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3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전정은
페이지 정보

본문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역자 황보석, 열린책들, 2003)
'다리 위의 룰루'(역자 김경식, 열린책들, 2003)
폴 오스터, ‘허기’와 ‘상실’의 로드무비
전정은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96년 여름,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집에 잠깐 들러 들 수 있는 만큼의 책을 어깨에 짊어지고 ‘안녕히 계시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뒤,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가서 ‘저기, 나 말이야……. 이제 떠나야겠어…….’라고 말하고는 어딘가로 떠났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ꡔ달의 궁전ꡕ(1989)의 주인공처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고 보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고, 뇌출혈로 쓰러졌던 엄마가 표정도 잃고 건강도 잃고, 결국은 38kg도 채 안 되는 몸무게로 퇴원을 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방학 보충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으레 안방으로 가서 잠든 엄마가 아직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의 코끝에 손을 대어보기 일쑤였던 그 즈음, 어느 날 우연히 폴 오스터를 만났다. 웨인 왕 감독이 연출한 영화 ‘스모크’가 폴 오스터의 ꡔ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ꡕ에 들어있는 이야기였는지는 그 당시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도통 움직일 줄 모르는 카메라와 인물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허기와 상실의 목록들을 빼곡하게 채워나가며 지독한 성장통을 앓고 있던 내게, 폴 오스터의 ‘담배연기(smoke)’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이자 작은 숨구멍이었다. 폴 오스터는 ‘점심 한끼’ 값으로 오기에게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얻었지만, 내가 그 이야기에서 얻은 것은 점심 한끼 값어치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청년이 제안한 도박에 가진 돈 전부와 자동차까지 ‘올인’했지만 모두 잃고 빚까지 지게 된 후, 그 빚을 갚기 위해 강제노동을 선택하거나(ꡔ우연의 음악ꡕ), 대학 졸업 후 자발적으로 파산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허기를 견디며 책을 읽다가 죽기 직전까지 가는(ꡔ달의 궁전ꡕ) 등 폴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운명처럼 걸려든 우연한 상황에 자신의 전부를 걸며 자기 안의 극단을 시험하곤 한다. 한편, 이러한 설정은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에까지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의 자서전과도 같은 ꡔ빵굽는 타자기(Hand to Mouth)ꡕ, ꡔ굶기의 예술(The Art of Hunger)ꡕ 등의 에세이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설정은 이번에 새로 나온 그의 작품 ꡔ환상의 책(The book of illusion)ꡕ과 ꡔ다리 위의 룰루(Lulu on the Bridge)ꡕ에서도 예외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전 작품과 다르게 이번 신작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두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ꡔ환상의 책ꡕ이 ‘헥터 만’이라는 무성영화배우의 파란만장한 생을 알게 됨에 따라 주인공이 ‘상실’에 대한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ꡔ다리 위의 룰루ꡕ는 폴 오스터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하비 케이틀이 주연한 영화의 시나리오이다. 따라서 2003년 12월말 동시에 출판된 폴 오스터의 두 작품은 독자인 우리에게 있어서 폴 오스터라는 작가가 품고 있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과 고민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ꡔ다리 위의 룰루ꡕ의 경우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그 뒤에 첨부된 촬영 스틸사진,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작가 폴 오스터에 대한 성의 있는 인터뷰내용은 오스터가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소설가와 연출자의 경계에서 그가 어떤 선택과 고민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 독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편,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ꡔ환상의 책ꡕ은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라는 샤토브리앙의 말을 인용하며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 사실 샤토브리앙의 이 잠언은 이제까지 오스터의 소설이 관통해 온 주제를 집약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소설의 시작점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짚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역시 오스터의 이전 소설에서와 같이 추리 소설적 요소와 긴박한 사건 진행 그리고 재치 있고 날카로운 문체로 단숨에 읽는 이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나, 이 소설이 선사하는 더 큰 즐거움은 존재하지도 않는 무성영화를 너무나 그럴듯하고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에 있다. 그리하여 작가의 영화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소설 속 영화들은 메인 플롯 못지않게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액자구조소설의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다. 누가 뭐라던 폴 오스터 역시 존 어빙 못지않은 훌륭한 이야기꾼인 것이다.
사실 ‘위안을 위한 독서’는 자칫 허무해질 수 있다. 그러나 ‘독서를 통한 위안’은 종종 살아내는 일의 그 엄연함을 깨닫게 만들며 우리 마음의 강력한 예방주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ꡔ달의 궁전ꡕ의 주인공 마르코는 그를 짓누르는 허기를 견디며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찾는 것과 같은 잊혀진 가족 찾기, 뿌리 찾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았고, ꡔ다리 위의 룰루ꡕ의 주인공 이지는 죽음과 함께 찾아온 진실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죽음을 완성시킨다. ꡔ환상의 책ꡕ의 데이비드 또한 헥터 만이라는 잊혀진 무성영화배우의 인생을 쫓아가면서 그가 가진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남겨진 자로서의 남은 인생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들 모두 보상받을 수도 보장되지도 않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으로 또는 지치지 않는 허기로 홀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는 외줄 위에 위태위태 서있는 ‘공중 곡예사’처럼 갈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가보는 여행을 감행한다. 이 험난한 로드무비는 음험한 우리 내면의 지도를 그려 보이며 우리 각자의 역사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내게 폴 오스터의 작품으로는 ꡔ거대한 거물(Leviathan)ꡕ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폴 오스터를 다 읽고 나면 이제 내게 한동안은 살아가는 일만 남을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폴 오스터만큼 매력적인 글쟁이를 만날 기대로 벌써부터 온몸이 근질거린다.
- 이전글13호 대학생의 독서일기/이해운 05.03.07
- 다음글13호 대학생의 독서일기/ 05.03.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