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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특집/오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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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48회 작성일 05-05-3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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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서사와 역사적 신체에 대한 상업적 상상력


오윤호
(문학평론가)


대중의 집단적 기억과 재현된 역사
변화된 사회 환경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대중매체는 새로운 역사경험과 허구적 사실성을 겸비한 대중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21C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대중서사의 집단성과 역사 재현의 특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2002 한일 월드컵은 대중들에게 신화적 상상력과 집단행동에 대한 정당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이다. 경기가 벌어지는 내내 ‘(축구에) 강한 나라’라는 자의식을 자극하며, ‘영웅이 악당을 무찌른다’는 모험담을 대중들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골을 넣는다는 행위는 모든 영상 매체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으며, 붉은 물결의 환호성은 여전히 짜릿한 동료의식을 만들어냈다. 바로 그 순간에 역사적 순간과 개인적 체험이 동일시되면서 기묘한 희열이 발생한다. 즉, 더 이상 머릿속 지식으로만 구성되는 허구적 역사가 아니라, 동시대적인 감수성과 집단적 행동이 가져오는 희열을 경험하며 역사가 어느 순간 개인의 삶 속 깊이 침투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반미 촛불 시위, 이라크전 반대, 대선 자금 수사와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등등 인터넷과 텔레비전에서 넘쳐나는 이 대중서사들은 끊임없이 대중의 의식과 일상 속에 스며들어 일종의 담화로 재생산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역사(생경한 표현이지만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만이 아니라, 경험적 사실이며 삶의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가 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집단주의는 그 긍정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파쇼적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옹호하는 영화를 천만 명 이상이나 관람하는 저력 아닌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기서 대중서사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 재현의 문제를 2004년 초에 대중적 관심을 끌었던 ‘이승연 누드 파문’과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한 사례는 ‘누드’라는 새로운 상업적 트랜드를 부각시키며 일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중문화를 통해 폭로하고 또 철저하게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고, 다른 사례는 160억이라는 최고의 제작비을 들여서 만든 영화면서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6․25전쟁과 형제애’를 감상했다는 점에서 잘 만든 영화로 평가받은 영화다.
왜 <태극기 휘날리며>와 ‘이승연 누드집 파문’은 대중들에게 회자되어야 하며 대중매체를 통해 재생산되어야 하는가? 두 사례는 모두 6․25전쟁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다는 점, 특히 전쟁 와중에 놓여있는 개인의 신체, ‘몸’에 대한 가학적 표상이 주요한 재현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전쟁의 전면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전쟁의 그늘에서 벌어지는 강간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허구적 상상은 ‘이승연 누드 파문’과 <태극기 휘날리며>를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 소재이다. 이 절묘한 결합을 통해 신체 위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역사와 동일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례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투자와 수익의 개념에서 기획되고 대중에게 유포되었다는 점은 영상 문화의 복제성과 반복적 재현이라는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대중적으로 대성공을 이루었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 차이점을 밝히는 과정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21C 대중서사의 성격을 규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두 사례는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대중들의 역사 인식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역사에 대한 대중적 기억을 단지 하나의 허구적 서사처럼 소비하도록 만들면서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례가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이중적 특성이 서사적 갈등으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해 볼만하다. 적절한 소비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대중들은 동일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소비하는데, 새로운 대상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다. 그래서 이야기 시간(narrated time)보다는 서술 시간(narrating time)이 강조된다. 즉 텍스트 속에 재현된 시간(일본 제국주의 시대, 6․25전쟁)보다는 그것을 구조화하고 형상화하기 위한 재현 시간(실제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현재 순간)이 가지고 있는 연행성이 중요하다. 과거의 역사를 소비한다거나 동시대적인 역사를 개인적 체험과 동일시하는 역사 경험 문제는 현대인들의 삶이 가지고 있는 범위와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때 역사의 이해 관계 속에 서로 얽혀 있는 주체들의 다양한 욕망은 비극적인 역사를 어떠한 역사적 가치, 정치적 윤리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 과정에서 생산자들의 의도된 소비 대상과 실제로 대중들이 소비했을 대상 사이의 차이를 파악하고, 역사적 비극(기억)의 재생산와 대중문화의 상업성이 가진 연행적 서사 형식을 확인해 보자.
식민지 역사와 관음증의 역학-‘이승연 누드 파문’
‘이승연 누드 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이승연은 비밀리(대중이나 언론 몰래)에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집을 촬영했고, 상업적 매체(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를 통해 대중들에게 판매하려다가 각 사회단체와 대중 여론으로 인해 누드 사진 자체가 폐기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대중의 역사의식,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려는 심리와 그 역사적 윤리의식에 대한 질문이 미묘하게 얽혀 있다.
무엇보다도 ‘이승연 누드’가 사회적인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동안 재현하지 않았던, 혹은 은폐되어져 왔던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재현 그 자체가 논쟁거리가 된 것이다. ‘일제는 전장에 있는 일본군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를 신설하고 많은 조선과 중국 여성들을 희생시켰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를 입은 할머니와 그 가족들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으며, 떠도는 풍문이거나 스스로가 감내해야 하는 업보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술과 고백으로만 존재했고, 구체적인 재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0년대 변영주 감독에 의해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여기에서도 나래이션이나 음악은 없었으며, 영화는 단지 여성들의 목소리만을 통해 관객과 의사소통한다.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지 않은 채 사적 경험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 고백 과정에서 할머니들은 아내이면서 어머니이고, 소녀이면서 노인이 되어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구체화시킨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있어 ‘그 순간’은 치욕스러운 과거이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삶의 변화 속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정체성은 딸이면서도 어머니이고 소녀이면서도 노인인 다양한 역사적 지위를 다양하게 가지면서 변화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연 누드 사진은 그러한 위안부 할머니가 살아온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단지 억압된 현실인 ‘그 순간’에만 고정시켜 버리고 만다. 즉, 과거의 위안부 할머니를 재현한 것일 뿐, 현재에도 그 정체성이 ‘변화하는 진행적인 역사의 주체’로써 할머니들을 위치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승연 누드를 기획했던 사람들은 사적 경험의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그 재현 과정에서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억압된 소수자의 역사적 경험을 상업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려 했을 뿐, 그들의 시선으로 그 역사를 바라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또다시 역사의 억압적 위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부족과 함께, ‘이승연 누드 사진’은 여성의 벗겨진 육체를 드러내는 재현 방식 자체로 인해 대중적 관음증과 깊이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 다양한 주체들의 시선 교차를 통해 사실이었지만 은폐된 위안부 역사, 실제하지 않는 진실에 대한 욕망과 공포를 읽어낼 수 있다. 이승연 누드는 일종의 대립적 이미지를 사용해 제국과 식민지의 권력적 관계를 생산해내고 있다. 이승연의 몸은 단순히 벗겨진 육체가 아니라, 재해석되어야 할 탈식민적 약호가 된다. 언론에 공개된 사진은 반라의 여성 뒤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칼을 찬 일본군 헌병, 혹은 일제의 일장기)이 배치되어 있다. 처량한 반라의 여성과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헌병의 대비 속에는 제국의 성적 억압을 드러내는 폭력적 시선이 존재한다. 그동안의 위안부 할머니의 침묵과 역사 책임자들의 침묵처럼 흥미로운 그것은 그 고압적 시선이 반라의 여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대중문화의 소비자를 향하고 있으며, 반라의 여인과 대중에게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 역학 속에 존재하는 ‘민족적 울분과 역사적 폭로라는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고 제작자들은 말하지만 다른 연예인 누드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중이 경험하는 유사 식민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만약 이승연 누드를 예술적 형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이렇듯 뻔한 위험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민족적 비극을 재현해야만 했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상투성 속에서 재현된 비극은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은폐된 ‘식민지인이었다, 식민지인이다’라는 좌절감과 분노를 되새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이 사진을 소비하는 대중의 시선은 우선 반라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 반라의 여성은 성적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억압받는 식민지 여자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반라의 육체는 하나이지만 성의 권력적 관계 속에서 남성적 시선에 사로잡힌 여성의 육체를 구성하고, 제국과 식민지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는 제국으로부터 억압받는 피식민 주체의 육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작용 때문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대중은 자기 정체성을 위협받게 된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반라의 여인을 들여다보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시선을 깨닫는다. 상징적인 표상이긴 하지만 일장기와 일본 헌병의 시선이 그것인데, 반라의 여성을 성적 희생양으로 생각하는 일본군과 동일시되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간단한 사진 한 장이지만 식민지 지배자에 대한 피식민지인의 동일시와 저항의 이중적 심리작용이 적절히 재현되어 있으며, 대중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피식민지인의 공포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들이 소비했던 것은 ‘이승연 누드 사진’ 그 자체가 아니었다. 몇 번의 우애곡절 끝에 이승연 누드 파문의 원본 사진은 소각되었다. 그 이후로도 언론과 대중은 실체 없는 비어있는 기표를 반복적으로 거론했다. ‘이승연 누드 파문’은 텅 빈 텍스트에 대한 환상을 육체에 대한 관음증으로 채워버린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 비어있는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 위안부 할머니 앞에서 질책을 받으며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사죄를 비는 이승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어떠한 역사적 사죄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신사참배 문제와 독도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일본을 향해 울분을 드러낸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승연의 사죄 사진은 민족적 감정을 은밀하게 정화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진에서 제국의 상징 아래에 놓인 반라의 이승연은 성적 대상이면서 식민지의 피식민지인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지만, 위안부 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승연은 권력적 관계가 역전된 패배한 식민지 지배자를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즉, 역사적 사실을 상업적 목적으로 팔아먹었다는 격앙된 대중 심리는 이승연을 매국노에 가까운 존재로 비난하게 되고, 이승연의 민족적 반역 행위는 제국주의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심리적인 가치 부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승연의 눈물과 사죄는 제국의 지배자가 보여주는 눈물이면서 사죄가 됨을 역설적으로 의미하게 된다. 이때 대중은 이승연과의 동일시를 은폐하고 위안부 할머니의 지위에 자신의 시선을 투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가해자는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국을 모방한 상상의 제국주의자가 사죄를 통해 일시적인 정신적 안정을 취한 것뿐이다. 그녀의 사죄를 통해서는 어떠한 역사적 현실도 바뀌지 못한다. 대중은 교묘하게 자신의 가면을 바꿔 쓰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시선’만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연예인 누드라는 상업적 분위기에 휩쓸린 이승연의 육체만이 소비되고 성적 환상으로 재생산되었을 뿐이다. 대중으로 하여금 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기억을 말소시킨 상태에서 강박적으로 떠오르는 훼손된 피식민 주체의 육체를 소비하며 상업적인 쾌락을 경험하게 하는 대중서사의 특징은 더 이상 역사의 문제가 역사적 정당성의 문제이고 회복되어야 할 궁극적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승연 누드 파문’이 자자들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도 일순간에 사라졌다. 대중매체는 늘 침묵했었고 잠시 미모의 연예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관심을 보였지만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이 가벼움에 대해 대중들에게 스스로의 역사의식과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찢겨진 육체 위에 새겨진 국가주의-<태극기 휘날리며>
한편, 같은 민족끼리 이데올로기의 갈등 때문에 벌어진 6․25전쟁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 적이 아닌 적과 싸운 첫 번째 전쟁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베트남전쟁에 이어 이라크전쟁에도 파병을 결정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그들도 우리의 적이 아니다. 적이 아닌 적을 상대해야 하는 전쟁은 그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폭력 행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는 문제에 있어 자기 입장을 표명하기가 수월치 않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딜레마에 빠진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60-80년대 방공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6․25전쟁은 군부 독재에 의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담은 체 비극적으로 재현되었고, 공산주의를 적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의 부채의식을 강화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남북관계의 화해 분위기와 어우러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은 더 이상 비극적 정서로 대중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6․25전쟁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남북한의 사람들의 정체성과 민족적 감정을 주로 다루게 된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간첩 리철진> 등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드러내며 분단된 근대 국가에서 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물론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녀를 모르면 간첩>, <휘파람 공주>와 같은 영화는 남북한의 문제를 코미디로 풀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철저하게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가족주의의 따뜻한 정서를 전면에 내세우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진태와 진석이라는 형제가 있다. 진태는 구두를 닦으며 진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전쟁은 두 형제를 전쟁터로 몰아넣는다.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전쟁광이 되어가는 진태와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진석의 시선과 함께 전쟁은 남과 북을 오고가며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이 간단하면서도 상투적 이야기를 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중서사로서 만끽되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보여주는 바로 그러한 집단주의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체 국민의 1/4이 하나의 영화를 볼 수 있는가? 촛불시위와 같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시민문화가 형성되어 가는 긍정적인 대중문화 현상 속에서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잔영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충돌은 이 영화가 노리는 유일한 갈등 구조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동안 진태의 진석에 대한 사랑은 적을 쓰러뜨려 한반도 내에 민주 국가를 건설한다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압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만이 행복하고 안락하기를 바라는 가족주의와 국가 이익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국가주의는 근본적으로 같은 서구 근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 폐단을 미국이라는 국가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규 감독은 ‘가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감동, 상황에 맞는 캐릭터들의 매력, 스펙터클에서 오는 웅장함은 미국 메이저 영화사 관계자들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태극기 휘날리며>가 철저하게 미국시장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더 이상 영화 속에 재현된 6․25전쟁은 1950년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특수한 민족적 내란이 아니며, 보편적 인류애를 가장한 미국식 국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적 전쟁이 된다.
그 역사적 실체가 빠져 있는 자리를 메우는 것이 훼손된 신체, 가학적 폭력성의 표상이다. 영화는 겉으로는 미국식 가족주의를 내세워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형제애를 꽃피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 속에서 관객을 사로잡은 것은 국가 폭력으로부터 희생당한 훼손된 신체들이었다. 영화는 대화와 같은 극적 장면보다는 총을 쏘고 격투신을 벌이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잘려져 나간 팔과 나무에 걸려 있는 시체, 마을을 뒤덮은 양민들의 죽은 몸과 여기저기 흩어지는 피를 처참하게 경험해야 한다. 끝내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던 동생마저도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형이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회복된 형제애로 가족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쟁을 통한 국가의 폭력성과 인간 내면에 도사린 악마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다. 많은 국민들은 영화를 보면서 사디스트적 쾌락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 살해당한 육체에 대한 타자화를 시도하며 폭력적 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은연중에라도 그 훼손당한 육체들은 ‘잠정적인 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제목에 있어서부터 국기로 상징화된 파쇼적인 국가주의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살해되어가는 시민들과 군인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국가 권력의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단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홀로코스트 산업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언론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영화 중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손꼽으며, <태극기 휘날리며>을 극찬한다. 그러나 이들 영화들은 <태극기 휘날리며>가 가지지 못한 전쟁의 비극성과 인간 존재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극적 장면마다 문제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한민족으로서 ‘그들’의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피비린내 나는 폭력으로 그린 영화를 우리는 세계적인 영화라 옹호하며 천만 명 이상 관람한 것이다. 어떠한 도덕적 평가도 민족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평가도 결여된 체 죽음과 폭력으로 훼손된 신체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가 돋보이는 영화일 뿐이다. 게다가 이라크전 파병과 관련하여 대리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서 전쟁 지향의 국가주의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만약 깃발 부대 대장인 진태가 진석이를 광기 들린 상태에서 죽였다면 이 영화는 어떤 의미, 어떤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사실 진태의 유골이 발견이 되고 백발 늙은이가 된 진석의 우는 모습 삽입은 대중적 비극성을 자극한다. 만약 전쟁의 광기와 가족애 중 전쟁의 광기가 압도했다면, 의 뒤를 이어 우리 현대사의 폭력적 역사가 만들어낸 가공할 만한 무의식적 세뇌작용을 드러내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6․25전쟁이라는 소재를 단지 지나간 역사 소재로만 택해야 하는지, 아니면 삶 속에 중첩된 체 반복되는 현실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역사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모순적 작용 속에서 진지한 이데올로기적인 고민과 인간 존재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고민한 후에 선택되어야 했다. 영화 속에 재현된 가족주의 속에 묻혀버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도 그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가상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90년대를 거치며 6․25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통해 새롭게 정립하고 진지한 고민을 던졌던 많은 시각들은 <태극기 휘날리며>로 인해 와해되어 버린 듯하다. 잠재되어 있는 가족주의, 국가주의를 표상하는 과정,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대중, 그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적 대중서사인 것이다.
역사의 기억과 소비, 그리고 윤리의식
대중 매체는 역사를 빨리 잊으면서도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역사를 반복적으로 기억하며 서사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이승연 누드 사진은 잊혀진 식민주의적 정체성을 환기하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폭력적 국가주의를 애틋한 감정의 가족애로 치장했기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중서사는 21C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압도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역사란 망각에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욕망과 결합한 상업적 소비의 형식으로 현재 속에 재생산된다.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단절적인 상상력은 삶의 역사를 파편화시켜 고립시킬 뿐만 아니라 중첩되어 있는 역사의 지층을 통해 현재의 역사가 구성됨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소수자, 역사적 개인의 삶을 배제한 채 재현되는 이러한 대중서사의 폭력성을 지켜보면서 역사적 진실과 그 재현의 위험성을 다시금 두렵게 생각한다. 단지 기억하는 소수자만이 과거 속에, 역사 속에 사로잡혀 슬픔과 죄의식의 심연을 응시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기획에 따라 재구성된 역사적 기억이라 할지라도 단지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억압된 이데올로기적 기억을 환기하기도 한다. ‘이승연 누드 파문’은 제국과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재현하면서 피식민 주체의 식민주의적 무의식을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으며,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을 재현하며 가족주의를 표면화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성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일상적 삶이 안고 있는 수많은 가치 판단의 모순성과 윤리의식의 결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집단적 소비 성향은 조심스럽게 성찰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진실’에 대한 믿음이 역사를 순결하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며, 반복적인 역사 재현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저열한 상업주의와 사회 전반적으로 잠재된 이데올로기적 욕망 구조를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대중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데 더욱 유효하게 되었다. 대중서사의 상업성과 배설의 가벼움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역사의 중첩성과 연속성을 이해하는 일이 역사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지키는 유일한 윤리의식이 될 것이다.

오윤호
․1972 군산 출생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평론 「근대적 시민의 식민지 경험」 등
․서강대, 청주대 강사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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