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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문화산책/곽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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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의 한국영화 2
2003~4 ‘작은영화’의 위기와 살리기
곽영진
(영화평론가)
한국영화의 과식 편식, 부익부 빈익빈
50%․1000만 돌파의 음영
지난해 한국영화를 마감, 결산함에 있어서 세간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관객 점유율이 과연 50%를 돌파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답은 예측대로 ‘확실하게’ 넘어섰다,였다. 그러더니, 구랍 24일 개봉한 <실미도>가 1월 31일 <친구>(2000-1)의 818만 관객동원 기록을 가볍게 깨버리며 한국영화의 흥행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2월 초순 현재 하향 폭이 아직 완만한 <실미도>의 좌석점유 수치를 놓고 보니, 400만 돌파 시점부터 거론되던 1000만 고지 달성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2월 5일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도 언론시사회 반응 등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이미 TV 및 극장 예고편에서 그리고 본편의 기술 시사회나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 시에 그 스펙터클함과 드라마틱함에 대해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며 추측․가늠되던, 그리고 <실미도>와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쉬리> 등에 견주어서 감잡히기도 하는, 1000만 동원의 기대치가 무망하지 않을 전망이다. 이렇게 순제작비 1백10억(총제 137억)원이 소요된 <실미도>와 순제 1백47억(총제 170억)원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박을 터뜨린(릴) 후에도, <역도산> <바람의 파이터> <천군> <창공> 등 순제 80억 원 이상의 대작들이 대거 제작 중이거나 기획 중이다. 기 개봉한 <말죽거리 잔혹사> 등을 포함, 관객 3백만 명 이상의 흥행 대작들이 5~10편 정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1월 말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2003년도 한국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지역의 한국영화 관객/좌석 점유율은 49.7%인 것으로 집계됐다. 보고서는 “2000-2002년 한국영화의 전국(서울 포함) 점유율이 서울지역의 점유율보다 약 3.47% 높았던 점을 적용하면 2003년 전국 기준 한국영화 점유율은 약 53.2%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수입이 자유화된 자본주의체제 국가에서 자국영화 점유율이 할리우드영화를 제치고 50%를 넘어선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영화 부문의 수입 자유화에 대해 그 제한(국제법상 ‘문화적 예외’ 조항의 적용)을 가하고 있는 영화중진국 한국은, 아직 스크린쿼터제를 고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한편, 이에 비해 많은 나라들은 10%의 자국 시장점유율로도 기뻐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한국 다음으로 자국영화를 일정 수호하고 있는 영화선진국인 프랑스와 일본의 경우에도 자국 영화점유율은 40%와 30% 선에서 5% 안팎 밑돌고 있다. 그들 나라엔 스크린쿼터가 없다.
지난해 3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이른바 대박영화는 <살인의 추억>(550만)을 비롯해 <동갑내기 과외하기>(490만) <장화, 홍련> <스캔들> <황산벌> <올드 보이> 등 6편에 달한다. 하지만 영화 투자/배급사인 아이엠픽쳐스 등의 작년 말 조사자료 취합에 따르면 지난해 흑자를 기록한 작품은 전체 67편 중 20편(약30%)으로 세 편 중 한 편 이하가 적자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순제작비 45억 원 이상 투입된 영화 중 <스캔들> <황산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극장 흥행에서 참패해 ‘블록버스터의 악몽’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튜브> <청풍명월> <내츄럴 시티> <천년호> 등 4편의 손실액만 2백억 원,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까지 합하면 300억 가까이 이를 것이다.
개봉된 한국영화 편수(68)도 전년도의 그것(76)보다 11.5% 줄었다. 2002년의 블록버스터 작품들이 잇달아 실패한 데 따른 투자 자금의 이탈, 곧 준비가 덜 된 수준 미달의 작품이 도중하차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지지난해인 2002년 총 3백8억 원 손실과 수익률 -18%를 기록했던 한국영화는 지난해 아주 근소한 적자로 돌아설 것이 예상돼, 수익 측면에서는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긴 했다.
한국영화는 현재 2003년의 50% 점유율 돌파, 나아가 2004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1000만 관객 돌파의 기세와 화려함 속에 사실상의 외화내빈을 겪고 있다. 그리고 많은 문제와 음영, 특히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낳고 있다. 뜻있는 영화인이라면 이러한 문제와 과제를 인식하고 한국영화의 개혁에 나서야 한다. 다른 분야의 뜻있는 문화인, 나아가 영화팬들은 비판과 성원을 보내줄 터이다.
첫째, 영화 산업에 있어서도 외연의 확장뿐 아니라 ‘내연의 확장, 질적인 풍요’가 중요하다. 방금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점유율보다 중요한 것은 수익률이다.
둘째, 영화 예술/미학의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영화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문화와 영화의 다양성은 반드시 살려져야 한다. 그를 위해 대작이 아닌 비주류․저예산 마이너리티 영화, 곧 ‘작은영화’들의 생존을 위한 다원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긴급히 모색돼야 한다.
셋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부정성과 역기능에 대해 사유하고 그러한 측면을 견제, 지양해 나가야 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한국적인가. 유사․아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모순과 한계를 지닌 ‘잡종교배’의 결과물은 아닌가?
2003-4 한국영화의 뉴 트렌드
2003-4년 한국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임을 넘어서 하나의 트렌드로까지 나타난 것은 인터넷소설의 영화화와 10대 관객층의 부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0대는 인터넷소설과 그 각색 영화의 주요․단골 고객이다. 물론 <여고괴담(시리즈)> <장화, 홍련> 등 인터넷소설과 무관한 영화들이 10대 관객을 ‘대거’ 흡수하기도 한다. 따라서 10대 관객층의 형성은 인터넷소설과 연계 없이 가능한 측면도 있다.
2001년 대학생이 주인공인 인터넷소설 ‘엽기적인 그녀’의 영화화와 대성공(약 550만 동원)으로 러시를 이루어온 이래, 2003년엔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그녀를 모르면 간첩> <내 사랑 싸가지>와 TV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등장으로 위 트렌드는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귀여니 원작의 <그 놈은 멋있었다>와 <늑대의 유혹> 그리고 <옥탑방 고양이>, 그리고 다른 원작자 인터넷소설의 각색 영화들이 현재 제작 중이거나 제작에 착수되고 있다.
이미 1998년 <여고괴담>의 200만 이상 빅 히트로 중고생 관객층 형성의 가능성을 확인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10대는 가령 동대문, 명동 등지의 밀리오레 같은 중저가 쇼핑센터나 지역의 롯데리아 따위를 이용하거나 배회하는 소비층 정도로 인식되어져 왔었다. 즉, 국내외 전체영화의 관객 중 10% 미만의 구성비를 차지하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관객 평균 연령의 하향화를 동반하고 일부 역기능(‘유치화’ ‘감각화’ ‘개인화’ 등)을 수반할 정도로 기세를 과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10대들은, 진폭이 심하지만, 18세 미만이 관람 가능한 영화 전체 중 30% 안팎의 구성비를 넘나들고 특히 인터넷소설 원작의 영화들에서는 작품마다 30~60% 사이의 구성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 및 인터넷소설의 메가 트렌드 및 뉴 트렌드가 낳은 21C 초 신문명적이고 신한국적인 현상, 아울러 신청춘영화 현상의 하나라 하겠다. 이런 환경은 예술영화들의 투자․배급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또 하나의 트렌드는 가족 문제의 부각이다. 그 이전에도 가족 멜로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족보다는 멜로성에 치중했었는데 <집으로……>(2002)가 500만 대박을 터뜨린 후로 가족의 유대나 복원, 반대로 가족의 해체가 작품 컨셉과 내러티브의 중심이 되는 영화들이 속출하였다. 작년에는 <바람난 가족> <4인용 식탁> <올드 보이> 등이 큰 화제를 모았고 올해에도 이미 기획된 ‘가족영화’의 진행, 개봉이나 새로운 기획이 줄을 서고 있다.
또 하나의 트렌드로 <친구>(2000) 이래 근자의 <황산벌>과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 이르는 지역(방)성인 로컬리티(locality)의 현상과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대신 이 논평의 본론인, ‘작은영화’들이 처한 중대한 위기 상황과 그 해결의 기본 방향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예술영화, 작은영화
“한국에 예술영화는 죽었다, 작은영화는 설 땅이 없다”라고들 한다. 한 7~5년 전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좋지가 않다. 부연하면 한국에서는 예술영화나 소규모영화 시장이 틈새시장으로서의 지위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다. 가령, 작년 11월 하순 코아아트홀에서 단독 개봉한 김학순 감독의 <비디오를 보는 남자>가 1주일 만에 막을 내렸고,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경로를 통해 명성이 자자했던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는 관객 6천 명에 그쳤다.
요 4~5년 간 한국 예술영화 시장에 몰아치는 세찬 한파와 시장의 상대적․절대적 빈곤에 대한 그 책임은 관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저 유명한 탐미주의 걸작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스탠리 큐브릭의 불멸의 SF 고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수입․개봉이 안 되고 VHS와 DVD로만 출시된 터……. 내로라하는 국내 감독들의 예술영화․작가영화 신작도 그 투자와 개봉이 점차 더 어려워지는 ‘구조’로 가고 있지 않나 크게 우려되는 시점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죽었다’라는 지적이나 담론도 영화가에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영화판의 어떤 유통 고리와 암묵적인 연결이 있거나, 아니면 그처럼 ‘영리하지’ 못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영화산업의 선전꾼이 돼가고 있는 비평가. 이와 더불어 상업적인 영화저널리즘의 단순 논객이나 나팔수로서 ‘복무’하는, 그러한 일군의 비평가와 평단. 이들을 겨냥한 우정어린 충고, 아니면 악의 섞인 비판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 땅에 ‘작은영화’들은 죽어가고 있는가? 더불어 참비평도 죽어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릴 것인가? 그 절박성과 대안(성)은 어떻게 분석, 평가되고 도출되어야 하는가?
왜 ‘작은영화’인가?
우리가 ‘작은영화’라고 할 때, 이것은 거의 마이너리티 영화를 겨냥한 것이다. 그럼에도 마이너리티 영화란 용어를 쓰지 않는 이유는, 가능한 모국어를 애용하는 것이 좋다는 취지를 넘어서, 소수 감상자집단이나 정치적․성적․민족적 소수자를 위한 일반적인 의미의 마이너리티 영화와는 그 어의와 용법․용례를 다소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용어, ‘작은영화’에 띄어쓰기를 안 하고 인용부호를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우선 이 말이 단순히 대작에 대비되는 소품만을 특정하지 않고, 또 영화 교과서․사전에 나오는 유사 용어와 뜻이 같지 않을 뿐더러, 한국 영화계에서 널리 합의된 공용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작은영화’로써 공용어이자 상식어인 소형영화․단편영화․실험영화는 물론 매니아․씨네필용 영화 등의 부류를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영화’는 그것들과 관계는 있다. 특히 소품하고 대응면적이 크다. 그러니까 ‘우리’의 작은영화는 8미리․16미리 소형영화(small film)와 별개의 개념인 소품, 그러니까 소규모로 제작된 35미리 필름 및 각종 디지틀 장편상업영화하고 상관성이 아주 크다.
‘작은영화’ 하면, 어의의 기본값으로나 작품의 외연상으로 그 소품성(小品性)이 ‘기본’이 된다. 그래서 작고 단순한 규모의 제작방식(작품의 시․공간 설정과 연동되는 제작기간․로케이션 및 세트와 스펙터클의 안배 등 면에서) 그리고 역시 작은 규모의 제작비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영화 천재가 개입한다 한들 저예산으로는 스펙터클한 대작은 만들 수 없어 필연 소품 생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품 영화는 기획상의 오류나 제작현장의 변수, 또는 그런 문제가 아닌 해외 로케나 오지 촬영, 거액 개런티 등 문제로 중/고예산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가령 20억이 넘었던 <집으로……>와 <버스, 정류장> 그리고 작년의 <오구>는 소품일지언정 ‘작은영화’일 수 없다. 그러할진대 ‘작은영화’는 (현시기 약 10억 정도나 그 이하의) 저예산성을 담보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현재 한국영화의 평균 총제작비는 37억3천만 원 정도이고 대충 그 절반에서 3분의 1쯤인 18․12억 이하를 저예산으로 잡고 있다. 2003년의 개봉작 <영매> <선택> <비디오를 보는 남자> <플라스틱 트리>와 2004년 개봉대기작 <욕망> <송환> <미소> <나는 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쇼우 미> <그집 앞> 등 ‘작은영화’들은 전부 10억 미만의 저예산물이다.
그러나 소형 에로영화 등은 아예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저 허다한 대작(대형영화)에 對하는 허다한 소품이, 바꿔 말해 영화의 규모 자체가 현재 우리의 실천적 관심대상이 될 수는 없다. ‘작은영화’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성․예술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작다’고 하는 것은, 작품의 규모뿐 아니라, 애당초 관객의 규모와 질의 제한을 뜻하는(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 그 자체는 아니로되, 다수 대중의 영화 취향 및 관습에 대한 거절을 전제로 삼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허우 샤오시엔은 “예술/작가영화에서 대중에 대한 거절은 필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제한적 소수대중을 타깃으로 삼는 비주류성은 필경 주류 영화자본의 투자와 배급에 대한 거절을 낳는다. 그렇다면, ‘작은영화’는 일단 예술성 짙은 소품 장편상업영화나 마이너리티적인 장편상업영화를 정의하는 것으로 잠정 매듭지을 수 있다.
우리가 영화적이고 문화정치적인, 또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갖고 지칭하는 ‘작은영화’란 저예산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작은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마이너리티영화와는 좀 다른, 대중영화/상업영화의 틀(함축적으로는 장편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확장된 의미의 마이너리티영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아가 대작영화와 대박영화, 또 블록버스터영화(대박성 대작영화)에 저항하고 대항하는 활성적 의미를 담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극장 개봉을 못하고 대기 중인(또는 잠자는) 예술영화라든가 구청, 시네마테크전용관에서 개봉한(할) 독립영화의 가치와 비중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은영화’를 지지한다 함은 오히려 그들의 강한 비판성이나 비타협성을, 때론 그 거침없는 반사회성조차도 중시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확장된 의미의 마이너리티영화, 또는 ‘작은영화’로서 우리의 관심을 모두는 것은 예술영화․작가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큰 부족함 없는 대중영화인 경우이다. 대중영화로서 소재성과 흥미성 그리고 전달방식․화법 등 측면에서 ‘기본 결격사유’가 없으면서 표면적으로는 다수가 아닌 소수 대중의 관심사를 취급하는 것. 그리고 예술성 우위의 원칙과 스타일, 곧 이미지언어와 절제미의 추구 등 면에서 일반 대중영화와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 것. 또한, 스타 시스템이나 속물적 유희성․자극성에 등을 돌림으로써 대중적/흥행적 한계를 ‘자초하는’ 것이다. 하여,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보완되기보다 대립할 여지가 훨씬 많다.
‘작은영화’는 그 태생과 기반이 항시 비주류적인 지형(점) 위에 있다. 작품의 내용과 가치 면에서 반드시 좌파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류 사회와 주류 영화자본의 홀대와 억압의 문화지형 속에 있기 때문에 기성과 기존에 반발하고 저항한다. 고로 우파적일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영화는 예산(자본)과 함께 배급의 문제가 핵심인, 곧 전자가 선행 핵심이요 후자가 사후완결적 후행 핵심인 그런 문화상품이다. 그러니까 다른 예술품과 달리 매체(미디어)적인 특성을 가질 뿐 아니라 산업적이고, 심지어 국제무역적 특성을 지닌 독특한 문화․예술 상품이다. 스크린쿼터(screen quota) 공방에 휩싸인 한국영화는 영화의 국제적 무역분쟁, 아니 문화분쟁의 최전선에 놓여있다.
미국의 압력이나, 문화 마인드가 부족한 재경부․외통부 경제관료와 청와대 정책실의 절충안대로 쿼터를 일부 줄이면 어떻게 될까? 만일 10%(현행 최대 146일의 1/4인 36.5일)만 줄여도, 한국영화 배급․상영의 안전판이자 지렛대는 깨져 나가는 것이기에 투자 규모는 약 30% 내외로 줄 것이다. 그리고 예술성 짙은 중소영화 부문부터 당장 그 칼을 맞을 것이다. 당분간은 코미디나 조폭 영화처럼 장르상의 ‘안전장치’를 지닌 고예산 흥행대작에만 투자와 배급이 이루어질 것이요 질 높고 대안성 있는 예술영화, 소형영화는 그러한 가능성이 거의 ‘제로’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흥행산업인 영화산업의 생산 경제학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제 이 땅의 ‘작은영화’는 들뢰즈가 얘기한 지역적 마이너리티영화로, 아울러 제임슨이 얘기한 제3세계적 마이너리티영화로 그 영토와 정체성을 확립(장)해 나가야 할 계제에 있는 것이다.
‘작은영화’의 현황과 미래 : 대안은 없는가
마케팅․배급․상영의 대안을 마련하자
‘와라나고’, 그러니까 2001년 10월 개봉 후 각기 1~2주 안짝으로 종영 당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그리고 이들의 강제종영(?) 직후 막차를 타고 개봉한 <꽃섬>까지 모두 다섯 편의 작가영화를 우리는 기억한다. 물론 그 전엔 <눈물> <수취인 불명> <소름> 등의 ‘작은’ 영화들이 고배를 마셨다. <꽃섬> 개봉 중 일부 씨네필들의 분노와 요구․성원에 의해 재개봉 운동인 저 유명한 ‘와라나고 영화제’가 열렸고, 그 해 11월에서 2002년 1월 사이 <와이키키……>의 제작사 명필름이 극장 또는 스크린을 통째로 대관․임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내외 그 유례가 없는, 일군의 선진적 관객(수용자 집단)이 추동하여 야만적인 시장의 논리에 저항하게 된 이 두 사건은 한국 영화사와 대중문화사에 일대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전자의 경우, 2000년의 ‘<박하사탕> 두 번 보기 운동’ 그리고 2002년의 <남자 태어나다>와 2003년의 <지구를 지켜라> <선택> ‘살리기 운동’ 등에 맥이 닿는다. ‘와라나고’의 폭발력과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해외에도 제작사가 일반 상업 유통망을 통해 ‘사후적으로’ 일정 배급을 떠안은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배급 시스템의 불합리나 극장들의 횡포에 대해 배급사가 아닌 제작사가, 작품에 대한 나름의 입장과 애정을 갖고 열혈 관객의 분노와 호응에 힘입어, 배급의 책임을 떠맡았다는 것에 대단히 높은 의의를 둘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관․임대는 제작사 측에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바람직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참고로 메이저인 명필름과 CJ엔터테인먼트가 각기 제작, 배급하여 전국 약 50개관에서 테입을 끊은(wide release된) 중저예산의 <와이키키……>는 외형(양)과 달리 내용, 가치관, 정체성은 충분히 ‘작은영화’답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저물어 가는 한해의 ‘폐장’을 전후하여 거의 동시적으로 터져 나온 저 두 사건은, 이 땅의 영화영토에 크나큰 문제를 던졌고 2004년 여전히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첫째, 바람직한 수용자/관객 문화의 형성, 나아가 그런 운동의 조성이나 조직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둘째, 제작사측에서는 마케팅․배급기획의 사전 부족 그리고 주말 복수 개봉 및 단명(短命)의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사전적으로’ 배급경로를 안고 출발하는 외국의 아트무비 제작 관행에 대한 연구는 진척되고 있는가)? 저널리즘과 전문평단의 원칙 있고 일관성 있는 평가․평론이 이루어져 오지 못한 저간의 모습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령, 잘되면 찬사 일변도로 대세가 잡히는 그런 상황주의적인 논평이 축적돼 관객불신의 피드백, 부메랑이 된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와 과제를 던지고 남긴 것이다.
확고부동한 리얼리스트 임순례 감독은 필자와의 작년 봄 대담에서 이렇게 강조한 적이 있다.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많은데도 그 무슨 상업적인 이유로 장을 마련해 주지 못하거나 빼앗아버리는 건 용납될 수 없다. <친구> 이후로 대작 붐이 일반화되다시피 했는데 그 사이사이 개봉된 마이너리티 영화는 전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관객들의 주관화, 편중화, 획일화가 이루어진 거다. 이런 가운데서도 예술영화․마이너리티영화에 대한 관객의 취향과 관련, 그 잠재적 다양성을 지혜롭게 접근 개발해 작품을 기획하고 또 전문적 배급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37억을 넘어섰고 갈수록 그 대작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관객들의 평균 연령도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하향화되었다. 이런 환경은 ‘작은영화’들의 투자․배급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물론 큰 영화 하나 잘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작은 영화 하나 만들겠다는 제작자와 감독들이 소수라도 존재하긴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2003년 <질투는 나의 힘> <선택> <비디오를 보는 남자>와 옴니버스 <여섯 개의 시선> <이공(異共)> 등 ‘작은영화’의 관객동원 부진이나 고전은 종래의 마케팅․배급 방식으로써는 어찌 보면 당연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대안적인 마케팅․배급 방식과 상영의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는 결론이다. 공히 미개봉작으로서 배급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최초의 HD디지틀영화 <욕망>(명필름)은 온․오프 라인 동시상영이라는 대안으로 칼을 뺐고 <미소>(미소필름)와 <쇼우 미>(시월필름)도 별도의 대안 찾기에 나선 태세라 귀추가 주목된다. (<영매>는 다큐멘터리로서 서울 단관 개봉하여 1만2천3백이라는 ‘초대박’의 성과를 건져 올렸다.)
‘작은영화’ 기대주들의 여물음과 개화만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는 관객의 태도, 그 성의일 것이다. 영화예술과 관객은 같이 성장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이 한 나라의 비평계다. 올곧고 실천적인 비평이 부재한 영화가는 온갖 교묘한 유착과 허장성세, 관객기만이 횡행하면서 예술영화의 불모지가 될 테니까. 원칙과 역사의식 없는, 사실상의 영화산업의 선전꾼들이 지어낼 허식․요설․선정주의 등과 함께 영화가의 화류성(花柳性) 및 대국민 사기성은 늘어가고 푸코가 말한 대로 영화는 지배 계급의 효율적인 통제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비단 평단만이 아닌 여러 분야의 영화 전문가들이 원칙을 갖고 좋은 관객들과 함께 문화운동 차원에서 이러저러한 접근과 실천을 한다면, ‘작은영화’는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화사하게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예술영화전용관, 특히 독립영화전용관을 마련하는 것이나, 스크린 쿼터 내에 가령 국내외 영화 불문하고 마이너리티영화 쿼터를 확보하는 것(全스크린 총량의 약 5~10%쯤), 멀티플렉스 내 최소 1개관의 예술영화전용관을 의무화시키는 안도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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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진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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