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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초점/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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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여, 문학의 대지에 발을 굳건히 디뎌랴
―최근 소설비평에 대한 비판적 성찰―
고명철
(문학평론가)
1. 문학비평이 외면받는 이유
문학비평이 외면을 받고 있다? 아니, 뜬금없이 이게 웬말인가? 매 분기마다 혹은 매 해마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신인상 제도를 통해 전문 독자로서의 능력을 갈고 닦은 문학비평가가 배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문학비평가가 꾸준히 제도적으로 배출되고 있어 우리의 평단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점점 풍요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해석이 문학비평의 형식으로 평단에 제출되고 있다. 하지만 속속 제출되고 있는 그 숱한 비평담론은, 문학비평가의 비평 행위의 자족성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문학상업주의를 더욱 부채질하는 주례사 비평의 추문으로, 특정한 비평 에콜의 문학적 입장을 공고히 다지는 것 등으로 전락한 가운데 창작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에게까지 외면을 받고 있다. 문학비평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처럼 작금 문학비평이 직면한 위기와 문제는 여전히 문학의 대지를 음산하게 배회하고 있다. 문학비평의 이 같은 문제를 낳게 한 원인에 대한 성찰은 그 원인을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 중 우선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문학비평가 이명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그런데 90년대를 관통하면서, 우리의 비평은 강단비평에 포섭되었고, 비평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저널리즘 비평은 거의 실종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특히 비평의 강단으로의 실종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켰다. 강단비평의 노골화된 생리라는 것이 미끈한 이론화와 가치중립적인 객관화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형성 중에 있는 비평가의 개성을 말살시킨다. 비평이 보수적인 아카데미 제도 속에 학문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이론의 외양을 취하고 있는 담론은 번성하지만, 그 번성하고 있는 담론의 현실대응력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 비평이 활성화됨으로써, 강단비평의 제도화와 맞서는 긴장관계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출판을 포함한 저널리즘 지형에서의 비평적 실천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________________
이명원, 「비평을 읽지 않는 몇 가지 이유」, ꡔ리토피아ꡕ, 2003년 가을호, 35쪽.
비평담론이 ‘현실대응력’을 상실한 채 “보수적인 아카데미 제도 속에 학문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비평 스스로 비평 본래의 역할을 방기하는 일이다. 강단비평의 활황 속에서 저널리즘 비평의 위축은 비평의 소외를 낳는다. 따라서 저널리즘 비평의 활성화가 요구된다. 그런데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이명원이 언급하는 저널리즘 비평이란 신문, 방송 등의 저널에 의한 협소한 비평행위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널의 다양한 비평행위가 갖는 폐해, 즉 문학상업주의의 전면화를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 표피적 보도성 기사로 인해 독자의 문학에 대한 심미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점, 문학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는 점 등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임에 분명하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이명원의 저널리즘 비평은 이 같은 저널의 비평행위와 무관하다. 그가 의미를 두고 있는 저널리즘 비평은 강단의 끈끈이에 들러붙지 않는,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이론의 미궁 속에서 자족하는 게 아닌, 현실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작품의 비의성(秘意性)을 해독해내고 그것의 가치를 평가해내는 ‘살아 숨쉬는 비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살아 숨쉬는 비평’이 언제부터인지 실종되고 있다. 이러저러한 새로운 이론들을 비평담론 속에 매끄럽게 배치시키고, 이론들의 틈새 속에서 작품의 의미가 새롭게 해독되고 있지만, 그러한 비평은 비평가의 실존이 휘발된 채 박래화된 비평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달리 말해 새로운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 작품을 횡단하는 이론의 과잉된 몸짓은 있되, 작품의 섬세한 결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대상의 가치를 판단해내는 비평가의 존재는 남루하다. 이 같은 비판적 성찰은 비단 이명원과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나는 90년대에 씌어진 개인주의적 작품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무력감을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론들은 대체로 소재 또는 주제의 새로움에 대한 의미부여나 세련된 수사적 요소에 대한 감탄으로 흐르는 경향을 드러냈다. 개별적 차이들은 그 존재만을 이유로 긍정되었으며, 비평들은 개별작품을 위해 새로운 이론들을 그때그때 끌어다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낯선 이론들이 많이 도입되었고, 때로는 이론을 위해 작품이 상처를 입는 경우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하나의 준거틀을 가지고 모든 작품을 비평할 수 있는 거대담론의 소멸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 경향을 요약하자면, 수사적․의미론적 차원의 비평이 성행한 대신 텍스트적 차원의 비평은 오히려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비평의 기능이 강단에서의 문학연구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텍스트적 차원에 대한 무관심은 비평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________________
황광수, 「1990년대와 비평의식」, ꡔ길 찾기, 길 만들기ꡕ, 작가, 2003, 161쪽.
문학비평가 황광수 역시 ‘이론의 범람(혹은 과잉)’을 경계하고 있다. “수사적․의미론적 차원의 비평이 성행한 대신 텍스트적 차원의 비평은 오히려 드물어졌다는” 그의 언급은 경청할 만하다. 작품에 대한 사심 없는 비평은 작품의 철학적․윤리적․미학적 가치를 평가해냄으로써 비평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보인다. 이것은 이론‘들’에 강박되지 않고, 작품 고유의 생명성에 육박해 들어가는, 하여 비평가의 전존재를 건 삶의 투쟁이라는 비평가의 엄숙한 결단이 보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바, 이것은 ‘비평의 주체’가 정립되어 가는 도정이다. 이론‘들’에 의해 비평의 주체가 무화되는 게 아니라, 이론‘들’과 긴장 관계를 맺으면서 비평의 주체는 문학의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딘다. 하여 디딘 두 발을 옮길 때 비평은 ‘살아 숨쉬는’ 존재의 자격을 비로소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문학비평은 문학의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있을까? 딛고 있다면,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글에서 비교적 최근의 소설비평을 대상으로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을 성찰해 보기로 한다.
2. 소설의 신생(新生), 그 과도한 비평적 욕망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은 그 전 시대인 1980년대의 소설과 명확히 구별되면서 독자적인 소설 미학을 구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를 둘러싼 크고 작은 비평적 해석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90년대 소설 미학의 성과를 옹호하는 비평가의 대부분은, 90년대 소설이 80년대 소설의 미학을 부정․갱신함으로써, 한국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들에게 80년대 소설은 은연중 역사적 퇴물로 간주될 뿐, 90년대 소설의 신생을 위해 90년대 이후의 문학 대지에서 가능한 추방되어야 할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80년대/90년대의 이분법 속에서 90년대 소설의 인정투쟁을 위해 80년대 소설을 역사적 망각의 늪 속으로 밀어뜨린다. 80년대 소설의 흔적을 90년대 소설에서 말끔히 지워내기를 욕망한다. 다시 말해 80년대 소설은 이렇게 90년대와 급격히 단절된 비평의 게토(ghetto)로 추방당하는 운명을 감수하고 있다. 90년대 소설의 신생을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평의 방략에 의해 80년대 소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으며, 90년대 소설의 온갖 새로움은 이른바 ‘욕망의 현상학’이란 주제 아래 비평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런데 내가 저간의 90년대 소설에 관한 비평을 지켜보면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소설의 새로운 미학에 주목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 때문이 아니다.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서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작가의 소명이며, 그렇게 모색된 서사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비평가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문제는 비평가가 지난 연대의 서사적 가치를 폄하 내지 부정하는 비평의 논리로써 서사의 새로운 징후를 보이고 있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기대 이상의 비평적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________________
나는 문학비평가 서영인이 문학비평가 신수정의 비평집 ꡔ푸줏간에 걸린 고기ꡕ가 내포한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 역시 이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80년대와의 엄격한 구분 속에서 확보하고자 했던 90년대 문학인들의 ‘인정욕망’을 신수정 역시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들이 90년대를 전시대와 확연히 차별되는 시대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또한 그 과정에서 지난 시기의 가능성과 문제성이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그래서 90년대 문학이 그것을 전혀 참고할 수 없는 곤경이 빚어졌다는 점이다. 화려하게 부상했던 여성․일상․문화의 담론들이 강력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촘촘한 메커니즘 속에 스스로 포박되어가고 있다는 징후가 속속 발견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새로운 문학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우리 시대 문화에 한정된 자유만을 허용했던 이분법적 사유의 틀을 근원에서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다.”(서영인, 「비평의 안과 밖」, ꡔ동서문학ꡕ, 2004년 봄호, 261-262쪽)
여기에는 새로운 서사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편견이 가로놓여 있다. 새로운 서사, 즉 서사의 갱신은 과거의 서사의 흔적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새것 콤플렉스’의 병리적 증후가 잠복되어 있다.
이러한 병리적 증후를 보이고 있는 비평이 최근에 제출된 적이 있다. 문학비평가 김형중의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ꡔ파라21ꡕ, 2004년 봄호)란 평문이 그것이다. 이 비평은 근래 발표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김형중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비판 대상이 되는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두루뭉술하지 않다. 그는 리얼리즘의 갱신을 욕망한다. 그래서 그는 “시간적으로는 과거, 공간적으로는 이국이나 주변부, 심리적으로는 유년기 판타지 속으로 도피하지 않는”________________
김형중,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ꡔ파라21ꡕ, 2004년 봄호, 65쪽.
‘당대적’ 성격의 리얼리즘 소설이야말로 리얼리즘의 갱신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확언한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설득력이 결여돼 있다.
김형중은 리얼리즘의 갱신에 어긋난다며, 황석영의 ꡔ오래된 정원ꡕ, 송기원의 ꡔ사람의 향기ꡕ, 최인석의 ꡔ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ꡕ, 김영현의 ꡔ폭설ꡕ, 방현석의 ꡔ랍스터를 먹는 시간ꡕ, 정도상의 ꡔ누망ꡕ, 한창훈의 ꡔ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ꡕ, 김종광의 ꡔ소주와 짬뽕의 힘ꡕ, 이명랑의 ꡔ삼오식당ꡕ 등의 최근작들을 한꺼번에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비평가의 비판에 성역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의 비판적 열정에 내가 고무되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그런데 그의 비판 작업을 살펴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비판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판의 칼날을 비판 대상자에게 들이대고 있으나, 그 비판의 칼날은 왠지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그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촘촘한 해석이 동반되지 않은 채 몇몇 작품을 동류항으로 묶어내고, 비판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부분만을 확대시키는 방식의 비판은 가장 경계해야 할 비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의 방식으로는 개별 작품들의 미학적 성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비판자가 비판의 편의성을 위해 자의적으로 분류해놓은 비판적 준거틀만이 앙상하게 남을 따름이다. 가령, 김형중의 다음과 같은 비판의 요지를 살펴보면 그 비평적 오류가 명백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방현석은 혹시 이미 관성화된 자신의 글쓰기를 갱신하기보다는 무대를 옮겨서라도 그 글쓰기를 유지하는 쪽을 택한 것은 아닌가?같은 글, 61쪽.
따지고 보면 한국 문학사란 어떤 맥락에서는, 징용에 끌려갔거나 빨치산이 되었거나 월남전에 참전했거나 자학적으로 노름판에 빠졌거나 정치판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거나 학생운동 혹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거나, 등등의 남자들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절개와 탄식의 역사 아니었던가? 시대가 바뀌어도 여성들의 역할에 부여된 관성적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혁명의 서사는 아니더라도 남성 위주의 서사를 반복하는 한 그들의 소설은 여전히 관성 속에 있지 않는가?________________
같은 글, 63쪽.
작가 방현석의 최근 서사의 초점은 베트남에 있다. 그의 소설 무대가 베트남으로 옮겨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의 베트남에 대한 서사적 진정성이다. 김형중의 성급한 비판대로 80년대 소설에서 낯익은 리얼리즘의 전통을 완고히 수호하기 위해 방현석이 베트남이란 타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방현석이 베트남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80년대의 낯익은 자신의 서사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90년대 이후 이렇다할만한 리얼리즘의 갱신을 이룩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적 사유의 도정으로 보아야 한다.베트남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이후 민족문학․리얼리즘 갱신을 모색하는 일환의 진정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종래 베트남전쟁 소설에서 보이는 베트남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게 아니다. 사실 방현석의 베트남에 대한 관심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자발성을 통해 1980년대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의 서사에 대한 갱신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베트남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서로 다른 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아시아적 가치와 상생의 상상력을 소중히 키워냄으로써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리얼리즘의 갱신을 모색하는 데 궁극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90년대 이후 리얼리즘의 갱신을 위한 세계관적․미학적 고투의 일환으로 베트남 서사에 대한 방현석의 열정을 인식해내는 비평적 성찰이 요구된다. 80년대의 낯익은 서사의 관성을 위해 베트남이 방현석에 의해 호명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베트남은 90년대 이후 김형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대적’ 관점에서 80년대를 관통해온 자가 지금, 이곳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관한 성찰의 계기를 던져주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문제적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김형중은 최근 리얼리즘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성에 관한 서사가 남성위주의 관성화된 서사에 여전히 머물러 있기에, 이 역시 리얼리즘의 갱신으로 보기에 힘들다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한다. 가령, 황석영의 ꡔ오래된 정원ꡕ에서 윤희라는 여성은 기존 남성 위주의 관성화된 서사로 읽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ꡔ오래된 정원ꡕ 이전의 황석영식 리얼리즘이 주체 중심의 동일자적 시선에 의해 객관현실을 형상화하였다면, 이 소설의 경우 시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듦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의사소통적 장을 마련해줌으로써, 세계를 어떤 단일한 동일자(현우라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가 서로 교호하면서 세계를 다면적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복안(複眼)의 서사’를 보여준다는 점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________________
ꡔ오래된 정원ꡕ에 대한 황석영식 리얼리즘의 갱신에 대해서는 고명철의 「환골탈태하는 리얼리즘의 ‘물건들’」, ꡔ비평과전망ꡕ(8호, 2004)을 참조할 것.
더욱이 이러한 ‘복안의 서사’ 속에서 윤희의 존재는 현우로 하여금 18년의 형기 동안 맹목화되었거나 망각되었던 80년대의 현실을 타자로서 정직하게 만나게 하여, 근대의 파행뿐만 아니라 이 근대적 파행을 극복하고자 한 근대의 또 다른 노력 모두가, 혹 근대의 폭력과 광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근대 자체를 성찰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황석영의 ꡔ오래된 정원ꡕ에서 윤희라는 여성은 김형중이 비판하는바 기존 남성위주의 서사에 복무하는 하위 주체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비판의 오류를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앞서 내가 언급했듯이, 김형중의 비평적 무의식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90년대 이후 소설의 신생에 대한 과도한 비평적 욕망으로 인해 서사의 갱신은 과거 서사와 단절해야 한다는, ‘새것 콤플렉스’의 병리적 증후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리얼리즘의 갱신에 대한 비평적 욕망은 리얼리즘의 갱신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작가들에 애정을 갖고, 그 작품의 진정성을 섬세히 보듬을 때 구체화되는 것이지, 비평가가 작품과 무관한 채 이미 암묵적으로 규정내리고 있는 어떤 비평의 잣대를 막무가내로 작품에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90년대 들어 가열차게 비판한 80년대식 지도비평의 폐단이 아니었던가. 작품에 대한 비판은 언제든지 뒤따라야 하되, 해당 작품에 대한 애정이 동반되지 않은 비판은, 작품의 갱신에 그 어떠한 생산적 논의를 제공해주지 못할 터이다.
3. 강단비평의 폐해, 작품보다 승한 이론의 문제틀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비평이 외면받고 있는 이유들 중 하나로서 강단비평의 폐해에 주목한 바 있다. 문학의 현장성을 위축시키고 있는 강단비평의 문제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대학의 학문적 영역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문제틀을 문학 현장에서 조급하게 검증받고 싶어하는 데 있다. 아니, 검증의 단계를 지나쳐서 그 문제틀을 문학 현장으로 과도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강단비평이 최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작품의 온전한 실상이 아니라, 학구적 문제틀을 시험해보고 조금이라도 그 문제틀이 적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다. 강단비평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강단비평이 비평의 영토에서 그 위용을 떨치고 있는 한, 문학비평의 자기소외의 문제는 극복하기 힘들다. 나는 이러한 강단비평의 구체적 폐해의 한 사례로서 황석영의 최근작 장편 ꡔ심청ꡕ을 대상으로 한 비평의 문제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ꡔ심청ꡕ이 발간된 이후 마치 기다렸듯이 ꡔ심청ꡕ에 대한 비평은 줄을 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목도된다. ꡔ심청ꡕ에 대한 비평은 세부적 해석의 차이를 제외하면, 모두 한결같이 황석영식 리얼리즘의 갱신에 의한 ‘동아시아적 근대’를 탐구해낸 탁월한 서사로 극찬하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이 ‘동아시아적 근대’에 대한 탁월한 서사인가. 문학비평가 류보선의 비평대로 “ꡔ심청ꡕ은 황석영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그야말로 황석영의 모든 적공이 고스란히 투사된 소설”________________
류보선, 「해설: 모성의 시간, 혹은 모더니티의 겨울」, ꡔ심청ꡕ 하권, 2003, 313쪽.
인가. 문학비평가 서영채가 언급한바, “논리적으로는 친숙하면서도 실감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던 동아시아적 근대라는 개념이, 심청의 시선을 통해 구체적 생활공간의 형태로 드러나”________________
서영채, 「창녀 심청과 세 개의 진혼제」, ꡔ문학동네ꡕ, 2004년 봄호, 282쪽.
고 있는가.
내가 이러한 의구심을 갖는 데에는, ꡔ심청ꡕ에 대한 이 같은 비평이 ꡔ심청ꡕ의 온전한 실상에 사심 없는 비평의 태도로써 비평적 판단을 내렸다기보다 ꡔ심청ꡕ을 간행한 출판사 <문학동네>와 동일한 출판사에서 발간되는 문학계간 ≪문학동네≫의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주례사 비평의 혐의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류보선과 서영채 모두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이라는 점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ꡔ심청ꡕ의 해설을 쓴 류보선은 독자들에게 ꡔ심청ꡕ이란 작품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해설을 썼다기보다 ꡔ심청ꡕ을 황석영 문학의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비평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류보선에 의해 ꡔ심청ꡕ은 동아시적 근대를 탐구하는 황석영식 리얼리즘의 최고봉이란 비평의 딱지를 붙인 셈이다. 여기에다가 서영채는 단독 비평의 형태로 그 자신 특유의 근대적 사유의 활달함을 통해 “황석영은 19세기 동아시아라는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심청의 혼령을 소환했고 그에게 렌화라는 제웅의 몸을 주어 동아시아를 유랑케 했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ꡔ심청ꡕ은 바다 건너로 팔려간 수많은 심청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되었다”서영채, 앞의 글, 295쪽.
는 평가를 내린다. 요컨대 ꡔ심청ꡕ에 대한 비평은 ≪문학동네≫의 비평 에콜로부터 황석영 문학의 최고봉이며, 동아시아적 근대를 탐구해내는 ‘훌륭한 서사’로 손색이 없다는 비평적 합의의 문서나 다름이 없다. 나는 이러한 두 평가를 지켜보면서, 그동안 문학권력 논쟁에서 문학권력 비판자들이 지속적으로 논의했었던 주례사 비평의 악몽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런데 ꡔ심청ꡕ에 대한 비평에서 정작 문제인 것은 주례사 비평도 문제이지만, ꡔ심청ꡕ의 해석이 어떤 문제틀에 의해 갇혀 있다는 것 역시 큰 문제점이다. ꡔ심청ꡕ은 황석영의 역작 ꡔ손님ꡕ의 연장선에서 자동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황석영이 “동아시아론의 문학적 구현을 꾀하고 있는”________________
최영석, 「강신과 축귀」, ꡔ작가세계ꡕ, 2004년 봄호, 75쪽.
맥락으로 ꡔ심청ꡕ을 비평하고 있는 게 그것이다. 말하자면 ꡔ심청ꡕ은 ꡔ손님ꡕ 이후 황석영식 리얼리즘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서도동기(西道東器)’의 서사 양식을 개척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식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ꡔ손님ꡕ의 경우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이미 집중 조명된 바 있듯, 서구의 서사 양식에 기댄 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적 서사 양식인 굿의 형식을 작품 전체에 덧씌워, ‘서도동기’의 서사 양식을 개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주의적 내용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겠다” 황석영, 「작가인터뷰: 황석영이 황석영을 말하다」, ꡔ작가세계ꡕ, 2004년 봄호, 33쪽.
는 그의 ‘서도동기’식 서사 양식은 ꡔ손님ꡕ에서 훌륭히 소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ꡔ심청ꡕ이 ꡔ손님ꡕ의 연장선에서 ‘서도동기’의 서사에 성공하고 있다는 비평적 판단에는 수긍할 수 없다. ꡔ심청ꡕ이 19세기 동아시아 근대의 풍경을 조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형상화의 성공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냉엄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혹시 ꡔ심청ꡕ에 대한 잇달은 비평이 동아시적 근대담론을 성급히 ‘선취(先取)’하고자 하는 강단비평의 미혹 때문은 아닌가. 지금, 이곳 강단비평의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가 서구 중심의 근대적 패러다임과 다른 동아시아적 근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모색이라는 점을 고려해보건대, 이러한 강단비평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론의 차원에서 동아시아적 근대담론이 학제적 연구를 통해 그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데 반해, 창작의 영역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만한 동아시아적 근대에 관한 서사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탈식민주의 시각이 팽배해짐에 따라 서구식 근대의 파행과 맹목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동안 소홀히 간주되어온 동아시아적 근대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고 있는 저간의 현상을 고려해본다면, ꡔ심청ꡕ에 대한 이 같은 강단비평은 동아시적 근대담론을 이모저모 성찰해볼 수 있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ꡔ심청ꡕ의 온전한 실상을 왜곡할 수는 없다. ꡔ심청ꡕ을 동아시적 근대담론의 문학 실현장으로써 마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처럼 강단비평의 척도에 따라 늘리거나 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 황석영이 고전 서사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시각으로 심청을 되살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매춘부로서의 기구한 인생 유전을 살아가는 심청을 통해 봉건․반봉건(半封建)․근대로 뒤범벅된 동아시아의 풍경을 서사화하고 있는 것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심청의 ‘몸’은 심청 개인의 육체이면서 동시에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옮아가는 동아시아의 표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________________
고명철, 「심청, 동아시아 오디세이아」, 월간 ꡔ북새통ꡕ, 2004년 1월호, 44쪽.
문제는 매춘부로서의 심청이 얼마나 서사의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또한 동아시아의 근대적 풍경이 심청의 그러한 삶 속에서 자연스레 형상화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것은 ꡔ심청ꡕ을 통한 동아시적 근대담론을 구명하는 것과 다른 층위의 문제다. ꡔ심청ꡕ은 어디까지나 장편 소설이다. 장편 속에서 동아시아적 근대담론을 얼마든지 밝혀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적 차원에서 동아시아적 근대담론을 탐구하는 것과, 문학-소설의 형상화 차원에서 그 담론이 제대로 형상화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럴 때 ꡔ심청ꡕ은 아직까지 소설의 형상화를 통해 동아시적 근대담론의 실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19세기 질풍노도와 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풍경은 ꡔ심청ꡕ 속에서 자연스레 형상화되고 있지 못한 채 작가에 의해 마지못해 그 풍경을 우격다짐으로 배치해 놓은 듯하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이 ‘20세기의 3부작’이라고 언급한 ꡔ무기의 그늘ꡕ, ꡔ오래된 정원ꡕ, ꡔ손님ꡕ 등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탁월한 재해석의 시각을 고려해보면 그렇다. ꡔ심청ꡕ의 동아시아적 근대의 풍경은 19세기 역사적 자료를 언어로 다시 풀어쓴 데 불과하며, 매춘부로서의 심청은 자신의 비루한 존재에 대한 성찰과 각성이 대단히 낭만적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매춘부로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청은 결연히 흔들리지 않고, 풍운아들이 격동기를 견뎌나가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바꿔 말해 육체는 여성이되, 기실 여성성은 탈각되어 있고, 영웅으로서의 남성의 비장한 파토스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심청에게 매춘부로서의 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고통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 나기 위해 으레 감내해야 할 고통스런 입사식(入社式)에 불과할 따름이다. 즉 심청은 ‘여성-영웅’인 셈이다. 여기서 매춘부 여성으로서의 심청에 대한 서사적 핍진성은 떨어진다. 한 자연인으로서 매춘부 여성의 간난한 삶을 둘러싸고 있는 여성의 내면 풍경은 대단히 조악하게 형상화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매춘부 여성으로 전락한 매춘 행위의 선정적 디테일이다. 강단비평이 조급히 선취하고자 하는 동아시아적 근대담론의 미혹 속에서 ꡔ심청ꡕ의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게 아닐까. ꡔ심청ꡕ에 대한 사심 없는 비평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4.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비평,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비평
문학비평, 그것도 소설비평에 국한시켜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논의해보았다. 서사의 갱신을 향한 과잉된 비평적 욕망이 비판 대상이 되는 작품에 대한 정치(精緻)한 독해 없이, 비평가가 작품과 무관한 채 이미 암묵적으로 규정내리고 있는 어떤 비평의 잣대를 막무가내로 작품에 들이대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주례사 비평의 해묵은 폐습에 의해 혹은 강단비평의 문제틀을 과도하게 작품에 적용한 나머지 작품의 온전한 실상을 또렷이 보지 못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문학비평이 외면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학비평의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문학비평은 문학장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결여되었거나, 작품에 대한 지나친 짝사랑으로 인해 문학비평은 창작과 점점 괴리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비평의 불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창작과의 괴리는 일반 독자로부터 문학비평을 자연스레 멀어지게 한다. 창작과 독자로부터 멀어진 문학비평은 결국 문학비평의 협소한 영토로 내몰릴 뿐이다. 이러한 문학비평의 딱한 처지를 방관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문학비평 본래의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나는 문학비평의 이러한 과제를 마주칠 때마다 문학비평가 도정일의 다음과 같은 전언에 귀기울여 보곤 한다.
문학비평이 수행하는 광의의 문화적 비판과 반성은 한 문화가 창조하고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가치들을 부단히 정의하고 확인하는 인문문화적 사색행위다. 이 점에서 문학비평은 인문문화의 신경중추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은 그것이 수행하는 많은 작업들 중에서도 한 문화의 건강성 여부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병적 징후를 감지하며 그 진단의 결과를 사회에 보고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인무학의 갈래이자 사회문화적 제도로서의 문학비평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 기능이다. 우리의 문학비평은 문화적 몰락의 여러 징후와 현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발언권을 넓혀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평 자체의 사회적 소외를 방지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________________
도정일,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 ꡔ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ꡕ, 민음사, 1994, 266-267쪽.
문화적 비판과 반성에 인색하지 않는 것, 한 문화의 건강성 여부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병적 징후를 감지하여 진단 결과를 사회에 보고하는 것, 게다가 병적 징후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모색하는 것, 이것들이 인문문화의 신경중추 가운데 하나인 문학비평의 자존을 확보하는 길이다. 이러한 자존 없이 문학비평의 사회적 소외의 가속화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소설비평도 예외일 수가 없을 터이다.
문학의 대지에 굳건히 두 발을 딛는 소설비평의 삶은 대지 없이 불가능하다. 대지가 때로는 비옥할 수도 있고, 때로는 척박할 수도 있다. 소설비평은 이 대지의 생래와 그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 비평가의 부자연스런 비평적 척도로 문학의 대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문학의 대지, 그 자연스러운 생래에 따라 비평은 특유의 심미적 이성을 갈무리해야 할 것이다. 너무 넘쳐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비평’, 타자를 적대시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무턱대고 동일성의 관계로 타자를 흡수하지도 않으면서 생산적 대화를 나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비평’, 이러한 문학비평이 21세기 우리 문학의 대지에 착근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평론집 ꡔ‘쓰다’의 정치학ꡕ ꡔ비평의 잉걸불ꡕ 등
․광운대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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