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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2004년 여름호) 대학생의 독서일기/박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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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89회 작성일 05-05-3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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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ꡔ일요일 스키야키 식당ꡕ(문학과지성사)

단 한곳뿐인, 하지만 저마다 다른 그곳

박진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나는 언제나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6900원짜리 밥과 5900원짜리 밥을 두고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하면 어쩐지 종업원이 나를 업신여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5900원짜리 밥의 주재료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도를 지나치게 늘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급히 메뉴판을 덮어버리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6900원짜리 밥을 먹는 사람이 존재하는 동안은 5900원짜리 밥을 먹는 나는 가난하다.
한데 내 집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반도 채 먹지 않은 찌개가 버려지고 입을 열고 한번 따라 마신 우유가 유통기한이 지나 배수구로 콸콸 쏟아진다. 모양만 보고 사온 빵이 맛이 없으면 절대로 다시 꺼내지 않은 채 봉지째 버린다. 그 순간에는 내가 조금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매번 그럴 때면 앞으로 금전출납부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가난했던 순간에도 내가 있었고 무절제한 순간에도 내가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섣부른 판단인지 몰라도 절대 빈곤이나 결핍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같은 말로 절대 만족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이런 얄팍한 생각을 갖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타인처럼 배치된 각각의 인물들은 결국은 어떻게든 억지스럽고 진절머리나게 얽혀 어디서든지 그들 중 누군가가 깨버린 밑 빠진 독을 열심히 메우고 있다. 돌연 머저리가 되어버린 국립대학 전임교수 마(馬)에서 시작되는 얽힌 덩굴은 전당포를 운영하는 수전노에게까지 이어지니 길기도 길지만 그 꼬임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한장 한장 넘길수록 맹렬히 뻗쳐 나오는 담쟁이덩굴처럼 연속되는 탓에, 분명 하나의 소설이 분명한데도 읽을수록 일만 벌어지고 있지 도무지 정리되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소설인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수는 여느 비슷한 분량의 소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다채롭게 늘어나고 중심 줄기를 제외하고도 앞으로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잔가지들-마(馬)의 아이들인 막과 말리, 또는 어쩌면 임신 중에 담배를 피운 배유은의 뱃속에 있는 아기 등-역시 마구잡이로 제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의도적이고, 그래서 작위적이게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 당장 싱싱한 표고버섯이 잘 익은 뜨거운 스키야키를 먹고 싶은 마(馬)와 그의 후처, 특별한 것도 없이 너도나도 원하는 돈을 갈구하는 후처의 아들 세원,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동시에 어머니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세원의 여자친구 부혜린, 남성에 대한 상실감과 딸을 멸시하면서도 놓아주지 않으며 역시나 돈에 목을 매는 혜린의 모친 표현정, 세원과 혜린을 경멸하면서도 허황한 궤변과 농후한 사기꾼 기질로 옛 친구의 아내를 꾀는 마(馬)의 친구 백두연, 경제력을 가진 남편을 잃고도 풍족한 과거를 잊지 못한 채 아등바등하는 마(馬)의 아내 박혜전, 선천적인 냉소주의에 결핍이 몸으로 드러나는 마(馬)와 두연의 대학 동창 음명애, 핏줄의 모호함에서 느끼는 결핍에 우울해 하는 준희와 노동을 거부한 채 쓰레기만 먹는 쓰레기 같은 그의 오빠 노용, 그리고 이 소설을 자신의 인터뷰 보고문인 듯 착각이라도 하게 만드는, 마(馬)의 대학 제자들인 성도와 가난한 그의 여자친구 진주.
이들은 저마다 너무나 다르게 놓여 있지만 결국은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고 그 결속력을 강조라도 하는 듯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라는, 소설 속에서 서로 다른 이들에게 서로 다른 곳인 것처럼 누차 언급된 이 공간을 통해 단단히 한 번 더 묶이게 된다. 정신없이 뻗쳐 나가던 소설은 이제야 정돈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런 정리가 소모적인 과정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독하게도 관련을 맺고 결핍을 충족시켜 주려고 할수록 냉정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미궁이다. 글을 읽는 우리는 그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벽은 그런 결합을 막는다. 그래서 그들이 흩어져 있는 미궁을 조감하는 우리는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분명히 부암동의 그곳 한곳뿐이지만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말할 때마다 새롭게 탄생한다. 그저, 썩 좋진 않아도 가난한 형편에 대충 맞출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에게는 끔찍하게 좋은 맛이라서 열악한 주변 환경을 무릅쓰고라도 찾아가서 맛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그 맛 따위는 상관없이 20여 년 간의 어머니의 구속에서 벗어나 독립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공간이 저마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그곳은 서로에게 완벽히 차단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공간의 단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한번쯤은 스쳤을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간다. 억겁 년 전의 그 지독한 인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서로를 외면하며. 그리고 그 속에서 모두들 무기력해진다. 상대적인 것이 사라지면서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결핍이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무(無)로 인식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규범이 사라져버리고 상하질서도 사라져버린 채 동물적 본성만을 앞세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적이 되어, 그리고 스스로에게 적이 되어 으르렁거린다. 이제 우리는 원시시대로 회귀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항상 만족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난 단돈 천원에 가난함을 느끼고 상한 우유를 버릴 때 내가 검소하지 못하다는 자책을 하게 된다. 한데 이제는 혼란스럽다. 내가 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같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 스키야키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도무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 모르는 나에게 스키야키는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커다랗게 부여한 의미가 나에게는 또 다른 단절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 역시 미궁 속의 한명의 결핍된 인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 머리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스키야키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해서 또 하나의 나만의 ꡔ일요일 스키야키 식당ꡕ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나처럼 시무룩해하지 않을까. 정수리에 와닿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저마다 너무 다른, 하지만 결국 같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만들어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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