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5호를 내면서/김남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57회 작성일 05-05-30 13:02

본문

조용한 잡지로 살아남는 법

김남석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게 많은 잡지들이 있다. 서점의 대명사라고 하는 교보문고에 가면 문학 관련 잡지 코너가 벽을 등지고 서 있고, 무려 두 개의 서가 분량에 육박하는 잡지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 앞에 서면, 다 읽을 수도 없고, 다 읽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왜 그럴까?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문학잡지는 왜 늘어나는 것일까?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잡지가 창간되는 것은 세금 혜택 때문일까? 할 말이 늘어나서일까? 지나치게 많은 비평가와 창작자가 양산되어서일까? 질문 없는 대답들이 그 앞에만 가면 소용돌이친다.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한때 국가 기관을 중심으로 원고료를 현실화하기 위한 방안이 제안되었다고 한다. 국가 기관은 공인된 전문가들을 통해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점검한다는 차원에서 잡지들의 동태를 조사했고, 그 조사를 바탕으로 ‘지원해야 할 잡지’와 ‘지원하지 않아도 될 잡지’를 ‘나름대로’ 구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잡지가 난무하고 사이비 문학인이 출몰하는 현 상황을 교정하겠다는 당찬 포부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알 만한 또 하나의 국가 기관은 심사위원들을 통해 ‘지원해야 할 잡지’와 ‘지원할 필요가 없는 잡지’를 ‘또 나름대로’ 구분했고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잡지의 등급을 매기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이 등급은 지원금과 관련이 있다). 많은 원로 문인들을 대동한 잡지들은 이 심사 기준을 통과해서 ‘특별한 잡지’로 자리매김했다는 소문도 함께 들리고 있다.

무책임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모든 소식을 소문으로 접했다. 개인적으로 신뢰하지만, 객관적으로 신뢰해 달라기에는 무리가 있는 소문으로만 접했다. 그리고 한 번도 이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소문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문학의 운명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아니 문학잡지가 그러한 이유로 사라지거나 정리되거나 혹은 특정 잡지가 발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학은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문학을 권력 집단으로 파악하고, 권력을 도모하려는 자는 끊임없이 주변을 정돈하고 체계를 세우고 그 안에서 가시적인 구획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그 위기를 타파하겠다고 나서왔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 그 정돈의 힘에 반항할 때도 있었지만, 그 반항심 역시 기존의 문학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구로 다시 변질될 때가 더욱 많았다.
그래서 나는 문학의 정돈 욕구를 믿지 않는다. 개혁이나 진보와 같은 거창한 문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있어 왔던 욕심이고, 그 욕심은 아주 간접적으로만 문학에 기여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문학의 진면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항상 어려웠지만, 그러했기에 버틸 만큼의 힘은 꼭 가질 수 있었다.

≪리토피아≫ 2004년 가을호 책임편집을 맡은 이로써 개인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일인 줄 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연을 통해 나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 잡지 편집 위원 일동은 다가오는 ‘문예지 간택(?) 사업’에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대한 부당함도 느꼈고, 대책에 부심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에 별다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반대했다. 아니 대항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많은 잡지들이 간택되고 싶어하지만 그 간택은 이미 권력을 장악한 측의 일방적인 잣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우리의 노력과 모색은 별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잡지가 많아지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양하고 그 방향은 일정하지 않다. 문학은 더욱 그러한 다양성과 무방향성에 대해 나무라지 않아 왔다. 문학은 정리와 질서와 체계와 선택을 요구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아니라, 그 구석진 한켠에 존재해 왔다. 그러니 더 많은 규격이 주어진다고 해도 항상 존재할 이유를 찾을 것이다. 문학잡지가 많은 것은 그만큼 목소리가 다양해졌고 통일된 어떤 체제로부터는, 충분한 문학의 진미를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말해야 할 필요성과 욕구는 증가했는데, 말할 수 있다는 기존의 지면은 부족했거나 거북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재편하겠다니!)

≪리토피아≫는 창간 4주년을 앞두고 있다. 그렇지만 여직까지 문단의 헤게모니나 권력의 중심에 놓인 적이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 도발적인 발언을 할 필요도 느낀 적이 없다. 문학은 목소리 높여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주목받는 생의 자리에서만 빛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낙담할 필요도, 울분은 느낄 필요도 없다. 조용히 우리 길을 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리토피아≫가 목소리가 작아서 자랑스럽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억지로 소리 높이지 않아서 좋고, 도발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개선하겠다고 나서지 않아서 좋다. 늘어나는 잡지에서도 확인되었듯이, 그렇게 절대적인 목소리는 이미 이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서민문학 ≪리토피아≫가 되어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이어져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문학계에 ≪리토피아≫가 생존해야 할 목적 하나는 달성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특집은 다가오는 정부의 문학 시책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지난 시대에 대한 조용한 회고로 결정되었다(아마 주목은 덜 받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90년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최선을 다해 90년대를 다시 통과하겠다는 ≪리토피아≫ 식구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는 말만 전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요란했지만 의외로 빈껍데기뿐이었던 90년대의 담론을 돌아보는 필자들의 태도는 우리의 조용한 염원과 너무나 닮아 있다. 편집 위원을 대표해서 감사드린다.

≪리토피아≫는 항상 분에 넘치게 많은 시인들의 협조와 사랑을 받아 왔다. 시인들의 노고는 틀림없이 이 땅에 문학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 일조할 것이다. 시인들의 이름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초점은 ≪리토피아≫가 가진 장점이다. 특정 주제가 아닌 자유로운 화두로, 글 쓰는 이의 선택을 중시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발언도 가능하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다시 중요하게 인식시킨다는 점에만 필자들의 소임이 있다. 민중서정시의 가능성, 구용시의 발견, 분단영화에 대한 고찰은, 사실 주제와 장르 면에서 중구난방이다. 구획된 질서나 어떤 체계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분야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필요한 만큼만 하고 있다는 점이 보기 좋다.
‘지난 계절 작품 읽기’는 일종의 서평이다. 우리는 서평이 잘 쓰여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단 들인 품에 비해 남는 글이 적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고, 또 남의 작품과 글을 잘 보지 않는 관습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평은 필요하다. 문학이 읽혀야 하고,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작품에 대해서는 착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의 미래를 위한 ‘품앗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문학이라는 밭을 가는 농부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수고에 깊이 감사한다.
문화산책은 기존의 문화지들이 보유하지 못한 정심한 문화 에세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항상 신기하다. 신문 리뷰나 연극 단평 혹은 20자 분량의 영화평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거짓 포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정이 없는 답이 신뢰받기 힘들듯, 직관만 난무하는 글이 아닌가 싶다. 문화산책은 짧은 글이 가진 결론까지의 신속한 독파력은 보장하지 못하겠지만, 차분하게 자라나는 생각의 경로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의 독서일기’는 참신하다는 면에서 흥미를 끈다. 그들은 아마 미래의 평론가나 창작가나 연구자가 될 듯하다. 아니 좋은 독자가 되어도 좋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학에서 제일 어렵고 중요한 위치는 사심 없는, 그리고 착실한 독자이다. 그들이 한국 문학의 동량이 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앞 세대가 못 이룬 ‘좋은 독자’를 꼭 겸할 것을 권유하고 싶다. 이 밖에도 큰 갈래로 묶어지지 않는 몇 개의 글이 있다. ‘속담으로 읽는 문화사’와 ‘하이쿠의 세계’가, 구획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장르의 관습에 갇혀버린 우리들에게 더 넓고 다양한 문학의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리토피아≫가 다른 잡지들의 귀중한 ‘독서자’가 되었으면 한다. 독서자는 창작자만 못 한 자리가 아니다. 앞 다투어 위기를 외치는 사람들이, 어쩌면 위기를 조장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앞 다투어 외치는 위기의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읽고 사색하고 꼭 필요한 말만 골라하는 잡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세상을 정리하거나 인도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세상을 어지럽히거나 불필요하게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으로 만드는 유토피아는 조용한 세상 속에서도 분명, 존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필진을 대표해서 김남석

추천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