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유찬숙
페이지 정보

본문
이강숙 장편소설 ꡔ피아니스트의 탄생ꡕ(현대문학사)
더 멀리, 더 높이……
유찬숙
(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누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순간만큼 귀한 것은 없다. 음악은 ‘잘해야 함의 대상’만은 아니다. 음악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되어야 한다. ‘음악을 잘함’보다 ‘음악을 좋아함’ 때문에 음악이 자기 앞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음악을 잘하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본문 중에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 적어도 내게 있어 ‘음악’이라는 것이, 꼭 도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던 동시에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대적인 아픔이었던 시간들이 벌써 강산을 변하게 할 만큼의 부피와 깊이를 가진 나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만하면 나도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적어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임에 분명한데, ꡔ피아니스트의 탄생ꡕ이라는 소설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면서, 나 역시 본격적으로 음악을 전공으로 삼기 이전 어린 시절에 이미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음악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후였다.
이 소설 속에선 여느 아이들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피아노 선생님을 찾은 5살짜리 ‘현민영’이라는 꼬마 아이가 16세의 나이로 국제콩쿠르에서 1등을 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5살에서 16살이 되기까지, 역시 강산이 한 번쯤은 변했을 그 시간 동안 한 꼬마가 음악을 배우고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는 일이 내게는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민영에게서 때로는 나를 발견하며, 또 때로는 나를 반성하며······.
싸늘한 실내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건반 역시 얼음장 같았다. 헤논 1번을 칠 때에는 손이 차가워 건반에 손을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헤논 1번에서 스케일연습이 나오는 곳까지 한 시간 정도 치면 건반도 녹고 손도 녹았다. 차가운 기운을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 한 시간쯤 참고 건반과 싸우면 건반이 따스해진다. 피아노 연습이라기보다 견디기 연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영은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태어난 아이, 연습을 하려고 태어난 아이 같았다.(본문 중에서)
때로는 내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뭔가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다는 점이 아쉬울 때가 있다. 그저 부모님의 권유로 음악학교 시험을 봤다가 운이 좋게도 합격을 하는 바람에 난 음악을 하게 되었다. 그건 민영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어릴 때 피아노를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했든 음악을 하는 과정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시작해버린 음악을, 그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감내해가면서까지 지키고 있다는 것. 그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이라는 점에서 더 강력한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정말 그렇게 태어났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민영에게는 음악적 조언자이자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강주섭을 비롯해 4명의 스승들과의 인연이 닿는다. 음악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준 원주혁, 전문적 기술을 연마시켜준 서혜전, 남주영, 그리고 창조자의 비밀을 캐는 일에 도움을 준 여진원.
본인 자신이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이론가이고 한국 예술의 행정가이기도 한 저자는 아마도 자신이 연구해오던 피아노 교육방법론의 모델로써의 단계적인 스승을 이 소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아쉬운 것은 이런 이상향을 실현시키느라 현실감은 좀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하지만 민영이 국내콩쿠르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등, 음악계에서 공공연히 벌어져 왔던 관습적 악례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어쩔 수 없는 콩쿠르의 생리라든가, ‘사사’란에 스승의 이름을 어떤 순서로 기재하느냐에 따라 자칫하면 누군가가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는 미묘한 문제까지도 현실 그대로의 상황이 다루어지고 있다.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국내 콩쿠르의 생리를 따르지 못해 번번이 낙방하며 슬럼프를 겪던 민영은 결국 국제 콩쿠르에서 실력을 인정받는다. 비록 피아노를 직접 가르치진 않았으나 이 소설의 처음부터 민영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던 강주섭이 민영을 데리고 등산을 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민영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걷게 될, 절대 평탄하지만은 않을 피아니스트의 길에 대한 조언과 함께.
아마도 그것은 저자 자신이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민영보다는 오히려 강주섭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소설에서 조금은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강주섭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을지 몰라도 상대적으로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한 사람 민영의 심리묘사는 부족했다는 점. 따라서 훌륭한 음악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정작 그 개인의 고뇌와 갈등은 배제된 채, 지극히 수동적인 과정으로만 그려졌다는 점이다. 또한 전체적인 내용 전개에 있어서도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간과한 채 이야기를 끝내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맨 처음 피아노 선생을 구하기 위해 버스에서 만난 여학생을 따라갔던 일이 마치 복선인 듯 등장해서는 뒷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점이나, 민영과 남주영과의 갈등이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 소설이 끝나버린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아름다움이 정말 귀중한 것이라면 ‘소리가 아름다워야 하는가, 인간 마음이 아름다워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음악의 존재 이유를 관계지어보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본문 중에서)
강이 변하고 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의 음악은 아직 턱없이 좁고 얕기만 하다. 이 삶이 다할 동안에 강산이 몇 번 더 변할지, 혹 그때 가면 내 삶이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언젠가 문득 돌아봤을 때에도, 내가 사랑했던 음악이 여전히 아름답게 내 앞에 존재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음악은 손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만드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 이전글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최재림 05.05.30
- 다음글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정혜인 05.05.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