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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시/남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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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내 얼굴을 잊은 지 오래 그대는 그대 얼굴 잊지 않았는가 숲의 얼굴을 보리라 물 되어 강 아래로 흐르기도 하고 구름 되어 비로 내리기도 하고 돌 되어 이리저리 구르기도 하고 새 되어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노래를 부르기도 해 돌아서면 밤새 내 목덜미를 훔치던 숲의 부드럽고 거친 숨소리 돌아서면 연신 내 허리를 휘감던 숲의 손길 돌아서면 단내를 풍기며 누르던 알싸한 숲의 입술에 취해 온 몸으로 피워 올렸던 내 꽃밭의 꽃잎 수도 없이 뚝뚝 떨어뜨리며 아아 드디어 숲의 얼굴을 보겠네 고개를 들면 숲은 그저 얼굴 없는 짐승일 뿐 애초부터 숲은 얼굴 없는 짐승이었던가 하여 다시 나는 내 얼굴을 찾으리라 하지만 내 얼굴을 찾을 수 없어 혹여 잠속에서는 다시 내 얼굴을 찾을까 깊은 잠에 들지만 잠속에서도 이미 잊은 온전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아 그리하여 나는 이미 내 얼굴을 잊은 지 오래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이면 비에 씻긴 햇살에 찰랑대는 잎새처럼 늘 말간 얼굴로 방긋방긋거리며 거리로 나서지만 나는 이미 내 얼굴을 잊은 지 오래 거리로 함께 나선 그대는 아직 그대 얼굴 기억하시는가 혹여 그대는 잠속에서나마 그대 얼굴 보시는가
살인 교사(敎唆)의 추억이 아름다운
잊을 거예요 막막한 그리움으로 내 꿈속에서 때때로 슬그머니 끈질기게 부활하는 아버지 잊을 거예요 사실은 나 봄부터 꿀사과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바뀌는 하늘 변덕 가슴으로 다 받으며 꿀 만드는 꿀사과 때 되면 아무 원망하지 않고 나무의 몸 떠나서 매서운 겨울 찬 기운 이는 긴 시간 다시 오래 견디며 몸의 가장 깊숙한 가운데로 꿀 모으는 꿀사과 이야기 나 정말 하고 싶었어요 죽 끓듯 하는 변덕 무척이나 혼란스러워도 마침내는 꿀맛 내는 꿀사과처럼 어느 때인가는 기어이 꿀맛 주겠거니 하는 희망 이제 잊을 거예요 언제나 인자한 바위 얼굴이었다가도 돌아서면 한순간에 얼굴 쓱싹 바꾸고 한결같음을 자랑하는 그 징글징글한 정 다가서면 그저 길을 막고 선 커단 돌일 뿐인 그 바위 얼굴 이제 정말 잊을 거예요
남태식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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