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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시/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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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렌즈 없이 본다는 거
오로지 스스로가 이해하는데 실패한 사유가 참된 것이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세수하다 렌즈를 잃어버렸다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남자와 놀았다 북경장에서 꽃빵, 그리고 처음 보는, 이름을 외웠으나 잊어버린, 느끼한 요리를 먹었다 다음엔 먹지 말아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므로 초조했다 그게 걸려서 다 토했다 몇 년째 다니던 병원이 옮겨졌으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그 병원이 있던 옛날 동네로 갔다 어지러웠다 나는 그 젊은 의사를 신뢰했으나 수소문해서 갈 정도의 열의는 없다 그 근처 오락실에서 놀다가 다시 배가 찔리고 아파 오락실 위층 내과로 갔다 급체한 것이라고 급성위염의 일종이라고 원래 잘 이렇다고 말해주었으나 늙은 의사는 믿지 않고 청진기를 가지고 여기저기 온몸을 뒤진다 무릎을 붙이고 가슴을 압박한다 나는 거기 아니 여기가 아프다고 말했고 그는 땀을 흘리며 오래오래 진찰했다 황당했지만 그대로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언니에게 말했더니 서내과는 유명하단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간다고 나는 약도 안 먹었는데 복통이 없고 구역질이 끝났다 다시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음식을 먹어 배가 아프면 또 갈지 모른다 그 늙은 정신병자 변태 돌팔이로 소문난 그 의사가 나를 고쳤으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것이 하도 신기해서 쓴다 비유나 상징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한번에 쓴다 고치지 않겠다 아까 내가 토했던 담벼락이 냉이꽃밭이었던 것 같아 그게 좀 부담되지만
오프너
뚜껑을 모으기 위해
병을 찾아다녔어
병딱지나 쿠폰을 가지려고
식료품을 천장까지 쌓았지
늘 그런 건 아니야
다행히 넌 나를 잊어먹었겠지
입술을 뗐어
하필이면 이 밤에 비도 오는데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 어떻게 여는 거니
코르크마개를 병 속에 빠뜨렸어
오 제발 유리 파편까지 마실래
아무 속임수 없이
너는 입으로 병을 땄었어
기교도 감상도 없이
병 따는 유쾌한 기계처럼
세상 모든 병뚜껑을 열 수 있었지
난 수없이 요구했고
네게서 피가 날 때까지 몰랐어
내일이 꼭 오늘과 똑같기를 바라던 날이었어
뭘 할지 계획하지 않는 게 좋았거든
마개의 파편들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는
목이 길죽한 병은 불편해 미치겠어
반이나 남은 푸른 알코올
이게 성가시고 불편할 거야
김이듬
․2001년 ≪포에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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