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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초점/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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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26회 작성일 05-05-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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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비평을 위한 기본 전제들

김인호
(문학평론가)



1.
우리는 좋은 문학에서 자연을 만난다. 그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자연미로서 만난다. 그래도 그것은 자연과 만난 효과와 똑같다. 시적 언어는 때때로 자연의 힘을 부르고, 지시적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자연을 만난 경탄을 표현하고, 자연의 내부로 들어간 기쁨을 노래함으로써 자연을 떠올린다. 그럴 때 자연은 텍스트 안에 들어와 넓은 가슴을 연다. 자연 앞에서도 맛보지 못한, 혹은 맛보았으나 표현하지 못한 언어들이 거기에 있다.
시인의 절박한 요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사물과 자연과 우주의 응답이 들려온다. 시인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이중적 언어, 혹은 깊은 상징성을 담은 언어를 통해,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색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잊혀졌던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잃어버렸던 본질을 찾아주는 그 언어는, 마침내 우주적 공명 속에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그것은 기술된 의미 말고 다른 의미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듣고 볼 눈이 있는 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조너선 컬러는 ꡔ문학이론ꡕ에서 말한다. “시는 매력이나 마법을 산출하기 위해 언어의 비의미론적 성질-소리, 리듬, 글자의 반복-을 전경화한다.”________________
조너선 컬러, ꡔ문학 이론ꡕ, 이은경․임옥희 역(동문선, 1999), p.126.
시인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혹은 문득 사소한 해프닝을 통해 자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저승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한 것과 같다. 그때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는 저주받은 영혼들을 위로했고 심지어 저승왕 하데스마저 감동시켰다지 않은가? 에우리디케가 살아 돌아왔는가는 다음의 문제다. 그녀가 정말로 살아 돌아올 뻔했다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로 그것이 음악 혹은 시적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상의 상태이다. 정녕 시적 언어(오르페우스의 노래)가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 있다면, 그걸 통해 자연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의 언어를 알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자연의 문을 두드린다. 특히 현대처럼 자연과 의사소통이 단절된 시대에, 역설적으로 그것은 더욱 요구된다. 그러한 역할을 떠맡은 것 중의 하나가 문학이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을 연관시키면서 자연과 연결된 통로를 찾는다. 개별 인간의 무의식의 지층을 뒤질 때 자연과의 연관 관계를 찾게 된다. 거기에 자연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할 것이다. 문학이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데, 신화는 특히 원시적 흔적을 잘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어머니가 곰이었다면, 그로 인해 어머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자연과의 연관 관계를 찾게 된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원시적 상태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생태학적 본질에 접근한다. 게다가 그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다양한 코드를 풀어내면,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좀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자연으로 들어가는 통로마저 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 만능주의에 대한 반성과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남호는 「녹색문학을 위하여」에서 모든 좋은 문학은 녹색문학이라고 말했지만, 좋은 시가 다 생태적일 수는 없다. 자연을 소재로 삼고, 자연 친화적이라고 해서 다 생태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자연을 연민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생태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근대 이후로 자연을 지배해 온 주체의 과오를 너무 쉽게 묵인해 주는 결과가 된다. 근대적 주체는 자연을 도구화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파괴하고 그 신비스러움을 다 앗아갔다. 근대 이후의 문학에는 그런 주체의 정신, 즉 계몽의 정신이 담겨 있다. 계몽의 정신은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연과 맞서거나, 자연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의도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친화적 태도를 보여도, 근대 문학의 이면에 숨어 있는 주체의 오만은 근절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누구도 지금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런 주체로는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공기와 물과 밥이 모두 자연에서 나왔다면, 자연의 훼손은 인류 자체의 생존의 문제가 된다. 그것은 자연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의 존재론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문명을 발전시키고 자연을 대한다면, 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체르노빌이나 보쿰의 대참사 못지않은 재앙이다. 엘니뇨, 라니냐 현상은 그런 재앙을 예고해 준다. 그럴 정도로 환경의 문제는 시급하다. 이미 그것은 인류 전체의 문제가 된 것이다. 문학도 위기의식을 느끼며 그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문학마저 시민운동에 나서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문학 자체의 문제에 충실함으로써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주체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연과 대등하게 대화하기보다는 자연을 억압한다. 자연은 한번도 언어화되지 않는 언어로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 등을 노래하고,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은 봄날의 햇빛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노래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묵살하는 것이다.
문학은 존재의 비의를 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학의 기호는 물질적으로 우리 일상을 노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호 너머의 세계를 붙잡고자 한다. 다만 어떤 자연적 본질도 쉽게 자기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기는 어렵다. 게다가 자연의 언어는 텍스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그 언어를 찾아내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때 성큼 자연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2.
언어에는 지시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화행적 요소들도 들어 있다. 그래서 어떤 텍스트에서는 지시하는 내용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특히 문학적 언어는 ‘대화’를 통해 다성적 화음과 같은 효과를 얻기도 하고, 그것 자체로 미적 생명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거꾸로 독자가 아주 뛰어난 해석력을 가지고 분석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어느 한 관점만으로 보게 됨으로써 작품의 중요한 의미들을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텍스트에 담긴 자연의 생명력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지시된 언어 이면에 숨어 있는, 혹은 그 언어의 틈새에 숨어 있는 언어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문학에 그런 것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문학 텍스트의 중요한 역할이라면, 문학의 궁극적 목적 중의 하나는 언어 너머의 지대를 찾는 일이 된다.
텍스트에 기술된 자연은 기호화된 자연이다. 게다가 그것은 주체의 시야에 포섭된 자연이고 주인공을 위한 배경 구실을 하는 자연이다. 그럴 때 자연은 대체로 타자의 역할로 밀려나고 주체를 돋보이게 하는 구실에서 그치게 된다. 언어로 그려지는 순간 숙명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주인공 못지않게 텍스트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연도 있다. 주체의 인식 틀 속에 들어가지 않고 그 외부에서 주체에게 작용하는 자연도 있다. 주체가 역사나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힘에 끌려가는 왜소한 존재가 될 때 자연은 그 주체를 포근히 감싸기도 한다. 혹은 주체가 횡포를 부릴 때 다소곳이 그 수모를 참아내지만 조용히 그에 대해 대응한다. ꡔ오딧세이ꡕ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연의 힘에 저항하며 자신을 세워나갔지만 사실상 자연(바다)도 그를 10년 동안이나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 인간의 자연 지배는 갈수록 파괴적인 양상으로 나아가, 자연은 그에 대해 대응할 방법조차 잊고 보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세이렌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도 오디세우스가 그것을 ‘괴물의 유혹’으로 몰아세웠을 때, 그때까지 주체가 되지도 못한 ‘귀를 막은 사람들’조차 세이렌의 체험을 끔찍스런 재앙인 것처럼 소문냈다. 그런데 그 노랫소리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뒷이야기로 보자면, 오랫동안 칼립소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이를 달리 보면 오디세우스만이 ‘자연을 누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달리 보면 자연이 그에게 고향을 잊게 하고 그를 바다에 가둬놓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보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데 1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을 보면 자연에 대항한 자가 원상태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많은 기간이 걸리는지 암시적으로 알려준다.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인간에게 대응한다. 귀를 막은 이데올로기적 인간들이 자연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은 채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을 회복하는데 그렇게 많은 세월이 걸리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비합리적인 측면들을 제거하면서 자연의 법칙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틀 속에 들어오지 않은 요소를 철저히 ‘악’이나 ‘광기’로 몰아세우면서 배격했을 때, 자연이 자정적 능력을 통해 원상태로 돌아오는 데 그러한 세월이 걸린 것이다. 결국 세이렌은 수장되었고 다시 ‘자연’, 즉 그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상징을 풀어내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한스 요나스는 ‘자유’의 개념이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밝혀내는 데 실제로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줄 수 있을 것”________________
Hans Jonas, ꡔ생명의 원리ꡕ, 한정선 역(아카넷, 2001), p.22.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생명체란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이지만 살아 있는 한 자유의 상태를 만끽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바친다. 시적 언어는 인간을 미궁에서 자유로 이끄는 매개물이다. 미궁의 바닥을 기어다니던 존재가 어느 순간 시적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미궁의 벽 위로 날아올라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는 수도 있다. 미궁의 바닥을 기어가는 인간들이 잠깐 동안 그 ‘은빛 날개’를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이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신기루나 판타지로 기억한다. 인간은 그것을 붙잡기 위해 주술적 언어를 만들고 시적 언어를 개발해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판타지로 내려왔다. 맨 처음의 언어가 하늘과 소통하는 주술적 기호였고 동굴의 벽화가 자연의 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기호였다면 그것들은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기호와 대상이 어느 정도 일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호는 사물을 억압적으로 규정했고 인간은 그 기호를 통해 문명을 이뤄 나갔다. 나무를 ‘나무’나 ‘tree’라고 할 때 거기에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배제하는 폭력성이 존재한다. 그래도 그런 상태에서의 기호는 대상과 그렇게 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될수록 대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호의 힘은 사라져 갔다. 특히 ‘소리’와 ‘모양’이 사라지고 내용만이 남게 되었다. 그럴 때 주술사의 ‘주문’과 ‘부적’은 위력을 잃게 된다. 주술사에게는 소리나 모양이 중요하건만 근대 이후로는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의’를 통해서는 그 소리나 모양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자연의 상처, 혹은 ‘기표의 흔적(trace)’을 통해서 간신히 주술사가 사용했을 소리와 모양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원문자(archi-ecriture)’를 떠올리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과 소통하게 된다. 기의 위에서 ‘부유하는 기표’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의 본질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언어가 생태적이다. 그것은 주체가 고정화시킨 기호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흘러가게’ 하는 기호이다. 그런 기호를 획득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연과 소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예술의 기호는 그러한 기호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호들 속에 숨어 있는 소리의 울림이나 에너지의 흐름을 읽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물을 기호화했을 때 배제한 것들을 되살려준다. 즉 사물의 본성은 기표적인 특성이 효과적으로 잘 어우러질 때만이 나타난다. 기표들이 부유함으로써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불쑥 뛰쳐나오는 존재의 ‘날개’를 보여준다면, 그 순간 자연과 인간은 서로 소통될지 모른다. 그 ‘날개가 나타난 틈새’에서 ‘생명력’이나 ‘에너지’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그 충만한 가운데서 자연과 인간은 일체화를 이루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은 ‘관계’를 맺는다. 결코 ‘타자’를 만들어내는 일 없이 관계의 ‘매듭’들은 각각의 주체가 되어, 서로에게 작용하고 서로의 힘을 나누어줌으로써 행복해진다. ‘생명의 다양성’은 그러한 충만 속에서 꽃 피어난다.

3.
생태문학은 많은 오해 속에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김욱동은 “생태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도 결국 다른 유기체처럼 에너지의 흐름과 물질의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________________
김욱동, ꡔ문학 생태학을 위하여ꡕ(서울: 민음사, 1998), p.233.
고 말한다. 이는 생태적이지 못한 ‘괴물’조차도 ‘에너지의 흐름과 물질의 순환’이 원활하면 생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야기한 발언이다. 게다가 문학을 ‘유기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되, 기계적․반복적 흐름마저도 문학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물론 김욱동의 견해는 내용과 소재 차원에서 환경을 다루는 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방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과 밖의 소통의 문제를 살피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태문학의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다. 또한 이남호가 「녹색문학을 위하여」에서, “나는 모든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동경한다고 믿는다. 모차르트가 찾아간 곳도 자연이고, 칸딘스키가 찾아간 곳도 자연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에게 자연적인 것은 다 예술적인 것이 된다.”________________
이남호, 「녹색문학을 위하여」, ꡔ포에티카ꡕ, 97. 겨울호, p.13.
라고 말한 것도 문제이다. 여기서 그는 자연과 예술의 구분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무화시키고, 좋은 문학을 다 생태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근대 이후의 문학은 점차로 자연과는 멀어져 온 장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차르트, 칸딘스키, 쇼팽 등이 설혹 자연을 노래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자연과 가까워지기보다는 자연과 더욱 멀어지는 과정을 담았을 수도 있다. 또한 이남호는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소중하며’ ‘근원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오히려 자연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을 생각해 본다면, 소설은 문명의 한 요소이지 자연의 한 요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문학을 막무가내로 자연과 합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큰 문제다. 그렇게 쉽게 문학과 자연을 동일시할 수 없고, 적어도 그것이 발생한 과정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생태학적 전망을 내놓을 수 없다. 사람들도 이제는 자연의 재앙이 곧 자신의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게다가 그것이 지금 당장 피해를 주기보다 미래세대에게 치명적으로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요나스는 ꡔ책임의 원칙ꡕ에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지 않으면 인류의 종말이 가까워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더라도 근대적 시스템 자체를 검토하고, 그 근원의 문제들을 되물어야 생태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우연적인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이다. 우리는 문학에서 감각적 기호를 통해 자연의 내부에 들어간다. 그 갑작스러운 순간에 ‘사다리’도 없이 자연의 내부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과 대화하는 상황은 주체가 자신의 권리라고 여기던 것들을 포기할 때 문득 찾아온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능력을 보류하고 자신을 비워놓을 때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무의식의 지대에 들어가고 또 자연의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이나 사물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때 가능하고 ‘억압된 무의식’의 비밀을 풀 때 가능해진다. ‘텍스트화된 자연’은 자연보다 그것을 더 잘 일깨워준다. 그것은 기호로 만들어졌지만 자연보다도 쉽게 자연의 본질을 매개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와 기술의 코드 속에 갇혀 살고 있다. 그것은 공기처럼 이데올로기처럼 우리를 휩싸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그것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 코드를 벗어나게 되지는 않는다. 이미 인간은 기술문명 속에서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이미 그것은 이데올로기화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점투시(一點透視)에 의한 원근법으로 사물을 보고 또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통해 사물을 본 것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진 찍히거나 그림으로 그려진 것, 혹은 언어로 기술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된 사물의 어떤 지점일 따름이다. 그 이미지화된 사물은 사물 전체를 보여주지 못한다. 예컨대, 봄날의 벚나무는 불과 열흘 남짓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꽃을 보여주지 않지만 우리는 벚꽃의 기호만을 벚나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벚꽃을 노래하는 것이 벚나무의 본질을 밝히는 일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벚나무와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벚나무 전체의 삶을 파악해야 한다. 시적 언어나 감각적 기호는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길목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그 예술의 기호들은 자연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이야기하게 한다. 우리는 기술이나 언어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면서 그것들을 사용하다 보면 그것들의 틈새에서 자연의 본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언어나 그 밖의 예술의 기호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자연미가 자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야만 자연과 말을 건넬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 방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언어가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 속에 자연의 흔적은 남아 있게 마련이고, 그 흔적을 되살릴 때 자연과 만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자연과 멀어진 언어로 어떻게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그 언어로 우리가 구원될 수 있다면 우리는 돌아갈 수도 없는 상상계적인 자연에만 얽매일 일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구조를 해체하거나 다원화된 주체들끼리 상호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통해서 기호가 발생했다면 우리는 그 기호를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예술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기호에는 자연의 ‘흔적’이 새겨져 있고,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내어 해석해낼 수 있다. 그런 태도만이 생태문학을 가능하게 한다.
생태문학은 요나스의 지적처럼 ‘공포의 발견술’을 통해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환경의 위기를 인식하고 우리의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내용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어 그것은 문학의 언어 혹은 문학적 형식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모든 문학들을 평가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생태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주체의 위치’에 따라 혹은 ‘자연과의 관계’에 따라 그 정도가 정해진다. 그런데 그 언어는 원시 상태에서의 최초의 발생과는 상관없이 저 나름대로 발전해 나간다. 언어의 자의성은 이제 언어의 발생에 대한 것마저 잊게 만들고, 그로 인해 사용하는 기계적 언어들은 점차 언어가 지시하는 사물이나 자연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언어의 원시성을 되찾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의성어나 의태어를 쓴다고 해서 그것이 언어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주체의 입장을 반성하고 타자의 시선으로 주체를 보려는 시도를 할 때 자연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한다. 실제로 어떤 텍스트에서는 자연의 힘이나 기운과 같은 것이 방출된다. 그것은 ‘기표’의 측면이 강조된 예술의 기호를 찾아낼 때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결국 그러한 것이 문학의 생태학을 이루어낸다.

4.
문학도 언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고 문법의 규칙에 따라야 하는 이상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법의 규칙이 바뀌기 위해서는 시대적 충격이나 그에 따르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핸드폰의 등장이 새로운 문자메시지의 기호들을 만들고 기성세대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언어들이 생겨났는데, 그걸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은 아니다. 언어의 변화는 시대적 특징에 따라 나타나지만 그 또한 담론이 세력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문학도 담론인 한 2000년대의 문학도 그 세력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 변화에 맞춰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학은 일반 담론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만의 독특한 효과도 지닌다.
생태문학은 언어 스스로 열려 있는 ‘살아 있는 형식’을 추구한다. 그것은 막연히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 시스템을 문제삼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문학적 틀도 때가 되면 저절로 바뀐다. 그리고 기호 바깥의 문제와 연관된다. 기호들은 자기 자신들의 문제에 신경을 쓰겠지만 생태학적인 위기의식을 갖게 될 때 그 내부적으로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내용이 형식을 이루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 외부의 문제가 문학 내부의 형식의 문제가 된다. 텍스트 바깥의 문제의식이 텍스트 안으로 스며들어와 새로운 형식, 새로운 언어로 꽃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한판 멋들어진 춤판을 벌인다면 그것이 바로 생태문학이다. 축제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삶의 활력을 마련해주고 삶 자체를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내용 측면을 넘어서 형식과 문체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더욱 훌륭한 생태문학이 된다. 예술의 기호들은 자연물과 인공적 기호들을 재배열함으로써 문학을 ‘제2의 자연’으로 만든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자연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보여줄 수 있다. 자연의 소리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텍스트 자체가 자연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으면서 깊은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면 그것은 자연과 교감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주체의 권한을 축소하고 타자를 주체로 받아들이며, 자연과 인간을 상호주체적 관계에 이르도록 만들면 거기서 그런 교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생태비평은 그것을 돕는다. 독자들에게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그것은 텍스트에 종속되자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어우러져 새로운 심미적 구체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런 비평을 통해 제2의 자연으로서의 텍스트와 어우러지는 자연과의 진정한 관계의 장을 열고, 자연과의 소통의 지점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문학은 자체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지만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는 것도 포기할 수 없다. 문학이 인간의 존재와 본질을 다루는 분야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자연의 본질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학적 텍스트의 ‘관계의 그물망’ 위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은 꽃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 꽃들이 피어날 문학을 기대해 본다.

김인호
․1957년 정읍 생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
․저서 ꡔ니체 이후의 지성사ꡕ 등
․동국대․경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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