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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대학생의 독서일기/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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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의 ꡔ야살쟁이록ꡕ(우리교육)
꽃등세대를 추억하며
하성태
(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내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봤다. 첫사랑의 아픔을 ‘영화’라는 마약으로 치료하며 수능 공부보다 독서나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고 교회 청년회 일에 열심이었던 90년대 중반. 애틀란타 올림픽이 열린 96년 여름 정부의 과도한 학생운동 탄압으로 연세대 사태가 일어났고, 이듬해 한총련은 결국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그 해 12월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난 대학이란 미지의 공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 기억이라지만 자신이 살아나갔던 시․공간적 현실과 조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기억이다. ‘나’와 ‘우리’의 완성된 기억은 그렇게 추억이나 회고가 되어 자신의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90학번 소설가 김종광의 87년에서 89년까지의 고등학교 시절을 다룬 ꡔ야살쟁이록ꡕ은 김종광이라는 개인의 기억과 80년대 후반의 시대적 인식, 그리고 누구나 공유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소소한 일상의 묘사가 잘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소설이다.
충남 방언에서 비롯된 구수한 입담과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갖춘 김종광의 신작 ꡔ야살쟁이록ꡕ은 더욱 풍성해진 그의 소설적 스펙트럼을 확인시켜 준다. 전작 경장편소설 ꡔ71년생 다인이ꡕ가 90학번 운동권 학생의 10년의 모습을 주변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형상화해 냈다면 ꡔ야살쟁이록ꡕ은 다인이의 고등학생 버전인 다현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김종광은 왜 90학번 세대에 집착하는가? 물론 작가 자신의 체험에 우러나오는 글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겠지만 정확히 전대협 세대와 한총련 세대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90년대 학번들을 X세대, 신세대로 규정지으며 애써 ‘386’세대들과의 차이두기를 시도했던 것은 새로운 세대를 소비지향적이고 탈이념적으로 키워내려는 일종의 수사학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세대적 변화의 단절과 소통의 카오스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첫 세대인 90학번들의 시각이야말로 후일담소설이 주를 이루었던 선배들의 시각과 다른 김종광만의 새로운 시각인 것이다.
ꡔ야살쟁이록ꡕ은 충남의 가상도시, 혼주읍의 혼주고를 배경으로 1학년 7반의 학급일지와 다현과 친구들이 만드는 문집 <야살쟁이>를 통해 전개된다. 그 사이로 충남 출신인 김종광의 자전적 체험이 투영된 소설가 지망생 다현의 시점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다현은 소설 창작에 관심이 많지만 수업 시간 동안 몰래 하는 짤짤이와 자위행위에 자신을 탓하곤 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다현과 반친구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입시라는 중압감에 시달려 마냥 고민만 하며 보낸 시간이 아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80년대 후반, 살인적인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주인공들은 펜팔과 문집 활동, 수업시간의 짤짤이와 수학여행에서의 고스톱과 같은 도박, 오락실과 영화관을 드나들며 견디어내고 있었다. 평범함 고딩들의 일상은 80년대의 역사적 현실에 맞닥뜨리면서 더욱 풍부해진다. 아니 일상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을 외면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때로는 우회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환기시켜 준다.
사회 선생의 ‘벽지 고등학생 연구’라는 논문 조사 이전에도 다현과 친구들은 시골 출신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태풍 셀마가 휩쓸고 간 이후의 혼주군이 비참한 모습은 도시와 다를 수 없는 시골의 지역적 낙후성을 드러내며, 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의 뜨거운 열기도 시골마을에 촛불을 들게 해준다. ‘전교조 꽃등세대’라 할 만한 다현과 그 친구들은 스승이라 불렀던 전교조 교사들의 참교육을 통해 80년대의 사회적 모순과 암울한 현실을 자각해나간다. 또한 소설을 창작하고자 하는 다현을 통해 ‘소설’이라는 본질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심들을 다현과 친구들은 <야살쟁이록>을 통해 표출하는데 ‘얄망궂고 되바라진 말이나 짓’이라는 뜻의 문집 <야살쟁이록>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문집의 내용들 중 <시국평론>을 통해 88년의 암울했던 상황을, <특별기고>를 통해 현대라는 대기업의 부도덕한 횡포를 , <산문시>를 통해 교복 자율화와 지역과 계급의 문제를, <쟁점토론>을 통해 5공 청문회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까발리고 비판한다. 전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대와 조응하는 시각들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산문’을 삽입한 것이 바로 김종광식 ‘야살’스런 글쓰기인 것이다.
김종광이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민중의 목소리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했던 다성적인 글쓰기는 ꡔ야설쟁이록ꡕ에서는 시대를 조망하는 다각적인 소재의 차용을 통해 80년대의 기억을 복원해 낸다. 자칫 소설적 깊이보다 여러 소재를 나열하는 가벼운 소설로 오인받을 수 있겠지만 80년대 후반 충남의 시골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깊고 넓은 시각을 획득해내고 있는 것이다. ꡔ야설쟁이록ꡕ은 보편적인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시골 출신 소설가의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민주화 투쟁과 군부독재의 잔재가 남아있던 80년대의 시대적 현실들이 맞물려져 경쾌하면서도 소설적 진정성을 잃지 않는 독특한 소설이다.
마치 인터넷 소설의 그것을 보는 듯한 ꡔ야살쟁이록ꡕ의 표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터넷과 정보 통신의 시대, 전교조 스승들이 버젓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된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N세대, P세대라 규정되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집어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전히 입시지옥인 현실에서 살아가지만 더 나은 풍요와 더 많은 여가 도구를 부여받은 현재의 야살쟁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월드컵과 여중생 추모집회, 그리고 최근의 탄핵무효 집회 속에서, 교복을 입고 친구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몰려나왔던 그 소년소녀들이 바로 15년 전의 야살쟁이들의 현재의 모습이다. 그들 또한 언젠가 고딩시절의 소중한 경험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다현과 마찬가지로 고3 시절의 12월 31일 밤을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맞지 않을까?
김종광은 소설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현재의 독자들에게 대화를 걸고 다. 그들은 80년 광주, 60년의 4․19를 기억하는 선배들이 될 수도, 96년 연세대 사태를 기억하는 내가 될 수도, 월드컵과 촛불을 기억하는 후배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들과 공유하는 기억은 소중하며 진실한 소설을 통한 만남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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