수록작품(전체)
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정혜인
페이지 정보

본문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ꡔ외면일기ꡕ(역자 김화영, 현대문학, 2004)
생(生)의 깊이에 닿은 아름다운 메모집
정혜인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북서쪽으로 다섯 시간 거리에 작은 도시 Vaagaa가 있다. 그 Vaagaa에서도 더 벗어난 시골에 마티스와 해럴드, 두 노인 형제가 살고 있다. TV도 없이 물질문명과는 동떨어진 수도승의 삶을 살아가는 두 노인 형제에게 유일한 취미는 쌍안경으로 세상보기. 그들은 쌍안경을 통해 이웃이 키우는 양들을 관찰하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언덕과 나무들의 색을 즐기는 것이다.
2년 전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읽은 이들의 기사를 문득 떠올리게 된 이유는 지난달부터 틈틈이 아껴가며 읽고 있는 투르니에의 산문집 ꡔ외면일기ꡕ의 한 페이지 때문이었다. 거기엔 작가 투르니에가 자신은 여행을 할 때 거의 빼놓는 법이 없이 쌍안경 하나를 지니고 다닌다는 내용이 있었다. 쌍안경에 관한 두 이야기의 어떤 연관성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읽었던 그 기사가 투르니에와는 달리 나의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더 놀랐다. ꡔ외면일기ꡕ는 그렇게 일상의 자잘한 기록과 유머가 담긴 메모 모음집이다.
1924년 파리에서 출생한 미셸 투르니에는 현재 생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널리 알려진 콩쿠르상의 심사위원이며 그 자신이 ꡔ방드르니ꡕ, ꡔ마왕ꡕ 등의 많은 소설과 짧은 글 긴 ꡔ침묵ꡕ, ꡔ예찬ꡕ 등의 산문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질 들뢰즈, 미셀 푸코 등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면서 쌓은 철학적 소양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ꡔ예찬ꡕ과 ꡔ외면일기ꡕ 등에 수록된 번역자 김화영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 보면 인간적인 투르니에의 면모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외부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라는 테오필 코티에의 말을 두고 투르니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열정은 다름 아닌 호기심이며, 호기심은 곧 발견하고 보고 알려주는 욕구, 그리고 예찬하고자 하는 욕구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투르니에의 산문집 ꡔ외면일기ꡕ에서는 그런 작가의 욕구가 잘 드러나 있다.
외면일기(journal extime)라는 말은 투르니에가 만든 조어라고 한다. 거의 반세기 동안 시골에서 살아온 그는 자신들의 내면적 상태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수공업자들과 농사꾼들의 사회 속에 묻혀 지내고 있다. 투르니에는 ꡔ외면일기ꡕ를 시골 귀족들이 추수, 아이들의 출생, 결혼, 초상, 급변하는 날씨 등을 적어두곤 했던 ‘출납부’와 비슷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ꡔ외면일기ꡕ를 읽다보면 독자는 작가의 겸손함에 놀라게 된다. 산문집의 내용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발견으로부터 유럽의 역사와 문화, 철학, 대문호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외면일기는 일년 열두 달의 주기로 장이 나눠져 있고, 각장마다 작가가 관찰한 자연, 방문한 장소, 읽었던 책, 만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
“거인들이 밝고 지나간 발자국들을 보면서//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텐트를 지고 떠돌던 땅이//아직도 대홍수에 젖은 채 마르지 않았구나.”(34쪽)
투르니에는 고약한 정월이 끝나는 것을 기뻐하며 위에 옮긴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읊는다. 2월에 그는 루브르 미술관을 방문하고, 어떤 알지 못하는 여자가 보낸 원고를 받기도 하고, 그 자신이 옛날에 녹음한 로맹가리의 인터뷰를 듣는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자신의 의식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로, 삶이란 ‘여러 시기들’의 연속이다.(170쪽)
블리니 종합병원에서 심장검사……그러니까 내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저 내속에 죽음이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197쪽)
삶의 시기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죽음을 보여주는 저 짧은 문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아름다운 감상과 기억도 빠뜨리지 않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제1악장이 가슴을 찌르는 듯 집요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언제나 변함없는 놀라움과 황홀함. 나는 이 음악의 아름다움에 습관 되지 않는다.(197쪽)
아래의 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해준 소설가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유명한 대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인상적이다.
소설가란 그런 거야. 하지만 내가 글을 다 쓰고 나서 나 자신은 뭘까 하고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 또 내겐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배우와 비슷해. 배우는 햄릿, 네로 황제, 알세스트, 돈 후안, 파우스트 등이었지만 의상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202쪽)
파스칼. 「팡세」라고 하는 미완성의 무더기는 몽테뉴의 「수상록」의 여백에 끄적댄 일련의 노트들에 지나지 않는다. 조직적인 어리석음 모음집.(264쪽)
이 책은 또한 도처에서 농담과 해학이 넘쳐나는 글들을 찾을 수 있다. 작가란 언어를 숙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외면일기에서는 작가들의 숙명적인 언어가 투르니에라는 ‘망(網)’을 빠져나와 하나의 음악, 그림, 사진과 농담이 되었다. 독자들은 노작가에 이끌려 아니 투르니에와 함께 미술관을 방문하며, 지휘자가 육화(肉化)시킨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고, 유명한 대가들의 뒷얘기를 얻어 듣기도 하고, 농담을 나눈 뒤, 마침내 그가 연 캐비어 파티에 초대되어 맛있게 캐비어를 먹으면 된다. 그러니 책을 덮는 게 아쉬울 수밖에. 니체를 만날지, 작가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정육점 주인 미셸 투르니에를 만날지 알 수 없는 기대로 또 다시 즐겁게 책을 펼쳐본다.
- 이전글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유찬숙 05.05.30
- 다음글14호 문화산책/박황재형 05.05.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