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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최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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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보스케의 ꡔ지식인은 돼지다, 고로 나는 최상의 돼지다ꡕ(강주헌 역, 작가정신)
돼지 같은, 신성한 달리와의 유쾌한 대화
최재림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위대한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 비할 바 없는 예술성을 지니는 것인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20세기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생애에 있어서만큼은 그러하다고 확언할 수 있다. 방탕하고 광기 어린 성품을 타고났던 그는, 23세이던 1926년에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제적당하였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듬해 피카소를 만나 초현실적 세계의 독창적인 창조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시, 소설, 영화, 연극, 발레의 대본이나 무대장치 디자인, 그리고 백화점의 디스플레이나 보석 세공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폭발적인 열정을 과시했던 예술가였다. 돌계단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으로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리고, 자신의 전시회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엉뚱함이 일상이었던 사람. 젊은 시절에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기 위해 상점 진열창을 부수었다는 광인.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의학자 롬브로조가 주장했던 ‘천재 광기설’의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되는 인물이 아니겠는가. 상징이 된, 위로 말아 올려진 콧수염조차 기이한 괴짜의 약동했던 생의 탄력을 증명해 보이는 듯하다.
이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알랭 보스케가 1960년대 중반에 파리의 한 호화 호텔에서 달리와 가졌던 대담을 엮은 것이다. 여기서의 ‘대담’이란 두 석학이 고풍스런 팔걸이 의자에 앉아,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 아래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아니다. 얼룩 살쾡이가 어슬렁대며, 무용수나 원자물리학자, 의사, 군인 같은 이들이 “세르반테스가 풍차에 달려들 듯” 불쑥 찾아오는 어수선하고, 우스꽝스런 방 안에서 진행되는 놀이. 때로 양탄자에 함께 엎드린 채, 야릇한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대담은 과연 달리답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선 위선이나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곳은 말의 검이 오고 가는 결투장을 연상케 한다. 주로 보스케가 허점을 노려 늠름한 중세 기사처럼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고, 달리는 능숙하고 교활한 몸짓으로 그것을 받아넘긴다.
이 천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범인(凡人)의 딱딱한 상식의 껍데기를 박살낼 만큼 위협적인 것이다. 스스로 ‘신성한 달리’임을 자처하는 자는 결코 반듯한 겸손을 갖추거나, 그럴듯한 말로 꾸며 도덕성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는 격정이 가득하거나 습기 찬 어조로 동료 화가를 깎아내리고, 신(神)을 부정하며, 전쟁을 지지하고, 미술 복제품을 찬양한다. 돈을 밝히는 출세주의자임을 거리낌 없이 고백하며, 자신의 걸작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이 피카소의 그림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뛰어난 작품이라고 단언한다. 그런 오만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어떤 광포한 비난도 마조히스트적 기질을 발휘하여 모두 특별한 관심으로 즐겁게 받아들이는 데에야 독자는 아연해질 수밖에.
그러나 사나운 어릿광대 같은 그의 언어 이면에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조롱과, 견고하게 자리 잡은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에서 검열만큼 유쾌한 것은 없”(p.215)다고 말하는 그의 도전적 언어는 예술과 별개이지 않다. 다채로운 형상이 극도로 미학적인 공간 속에 섞여 들어 있는 일련의 회화에서, 현실과 이상의 차가운 경계가 파괴되고 뜨겁게 한몸으로 엉켜 있는 모습은 얼마나 큰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는가! 더군다나 그는 유행처럼 번진 초현실주의 화풍에 언제까지고 머무르지 않았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 고전주의로 복귀하려 했고, 그 대가로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자 미국에 귀화해 팝아트적인 생산 활동에 매진하는 등 실로 기성의 질서에 거역하는 맹렬한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달리는 자기의 인격 속에 구현된 이중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다음의 발언들은 광대이자, 천재인 자신을 얼마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모순덩어리, 가장 기상천외한 기인이지만, 동시에 가장 중심이 뚜렷한 사람이기도 하오.“(p.183) “나는 양극단을 몸에 지닌 사람이오. 한쪽은 한없이 겸손한 달리지만, 반대편은 나의 절대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오만한 달리인 거요.”(p.118)
모순적 자아, 즉 실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에로티시즘과 죽음으로부터 결코 눈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부패와 소멸로 귀결되는 죽음이 나에게 닥칠 것을 생각하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거요.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아요.”(p.55) 그는 살아 있는 존재를 무화시키는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 명성에 탐닉하였다. 특히 인공 동면(冬眠)을 통해서 영생이 가능하다고 믿은 그는 현대 과학의 극렬한 신봉자이기도 했다. 지배당하는 인류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견케 하는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의 발전이 예술의 급진적인 변모를 가져오리라 예언한다.(p.203)
정상적인 사람보다 적어도 50년은 더 살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업적을 이룰 것을 꿈꾸던 그는, 사랑하는 부인 갈라가 죽자 7년 동안 양분주사를 맞아가며 연명하다가, 1989년 86세를 일기로 평생의 숙원으로부터 배반당하였다. ‘열정feu’ ‘미친fou’ ‘광기folie’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에너지로 점철되었던 삶은 허풍 치듯 홀연히 떠나갔다. 생명 연장의 포부를 야심만만하게 밝힌 대화의 기록에서 죽은 자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슬프고도 허허로운 감상을 자아낸다.
올해로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달리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고 한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어쩌면 그는 이미 불멸에 도달한지도 모른다. 연약한 육신 없이도 존재하는 완벽한 불멸……. 어둡고 축축한 사진 속의 사내가 속삭인다. 달리, 달리, 달리 살아라. 삶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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