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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시/김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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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X파일 속에서
어이없게도
날이 밝자 조난당한 한치의 섬은
수심이 무릎밖에 되지 않았다
대낮이었으면 그냥 걸어 나와도
불과 몇 분이면 뭍에 닿을
캄캄한 밤
허기지면 너를 먹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에
글쎄, 요즘 체중이 좀 늘었다고 두런거린
조난의 절망이 편안해
영원히 갇혔으면 했던 어둠
살을 맞대어도 별일은 없었지만,
별빛이 별빛으로 다가오지 않아
헤쳐 나갈 생각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죽을 생각에 우리는 동의했다
끝내 마음을 건넬 수 없었지만
날이 새자 새삼스레 민망했던
핑계의 저 깊은 수심
파도
힐끗 돌아보는 저 사내의 속모를 웃음
아내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키스 자렛이 피아노 저편 어둠을 보며
Over the rainbow를 친다
한껏 발기한 무지개 너머 날아가는 새를 보았는지
눈감고 고개 쩔래쩔래 흔들며
급하게 허나 또박또박 다이알을 누른다
그건 그의 오랜 습관이다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무엇이 보이는지
오늘은 무지개 너머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는지
내 휴대폰은 아까부터 계속 운다
고개를 끄덕이며 어깻짓하며 그가 뭐라 속삭인다
무슨 말인지 힘 빠져 나는 자꾸 용쓰는데
그가 속삭일 때마다 시계 속 파도는
엄청난 키로 나를 덮친다
시간이란 지나가면 고요해진다고
아이들은 들풀처럼 자란다고
무지개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뜻 모를 내용만 환호와 박수 속에서 이어진다
아내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는데
벽에 걸린 저 사내의 속모를 웃음처럼 봄은 와
엉망진창 부풀어 터지려 하는데
*키스 자렛(Keith Jarrette)-재즈 피아니스트
김영근․대구 출생
․1993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ꡔ행복한 감옥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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