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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초점/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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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재현하는 시의 수사들
―김참, 정재학의 시를 중심으로―
김지선
(문학평론가)
1. 후기 산업사회의 현실을 재현하는 시
시를 읽는 즐거움은 시를 통해 상상력을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는 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다의성과 모호성 때문이고 이 모호성과 다의성이 나의 체험의 한계를 부수고 인식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언어의 체계 속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언어는 세계의 질서를 만드는 도구이자 내 인식을 가두고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감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를 통해 미학적 체험을 하는 것은 상상의 자유로 나아가는 즐거움이자 동시에 견고한 나의 인식의 틀을 깨는 고통이기도 하다.
김참과 정재학의 시는 이러한 고통과 즐거움의 이중적 체험을 배가시킨다. 그들 시의 형식적 특성은 언어의 일상적 의미를 낯설게 하고 환상과 현실의 대립을 해체한다. 종잡을 수 없는 의미는 잡힐 듯 말 듯 내 인식의 그물망으로부터 빠져나가 그들만의 독자적 소우주에서 머무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들의 시는 후기 산업사회의 징후나 병폐를 그들 시의 독특한 어법으로 재현한다.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간편하고 단순해졌지만 인식은 더더욱 분열과 혼란의 상황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발달된 미디어와 일상화된 인터넷의 사용은 가상과 실제를 뒤죽박죽 섞어놓았다. 또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기법이었던 이미지의 병치, 꼴라쥬, 포토몽타쥬 등의 기법은 광고, 영화 등 대중문화에 사용되어 상업주의와 자본주의를 팽창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을 심화시켜 욕망마저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없는 상태 속에 우리를 빠뜨리고 있다. 비합리성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구분마저도 불가능하게 된 상황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ꡔ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ꡕ에서 속도의 가속화에 의해 심화된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 우리 삶의 양상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획일화(평준화)>와 <다양성에 대한 욕구>라는 양면적 가치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빨라진 자본의 유동성은 자본을 거머쥐려는 자와 삶의 기반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들 사이에 분열과 대립을 조장한다. 실제로 고속철도의 개통은 하비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의 양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날 조짐을 보인다.
일상적 언어는 세계의 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교묘하게 현실의 균열을 은폐하고 우리의 인식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합리성이라는 환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시는 독자적 수사의 방식을 창조해 왔다. 수사법은 단순히 언어 사용의 기법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과정이라는 인지언어학자의 연구(ꡔ삶으로서의 은유ꡕ, 제이코프와 존슨)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수사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세계 인식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김참과 정재학의 시처럼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실험적 시의 경우 시의 형식에 대한 탐구는 시의 세계 인식에 접근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일 것이다.
2. 김참 시의 서술구조와 정체성의 문제
김참의 시는 같은 구조의 문장을 반복하거나 서사의 양상을 띠는 시가 많다는 점에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산문성이 강하다는 것은 지시적 의미가 두드러지고 문장과 문장의 결합을 통해 의미를 확정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명확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시의 의미는 미로를 헤매는 시적 자아의 모습처럼 미궁 속을 헤매게 만든다.
남자는 하수도 뚜껑을 열고 비밀통로 바깥으로 나온다 부신 햇살에 눈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노란 해바라기 피어 있는 낯선 해변이다 그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걸어간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며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있다 나는 책을 덮는다 졸음이 쏟아진다 정말 따분한 소설이다 마감이 다가온 원고를 쓰기 위해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켜고 글자들을 찍어나간다
방에 누워 오래된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의 여자는 해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여자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붉은 태양 노란 해바라기 푸른 지붕의 집들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리는 푸른 지붕의 집에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김참 씨가 항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부엉이와 까마귀가 앉아 있는 미루나무를 항아리 위에 그리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백사장에 누워 당근 주스를 마시는 사이 그림 속의 김참 씨는 항아리를 들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궁이 비밀통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박쥐들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궁이 밖으로 빠져나가 어두워진 김참 씨의 마당을 날아다닙니다 그림 속에서 달이 뜨고 별똥별이 떨어지고 개들이 컹컹 짖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멈추고 당근 주스를 마셔본다 아궁이 속으로 사라진 남자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나는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집 밖으로 나와 하수도 뚜껑을 열고 하수도 안으로 들어간다 소설 속의 남자와 김참 씨가 열었던 하수도 뚜껑을 찾아 악취가 코를 찌르는 하수도 내부를 돌아다닌다 마침내 나는 열린 하수도 뚜껑을 발견하고 지상으로 올라간다 바깥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노란 해바라기 피어 있는 해변이다 모든 것이 낯설다 나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여자의 그림을 흘끔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미로 여행」 3, 4, 5연
문장의 명확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모호해지는 것은 우선 시가 메타시의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대략적 내용은 ‘소설을 읽던 김참이 소설의 내용을 토대로 시를 쓴다’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에 대한 자의식 즉 자기반영성을 시 속에서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시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하지만 이 시에서는 반성이라기보다는 시쓰기의 영향을 드러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음 문장 때문이다. “그림 속의 김참 씨는 항아리를 들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문장은 세 가지 상황과 얽혀 있다. 우선 ‘그림 속으로 김참 씨가 들어갔다’는 전제 하에 ‘김참 씨는 항아리를 들고 아궁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김참이 항아리에 그린 그림은 여인의 그림 속 풍경이다’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러한 상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에서의 경계 해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텍스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해체(그림과 현실의 해체) 둘째, 텍스트와 텍스트의 해체(소설/그림, 소설/시, 그림/항아리 속 그림의 해체) 둘째, 텍스트와 현실의 해체(소설/현실. 시/현실) 중요한 점은 해체가 이루어지는 결정적 동기가 되는 것은 시 속 김참이 소설 속의 남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동일시 과정에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텍스트와 텍스트, 현실과 텍스트의 경계 해체를 암시하는 시의 구조는 무엇을 말하는가? 롤랑바르뜨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을 통해 상호 텍스트성의 영향 속에 놓여 있는 후기 현대의 모습을 제시한다. 김참의 시는 텍스트와 현실이 혼재되어 있는 미로 속을 헤매는 시적 자아의 형상화를 통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일방적으로 텍스트의 영향을 받는 나의 모습도 아니고 저자의 절대적 권위를 제시하는 나도 아니다. 텍스트의 영향을 받은 나는 또다시 텍스트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관계의 양상이며 확정적이고 안정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 한편의 김참의 시는 눈동자의 환유를 통해 세계에 노출된 나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둡고 쓸쓸한 공원에 누워 꿈을 꾼다. 수많은 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갑옷 입은 기마병들이 지나가는 꿈.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긴 행렬들을 지붕 위의 티티새들이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꿈.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의 무덤 옆을 지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끝없이 걸어가는 꿈. 술 취한 도굴꾼이 칼과 항아리가 묻힌 내 무덤을 파헤치는 꿈. 누군가 무덤 밖으로 뛰어나가 거리를 질주하는 꿈. 내 꿈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붉은 지붕들 위를 고양이처럼 뛰어다니는 꿈. 불켜진 집들의 유리창에는 끝나지 않는 나의 꿈을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가득하다.
―「공원에서」 전문
나는 공원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꿈을 꾸는 존재이다. 나의 꿈은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사람들이 내 무덤을 파헤치는 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내 꿈속에서 튀어 나간 사람들이 뛰어노는 꿈) 것으로 형상화된다. 시에서처럼 나는 꿈에서조차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다. 세상은 나를 지켜본다. 동시에 나는 나라는 정체를 너의 시선을 통해 확인한다.(<너의 눈>) 마치 뿌리도 없이 뻗어올라 뒤엉킨 가지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리기도 하고 제멋대로 어긋나기도 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김참은 말하는 듯하다.
3. 정재학 시의 탈문맥화와 현실의 균열
정재학의 시는 포토몽타쥬, 꼴라쥬와 같은 탈문맥화된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시에는 특히 시선의 환유로서 눈동자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눈동자는 외눈박이, 세 개의 눈, 눈동자를 빼버린 눈과 같이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사물을 왜곡시키는 눈으로 기능한다. 시에서 눈은 거울처럼 사물 또는 존재의 심층이 아니라 표층을 비추며, 깨진 거울의 난반사와도 같이 세계의 조각나고 분열된 모습을 비춘다. ‘이중 색채를 위한 아르페지오’는 시적 자아의 굴절된 시선에 비치는 세계의 파편적 인상들을 묘사한다. 이 시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의미의 간극이 가장 크기 때문에 더욱 난해하고 추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환상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공포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이기도 하다.
지붕 없는 폐지 창고에서 굴곡진 눈동자로 색채의 악연을 만난다 검정 속의 노란 종이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말려 있었다 구두 속에서 곰팡이가 자라기 시작하자 구두는 빛을 강하게 빨아들인다 거리에서 죽은 빗물이 너와 나 사이를 흐른다 보라 속의 하얀 종이 위에 망각된 광기 뒤의 눈물이 쌓여 있다 썩은 피가 섞인 술잔을 부딪친다 그 잔은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온몸의 감각세포에서 독사들이 우글거린다 내가 애지중지하며 길렀던 것들이다 빨강 속의 검정 종이에 뛰어놀던 고양이가 술잔에 털을 빠뜨린다 내 입으로 뛰쳐나온 한 마리 독사가 응고된 새벽을 품고 있다 너는 새벽을 죽인다 아홉 번의 확인사살 속에 내가 있었다 초록 속의 주황 종이 위로 악몽에 시달리는 잎사귀들이 권태롭게 찢어져 있었다 플랑크톤이 이상 번식을 시작한다 의사의 오진(誤診) 위로 축처진 전구가 빛나고 있다 나의 실어증은 잠들지 않는다
―「이중색채를 위한 아르페지오」 전문
시는 화음을 연속적으로 펼치는 아르페지오 주법처럼 연속적으로 분절된 이미지들을 병치하고 있다. 대비가 심한 색채와 색채의 만남은 불협화음처럼 삐꺽이고 충돌하며 악몽과도 같은 현실의 파편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폐지 창고에 나뒹구는 종이, 구두, 고양이, 술잔, 찢어진 잎사귀는 실제인지 시적 자아의 악몽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마구 뒤헝클어져 있다. 검정 속의 노란 종이는 어린 아이의 시체를, 보라 속의 하얀 종이는 광기에 희생된 자들의 눈물을 연상시키지만 빨강 속의 검정 종이에서 연상하게 되는 것은 뛰어 노는 고양이의 무심함이다. 너와 나의 사이는 죽은 빗물이 흐르고 너는 내 속에서 튀어나온 새벽을 죽이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단절되거나 폭력이 개입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악몽과 현실의 혼재가 굴곡된 눈동자에 비치는 잔상이라는 점이다. 시적 자아는 자신의 인식이 사물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다. 이 왜곡은 사물을 눈으로 인식하는 자들의 운명이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세상이 악몽인지 세계를 보는 자신의 시선이 바로 악몽 그 자체인지 분간되지 않는 상태는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남은 것은 공포와 끝없는 권태뿐이다.
정재학의 시에서 눈의 이미지는 이처럼 세계를 분열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 방법에 대한 환유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열된 세계 속에서 사물을 또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성의 작용은 시적 자아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닫히지 않는 문 2’는 태양을 이성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면서 대중에 의한 파시즘적 폭압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키는 시로 읽을 수 있다.
그때 아낙사고라스의 처형식이 있었네
사람들은 돌아가며 그의 피를
조금씩 맛보고 있네
나 그를 구할 수 없었네
하늘의 새들은 구름 뒤에 숨어
지저귀며 나오지 않았네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쳤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망쳤네
태양이 원망스러웠네
아이들이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네
해가 지고 있었네
꿈 한 겹에서 벗어났네
………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네
문을 닫았네
문이 닫히지 않았네
………
―「닫히지 않는 문․2」 부분
시는 크게 두 개의 꿈을 형상화한다. 하나의 꿈은 아낙사고라스의 처형식에 관한 것이다.(아낙사고라스는 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위협하는 자라는 혐의 때문에 처형된 철학자다). 사람들의 잔혹 행위는 태양의 영향 아래서 자행된다. 그러나 태양이 져도 시적 자아의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도망치는 또 하나의 꿈에 시달린다. 문은 닫아도 닫아도 열려 있다. 이는 반복적 삶에 대한 공포다. 사람들의 폭력이 자행되는 삶, 그리고 이러한 삶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자아의 공포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이는 꿈을 꿔도 꿈을 깨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면서 삶이 악몽 그 자체라는 것을 드러낸다.
4. 이들 시의 가능성과 문제점
김참의 시는 메타시의 서술구조를 통해 상호텍스트성의 문제를 탐구한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결국 시적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된다. 독서와 창작의 행위가 영역간 경계를 해체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자아는 견고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닐 수 없는 존재다. 정재학의 시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현실의 균열을 드러낸다. 시에서 사용된 굴절된 눈동자의 이미지들은 균열된 현실과 그 속의 자신의 분열된 인식, 이러한 분열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파생되는 타자의 파시즘적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참, 정재학 두 시인은 일상적 언어의 견고한 틀을 깨는 실험을 통해 후기 현대적 삶의 징후를 드러낸다. 이들의 시도는 후기 현대적 삶의 실재를 재현하는 시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미학적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략적 차원의 실험시가 내포하는 문제를 답습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자기 반성이 요청된다.
실험시의 어려움은 형식의 일회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패턴은 더 이상 실험시로서의 의의를 지니기 어렵다. 사실 아방가르드적 형식들은 더 이상 실험을 주도하는 첨단의 기법이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우연의 효과를 노리는 이미지의 병치, 꼴라쥬 등의 기법들은 광고, 패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 쉽게 흡수되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예술 형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는 여전히 추상성과 난해성의 극복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중의 문제점을 떠안고 있다. 난해성의 극복이라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시적 언어를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 언어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시의 기법이 시의 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구심점을 반드시 마련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내적 구심력을 갖추지 못한 시는 화려한 기교만 갖춘 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주시할 때 김참은 반복적 패턴의 문제를 정재학은 시의 추상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당면 과제로 떠오른다. 이들의 시가 시 읽는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안겨주는 시가 되기를 바란다.
김지선
․1970년 출생
․2003년 ≪시와반시≫로 등단
․한양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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