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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초점/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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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 詩와 김구용 詩에 대한 대조 비평
장종권
1. 문학사 기술과 대조 비평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은 “문학 전통은 참신한 저자가 선배 저자의 형식과 존재에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투쟁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 이전에 발생했던 것에 비추어 선배 저자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의미도 동시에 인식하게 될 때 시작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________________
해롤드 블룸, 윤호병 편역, 「시 전통의 변증법」, ꡔ詩的 影響에 대한 不安ꡕ(고려원, 1991), 186면.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선배 시인과 그 선배 시인을 따르는 후배 시인 간의 ‘대조’를 통한 문학비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해롤드 블룸의 ‘詩的 影響’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시인들 사이의 유사성을 해명하는 데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시를 어떻게 수정주의적으로 계승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을 쏟는 듯하다. 이와 같은 연구 경향은 시인의 창의성을 다소 과소평가하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지만, 시인을 둘러싼 문학사적 배경을 강조하는 하나의 문학관으로서 받아들임직하다.
문학사의 통시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김구용의 시는 여러 모로 李箱의 시를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면이 있는 듯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언급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김구용 시의 문학사적 의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李箱 시와 김구용 시 사이의 대조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김구용은 李箱 시의 모티프를 자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잠재 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시상의 전개 방식 면에서도 李箱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김구용은 연구 논문을 별로 남기고 있지 않은 중에도 李箱에 대한 제법 분량이 긴 글을 남기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李箱에서 김구용으로 이어지는 우리 시사의 한 흐름의 양상을 살핌으로써 그 시사적 의의와 한계를 해명해 보고자 한다.
2. 李箱 시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김구용의 李箱論
「‘레몽’에 도달한 길」에서 김구용은 李箱 시가 발표된 1930년대의 시대 상황, 李箱 시의 형태 실험, 李箱 시에 대한 당대 독자들의 반응을 비롯하여, 李箱 시에 드러난 죽음과의 대결 의식을 주로 논했다. 김구용은 李箱을 우리 시문학사에서 ‘현대시를 이루어놓은 최초의 공로자’로 평가하면서, 李箱을 초현실주의 시인으로만 한정하여 논하는 시각의 부당성에 대해 언급했다. 김구용은 초현실주의 이론이 퇴조하여도 소멸하지 않을 李箱 시의 특색을 1930년대의 시대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李箱의 시대 의식에서 찾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김구용은 “미와 창조와 sex는 그(李箱-인용자)에게 가능과 미래를 제시하였고 그만큼 그를 배반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한계를 거부하는 분열을 볼 수 있다. 썩어 가는 전신으로 그는 지상을 고발하였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李箱의 시 정신을 ‘檢診의 정신’으로 평했다.________________
김구용, 「‘레몽’에 도달한 길」, ꡔ김구용 문학전집6: 因緣ꡕ(솔, 2000), 600면.(※이하 ꡔ因緣ꡕ으로 약칭함.)
여기서 김구용이 李箱의 시를 유희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진지하고 윤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李箱의 「오감도」에 대한 김구용의 평가에서도 재확인된다.
많은 사람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온 「오감도」 ‘시제 4호’ ‘시제 5호’ 등은 죽음과 싸우는 이상의 자화상이었다. <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어뱉었더냐> 내뱉은 것은 그의 전 작품이다. 喀血이었다. 대개의 경우 현대 시론에 의한 시인들의 초기 작품들이란 이유야 여하튼 간에 대개가 경박한 기지나 서투른 색채나 어색한 조립 때문에 그 원래의 가치마저 희박케 한 경우가 많다. 당시 일본의 초현실파란 사람들도 거개가 원숭이 같은 손장난만 하다가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氣象圖」가 대담한 실패를 한 예다.
畵虎不成에 反類狗子格인 실패 없이 이상이 일약 현대 시론을 극복한 독특한 자기 예술을 완성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엄숙한 불행과 비극에서 싹텄다. 이상의 비극과 불행이 어째서 우리의 문제가 되며 오늘날 허다한 공감을 불러일으킬까. 그 비극과 불행은 이상만의 불행과 비극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불안, 반항, 분열, 자조, 공포, 방탕, 위기, 집요, 빈곤, 갈등, 오만, 위장이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것이요, 세계의 기정 사실이 되었다.(중략)그의 예술의 난해성은 <貞操는 禁制가 아니요 良心이다. 이 境遇의 良心이란 道德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絶對의 愛情’ 그것이라>고 한 ‘금제가 아닌’ ‘양심’ 즉 ‘절대의 애정’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禁制가 아닌> <良心>, 즉 <絶對의 愛情>을 찾는 절규가 현대에서는 난해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에의 갈구가 괴상한 몸부림을 친다.위의 글, 611~613면.
김구용은 「오감도」를 ‘경박한 기지나 서투른 색채나 어색한 조립’ 이상의 진실성을 갖춘 시로 보았던 것 같다. 주목할 점은 김구용이 일본의 초현실파와 李箱을 견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교는 李箱이 활동했던 1930년대 일본 시단에서 초현실주의가 유행했던 시대적 맥락이 개재해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李箱의 시 형태 실험이 초현실주의의 기존 시 형식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구용은 다른 글에서도 “잠재의식과 夢幻으로 인상적 효과를 노린 초현실주의자들의 현란한 손재주가 얼마나 위대한 낭비였던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초현실주의를 맹종한 일본 시인들의 작품에서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한갓 나의 독단일까.”라고 하여 초현실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________________
김구용, 「눈은 자아의 窓이다―시를 위한 노트」, ꡔ因緣ꡕ(위의 책), 430면.
김구용이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이 모두 ‘손장난’, ‘손재주’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기교적인 면에 모아지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구용은 李箱의 시를 技巧만의 초현실주의 시와는 달리 세계관의 차원에서도 깊이가 있는 시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김구용의 견해가 초현실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구용은 어디까지나 기교 중심으로 편중된 일본 초현실주의에 대해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구용은 李箱 시의 성공 요인을 논하면서 식민치하의 시대 상황을 거론했다. 그리고 李箱의 비극과 불행이 李箱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김구용은 戰後의 각박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구용은 李箱의 시대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겹쳐 보면서 李箱에 자기 자신을 投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불안, 반항, 분열, 자조, 공포, 방탕, 위기, 집요, 빈곤, 갈등, 오만, 위장’과 같은 것들은 李箱 시의 주제 의식이면서 동시에 그대로 김구용 시의 주제 의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또한 김구용이 李箱 시의 난해성을 ‘진실에의 갈구’, ‘절대의 애정’인 양심의 소산 등 전폭적으로 긍정한 裏面에 자기 자신의 詩作에 대한 辯解도 개재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김구용이 李箱 시의 基底로 말하는 ‘절대의 애정’이 무엇에 대한 애정인지 밝힐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 김구용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김구용은 「현대문학과 체험」(1959)에서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문학은 인간을 귀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적인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어서, 이 점을 참고할 때 김구용이 말하는 ‘절대의 애정’이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말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레몽’에 도달한 길」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언급이 특별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같다. 그 대신 김구용은 李箱의 분열증적 詩想 전개 방식을 현대인의 자아 탐구와 관련지었다.
정신과 육신의 전쟁은 치열하였다. 주체와 객체, 내부와 대상이 각각 군웅으로 할거하였다. 처절한 현대인의 의식 분열이었다. 분열한 의식들은 연합이란 말을 모른다. 자기가 세상인지 세상이 자기인지 누가 자기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________________
김구용, 「‘레몽’에 도달한 길」(앞의 글), 616면.
김구용은 李箱 시의 자아 탐구에서 휴머니즘을 보아내려고 한 듯하다. 김구용이 보기에 李箱 시의 분열증적 양상은 李箱 개인의 분열증이 아닌 현대인의 분열증이었다. 李箱은 자신의 분열증과 대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고 김구용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김구용의 해석에는 매우 독특한 점이 있다. 김구용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육신의 전쟁’으로서의 의식 분열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李箱 시의 분열증적 양상을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김구용은 李箱 시의 난해성을 ‘진실에의 갈구’, ‘절대의 애정’으로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이 李箱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인의 자기 정체성 탐색으로 그 내포를 확대했을 때, 김구용은 ‘양심’이라는 말을 李箱의 시를 논하는 데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자아탐구가 휴머니즘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李箱 시 모티프의 계승과 변용
물론 李箱 시에 대한 김구용의 평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구용이 李箱 시를 얼마나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게 분석했는가 하는 문제보다 김구용이 李箱 시를 어떻게 수정주의적으로 계승․발전시켰는가 하는 점일 듯하다.________________
해롤드 블룸은 이와 같은 수정주의적 계승․발전을 ‘창조적 誤讀(creative misreading)’의 과정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해롤드 블룸에 따르면 시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선배 시인을 추종하는 후배 시인의 ‘병든 자의식’이지 선배 시인의 詩史上․詩批評上 객관적 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해롤드 블룸, 앞의 책, 34~39면 참조.)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김구용의 李箱論을 살피는 데서 더 나아가 김구용 시에서 李箱 시의 영향을 찾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김구용 시에 드러나는 李箱 시의 영향을 크게 거울 모티프, 여성상 등으로 나누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거울 모티프가 李箱 시의 주요 모티프였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구용은 그의 시 「실내」, 「신화」, 「산재」 등에서 李箱 시를 연상시키는 거울 모티프를 사용했다. 특히 「신화」는 李箱의 「거울」과 그 시상 전개 양상이 매우 흡사한 詩이다.
내가 볼 적마다 놈은 흘끔흘끔 나를 보기에 무슨 할말이 있다면 시원히 들어보려고 가니까 놈도 긴한 일이나 있는 듯이 내게로 온다. 우리 인사 합세다 하니까 놈은 음흉스레 입술만 들먹일 뿐, 대답을 않는다. 내가 수상한 놈임을 알았지만 선심으로 악수를 청해도 놈은 싸늘한 제 손끝만 내 손끝에 살짝 들이댄다. 놈의 소행이 괘씸하나 나로서는 기왕 내민 손을 옴칠 수도 없어서 정답게 잡으려는데, 놈은 기를 쓰며 그 이상 응하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니까 그제는 따라 웃는다. 하 밉살스러워서 뺨을 쳤더니, 거울은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놈은 깨끗이 없어졌다.
목을 잃은 나는 방안에 우뚝 서 있는 놈의 동체를 보았다.
―「신화」 전문
흔히 ‘거울’은 자기 성찰의 장치로 알려져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李箱의 「거울」에서도 거울 모티프는 자기 성찰의 장치로 쓰였다. 李箱의 「거울」에 사용된 거울 모티프의 특징은 시적 자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이미지가 아닌 ‘他者’로 인식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거울」의 시적 자아는 ‘거울 속의 나’와 ‘나’(거울 밖의 나)를 구분한다. 그리고 시적 자아는 “잘은모르지만외로된事業에골몰할께요”(「거울」 제5연中)와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거울 속의 나’ 역시 현실계의 사람처럼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리라 생각한다. 「거울」의 시적 자아 ‘나’는 ‘거울 속의 나’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바란다. 그러나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의사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李箱은 이와 같은 의사 소통의 불가능성을 ‘握手’의 불가능성을 통해 암시하고자 했다. 「거울」의 제3연에서 시적 자아는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握手를받을줄모르는―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라고 진술한다. 하지만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실패는 본질적으로 ‘거울 속의 나’가 ‘왼손잡이’라는 육체적 조건 때문이 아니다. ‘거울 속의 나’는 본래 육체를 지닌 실체가 아닌 이미지, 幻影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握手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李箱은 바로 이 점을 끝까지 은폐하면서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기 성찰은 매번 실패하고 만다(“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中). ‘거울’은 ‘나’로 하여금 ‘거울 속의 나’를 만날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단절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적 자아의 자기 성찰은 매번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지식인의 자의식을 나타내는 듯한 李箱의 ‘거울’은 김구용의 「신화」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李箱이 ‘거울 속의 나’와 ‘나’를 구분하면서 거울 속의 ‘나의 幻影’을 분신(double)과 같은 육체를 지닌 他者로 간주했다면, 김구용은 ‘거울 속의 나’를 ‘놈’의 3인칭적 존재, 他者로 파악한다. 李箱이 ‘거울’의 존재를 명확히 전제하면서 詩想을 전개한 데 대해, 김구용은 ‘거울’의 존재를 감추면서 詩想을 풀어나간다. 李箱도, 김구용도 이 他者․幻影에 대해 위화감을 품고 있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幻影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 ‘놈’ 사이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신화」의 시적 자아는 ‘놈’을 음흉하다고 하고 ‘수상한 놈’이라고 치부한다. 김구용 역시 李箱처럼 ‘握手’의 불가능성을 통해 시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거울 속 幻影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나타내고 있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것은 김구용의 李箱에 대한 분명한 오마주(hommage)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구용이 이 시의 제목을 ‘신화’라고 붙인 것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듯하다. 즉, 김구용의 「신화」는 韓國詩史上 李箱이 발견한 거울 모티프를 기념하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김구용은 「신화」에서 거울을 깨면서 거울을 인지한다. 거울이 깨지면서 시적 자아의 거울 속 환영인 ‘놈’도 깨끗이 없어진다. 그러나 ‘놈’은 오히려 거울에서 벗어나 “방안에 우뚝 서” 있게 된다. 그것을 ‘나’는 깨진 거울 속에서 알아챈다. 일종의 ‘轉位’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轉位를 통해서도 ‘나’와 ‘놈’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듯하다. 이 점은 李箱의 거울 모티프보다 한층 극심한 분열처럼 보인다. 이것은 「신화」의 시적 자아가 거울을 부수는 데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여겨진다. 「신화」의 제2연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이 ‘목’을 잃었으며 ‘놈의 동체’를 보았다고 逆說的인 진술을 한다. 목을 잃었다는 것은 머리까지를 잃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거울 속 幻影인 방안에 선 ‘놈’의 형상이 동체, 즉 몸통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구용은 이와 같은 逆說을 통해 자의식의 혼란에 빠진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놈의 동체’를 보았다는 것은 視力에 의한 감각적 인지를 의미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깨진 거울에 비친 목 없는 동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자의식의 분열상을 깨달았다는 의미의 ‘보다=이해하다’로의 의미의 확장을 보인다. 이처럼 분열된 자의식을 直覺한 것이 김구용 시 쓰기의 원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신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李箱의 거울 모티프로부터 示唆 받은 것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지점에 詩史的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구용이 李箱 시로부터 이어받은 주요 모티프 중 두 번째는 여성상과 관련된 것이다. 李箱이 여러 소설에서 ‘기생’, ‘매음녀’를 주요 인물로 다루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서도 李箱은 ‘매음녀 모티프’를 즐겨 사용했다. 「狂女의 告白」, 「興行物天使」, 「I WED A TOY BRIDE」 등의 작품들은 매음녀를 모티프로 한 李箱의 대표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I WED A TOY BRIDE」에서 李箱은 매음녀를 ‘인형’으로 취급하는데, 이와 같은 면은 김구용의 시 「消印」 등에서도 나타난다. 김구용 시에 등장하는 탕녀 계열의 여성들은 李箱 시와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李箱 시에 나타나는 매음녀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하나의 표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李箱 혹은 그의 시적 자아들은 매음녀의 행위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자각해 가게 된다. 한편 김구용 시에 나타나는 매음녀들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그려져 있지만은 않다. 가령 「消印」에 등장하는 매음녀 역시 생활고로 인해 매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구용 역시 매음녀를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李箱과 상통하는 면에 있다. 다만 李箱의 경우 매음녀의 부정성을 부각시키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훼손성을 드러낸 반면, 김구용의 경우 그 깨달음이 사회 구조의 층위라기보다 다분히 순수 관념의 층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심층 의식으로서 순수 관념의 秘意를 캐내는 열쇠로 김구용이 ‘매음녀’와 같은 여성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은 어떤 면에서 초현실주의에 있어서의 여성관을 연상시킨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매음녀’를 비롯한 김구용 시의 다른 여성 인물들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할 듯하다. 우선 초현실주의에서 여성의 존재 의의에 대해 해명한 다음 글을 참고삼아 살펴보는 것도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프로이트는 여자를 뮤즈로 이해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인식에 계시의 역할을 부가했다. 그 발상은 빌헬름 옌젠의 단편소설 「그라디바: 폼페이의 환상」을 분석한 그의 글에서 유래했다. 소설에서 젊은 고고학자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그리스 부조에 새겨진 소녀 그라디바에 사로잡혀 있다. 하놀트는 부조에 묘사된 그라디바의 걷는 모습에 매혹되어, 그녀를 ‘걸음걸이가 눈부신’ 소녀라고 부른다. 하놀트는 그라디바가 폼페이 파멸 때 산 채로 매장되는 꿈을 꾸고, 그녀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폼페이 여행에 나선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걸음걸이가 눈부신’ 한 소녀를 만나고, 그녀가 그라디바이거나 그 화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오래 전에 그가 버린 어린 시절의 연인 초에 베르트강이다. 하놀트가 이것을 깨닫자마자 그리스 부조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이 치유되고, 그는 초에와 정상적인 삶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프로이트는 ‘Bertgang’이 독일어로 ‘걸음걸이가 눈부신’이란 뜻임을 지적한다. 그는 하놀트가 본래 초에에게 빠져 있었고, 그녀와의 만남이 그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시켰다고 결론짓는다.
초에-그라디바는 ‘여자-아이’다. 그녀는 여인 시절과 어린 시절의 요소들을 두루 겸비하고 있고, 그 역할은 하놀트가 자기 무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녀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지점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________________
피오나 브래들리, 김금미 역, 「초현실주의와 여성」, ꡔ초현실주의ꡕ(열화당, 2003), 48~49.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여성은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李箱에게 ‘아내’로 일컬어지는 매음녀들이 ‘초에 베르트강’이자 ‘그라디바’일 수 있었다면, 김구용 역시 매음녀 등의 탕녀 계열의 여성들과 관세음보살의 현신, 어머니 등 성녀 계열의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의 수수께끼를 풀어갔다고 할 수 있다. 李箱의 여성상이 매음녀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 냉소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김구용의 여성상은 탕녀와 성녀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출발하여 종국에는 그와 같은 구분의 無化, 圓融에 이른다는 점에서 李箱의 경우보다 관념적․철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가령 김구용의 「꿈의 이상」(1958)은 李箱 시의 탕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김구용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시의 주인공인 ‘그’는 미혼여성 좌담회에 나갔다가 여의사, 여선생, 여대생 등 세 명의 여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들 세 명의 여자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그’는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실직자로 전전하던 시절 ‘그’에게 오렌지를 사주었던 ‘흰 옷 차림의 여자’ 때문이었다. ‘그’는 ‘흰 옷 차림의 여자’가 베푼 자선에 강렬한 性慾을 느낀다. ‘흰 옷 차림의 여자’에 비해 미혼여성 좌담회에서 만난 여성들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열심히 ‘초코렛만 빨고 있었던’ 여대생은 李箱 시에 나오는 ‘興行物天使’를 연상시킨다. 李箱의 시에서 ‘초코렛’은 남성 상징으로 등장하거니와, 「꿈의 이상」에 등장하는 여대생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초코렛’의 시적 장치를 통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여선생은 거리에 나왔을 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다. ‘그’는 여선생의 그와 같은 허위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듯하다. 또한 여의사에 대해서 ‘그’는 왠지 낙태 수술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거부감을 느낀다.
믿지 못할 일이 있었다. 눈동자가 마술이라면 그럴 성도 한 일이었다. 흰 옷차림의 여자는 천연스레 오렌지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실은 그녀는 거울을 향하고 그와는 반대로 돌아서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돌아선 채 문갑에 오렌지를 놓더니 雨後晴 雲鶴甁에 연꽃을 꽂았다. 여자는 연꽃과 용이 비친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품었다. 그녀의 얼굴은 거울 속에서 점점 觀音으로 변하였다. 그는 그녀의 등뒤에 서서 정면 거울에 나타난 聖 白衣觀世音菩薩을 보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흰 옷차림의 그녀만이 관음으로 비쳐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그는 거울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울 속에서 여전히 관음의 미소를 하였다. 그는 “당신을 만나려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녀는 그의 음성을 못 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접근하는데 공간이 그의 앞을 완강히 가로막았다. 두 사이는 아무것도 없건만, 보이지 않는 透明質이 손바닥에 싸늘하니 느껴졌다. 그는 상대를 볼 수 있으나 상대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유리가 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난 늘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고 통하지 않는 공간에 기대어 머리를 숙였다. “난 원래 이유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하였다.
―「꿈의 이상」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그’의 꿈 대목 중 일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세음보살로 변한 여자라기보다는 그녀의 거울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흰 옷 차림의 여자’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녀의 거울 속 이미지다. 이 거울은 ‘그’의 무의식이 시각화되는 공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의 무의식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초현실주의의 재현을 거부하는 화풍을 연상시킨다. 가령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비치는 이상한 거울이 등장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나는 재현되지 않는다」(1937)라는 그림의 화풍과 위 인용된 부분에 깔린 ‘재현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초현실주의적인 거울에 의해 ‘흰 옷 차림의 여자’는 신비화된다. 이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自在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관세음보살의 형상으로 시적 자아 앞에 나타난다.
물론 “난 원래 이유가 없어요.”라는 여자의 분명한 음성에 환상이 깨진 시적 자아가 왠지 세상에 속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시적 자아가 ‘흰 옷 차림의 여자’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하고 있는 점은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김구용 시에서 관세음보살은 전쟁 때 헤어진 어머니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바라기」(1950), 「관음찬Ⅱ」(1957) 등에서 이미 자명해진 사실이다. 여기서 시적 자아가 ‘흰 옷 차림의 여자’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모성 결핍’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꿈의 이상」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김구용이 전쟁 때 어머니와 헤어진 것으로 인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으며,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 어머니를 관세음보살에 겹쳐놓았는가 하면, 매음녀를 비롯한 여러 여성 인물들의 형상에서 不在하는 母性을 찾아 헤맸으리란 개연성만은 있는 것이다.
4. 李箱-김구용 시 계보의 의미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李箱 시와 김구용 시의 대조비평을 시도해 보았다. 김구용은 李箱 시를 매우 진지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간 李箱 시의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기인한 판단으로 생각된다. 김구용은 李箱 시의 자의식 과잉적 스타일을 계승하여 나름대로 변용․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김구용의 ꡔ詩ꡕ에 수록된 長詩들은 李箱의 시보다는 李箱의 소설과 영향 관계를 찾아야 할 만큼 ‘소설적’이다. 등장인물이 있고 추상적이나마 사건이 있으며 배경 또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김구용만의 독특한 시적 영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구용은 李箱 시의 모티프 가운데 거울 모티프와 매음녀 모티프 등을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용의 거울 모티프, 여성상 등은 모두 초현실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李箱의 초현실주의적 스타일보다 일층 정교해 보인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김구용의 시가 일층 분열증적이라는 점, ‘꿈’을 강조하는 김구용 시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李箱-김구용의 시적 계보는 한국 시사에서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거부하고 무의식-꿈을 강조한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매우 의식적이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스타일이 한 쪽은 식민지 현실에서 기인했고, 다른 한 쪽은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현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李箱-김구용의 시 계보는 한국 시사에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으리라고 본다.
김구용의 李箱 계승은 李箱의 시니시즘적인 유머 감각을 탈각한 채 자의식 과잉의 경향만을 강화시킨 면이 없지 않다. 이 점은 김구용의 李箱에 대한 수정주의적 계승이 지닌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후 실존주의의 압도적인 영향 등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으로도 여겨진다.
장종권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ꡔ아산호 가는 길ꡕ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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