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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특집 그린 러쉬(green rush)가 끝난 다음/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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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러쉬(green rush)가 끝난 다음
김남석(문학평론가)
1. 유행의 담론을 넘어
한국 문학사나 지성사를 돌이켜보면 숱한 인문학적 동요들이 있어 왔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동요들은 주로 외부에서 찾아왔고, 어떠한 경우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외구의 문물이 수입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 우리가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어느 순간까지는 기쁘게 맞이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지성의 단계가 보급되고 정신사의 주체성이 발현되면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옳거나 숭배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소 비판적인 목소리로 담론이나 주의를 지켜보게도 되었다. 거칠고 투박하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우리에게도 담론이라는 형태로 합의된 정신의 장(場) 내지는 합법적으로 논쟁이 보장된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있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문학적 담론 가운데 이러한 자격 요건을 제대로 갖춘 것은 아예 없다. 우리 문학사에서 담론은 패션의 유행이나 주가 상승 도표처럼 일회용으로 쓰고 폐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해도 정신사와 문학사에 영향을 끼칠 만큼 지속적인 경우는 대단히 희귀하다. 무엇이든 지나고 나면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고, 또 다시 찾아오는 낯선 것에 기꺼이 투신하고 심한 경우에는 정복당할 준비마저 하는 것 같다.
생태 담론은 그런 측면에서 90년대를 유행했던 그저 그런 담론 중 하나이다. 아니 당시에는 담론이라고 말하기에도 초라한 어떤 정신사의 유행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아직 소멸한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담론의 허약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인들이, 작가들이, 독자들과 시민들이, 그리고 이 담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담론의 유무를 떠나 이 담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생태 담론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환경과 생태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인식을 촉발시키고 매개시킬 어떤 정신의 기폭제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 문학은, 우리 담론은, 우리 지성은 그러한 기대에 부흥할 만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우리의 생태 담론이 허약했다는 사실을 90년대에 진행된 비평적 담론의 재고찰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이 글에서는 소설에 관한 담론으로 범위를 축소했다.)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생태 담론이 과연 지금의 필요성과 기대에 걸맞은 알찬 성장을 거둔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자 한다.
세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생태 담론의 무용성이 제기된 것도 아니니, 원인만 찾을 수 있다면 현실에 유용한 생태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력이 연장된 생태 담론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의 생태 담론이 90년대의 내실 없는 담론의 비판적 검토 위에서만 일단 그 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불행일 수밖에 없다.
2. 생태 담론의 생성과 진행
2.1. 조심스러운 출발:이광호의 「녹색소설의 가능성」
소설과 생태의 관련성이 재기된 시점은 1990년 무렵이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광호의 평론 「녹색소설의 가능성」(ꡔ위반의 시학ꡕ, 문학과지성사, 1993)이 ‘녹색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 사례로 여겨진다. 물론 당시 ‘녹색’은 각종 물품과 현상에 붙는 공통 어사에 해당했다. 일종의 유행어로 새롭게 발돋움하기 시작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혹은 증명하는 레떼르 같은 것이었다.
이광호는 ‘녹색소설’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녹색’과 ‘소설’의 조어를 시험한 듯 하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녹색소설의 범주를 비상한 감각으로 구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어투로 ‘환경 문제’가, 문학의 ‘미답의 영역’이라고 문제 제기한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약간 과장된 어투로까지 보이는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거꾸로 당시 문학이 가지고 있던 입장을 시사한다.
문학은 사회경제적인 시각과 논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적어도 문학에 대한 담론들은 우리 사회를 보는 거시적 시각으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시야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한 고집이 이 젊은 비평가로 하여금, “환경 문제의 정치경제적 성격에 대한 사회과학적 통찰을 깔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어야만 생태 소설의 비평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쨌든 이광호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일정 부분 탈출하면서 그 외각일지라도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위험스럽고 모험적인 지적 탐사 행위였다. 이러한 그의 탐사는 적어도 지금으로써는 생태 소설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행위로 여겨진다.
이광호의 글 중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주장이 공허한 관념의 토대 위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거칠지만 ‘녹색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을 분류하고, 소수의 작품들을 직접 분석했다. 남정현의 「핵반응」, 정도상의 「겨울꽃」, 최성각의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 이용범의 「검은 비가」, 이정환의 ꡔ불꽃바다ꡕ(장편)에 대해 ‘녹색소설’의 의미를 부가한 점은 기억할만하다.
2.2. 생태학에 대한 관심 대두:90년의 두 문예지
90년 겨울에 접어들자, 두 문예지가 생태 문제에 대한 특집을 준비한다. ≪창작과비평≫은 「생태계의 위기와 민족민주운동의 사상」이라는 제명으로 좌담을 시행하고 겨울호(통권 70)의 표제로 내걸었다. ≪외국문학≫은 특집으로 '생태학·미래학·문학'이라는 테마를 내걸고 각계각층의 글을 수렴했다.
두 잡지의 특집은 적어도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하나는 아직 생태학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없다는 점이다. ≪창작과비평≫의 좌담에 백낙청·김세균·이미경·김록호·김종철이 참석했는데, 김종철을 제외하면 생태 문제에 대해서 전문적인 소견을 갖춘 이가 없었다. 각계각층을 대변한다는 표면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민족민주운동’이라는 창비 진영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인 운동에 매몰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좌담은 마치 지난 시대의 노동계급적 시각을 견지하는 그룹 대 새로운 생태 문제를 주장하는 김종철의 의견 대립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대립은 생태 문제에 대한 당시의 시각을 대변해 준다. 많은 정치사회학자(혹은 이러한 견해에 찬동하는 비평가 그룹)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생태 문제에 대해서, 지난 시대의 이념적 틀을 고수한 채 마지못해 수용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생태 문제가 사회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생태 문제를 사회 문제의 부수적인 틀로 여기고 하위 문제로 다루려는 태도가 역력하였다.
≪외국문학≫의 특집을 보면, 생태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취급되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생태학은 인류의 미래를 점검하는 학문 중 일부로 취급되고 있고, 자본주의 문제와 과학기술의 폐해로 인해 암울해져가는 인간 문명의 미래를 우려하는 작은 목소리로 간주되고 있다. 두 잡지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90년의 생태학은 인문학의 주요 거점은 아니었다. 맑스 위주의 경제관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존속된 새로운 학문의 맹아쯤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것은 생태학의 인문학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증언한다.
다른 하나는 생태학과 문학의 관련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문학과의 관련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생태학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이를 수용하려는 노력은 정치경제학적 담론과의 마찰을 겪고 있다. 창비 진영이 말하는 민족민주운동과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생태학의 가치가 받아들여지고 있지, 생태학의 담론을 통해 우리 문학의 현황과 미래, 한계와 대안을 제시하는 시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잡지의 성격 상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다루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외국문학≫ 역시 문학과의 관련성을 상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생태학, 혹은 외국 문학의 주류로 편입되는 생태 문학의 개요는 그려져 있으나, 그러한 담론이 한국적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비평적 척도로 작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0년 겨울의 두 잡지가 보여준 행보는 생태 담론의 시작을 공고히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생태학의 개념이 무엇이고, 기존의 개념어(환경, 공해, 오염)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으며, 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시행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생태학이 문학 혹은 문학 담론(비평 담론)과 왜 관련되고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적 답안은 제시되지 못한다. 이것은 생태 담론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초기 도입의 혼란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2.3. 생태 비평의 실제 관점:92년 ≪문학사상≫의 경우
≪문학사상≫ 1992년 11월호의 특집은 ‘생태 문학을 통해 본 인류의 미래’이다. 90년 ≪외국문학≫의 특집 제호와 일단은 유사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상당한 진보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큰 이유는 사회 현실에 대한 거시적 담론보다는 문학 전반에 대한 미시적 담론으로 그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특집에서 특히 정현기의 글 「풍요號로 출발한 죽음의 항로」는 소설 담론과 관련되어 주목을 끈다. 정현기는 70년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잘살아보세’와 ‘하면 된다’의 강압적 목표 하에서 우리 문학이 상당한 저항과 반발을 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묻어 나오는 환경 파괴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골라내고, 황석영의 소설(「객지」 「삼포가는 길」), 이문구의 소설(「해벽」 「우리 동네 이씨」), 윤흥길의 소설(「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비늘」 「날개 또는 수갑」), 조세희의 소설(ꡔ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ꡕ) 등에 나타난 개발에 대한 저항 논리 혹은 경제 발전에 대한 비판 정신을 생태학적 입장에서 바라본다. 70년대 사회 현실을 고발한 최인호나 조선작 혹은 문순태 소설 등에서도 반자본주의적 입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생태론의 입장을 적용시킨다.
이러한 정현기의 시각은 경제 발전이 가져온 폐해와 환경 파괴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확보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60년대, 70년대 작품의 일정한 성향을 새로운 시각, 즉 생태 비평적 척도로 연결시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현기가 정치하게 끌고 가는 「도요새에 관한 명상」, 「기계도시」에 대한 비평적 통찰이다. 정현기는 현재까지 생태 비평의 중심에서 논의되는 두 작품에 대해 비조 격 생태 비평을 시행한 셈이다. 그 결과, 그의 비평은 생태 소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과 생태 비평의 판단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실제 비평으로 지금도 참조 가능하다. 90년의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관망은 정현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문학에, 그리고 소설 비평에 적용된 것이다.
2.4. 녹색소설의 일차 정리와 그 한계:이남호의 「문학은 녹색이다」
1995년 출판사 ‘문예산책’은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집을 편찬했다. ꡔ녹색환경 소설집ꡕ이 그것이다. 체제를 보면, 다섯 명의 소설가가 쓴 환경 소설을 한 편씩 골라 묶고 있다. 김원일의 「도요새에 관한 명상」, 조세희의 「기계도시」, 우한용의 「불바람」, 최성각의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 한정희의 「불타는 폐선」 등이다.
작품의 선택 기준은 환경 문제의 제반 분야를 대표하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수질오염, 「기계도시」는 대기오염, 「불바람」은 방사능오염 등의 식이다. 이러한 분류 기준은 생태 문제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 작품들이 대표작이 되어야 하는 비평적 척도마저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생태 문제는,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윤리 문제이며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총체적 문제에 해당한다. 그 안에서는 인간과 동물과 생물과 무생물이 동등한 위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근본 생태론의 요체이다. 그럼에도 인위적인 현상만으로 소설의 소재를 분류하고 생태 소설을 바라보는 총체적 관점 없이 소설을 선택하고 대표작으로 묶는 것은 상당한 문제를 가져온다.(이 책의 편찬자가 분명하다면, 선택과 분류에 대한 책임을 편찬자에게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경우 편찬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출판사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했는지 다섯 편에 대한 총체적 해설을 이남호에게 부탁한다. 이남호는 녹색문학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섯 편의 소설에 대한 부분적 해제를 실시한다. 여기서 이남호의 논리를 보다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남호의 주장이 다른 평론가들의 주장과 다른 점은, ‘녹색소설’을 정의하고 바라보는 입장이다. 이남호는 ‘생태 소설’이나 ‘환경 소설’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는 것 같다. 모든 문학이 녹색이라는, 즉 미적 원리가 자연의 질서에서 잉태된다는 보편적 입장을 대변하기에는, 환경 소설이나 생태 소설의 용어나 개념은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특별한 용어의 규정보다는 문학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용어가 적당하다고 믿는 눈치이다. 그는 이광호가 썼던 녹색 소설이라는 조어를 통해 생태 소설의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문학 본래의 자연 친화적 입장을 고수하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평론가가 새로운 담론(생태 담론)에 맞서면서도 유행병적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이다. 생태 문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요란하게 제시하는 것처럼 생태 문학의 입장에 맞지 않은 입장도 없다. 이남호는 기존의 문학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생태 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문학의 녹색 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고수로 인해 세부 분석에 놓이게 되는 다섯 편 소설의 비평적 척도 역시 부실해진다. 왜 하필이면 다섯 편이어야 하는가? 혹은 문학 일반적 시각에서 다섯 편은 숱한 문학(소설) 작품을 대변할 만큼 대표작인가? 에 대한 물음은 스스로 난처하게 만든다. 이것은 주제론적 시각에서는 문학이 근본적으로 녹색인데, 소재론적 시각에서 다시 환경의 문제를 다룬(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별도로 분리해야 한다는 미묘한 이중성을 해결할 길이 없어진다.
또 작품 선정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다섯 편이어야 하는가? 숱한 환경 소설의 범주에서 왜 하필 다섯 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결여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이 선집의 편찬자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남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억울한 화살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 생태 담론과 생태 소설이 태동하는 초창기 무렵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섯 편의 소설이 생태 소설의 논의에서 경전처럼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집과 발문에 대한 책임은 상당하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전의 문제 제기자 즉, 이광호나 정현기의 시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선구적 발언은 작품의 해석과 질적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이광호가 평한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나 정현기가 평한 「도요새에 관한 명상」과 「기계도시」는 여과 장치 없이 이 책의 선집 요건으로 받아들여진 인상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 동안 생태 소설에 대한 비평적 담론이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5. 생태에 대한 관심 증폭:95년 ≪창작과비평≫과 96년 ≪실천문학≫
≪창작과비평≫은 1995년 겨울호 특집으로 ‘위기의 생태계, 대안은 없는가’를 내세운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순 좌담에 의존하지 않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는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환경 운동의 흐름을 고찰하고, 여성·고전 문학·정치 생태학에 대한 각론을 마련했다. 물론 석학들을 초청해서 ‘변혁운동과 녹색사상’을 주제로 좌담을 개최하기도 했다. 좌담이 세계적이고 원론적인 방면에서 생태 문제를 거론했다면, 각론들은 가급적 미시적인 분야에서 각 분야의 입장과 현황을 제시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창비 계열의 주된 노선인 민족과 계급주의 시각으로 인해 생태학의 본질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못했다. 90년 좌담에서 생태 문제를 기존의 시각으로 수용하려 한 한계는 벗어났지만, 생태 문학의 현주소나 생태 비평의 구체적 시각을 보여주는 데는 역시 미흡했다. 이것은 창비 계열이 공유하고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생태 문제를 올바로 혹은 직접적으로 바라볼 만큼 개방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반면 1996년 가을 ≪실천문학≫의 특집 ‘생태학적 위기와 문학의 진로’에서는 생태학의 개념적 이해뿐만 아니라, 문학에의 대응과 대안을 찾는 노력이 뚜렷하게 나타난 경우였다. 이진아의 경우, ≪창작과비평≫에 이어 ≪실천문학≫에도 필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각론의 입장에 있다가 후자에서는 일종의 총론의 입장에 놓였다는 것은 두 잡지가 생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실천문학≫은 거시적 담론의 횡행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에 대해서 인지한 것 같다. 거시적 담론의 공허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와 소설에 나타난 생태학적 요소를 점검하는 하위 글을 배치하고 있다. 이중에서 김동환은 「생태학적 위기와 소설의 대응력」이라는 소설 비평을 게재했다. ≪실천문학≫의 특집은 모호성과 추상성에서 벗어나 필요성과 유용성을 보여주었지만, 김동환의 글은 이렇다 할 새로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기존의 담론에서 벗어나는 변화된 논리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1장부터 3장에 이르는 서론은 생태 문제의 과학과 기술의 환경 파괴에 대한 개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생태학적 담론을 표방하는 글들이 주로 취하는 형식으로, 아직은 생소한 생태학의 외형을 제시하고 글을 쓰는 필자의 입장을 내보이는 일종의 자기 소개란인 셈이다. 그러나 생태학의 본질을 꿰뚫기보다는 생태학적 지식과 자신의 관찰을 늘어놓은 일종의 사족으로 보인다.
이 부분이 사족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이후에 나타나는 작품 분석과 크게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환의 글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대상 작품이 있고 이 작품을 분석하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작품을 선정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글쓴이가 앞에서 제시한 서론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지도 못한다. 4장부터 글쓴이는 한국의 소설을 지목하면서 분석해 나가지만, 왜 그 작품이 생태 비평의 논의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숙고는 없다. 해당 작품도 천편일률적이다. 이문구의 ꡔ관촌수필ꡕ이 다소 이채로울 뿐, 「도요새에 관한 명상」이나 「불바람」에 대한 분석은 이전의 언급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따지고 보면 정현기에 의해 이문구의 생태 소설적 가능성도 이미 제시된 바 있다.)
1995년 ꡔ녹색환경 소설집ꡕ에서 묶어 놓은 생태 소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고 소설을 보는 생태학적 논리가 새롭게 배출된 것도 아니다. 생태 소설의 규정이나 비평 담론 생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상태는 답보에 불과하다.
2.5. 생태 소설의 외연적 확장:김종회의 「생명사랑, 인간사랑의 문학을 위하여」
월간 ꡔ환경운동-함께 사는 길」 1997년 9월호의 특집은 ‘생태환경문학’으로, 문학의 각 장르에서 환경과 생태의 문제를 다룬 역사와 특징을 정리하고 있다. 생태 소설과 관련하여서는 김종회의 「생명사랑, 인간사랑의 문학을 위하여」가 실려 있는데, 이 글은 ‘생태환경 소설의 현수준과 과제’를 점검하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이 글은 세 가지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첫째 생태 소설(김종회의 구분으로는 ‘생태환경 소설’)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종회는 소략하지만 생태 소설의 기원부터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을 작품의 계보로 정리하고 있다. 둘째 기존의 시각에서 생태 소설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은 작품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생태 소설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셋째 생태 소설에 대한 균형 있는 안목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생태 소설에 대한 일방적 긍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회는 생태 소설의 외연적 확장과는 별개로 질적 평가를 병행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생태 소설은 아직까지 소재적 측면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종회의 정리와 지적은 상당히 중요하다. 환경과 자연의 심각한 훼손이 가져오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생태 소설은 일방적으로 긍정되었다. 소설의 구조적 결함이나 미학적 측면은, 주제적 중량감에 압도되어 간과되기 십상이었다. 또 지금까지의 근시안적 시야로 생태 소설의 범주를 지나치게 좁게 파악하거나, 미학적 측면을 고려하여 자의적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폐단을 멀리했다.
김종회는 김용성의 「사해(死海)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생태 소설의 계보를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맥락화하고,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결집시킨 후에 그 완성도를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생태 담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닌가 한다. 생태 담론은 궁극적으로는 만연한 생태 위기를 극복할 방법으로 문학적 대응책을 양산하기 위한 교류의 장이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과거의 실적을 찬양하거나 협착한 시야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작품의 더 나은 생산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문제의식의 확산에 공헌해야 한다.
김종회는 ‘악의 묘사는 그 치료를 위해 있다’는 에피그램을 통해 생태 소설의 목적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생태 소설에 대한 문학적 담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생태 소설이 생태 의식의 제고와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생태 담론은 이러한 생태 소설의 원활한 창작과 유통 그리고 격려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김종회의 글은 이러한 단순한 목적을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2.6. 비평적 담론의 결집:두 개의 평론집
1998년 두 개의 비평집이 산출되면서 생태 담론의 개인적 결집이 가시화된다. 하나는 이남호의 ꡔ녹색을 위한 문학ꡕ(민음사, 1998)이고, 다른 하나는 김욱동의 ꡔ문학생태학을 위하여ꡕ(민음사, 1998)이다. 두 평론집은 생태 문학의 대표적 비평가의 생태 문학관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생태 담론의 개인적 정리로 볼 수 있다.
이남호의 생태 문학관은 ‘녹색문학’이라는 용어의 정리와 이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문학에서의 특별한 범주로 생태 문학을 분류하지 않는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로 인해 그의 생태 문학관은 문학의 근본적인 색깔인 녹색을 잘 발현시키는 목적에 봉사한다.
반면 김욱동은 과거의 정치 이념이 퇴색하고 남은 빈 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문학관으로 생태 문학관을 정의한다. 붉은 이념이 지나 간 자리에 녹색 자연이 자라난다는 논리이다. 그의 포부는 우렁차고 확신에 차 있다. 그럴수록 그의 문학생태학은 구획되고 강화된 어떤 자리와 영토를 추구한다.
두 비평가의 색깔은 평론집의 체제에서도 나타난다. 이남호의 경우 이전에 발표한 「문학은 녹색이다」를 제외하면, 단 한편의 평론만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녹색문학의 취지에 부합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나머지 글들은 기본적으로 녹색이어야 하는 문학에 대한 녹색을 요란하게 강조하지 않은 평론일 뿐이다. 따라서 예외적 하나인 「녹색문학을 위하여」는 상대적으로 뚜렷한 녹색의 색깔을 보이게 된다.
이 글은 「문학은 녹색이다」에서 보여주었던 논리를 보다 공고히 하는 한편, 생태적 관점에 편중된 작품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 중에서 생태적 논리로 읽어낼 수 있는 부분과 주제를 취합하는 것에 더 공을 들였다. 김소월의 「산유화」, 브레이트의 「연기」, 오탁번의 「솔잎」, 서정주의 「동천」, 김수영의 「풀」 등이 주요 텍스트로 거론되고 있는데(텍스트가 주로 시지만 그 논지는 시론에 국한되고 있지는 않다), 생태 문학의 범주를 느슨하고 넓게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나서 녹색비평이 갖추어야 할 어떤 척도로 생태주의 주장을 펴고 있다. 녹색문학은 굳이 ‘녹색’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지만, 비평은 그 ‘녹색’을 반드시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면 모순된 논리인 것 같은데, 녹색문학의 가능성은 넓게 열어두고 현단계에서 비평적 평가는 꼼꼼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로 일단 이해될 수는 있다.
반면 김욱동은 처음부터 생태 비평관을 세우고 이에 합당한 작품들을 선별하고 그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해나가고 있다. 평론집 전체가 유기적 분할에 의해 문학의 전 분야와 화두를 포괄하려는 의욕을 보인다. 또 문학과 비평의 관련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녹색이념과 문학생태학의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남호의 조언대로 하면 녹색비평의 전범을 보이는 듯하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계속된다. 논의의 초점을 좁히기 위해서 녹색소설에 대한 비평 3장 「녹색소설과 생태학적 상상력」을 보자. 생태학적 상상력이라는 명칭으로 문학의 상상력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했지만 조세희·김원일의 범주(한승원은 예외)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녹색 이념의 상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대상 작품이 비평적 척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분석되고 있다.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감상보다는 녹색 비평관에 대한 적절한 사례나 분석 모델을 구경하는 인상이다.
생태 비평은 이남호나 김욱동에 이르러서 공허한 추상의 논리에서 텍스트라는 구체적 지반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그 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내면서(이 차이는 생태 담론의 과제이기도 하다), 대상과 척도 사이에서 불일치를 보이게 되었다. 작품을 우선시하면 생태 비평의 존재 근거가 약해지며 원론적으로 생태 비평의 녹색 이념을 강조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고, 비평관을 우선시하면 구미에 맞는 재료와 장황한 대응 논리만을 보게 되는 양면적 폐해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90년대 생태 비평은 이남호나 김욱동에 의해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수준에서 당위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수준으로 정착되었고,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논의에서 작품에 대입되는 구체적인 담론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 소설의 정의와 범주와 존재 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부족해서 생태 비평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의견만 확인하는 상태로 일단락된다.
90년대 생태 비평은 생태 담론의 활발한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이것은 생태 문학에 대한 정립된 견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태 담론을 통해 생태 문학의 의의와 존립 가능성을 생성시킬 수도 있었지만, 치열한 논쟁 부족으로 무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위장된 논쟁이 많았던 90년대였던 만큼, 생태 담론의 조용한 추진은 90년대 비평계에서는 미덕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2000년대이다. 바람직하게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태 문학과 담론에 대한 관심은 소규모이지만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몰아쳤다 사라지는 담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러나 90년대의 답보와 소극적 활동으로 점철되어서도 곤란하다.
이제는 생태 문학 혹은 생태 비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그 차이를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천편일률적인 작품 선택이나 공소한 추상 논리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려는 태도 또한 물리쳐야 한다. 비평은 언제나 그렇지만 작품과 함께 가는 것이다. 추상과 거시의 시각도 작품의 지형도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이것이 문학생태학의 올바른 진로일 것이다), 생태 비평의 낯선 탐사도 작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 위에서 추동되어야 할 것이다.
3. 껍데기는 가고, 남을 것만 남아라
9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한 생태 비평과 생태 담론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취약점은 곧 2000년대의 새로운 생태 비평과 담론을 생성하는데 우선적으로 유념해야 할 지점으로 생각된다.
우선 생태 담론이 생태 소설의 유무를 가리는 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90년대의 많은 생태 담론에서 거론된 소설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대개의 논자들이 한정된 텍스트에 기대어 자신의 주장을 펴 나갔고, 그 한정된 텍스트는 선행 연구자의 안목을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 새로운 작품(혹은 작가)을 그 목록에 끼워 넣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학문의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각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이러한 성향은 비평가들과 담론 생성자들에게 깊은 반성의 의미를 준다. 다시 말해서 독창적 시각으로 작품으로 고르고 이를 비평하고 이러한 비평을 토대로 담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다소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로 비평을 생성했고 이로 인해 담론의 가열찬 생성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담론이 비평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비평은 작품의 분석과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고 할 때 이러한 결론은 비평가들의 의무 방기로 여겨질 수 있다. 2000년대의 생태 담론에서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품에 대한 좁은 안목은 생태 이론에 대한 막연한 이해 때문이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몇 개의 문학잡지와 인문학 지면에서 생태 이론을 정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담론 생성자 혹은 비평가들의 지면에 판에 박힌 듯이 드러나 있다.
생태학의 창시자가 헤켈이고, 아느 네스가 심층(혹은 ‘근본’)생태학을 주창했고, 북친의 이론이 사회생태학으로 정립되었고, 최근 페미니즘과 정치학이 생태학과 결합하고 있다는 식의 정보가 그것이다. 어떤 평문을 펼쳐도 생태학의 역사와 흐름에 대한 소개는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이 같은 글 안에서도 어떻게 생태 이론으로 작품에 대입되는지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생태학의 이론적 수용은 수용으로, 작품에 대한 분석은 분석으로 분리된 셈이다. 그렇다면 왜 생태학의 역사와 이론을 그렇게 공들여 정리하는 것일까?
생태학이라는 학문이 현재의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우리와 관련 없는 새로움일 수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정도가 덜한 비평가인 이남호의 경우에는, 외국 이론을 굳이 참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동의한다. 90년대 생태 비평의 구조적 배치로 볼 때 외국 이론은 거의 쓸모가 없다. 진실로 쓸모가 없는 것인지, 담론 생성자의 피상적 이해로 인해 쓸모가 생성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90년대 비평적 성과만 놓고 보면 외국 이론과 생태학의 역사는 우리 문학의 담론을 생성하는 데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나는 이론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 많은 담론 생성자들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이해가 축소되었다고 믿는다. 작품을 보는 눈이 우선이 아니라, 이론을 이해하는 생각이 우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론은 무성하고(어떤 의미에서는 식상할 정도로 평범하고) 비평은 쇠약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외국 이론에 대한 완전한 숙지를 위해 노력하거나, 이론에 대한 불필요한 경도를 줄이고 우리 문학의 현실을 보다 면밀하게 탐구하는 자세를 확충해야 한다. 우리 문학에 대한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면 거꾸로 자생적인 생태 이론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세부적인 분석을 보자. 이남호의 경우에는 녹색비평은 녹색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에 민감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녹색의 본질, 즉 문학의 생태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료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다. 정현기의 글을 보면, 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은 곧 경제적 발전 논리로 대체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경향은 곧 생태학적 입장으로 동일시되는 듯한 진술을 만날 수 있다. 과연 그러할까?
인간의 행태가 반자연적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시인 이희중은 인간의 문명은 근본적으로 숲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인간의 문명에 대한 모든 반대적 입장은 그렇다면 생태학적 입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과연 생태학적 입장이란 무엇일까?
나는 ꡔ삼국유사ꡕ 안에도 생태 문제가 들어있다고 믿는다. 하늘의 해가 두 개가 된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일 수도 있지만 기상 이변을 뜻하는 그들만의 언어였을 수도 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반생태학적 재앙에 대한 증거 사례를 과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발췌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체제에 대한 전복적인 사고는 모두 생태학적 입장에 근접하는 것일까?
생태 비평이 그 유효성을 거두기 위해서는 생태 문학(소설)의 기원과 범주를 명확하게 밝히고 생태 비평의 녹색 자질을 증명하는 것 이외에도 모든 문학에 담겨 있는 반생태학적 입장에 대한 반론의 입법을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정 문학만이 녹색이 아닌 것처럼, 특정 비평만이 녹색이라는 주장은 다소 철회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 비평은 생태 비평의 존립 근거를 드러내는 비평이 아니라, 모든 문학 비평의 틈새로 스며들어 비평 자체를 생태학적 입지 위에 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역할은 담론 교류의 장을 통해, 생태학에 대한 각계각층의 입론들이 모여들고 충돌하고 정리되고 다시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책임하지만 솔직한 나의 믿음이다. 이것이 앞으로 생태 담론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여겨진다.
작금, 이론이 성할수록 작품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 가령 과거의 희곡에서는 생태학에 대한 요란한 선동이 없었음에도 인간살이와 자연환경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생태와 환경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쓰여지는 희곡에서는 그만 못한 통찰, 혹은 근시안적 오류가 더욱 많이 잠복하고 있다.
생태에 대한 문제가 가중될수록 시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고 소설은 위선된 포즈를 취하는 것 같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고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견문을 통해 검증받아야 할 생각이지만, 지금까지의 소박한 결론은 그러하다. 왜 그럴까?
먼저 생태 담론이 유행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유행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작품이 생태 담론이나 환경에 대한 관심을 유행으로 여긴다면 진보나 혁신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생태학은 위기에 처한 우리 모두의 각성이어야 한다. 그 각성은 단기간에 얻어질 수 없음도 분명하다. 각성이 단기간에 얻어지지 않는다면, 작품에 대한 숙고나 열정도 그와 같아야 한다.
우리 생태 문학이 소재적 측면에 집중할 뿐 삶에 대한 근원적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이 역시 90년대 담론에서는 김종회에 이르러서야 나오는 지적이지만, 지금으로써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공감하는 바이다.
소재 문제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관찰이 인간에 대한 관찰과 결부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분명 위기에 처해 있지만, 더욱 위급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삶이 자연보다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의 위기가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많은 생태 소설과 문학이 이 점을 홀대하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시간이 흐르면 이익을 찾던 사람들은 떠날 것이다. 골드 러쉬를 찾아 서부로 온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서부를 삶의 터전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남을 것이다. 생태학이 유행이고 붐이고 그래서 문학적 비평적 도움이 된다고 여긴 담론 생성자들은 이제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 생태 담론(여기서는 소설을 위주로 했지만)의 계승자들은 남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할 준비를 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지금이다. 지금이 그린 러쉬가 끝나는 시점이어야 한다.
김남석․
1973년 출생 ․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저서 ꡔ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ꡕ, ꡔ비평의 교향악ꡕ
․고려대, 서울예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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