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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대학생의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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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08회 작성일 05-03-0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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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의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1, 2''(컬쳐라인, 2003)

마지막 기억의 지평을 더듬어가는 오롯한 또 하나의 길

이경숙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기록(記錄)은 기억(記憶)을 지배한다.’라는 명제의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아마, ‘메모가 성공을 좌우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던 책에서였거나 아니면 ‘우리 카메라를 사십쇼.’ 정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고에서였던 것 같다. 잠시 멈춰 서서 한숨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는 우리의 일상에서 어쩌면 기록의 정확함과 가시성의 명확함은 스치듯 흐릿한 기억과 아련한 추억보다 더 가치 있는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어쩌면, 사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하게 기록하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진실을 담아두는 아날로그의 추억을 지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Ⅰ․Ⅱ」(이성희 지음, 컬쳐라인, 2003)는 매우 아날로그적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아주 조금씩은 시간을 달리 짐작해 버릴 수 있고, 조용한 오후에는 강물이 반짝이는 소리처럼 미약하나마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고 귀여운 바늘을 가진, 우리의 낡은 아날로그 시계처럼-이 책은 글을 쓰는 사람도 그리고 글을 읽는 사람도 아름답게 촌스럽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다.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이 책은 그림과 시에 관한 책이다. 작가 이성희는 자신이 국제신문에 1년 동안 연재했던 조각의 글들을, ‘영혼과 꿈을 그린 40인의 화가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작업에서 그는 국내외의 시와 소설 혹은 신화와 에피소드를 그 연결의 귀중한 실과 바늘로 사용함으로서 미술관에서 시인 릴케와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대표적 화가인 고흐, 모딜리아니, 고갱, 들라크루아, 클림트, 모네, 루소, 벨라스케스, 마티스, 밀레, 샤갈에서부터 동양권의 강희안, 이중섭, 김환기, 김홍도, 박수근, 김기창까지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다루면서 작가는 릴케, 김춘수, 박인환, 노자, 백석, 괴테 등의 문호들을 그들과 짝짓는다. 문학과 예술이 선과 향으로, 색채와 빛깔로 나름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이 책은 그림과 시가 선사하는 이미지의 향연들을 한데 버무리는데 성공한다.
특히 이 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선택한 그림과 시가 선정에서부터 하나의 이미지로 합일되는 순간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설득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해석에서 일종의 ‘색채론’을 그 방법항으로 선택했다. 고흐의 대표작들이 보여주는 ‘노란색’의 심상을 바탕으로 해서 작가는 고흐의 상처받은 영혼과 인사한다. 덧나기 쉬운 상처이며, 확인하기 두려운 구원으로서의 노랑의 이미지는 아르헨티나의 문호 보르헤스의 시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주인공 베르고트의 죽음, 그리고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처형대와 연결됨으로서 그 사이사이를 넓고 깊은 호흡으로 날아다니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 흩어져 있던 문학과 예술 속의 노랑의 이미지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의해 삶의 끝자락에서 빛나는 노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림과 화가에 대한 단편적 지식이나 명작이라 평가되는 시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향기로운 이미지를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덮는 순간 그 속에서 전개되었던 하나하나의 작은 지식들이 파편처럼 지워져 갈지는 몰라도 그 향과 빛깔만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으로 베어버리고 마는, 기록보다는 기억에 가까운 아날로그 앨범이다.
또한 작가는 기존의 미술사 책이나 작품 해설서에서 선택하는 서양 미술을 주류로 한 전개와는 다르게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의 미학에 대한 관심까지도 끌어안았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 게다가 그것이 열정과 정열이라는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는 동․서양의 그림과 시에서라면 그것은 오히려 동일선상에서 다루어질 때 좀더 강렬한 이미지의 아날로그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과의 만남은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기억의 지평을 더듬어가는 작고 오롯한 또 하나의 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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