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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시/박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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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8회 작성일 05-05-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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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11시 53분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하루
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11시 53분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의 해안에서
맨발의 나는 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으나
살아가야 할 날들 앞에서
살아온 날들이 무릎 꿇는 이 비참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날들 앞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속삭이며 불어오는 바람의 참담
인생의 어느 봄날 내가 무심히 보았던 비파나무 세 그루
아직도 비파를 연주하며 잘 있을까, 궁금해지는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한 하루
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그 한 子正





은둔사



은둔사는 내 마음의 말사다

*
은둔사의 밤이다, 남천도 뵈지 않는 캄캄한 고독의 옆구리의 시간이다

*
강진에 내려와 남천을 보네, 조그만 녹색 깃발 흔들며 수줍게 서 있던 남천 한 그루, 세상을 향한 연민으로 아득하게 흔들리던 너의 깃발들, 나는 너를 청춘의 남루한 깃발이라 불러보네 남천, 네 환한 고독의 천막

*
황칠나무에서는 황금빛 도료가 나온다는데
징기스칸의 부대는 몽골 천막 위에 황칠나무에서 나오는 이 도료를 발라 화려하고 당당한 위풍을 자랑했다고 하네

지금 내가 바라보는 황칠나무 군락지가 황금빛 천막으로 환하네
군대는 없고 수만 개의 잎사귀들이 經을 읽는 소리만 환하게 들려오네

*
미뢰가 뭘까

남쪽 지방에 내려와서 본 동백나무들은 내 속의 미뢰를 흔들며 서러운 짐승처럼 내 앞에 우뚝 서 있네
격렬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은 저 아득한 자세 앞에서 내 미뢰를 흔들며 지나가는 이 어질머리의 바람은 무엇인가

미뢰가 뭔가

*
윤달이 끼어 있어 사월이며 이월인 봄날, 몸은 사월에 거처하지만 내 영혼은 아직 이월에 머물러 있어 나는 여전히 온몸으로 분단국이다

*
하루 종일 창밖을 떠돌던 바람 이제사 고요히 나의 은둔사로 불어오네
바람의 끝에는 언제나 딱딱한 몇 점의 어둠이 묻어 있어 풍경에 부딪히며 음악으로 번지기도 하네
그 풍경 소리의 바깥에 지금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하나 있네

*
사라진 나라의 저녁 속으로 반월도 같은 달빛을 들고 찾아오는 무굴 제국의 어둠, 굴욕 없이 살자던 그들의 꿈도 지금은 마구 어두워져 마당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네 상처 입은 짐승처럼 하염없이 졸고 있네

*
그대를 따라가지 못한 바람만이 무수히 어둠의 깃발을 흔들며 오는 밤, 고독이 저 스스로의 고독 속으로 또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강진의 밤
아, 나는 왜 나의 고독 속으로 좀 더 깊이 걸어 들어가지 못했나  

*
비파나무가 고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은둔사의 밤이다

*
은둔사는 내 마음의 말사이다


박정대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ꡔ단편들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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