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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시/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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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풍경 4
오늘도 나는 공원으로 나가네
펜과 공책과 간식을 싼 비닐 백을 들고
오월의 부드럽고 순한 바람이 숲을 간질이는 곳에다 자리를 깔고
그들이 함께 놀며 내는 웃음소리를 듣네
바람과 숲, 햇살이 어울려 내는 웃음소리는 정말 듣기가 좋다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네
바람과 숲과 볕, 그리고 정적 속에서…
아마도 말년엔 그렇게 살게 되리라 믿네
쪼르르 다람쥐 한 마리 나무 위에서 내려오다 나와 눈 마주쳤네
어린 날 나는 다람쥐와 달팽이를 구별 못 해
다람쥐를 달팽이라 부르고, 달팽이를 다람쥐라 불렀다네
어린 눈에도 그 둘은 정말 귀엽고 예뻤다네
나는 가져온 간식을 다람쥐와 함께 나눠 먹으며
다람쥐도 나처럼 다람쥐 이상으로는 절대 커지지 않는구나
그 동안 내가 쌓아온 세월의 무미한 벽돌들을 허물었네
그때 비닐 백 속 풀벌레처럼 휴대폰이 울렸네
그에게서 온 전화, 그는 내 삶의 유일한 사랑이라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오월의 상쾌한 바람처럼
언젠가는 나도 그와 함께 이곳을 떠날 거라네
아직도 손잡고 떠날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유쾌한 일인지……
내 생각의 허리선을 마음대로 부풀렸다 줄였다 하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제 나는 모든 풍경들에게 조금씩 나를 내주며
내 힘으로 나를 그을릴 것이라네
그것뿐이라네
그 행복뿐이라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애무.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진주처럼 예쁜 빗방울들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우리를 보고 있다. 인간 냄새로 들끓는 방안의 모든 가구들, 책과 화분들. 눈에 보이지 않는 혼령처럼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저 먼 정글의 향기들까지 맡고 있다.
숨을 멈추고 호흡을 조절하자. 한번도 제자리를 떠난 적 없는 사랑은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는다. 머릿속에, 뱃속에, 가슴속에 갇혀 있던 모든 번민의 새들을 날려 보내자.
얼마나 놀라운가. 두려움 없는 사랑은 부재를 모른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장미꽃이 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침대에 있다.
김상미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ꡔ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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