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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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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89회 작성일 05-05-3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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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 환상이 만드는 공동체
―ꡔ트레인스포팅ꡕ의 공동체와 색채 고찰―


강성률
(영화평론가)


1. ‘젊은이의 양지’를 찾아서
경고 하나. 영화는 마약이다. 절대 입에 대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이브처럼 뱀의 간언에 넘어간다면, 당신은 에덴에서 쫓겨나 플라톤의 동굴 속에 갇힐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지몽매한 중생들은 시네마 천국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하루분의 헤로인을 찾아 헤맨다. 매일 밤 달콤한 환각에 젖어 자신을 박중훈 내지는 심혜진으로 착각하며 상상계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낙원이 지상으로 강림하길 학수고대한다. 그들의 생활이란, 아침이면 그날에 해당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하는 것이다. 그리곤 순서도 없이 하루 몇 편의 영화를 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겠지 하고 지쳐 있을 때, 어김없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은 돌아온다. 그들에게 현실의 도피처는 극장이며, 피난처는 시네마테크나 통신망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화는 현실도, 희망도, 미래도, 오락도 아니다. 그들에게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젊은이들은 신기루를 꿈꾼다. 이때 신기루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고 싶어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독립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그러나 이 두 세계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그들은 떠돌며 새로운 신기루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신기루는 실재하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거대한 회색 빌딩과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 속에서 친구를 만나고, 그들과 동병상련의 공동체 의식을 키우며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싸움을 한다. 젊은이란 실체는 방황과 고독이란 양태로 거리, 혹은 술집을 어슬렁거린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아우라를 가지지 못하며, 다만 대량 복제된 삶을 막막히 견딜 뿐이다.
여기 그들의 생활을 기록한 또는 극화한 한편의 영화가 있다. 영국이라는 서구의 섬나라에서 대니 보일이라는 젊은 감독이 만든 ꡔ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ꡕ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쓰라린 젊음의 한때를 내다보거나 경험하거나 추억하고자 하며, 그들이 만든 공동체를 답사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의 방황과 공동체를 표현하는 영화의 형식을 고찰하기도 할 것이다. 자, 이제 ‘젊은이의 양지’를 찾아 길을 떠나자.
2. 그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가족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우리가 너무도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이 남녀 차별을 양성화하고, 그렇게 길들여지도록 교육하고, 가정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폭력이 행해지고, 끝없이 반복되는 가사노동에 여성을 묶는다는 점에서 여성해방론자들이 가족제도를 반대한다는 것을. 부모의 재산을 자식이 아무런 노력 없이 상속받아 부모와 같은 계급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으로 빈곤도 세습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족제도를 반대한다는 것을. 또 우리는 알고 있다. 가정이 더 이상 사랑과 정서의 평온한 장이 아니라 사회 경쟁력만 교육시키는 공간이 되었으며, 자기 가족의 이익만 생각하는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사회가 더욱 각박해진다고 사회학자가 한탄한다는 것도. 장자 상속 제도를 실행한 우리나라에선 장남은 부모 공양과 제사의 무거운 짐 때문에, 막내는 장남에 비해 덜한 부모의 관심 때문에 가족을 원망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러한 반대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족제도라는 철옹성은 견고하기만 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출산과 양육, 자녀의 사회화, 성 관계, 정서적 만족, 가족원에 대한 보호 등의 역할을 그 어떤 다른 기구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토록 견고한 가족제도에 대한 인식이 문학을 비롯한 서사구조를 지닌 예술에서는 서서히 붕괴되어 간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족을 위해 벌레가 되도록 일하는 카프카의 모습을 우리는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가족이 붕괴되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해서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항상 시대를 조금 앞서가는 법이며, 이를 통해 시대 정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가 되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________________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이를 “서사는 다만 현실보다 뼈아픈 징후”라고 쓰고 있다. 이광호, 「왜 지금 가족을 말하는가」, ꡔ포에티카 2호ꡕ, p.27.
. 그런데 문제는 가족제도가 붕괴되어 갈 뿐, 가족제도를 대체할 뚜렷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가족제도의 붕괴는, 결국 가족제도가 수행하는 역할을 어떤 다른 기구도 대신 수행하지 못하기에 노인 문제, 청소년 문제, 자녀 교육, 정서적 불안정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 영화에 나타난 가족제도의 문제점을 고찰하며 그들의 공동체를 답사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이 글에서의 공동체란 ‘가족공동체’, ‘의사(擬似)가족공동체’, ‘공동거주체’, ‘의사공동거주체’를 모두 합쳐 말하는 명칭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면서 가족적 위계질서가 있는 경우는 ‘가족공동체’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지 않고 동년배들이 동거를 하면서 가족적 위계 질서가 있는 경우는 ‘의사가족공동체’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면서 가족적 위계질서가 없는 경우는 ‘공동거주체’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지 않고 동년배들이 동거를 하면서 가족적 위계질서가 없는 경우는 ‘의사공동거주체’로 정의하고자 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만의 집단을 이루고 있거니와, 우리는 이 집단의 분석을 통해 그들의 성격을 고찰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ꡔ트레인스포팅ꡕ에 나타난 그들의 공동체를 답사하면서, 그 공동체는 어떤 형태의 것이며, 기존의 가족제도와는 어떻게 다르며, 과연 그 공동체가 기존의 가족제도를 대치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위기의 상황에 처한 가족 문제와 젊은이들의 사고를 동시에 인지할 수 있기에 소요한 작업이다. 또한 이 글은 영화를 분석하는 글이기에 각각의 공동체가 지니는 특성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스타일 위주로 살펴보려 한다.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그린 영화답게 ꡔ트레인스포팅ꡕ은 가족제도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동체를 통해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매우 섬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2-1. 의사공동거주체
영화의 시작은 의사공동거주체에서이다. 의사공동거주체는 기존 가족제도와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가족이라는 억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그들 생활의 일차적 목표는 그들을 억압했던 기존 질서와 체계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제도에서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의 하나였던 아버지와 자식 간의 질서를 의사공동거주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 단적인 예가 바로 알리슨의 아기, 즉 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리슨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몇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같이 살지만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했을 때의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억압에서의 해방은 결국 자유를 의미하며 자유는 방종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이 모여서 만든 의사공동거주체는 밥 대신 마약을 먹고, 물 대신 술을 마신다. 그들의 거주체는 환각의 거주체이다. 환각의 거주체는 구성원에게 서로 무관심하며 각자의 환각을 품고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삶이란 강도짓과 마약과 싸움질이 전부이다.
이 공동체는 영화에서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듯하지만 이내 문제가 발생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던이 마약을 주워 먹고 죽어갈 때, 그 어느 누구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들이 취한 행동이란, 자신은 아버지가 아니라며, 마약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약으로 아기가 죽었는데도, 마약으로 순간적 고통을 잊으려 한다. 아기의 아버지를 모르기에, 어느 누구도 아기에게 응급 처방을 시도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알리슨을 위로하지 않는다. 구속과 간섭은 상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도 감수하고 있음을 그들의 거주체는 그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거주체는 깨어진다.
이 영화의 미장센 중 눈여겨볼 것은 색채인데, 색채란 결국 인간 심리의 표현이다. 말을 바꾸면, 같은 색을 두고 심리는 상황과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며, 색조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같은 상태의 심리일지라도 반응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색채가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사람을 병들게 하기도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파랑색이 금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색채에 반응하는 심리는 초월적 심리와 개인적 심리로 나눠 구분할 수 있다. 초월적 심리란, 가령 빨강색은 난색, 파랑색은 냉색이라는 일반적 심리이고, 개인적 심리란, 같은 빨강색일지라도, 추위를 느끼는 이는 따뜻한 모닥불을, 고통스러운 이는 선명한 핏방울을 연상할 것이라는, 특수한 심리이다.
색채를 통한 연상에는 “구체적 연상과 추상적 연상”________________
김학성 편저, ꡔ디자인을 위한 색채ꡕ(조형사, 1995), p.132.
이 존재한다. 색채(빨강)를 보고 실재적 대상(불, 피)을 연상하는 경우가 전자라면, 색채를 보고 추상적 관념(따뜻함, 고통, 정열)을 연상하는 경우는 후자이다. 때문에 영화 비평에 적용되는 연상이란 후자의 경우이다.
의사공동거주체에 나타나는 색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그들의 거주 공간의 색채와 다이안을 만난 디스코 텍의 색채가 그것이다. 거주 공간은 파랑과 빨강이 조화를 이룬 미묘한________________
이 글에서 미묘한 초록이라 함은, 빨강과 파랑을 혼합하면 보라색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질감을 지닌 초록이 발생하기에 그런 것이다.
초록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넘실거린다. 파랑이란 무엇인가. 파랑이란 죽음 지향적이다. 이때 그것은 높고 밝은 푸른 하늘처럼 인간에게서 멀어져 가는 냉담해진 상태이며, 종국에는 “침묵적인 정지 상태”칸딘스키(권영필 역), ꡔ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ꡕ(열화당, 1979), p.79.
가 된다. 피카소가 그린 청색 시대의 그림들이 한없이 우울하여, 냉담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 시기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ꡔ늙은 기타리스트ꡕ는 이런 분위기가 오롯이 살아 있다. 빨강은 무엇인가. 빨강은 “자기 내부에서의 운동”칸딘스키, 위의 책, p.82.
이며, 이 운동은 삶의 에너지와 같은 강렬성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종국에 그것은 삶의 ‘빨간 신호등’이 된다. 이러한 빨강과 파랑이 만나 초록이 되는 공간은 함께 융합되기도 하지만 각자 분리되어 비취기도 한다. 그렇다면 초록은 무엇인가. 초록은 빨강의 강렬한 에너지도, 파랑의 내부로의 수축도 작용하지 않는, 정적인 평온한 공간-여름의 초록은 그렇기에 인간에게 평온함을 준다.-이지만,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지칠 공간이다. 여름의 숲은 가을이 오면 변색하기에, 초록은 퇴색의 미래를 지닌 색이다. 요약해 보면 의사공동거주체의 공간은 파랑의 우울과 단절이, 빨강의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합쳐져 양단의 싸움을 벌이지만, 이것은 각각 존재해 양극단을 가진 그들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또 초록의 지루함으로, 퇴색의 미래로 이어져 이들의 공동체가 언젠가는 깨질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디스코텍을 보여주는 색채는 파랑이다. 파랑은 차갑다. 그 차가움은 단절을 의미한다. 파랑은 보는 사람에게서 멀어져 가는 구심력을 지니고 있기에, 종국에는 “의사 소통이 결핍”________________
최병근, 「영화에서의 장소와 색채의 창조적 사용」, ꡔ영화연구 12ꡕ(한국영화학회, 1996), p.91.
되어 완전한 부동과 정지 상태로까지 몰고 간다. 파랑은 곧 내부적 황폐의 공간이다. 젊은이들이 모여서 춤추는 디스코텍은 서로의 대화가 단절된 공간이며, 이를 입증하는 장면이 스퍼드와 토미가 각자 자신의 상대자에게, 상대자들이 스퍼드와 토미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다. 이런 단절은 스퍼드가 면접하는 공간의 파랑과도 일맥상통한다. 렌튼이 이 공간에서 애인을 구하려 한 것은 그래서 성사될 수 없는 것이며, 이 공간을 벗어나 디스코 텍을 나왔을 때에야 렌튼은 다이안을 만난다. 이때 다이안이 입은 옷이 빨강이다. 이 빨강은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는 단기적으로는 성적 열망을, 장기적으로는 다이안과 헤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거주체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형식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카메라의 높이와 이동카메라와, 몽타주 편집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쇼트보다 시점이 더 낮게 잡혀 있어 인물들이 거대하게 올려다 보이는 카메라는, 마약에 취해 누워 있는 인물을 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데, 이 앵글로 서 있는 인물을 잡으면 앙각이 된다. 흔히 이런 앙각은 인물의 절대성과 위엄을 보여주지만, 대니 보일은 절묘한 조명의 사용으로, 다시 말해 인물에게만 조명을 줌으로써, 그것도 머리 같은 중요한 부위에만 부분조명을 줌으로써 목적 없이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조만간 쓰러질 것 같은 이들의 생활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동카메라는 굉장한 스피드로 이동하면서 180도 법칙을 깨뜨리기도 하고, 점프 커트를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관객이 끊임없이 긴장하게 만든다. 그런데 통상 이동카메라가 사용되더라도 기본 씬은 10초 정도의 시간을 가지는데 이 영화는 마치 몽타주처럼 짧게 짧게 잘라서 속도감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순간성, 일시성, 즉흥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느낌은 고정카메라일 때도 나타난다. 가령 스퍼드가 면접을 볼 때, 카메라는 이 상황을 고정카메라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이 결여되었는데, 그 이유는 두 곳에서 잡은 고정된 화면을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의 빠른 교차편집으로써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통상 관객이 한 장면에 익숙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7-12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파격적인 편집________________
의사공동거주체의 편집에는 교차편집과 몽타주도 사용되었다. 교차 편집이란 두 개 이상의 사건을 교차로 집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이때 두 화면을 은유적으로 병치하는 주제적 편집이 사용되면 몽타주가 된다. 가령 렌튼이 축구공에 맞고 넘어지는 장면과, 마약을 주사하고 서서히 눕는 장면을 여러 개의 커트로 나눠서 하나씩 교차 편집하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을 비유하는 주제적 편집이며 몽타주이다. 또한 나이트클럽을 나온 토미, 렌튼, 스퍼드가 각자 섹스하는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 사이사이에 축구에서 득점하는 장면이 편집되어 있다. 쾌락의 절정(오르가즘) 장면과 스포츠의 절정(득점) 장면이 병치됨으로써 몽타주가 되는 것이다. 결국 몽타주는 관념들의 결합이다. 계속되는 커트와, 커트된 필름의 다양한 연결을 통해 이 영화는 다분히 조형적으로 보이며, 그 조형은 대단히 스피디하다.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빠르면 관객은 화면을 인식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고, 느리면 지루해 하는데 이 장면은 전자 쪽이다. 이 영화에서의 고정카메라는 이동카메라의 한 변용일 따름이다.
2-2. 가족공동체
ꡔ트레인스포팅ꡕ에 등장하는 인물 중 렌튼만이 중산층의 부모가 있을 뿐이며, 다른 인물의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페이드 아웃 되었고 가족에 대한 애정은 점프 컷 되었다. 의사공동거주체에서의 강도짓과 마약과 싸움질로 결국 법정에 선 렌튼은 마약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모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그렇게 부정하고자 했던 공간을 벗어나 환상을 품고 새 공간을 건설했지만, 결국 그 공간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렌튼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다.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그는, 가족공동체로 다시 돌아온다. 가족공동체는 기존의 가부장적 권위가 살아 있는 공간이기에 렌튼은 어느 정도의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의 보호라는 명목 아래 개인의 사생활이 침범되었던 이 공간에 렌튼은 다시 감금된 것이다. 좌파적 페미니스트인 미셀 바렛과 매리 매킨토시는 “감옥과 같은 사생활권”________________
미셀 바렛/매리 매킨토시(김혜경 역), ꡔ가족은 반사회적인가ꡕ(여성사, 1994), pp.75-78. 이 책에서 저자들은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것도 그 집안의 사생활이고, 남편이 아내를 강간하는 것도 그 집안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경찰이 함부로 개입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이란 용어로써 이 상황을 설명한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다루든, 그것은 그 가정의 사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렌튼에게 가족공동체는 ‘갇힌 공간’이다. 렌튼의 부모가 그를 방에 가두고 문을 밖에서 잠궈버리는 것은 이러한 가족공동체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가족공동체는 단점만 지니고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며 이어오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렌튼이 사고 쳤을 때, 결국 돌아갈 공간은 가족공동체뿐이다. 가족공동체는 그 자신을 지켜주는 이데올로기가 있는데, 그것은 자식들을 사랑하고 돌봐주는, 무한한 애정을 지닌 어머니라는 무기이다. 또한 거기에다 정서적 안정이라는 부수적 이데올로기도 있다. 그렇기에 가족공동체는 치료의 공간이라는 기능이 가능하다. 때문에 마약에 중독된 렌튼은 가족공동체로 돌아와서야 마약 중독을 치료한다. ꡔ트레인스포팅ꡕ은 가족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영화이다. 마약을 끊기 위해 렌튼은 병원과 집을 번갈아 오가는데, 이때의 교차로 인해 가족공동체는 병원과 같은 치료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렌튼은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공동체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필사적인 싸움을 한다. 이 싸움은 전적으로 렌튼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부모는 단지 그를 방에 가두어 두고 TV나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치료의 공간에서 그를 괴롭히는 인물들이 모두 의사공동거주체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 인물들은 가족공동체에서 치료받는 그를 시기하며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는 렌튼이 의사공동거주체와 내적으로 결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공동체는 의사공동거주체의 부정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지만 렌튼이 마약 중독을 치유하자마자 런던으로 떠남으로 인해 또다시 부정된다. 의사공동거주체와 가족공동체 모두가 부정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이렇게 양자를 부정한 렌튼이 런던에서 의지하고 꿈꿀 수 있는 공동체는 부모가 아니라 다이안이다. 그녀는 그에게 구속적이지 않으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족공동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색채는 백색과 노랑이다. 의사공동거주체의 빨강과 파랑은 사라지고 백색이 이 공간을 넘나든다. 백은 무색이다. 순백이란 곧 순수한 무를 의미한다. 무색은 “물질이나 실체로서의 모든 색깔이 날아가 버린 세계의 상징”________________
칸딘스키, 앞의 책, p.83.
이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상태는 공허하다. “극단적인 공허함”최병근, 앞의 글, p.94.
이 다시 가족공동체로 돌아온 렌튼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허탈에 빠진 렌튼이 이 공간에서 죽을 수는 없다. 백은 비어 있음이다. 비어 있음은 채워 넣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백은 치료의 색이다. 병원으로 가기 직전 마약을 하는 렌튼의 하얀 와이셔츠는 그가 곧 치료의 공간으로 이동할 사실을 암시한다. 밝은 조명과 흰색 계통의 복장과 이불 같은 도구의 미장센을 통해 이 공간은 재생, 삶의 공간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백은 단순한 치료의 공간이 아니다. 백은 죽음 직전의 의식을 잃은 환영이다. 그러므로 백은 죽음의 고통을 겪고 난 뒤의 재생의 공간이다. 렌튼이 초현실적 영상으로 죽음의 환영을 계속해서 보는 것은 이런 고통을 감내한 후에야 재생할 수 있다는 표지이다.
가족공동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색채는 노랑이다. 영화의 초반에 렌튼이 마약을 끊기로 다짐할 때의 색채는 전적으로 노랑이다. 사소한 준비물을 올려놓는 커다란 테이블이 노랑이고, 준비한 플라스틱 양동이 중 하나가 노랑이고, 심지어 이때 렌튼이 입고 있는 웃옷도 노랑이다. 노랑은 “전형적인 지상의 색깔”칸딘스키, 앞의 책, p.78.
로, 파랑과는 반대로 사람을 끄는 원심력을 지닌 색이다. 여름을 이긴 가을의 성숙을 지닌 색으로, 황금 들판의 풍요로움을 드러내 주는 색이다. 가족공동체는 백과 노랑으로 인해 치료와 가능성의 공간이 된 것이다. 죽음의 환영은 초현실적 영상으로 보인다. 초현실이란 데페이즈망으로 현실적 요소들을 ‘해체’하여 비현실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내부 세계와 현상 세계 사이의 경계가 소멸되는 통합의 세계”________________
신현숙, ꡔ초현실주의ꡕ(동아출판사, 1992), p.238.
로, ꡔ트레인스포팅ꡕ에서는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을 초월하여, 자신의 극한과 마주쳐서 그 고통의 쓰라림을 마주 안은 상황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처절함을 안겨주지만 한편으로는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침대에서 렌튼이 만나는 던을 비롯한 죽음의 초상과, 그를 옥죄어드는 상황은 이러한 초현실적 영상으로, 이것을 통해 렌튼에겐 고통의 극대화를, 관객에겐 고통의 처절함을, 종국에는 부활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해 준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에서의 초현실적 영상은 기발한 착상으로, 현실적 상황을 환상적 상황으로 대치함으로써 관객에게 신선함을 부여한다.
2-3. 의사가족공동체
런던에서 다시 맺어진 공동체는 렌튼의 의사가 무시된 채 결성되었기에, 렌튼에 의해 깨질 수밖에 없는 공동체였다. 새 삶을 살기로 작정한 렌튼은 에딘버러를 떠나 런던에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며, 다이안과 사랑의 편지도 교환하면서 저축도 하는, 몰라볼 만큼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폭력중독자 벡비가 사고를 친 후 수배되어 렌튼을 찾아온다. 이때부터 렌튼의 새삶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둘의 관계에는, 벡비가 폭군인 아버지, 렌튼이 불만을 품은 아들이라는 명백한 질서가 존재하기에, 의사가족공동체는 출발부터 불안한, 금이 간 공동체였다. 이를 명징하게 암시하는 것이 벡비와 렌튼이 잠잘 때 벡비는 바로 자지만, 렌튼은 거꾸로 자는 장면이다. 때문에 벡비의 발 냄새를 맡으며 렌튼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꿈꾸는 것이다. 이런 암시는 식보이, 스퍼드와 함께 공동체를 이룰 때도 여전히 나타나, 렌튼이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고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토미의 장례식 이후로 그들의 공동체는 식보이, 스퍼드와 함께해서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공동체가 된다. 벡비는 틈만 나면 칼부림을 하는 또다른 폭력적인 가부장이며, 벡비에게 순응하면서 식보이와 렌튼을 돌보는 중개자역인 스퍼드는 고통받는 어머니이며, 벡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식보이와 렌튼은 가부장하에서의 억압받는 자식이다. 출발부터 모순을 지닌 의사가족공동체는 폭군에 대항하는 자식의 반란으로 무너진다. 함께 합의해 마약을 팔아 큰 돈을 벌지만 결국 렌튼이 돈을 가지고 혼자 도망감으로써 공동체는 또다시 깨어진다.
의사가족공동체를 지배하는 색채는 흑색이다. 의사가족공동체가 구성되는 계기가 된 것이 토미의 장례식이었기에 그들의 복장은 흑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약밀매를 모의하는 공간과 밀매하는 공간이 모두 ‘닫힌 공간’이면서 흑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들의 복장은 이 공동체가 깨질 때까지 흑색 계통이다. 흑은 죽음이다. 의사공동거주체에서 던이 죽었던 것도, 그 공간이 지닌, 흑에 가까운 어두운 색조와 무관하지 않다. 흑은 “죽음의 현존”________________
최병근, 앞의 글, p.93.
이다. 다 타버린 장작의 슬픈 운명이다. 때문에 장례식의 복장은 흑이다. 토미의 장례식에 이들이 모였기에 이 공동체는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백이 재생의, 가능성의 무라면, 흑은 가능성이 없는, 소멸의 무이다. 흑은 암흑의 공간이므로, “미래와 희망이 없는 영원한 침묵과 같은 내적인 울림”칸딘스키, 앞의 책, p.83.
이며, 이는 렌튼의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 그래서 조만간 깨질 공동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상기시킨다.
의사가족공동체의 시간적 배경은 대개 밤이다. 그렇기에 색채는 마땅히 흑이다. 흑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주제적 암시도 제시한다. 의사공동거주체의 공간이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색조였다면, 의사가족공동체는 밤과 흑이 만나서 시간이 함께 진행되므로, 이 공간과 공동체가 공히 가장 절망적인 상태이며,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흑은 태초의 빛이 존재하기 전의 무질서이며, 최악의 상황이 존재하는 질서이다.
이런 공동체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방식은 부감과 앙각이다. 폭군인 벡비를 앙각으로 잡아 상황을 짓누르게 만들고, 대항군인 렌튼을 부감으로 잡아 초라하게 만든다. 렌튼이 벡비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밤에 돈을 가지고 도망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대항을 한 이유는 이런 카메라 기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마약밀매 공간의 카메라는 가끔씩 네 인물을 모두 부감으로 잡음으로써, 의사가족공동체가 초라한 공동체, 조만간 깨어질 공동체임을 암시한다. 이런 정직한(?) 기법은 또한 돈가방을 상황에 따라 짧게 삽입해 렌튼이 결국 돈을 훔쳐 도망하리라는 암시를 관객이 받도록 만든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의사공동거주체에서 사용된 앙각의 카메라가 의사가족공동체의 부감의 카메라와는 정반대의 카메라 기법이지만, 그 사용 목적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반대의 기법으로 동일한 효과를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2-4. 공동거주체.
돈가방을 들고 도망나오는 렌튼은 “가족을 택하라”고 말한다. “가족을 택하고, 직업을 택하고, 텔레비젼을 사고, 자동차, CD 플레이어를 사고, 정시 출퇴근을 하고, 연금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건전하게 살자”고 한다. 그런데 기존 가족공동체의 제약을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렌튼이 또다시,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족공동체로 복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영화의 첫부분에 언급된 렌튼의 독백을 들어보자. “택하고, 택하고, 나중에는 망할 놈의 집구석에서 술이나 퍼마시다가 자손 봉사나 받아볼까 하고 낳아놓은 못돼먹은 자식새끼들 눈총이나 받으며 죽어라.”고 가족공동체에 독설을 퍼붓던 그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다시 가족공동체을 선택할 리는 만무하다. 가족공동체의 단점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렌튼이 선택한 가족은 기존의 가족공동체와는 분명 다른 종류의 가족일 것이라는 추론을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계속적으로 암시되어 왔었다. 가족적 위계질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다이안의 집에서 렌튼이 그녀의 부모를 “공동거주자”라 칭한 점, 런던 생활 중 부모와는 연락하지 않고 다이안한테만 연락한 점,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의사가족공동체에서 끊임없이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던 점 등에서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공동거주체를 꿈꾸고 있다. 다이안의 부모를 공동거주자라 칭한 데서 우리는, 렌튼이 기존의 가족공동체의 장점은 인정하지만 위계질서는 반대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위계질서를 인정하지 않기에 렌튼은, 그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이고, 의사가족공동체로부터 탈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렌튼이 택하는 가족이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면서도 위계질서가 없이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거주체이다. 의사가족공동체를 떠나온 렌튼이, 가족적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가족공동체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환상을 채워줄 다이안을 찾아가리라는 예상을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수중에 큰 돈이 있는 상황이며, 런던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돈을 쉽게 벌었던 기억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부모처럼 중산층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공동체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스퍼드에 관한 것이다. 스퍼드는 돈이 생기면 “엄마에게 탄산수를 선물하고, 여자를 만나 섹스가 아닌 사랑을 할 것”이라 했고, 이를 수긍한 렌튼은 그에게만 몫을 남겨 두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엄마에게 탄산수를 선물하는 것이 가족공동체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 부분에서 나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단순히 작은 선물을 엄마에게 하는 것이 가족공동에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어머니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위계질서로의 복귀 차원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엄마에게 갖다 줄 거야, 엄마와 함께 쓸 거야, 엄마에게 큰 선물을 할 거야”라는 대답이 나왔어야 했고,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할 거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스퍼드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엄마보다는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애인을 결국 선택하리라는 추론이 그래서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색채는 백색과 파랑이다. 렌튼이 돈을 들고 거리를 걸어갈 때, 아침이 밝아온 시간대였기에, 세상은 환하다. 하늘도 백색 계열이고, 거리도 강물도 백색 계열이다. 백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재생의 색채이다. 재생이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________________
칸딘스키, 앞의 책, P.83.
상황이다. 이 상황은 의사가족공동체의 흑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백은 흑의 부정이며, 흑이 꿈꾸는 환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렌튼은 돈가방을 들고 ‘열린 공간’을 자신있게 활보하는 것이다.
거주공동체의 또 하나의 색채는 파랑이다. 렌튼이 스퍼드의 돈을 남겨두는 공간의 색채는 파랑이다. 그러므로 렌튼이 돈을 남겨두는 조그만 사물함은 스퍼드에게 ‘파란 비상구’이다. 파랑이 파랑일 수도 있지만 색조가 옅어지면 하늘색이 된다. 이는 의사공동거주체의 어두운 파랑과는 대조를 이루는 색조이다. 스퍼드에게 돈을 남겨준 그 조그만 공간은 파랑보다 하늘색에 가깝다. 하늘색은 파랑이 아니라 푸른색이다. 푸른색은 푸른 하늘에 대한 동경이 녹아들어 있다. 푸른 하늘에 대한 동경은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며, 순수에 대한 동경이다. 조그만 사물함이 깨끗하면서 순수하게 보이는 것, 렌튼이 자신에 넘쳐 거리를 걷는 것은 새 삶에 대한 순수한 동경 때문이다.
3. 방황의 끝, 그러나
ꡔ트레인스포팅ꡕ은 현대 사회의 가장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인 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가족이란, 하나의 개념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하며, 그 부정은 환상의 다른 이름이다. 가부장적 권위는 부정되었다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시 긍정되고, 새로운 가부장적 권위는 처음부터 부정되어 새로운 환상을 꿈꾼다. 이러한 관계는 이 영화를 표현하는 색채에서도 강렬하게 드러난다. 단절된 검은 파랑은 순수한 옅은 파랑에 의해 부정되고, 죽음의 흑은 재생의 백에 의해 부정되고, 퇴색의 초록은 풍요의 노랑에 의해 부정된다. 이러한 부정은 개별적으로도 작용하지만 내용과 색채가 함께 혼합되어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수많은 부정들이 꾸는 꿈은 결국 부정의 긍정이며, 이는 환상으로 종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거주체에 대한 환상이 말 그대로 환상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과연 공동거주체가 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공동거주체가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자식을 어떤 방식으로 키울 것인가, 그리고 만연하는 노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련의 문제들이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 영화는 과연 이런 물음들을 얼마만큼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자꾸만 해체되어 가는 가족에 대한 하나의 아픈 징후로서 이 영화 보기는 유효하지만, 스크린에서 빛이 멈추었을 때, 상상적 자아와의 결별을 치러야 하는, 유년의 완전한 이미지에서 깨어나야 하는, 그래서 스크린과 현실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단계에서 자위해야 한다. 시대에 대한 아픈 징후를 보여주는 영화는 흔치 않다는 것, 아니 모든 예술은 단지 시대적 징후만 나타낼 뿐이며, 상세한 분석과 예측은 인문 과학, 사회 과학 같은 다른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예술은 예술 자체의 구조와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예술이 모든 문제를 충족시켜주는 시대는 별들이 길을 밝혀주던 아스라한 옛날이었다는 것들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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