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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단편/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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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52회 작성일 05-05-3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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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그 깊고 푸른 심연


최 인




총소리. 나는 립스틱을 칠하다 말고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탕. 탕. 탕. 또 다시 날카로운 총성이 홀 안을 울린다. 번쩍이던 조명이 꺼지고 나이트클럽을 흔들어대던 밴드 소리도 끊어진다. 이어서 여자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어둠을 가른다. 우왕좌왕하는 발소리와 함께 위협적인 사내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온다. 엎드리지 못해? 다시 귀청을 찢는 총소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누군가 뒤에서 낮게 소리친다. 나는 홀 쪽으로 나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가만히 있어요. 굵은 저음으로 보아 남자가 분명하다. 무슨 일이죠? 글쎄요, 아직은……. 나는 어둠을 향해 불안한 시선을 던진다. 평상시 같으면 낯선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거부감이 일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어둠과 남자가 생경스럽지 않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
사내의 날카로운 외침에 섞여 둔탁한 충격음이 들려온다. 이어서 솟아오르는 비명소리. 어떻게 된 거죠? 누군가 총을 가지고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총을……?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남자도 같이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는 슬그머니 손을 뺀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보죠. 남자는 침착해지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나는 현역 군인이오.”
홀 안의 사내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쏘지 않겠소. 사내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탈영병이 확실하군요. 남자는 모든 걸 알았다는 듯이 힘주어 말한다. 이제 어떡하죠? 어디 비상구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나는 남자의 순발력에 감탄한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은 아닐까. 이리 오세요. 남자는 캄캄한 복도를 더듬거리며 걸어간다. 아, 잠깐만……. 나는 눈앞을 가로막는 어둠으로 인해 허둥댄다.
“여기 비상구가 있어요.”
남자의 들뜬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온다. 나는 뒤뚱거리며 남자를 따라간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비상구를 표시하는 불빛이 보인다. 아, 비상구! 푸르스름한 불빛은 마치 생명의 물줄기처럼 갈증을 풀어준다. 나는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간다. 조용히 하세요. 남자가 나직하게 경고한다. 그제야 나는 내가 너무 경망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소리가 너무 커요. 남자가 싱끗 웃는다. 이 남자……. 나는 비로소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희미한 비상등 아래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수려하다. 하얗고 투명한 얼굴과 깊이 패인 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다. 누구를 닮았지? 경서…….
“문이 잠겼어요.”
나는 퍼뜩 의식을 되찾는다. 뭐라고요? 내 목소리도 떨려나온다. 문이 열리지 않아요. 남자가 철문을 힘껏 밀어본다. 하지만 굳게 닫혀 있는 문은 꼼짝도 않는다. 다른 곳은 없어요?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금방 후회한다. 여기는 지하실이다. 다른 곳에 비상구가 있을 턱이 없다. 이곳뿐이에요. 역시 남자는 현명하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한마디로 자를 줄 아는 남자. 나는 계단 끝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왔던 다리가 후들거리며 말을 안 듣는다. 언제였던가. 경서와 나는 경찰에 쫓겨 어두운 창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같은 대학 연극반 동아리였던 경서……. 나는 머리를 흔든다. 그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어디 숨을 데가 있을 텐데…….”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린다. 아, 밀실……. 무대 뒤쪽 깊숙한 곳에 밀실이 있어요. 나는 흥분해서 소리친다. 어디요? 이 복도를 따라 한참 들어가면……. 나는 내가 한 말에 놀라 입을 다문다. 그래요?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는 입을 꽉 다문 채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연다. 그럼 그리로 가죠. 나는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기억을 털어내느라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이런 곳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남자가 알게 된다면……, 내가 한때 술집 호스티스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밀실이라면 안전할 거예요. 남자는 오로지 탈영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이트클럽의 내실 깊숙한 곳에 있는 방. 거기서 나는 무슨 짓을 했던가? 그런데 또 다시 그 어둠의 장소로 간다.
“됐어요.”
남자는 라이터를 켜들고 방안을 살핀다. 붉은색의 소파와 탁자, 벌거벗은 외국 여배우 사진 몇 개.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아주 특별한 손님. 이를테면 VIP들만 모시는 장소. 또 한 가지,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그리고 그 안 깊숙이 밀폐되어 있는 장소는 침실이다. 여기 있으면 안전해요. 남자도 밀실의 용도를 알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겠습니다, 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라이터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하다. 어디 초 같은 건 없을까요? 그는 여기저기 불을 비추며 기웃거린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남자의 행동을 지켜본다. 남자는 아직 침실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침실 안에는 무엇이든 다 갖추어져 있다. 냉장고가 있을 것이고, 음료수와 양주, 그리고 몇 덩이의 얼음과 싱싱한 과일, 물론 양초도 있겠지. 나는 핸드백을 열고 담배를 꺼낸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게 내키지 않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불 드릴까요?”
남자가 들고 있던 라이터를 내민다. 나는 허겁지겁 담배에 불을 붙인다. 마음이 가라앉자 다시 경계심이 고개를 쳐든다. 이 남자는 뭘 하는 사람일까. 나이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어요. 남자는 한숨 돌린 표정이다. 나는 소파 끝에 가만히 걸터앉는다. 긴장감이 풀어지며 눈이 감긴다. 남자의 손끝에서 깜빡거리던 불빛이 사라진다.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을 가린다. 무슨 소리 들리죠? 남자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남자는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되죠? 글쎄요.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남자는 말끝을 얼버무린다. 며칠을 끌 수도 있겠죠. 며칠? 이 어둠 속에서……? 이곳은 완전히 밀폐된 장소다. 그때와 다르지 않다면……, 소리조차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창문은 물론이고 빛이 들어올 만한 틈새도 없다.
“경찰들은 갔을까?”
경서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갔을 거야. 나는 우리가 잡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웃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웃자 경서도 따라 웃었다. 너 이게 장난인 줄 아니? 경서는 웃음 끝에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침울한 표정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쟁취할 수 있는 거지만 투쟁은 시기를 놓치면 안돼. 그는 나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미 내 뱃속에서는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는데……. 형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봐. 내 말에 경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랑? 그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투쟁가에게 사랑은 사치스러운 거야. 아, 그랬구나. 나는 그때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장난일지라도 경찰에게 쫓기는 것만큼은 장난이 아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경서의 진지한 표정을.
“어, 여기 문이 또 있네.”
역시 남자는 쉽게 침실을 찾아낸다. 보기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남자. 침실이잖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다. 만약 이 남자가 손님이라면…… 밀폐된 공간은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된다. 지금처럼 어색하고 답답한 감정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남자와 나는 이런 곳 특유의 미묘한 호감을 재빨리 나눠 가진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구체적인 건 알 필요도 없다. 그저 돈 잘 쓰는 남자와 서비스 좋은 여자라는 것만 알면 된다. 나는 취한 그에게 농염한 웃음을 던질 것이고, 그는 나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풀어지고 흐트러진 표정으로……. 내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남자가 촛불을 켜들고 나온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단정하고 단아하다. 팁을 선호하는 애들한테는 환영받지 못할 인상이다. 그리고 들고 있는 낡은 서류 가방으로 보아, 그가 이런 술집에 자주 오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다. 더구나 남자의 바지는, 너무나 오래 입어 무릎이 툭 튀어나와 있다. 거기다가 굽이 유난히 낮은 구두와 유행이 지난 넥타이……. 모처럼 주말을 맞아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곳까지 휩쓸려 온 모습이 역력하다. 남자의 어정쩡한 태도……. 그러니까 고급 술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그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표정과 움직임, 무엇이든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눈빛. 그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남자는 윗사람 눈치를 살피는 게 몸에 익은 기업체의 말단 사원이거나 관공서의 하급 직원이 틀림없다.
“여관방보다는 낫네요. 냉장고에다가 고급 침대도 있고.”
남자는 싱겁게 말하며 웃는다. 이런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쑥스러운 웃음. 그럴 때면 마치 경서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왔던 사람처럼. 남자도 그제야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저 안에 침실이 있어요. 남자는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듯 말한다. 그래요? 나는 짐짓 놀란 얼굴을 한다. 역시 술집 밀실은 좋군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인다. 남자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댄다. 내가 침착하게 행동할수록 남자는 더욱 안절부절 못한다. 남자의 눈이 자꾸 내 허벅지 쪽으로 향한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남자의 시선을 받는다.
“너무 조용하군요.”
남자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밀실 안에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차오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여자였더라도 이런 감정이 일었을까. 남자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큼큼 헛기침을 한다. 나는 다리의 위치를 바꾼다. 남자의 시선은 내 허벅지를 떠나 여배우의 나신을 향해 있다. 남자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신경은 더욱 남자 쪽으로 쏠린다. 이런 순간에 어디서 귀뚜라미라도 불쑥 튀어나온다면, 나도 모르게 남자의 품속으로 뛰어들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다시 헛기침을 한다. 밖은 어떻게 된 거죠?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 일병…… 전 일병…… 나…… 중대장…… 인데.”
탈영병들이 확실하군요. 그는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내쉰다. 건물을 울리는 확성기 소리가 남자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팽팽한 긴장감을 일시에 쓸어가 버린다. 지금…… 자수를…… 그러면…… 모든 걸……. 중간중간 잘리며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는 무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다. 금방 끝날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한결 밝아진 표정이다. 탈영병이 자수하는 거 봤어요?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당장…… 총을…… 버리고……. 그때 웅웅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총소리가 울린다. 총소리는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어둠을 뚫고 벽 이쪽까지 넘어온다.
“여기 있으면 안돼!”
경서는 경찰이 쏘아대는 가스탄을 피하며 소리쳤다. 빨리 도망가, 바보같이 굴지 말고! 나를 데려가.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며 애원했다. 안돼! 경서의 태도는 확고했다. 너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경서는 마치 자유의 수호자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멀리서 흰색 헬멧을 쓴 남자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경찰이야! 누군가 소리쳤다. 머리 위에서는 계속해서 가스탄이 하얀 분말을 뿌리며 터졌다. 학생들의 표정은 저항 의지로 굳건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학생들과 방독면으로 얼굴을 가린 경찰들. 지나가는 시민들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흥미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잡화상 주인 남자는 도로에 쌓아놓은 물건이 상할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있고, 미용실 여자는 커다란 출입문을 안으로 잠그는 중이었다. 시민 중 누군가가 씨부렁거렸다.
“지금이 어느 땐데 데모야, 데모가…….”
학생들은 경찰에 쫓겨 골목 안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거리에 남아 있는 건 도망치다 잡힌 몇 명의 학생과 이를 구경하는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의 표정엔 호기심과 적대감이 거의 같은 질량으로 배어 있었다. 누구를 향한 적대감이고 누구를 향한 호기심인지 모를……. 아가씬 뭐야? 경찰이 길 한가운데서 쿨럭거리며 서 있는 내게 시비를 걸었다. 나는 허리를 펴며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주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교환된 눈빛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번뜩였다. 그는 내가 데모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고, 나는 선량한 시민의 하나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짧은 순간의 게임은…… 아니, 대치는 나의 승리로 끝났다. 여기서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경찰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뛰어갔다.
“진수야…… 어미다……. 아이구…… 이게…… 웬일이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건 쇠잔한 노파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가족을 동원했군요. 남자가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진수야…… 나…… 형인데…… 제발…… 마라……. 확성기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불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남자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자수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야 물론…… 살아남기도 어렵겠죠. 대개가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자폭하니까요. 또 그래야만 되고요. 남자라면 말이죠. 남자는 낮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자수하면 괜찮겠죠? 자수요? 남자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 커진 목소리는 무언가에 대한 저항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남자는 애써 그런 느낌을 감추려 한다. 벌써 저격병들이 쫙 깔렸을 겁니다. 저격병이라고요? 나의 놀란 목소리에 남자가 돌아본다. 만약을 위해서요. 남자는 만약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만약 다른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다면 그를 먼저 죽이겠다는 말인가. 그들은 하나의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까지 엿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런 모습조차도 경서와 비슷하다.
“이…… 어미가…… 총을…… 제발…… 빈다.”
확성기의 불규칙한 음질을 찢어 버리기라도 하듯 몇 발의 총성이 또 울린다. 이어서 어둠을 가르며 들려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부산하게 움직이는 구둣발 소리. 탈영병은 두 명 같군요. 한 명 이름이 진수고…… 또 하나는…….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며 나직하게 말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 캄캄한 어둠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아마 쉽게 끝날지도 모릅니다. 쉽게 끝나다니요? 내 물음에 남자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는다. 의외로 쉽게 자폭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남자의 어조는 여유를 되찾은 듯 유들유들하다. 탈영병이 두 명이지만, 이곳까지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남자는 본능적으로 행동할지 모른다. 어둠 속의 은신자에서 점차 기회를 엿보는 야수로. 이런 생각 자체가 여자만의 자구 본능이겠지만 경계심이 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오늘 처음 이 지하 술집에서 만났고, 그것도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돌발적인 상황을 피해 이곳까지 숨어들었다. 이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자폭해도 좋고…… 자수해도 마찬가지죠.”
남자의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얼굴은 서서히 이완되고 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안다 해도 어떡하진 못할 겁니다. 수류탄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에요. 남자는 가늘게 웃는다. 이리의 이빨처럼 하얗게 드러나는 남자의 미소는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다. 위험에서 벗어난 순간 돌변하는 습성을 가진 야행성 동물.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겁니다. 남자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마치 모든 위험을 연기에 섞어 토해내듯이…… 괜찮을까요? 내 말에 남자는 다시 웃는다. 걱정 마세요. 일병들인 것 같으니까.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건 보이지 않는 위험이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섬뜩하고 날카로운 느낌. 남자와 나의 시선은 일렁이는 촛불을 향한다. 누가 먼저라기보다 그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니, 불빛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 청년을 처음 본 건 홀 입구에서였다. 청년은 길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불안정한 시선과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몸짓……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시선…… 자꾸 뒤를 돌아보는 태도에서 그가 도망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더구나 동생 세호의 모습을 청년의 파리하게 깎은 머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니, 한순간 그 청년이 세호처럼 군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대하기 직전…… 군대라는 조직의 경직되고 획일적인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세호. 그래서 더욱 청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단순히 세호가 군대에 갔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청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항거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 같은 게 감지됐다. 청년은 계속 홀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홀 한쪽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청년은 흰색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어서 눈에 잘 띄었다. 더구나 각지게 생긴 얼굴과 탄탄해 보이는 몸매, 짧은 머리는 청년의 신분과 생각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청년은 자리에 앉고 나서도 계속 들고 있는 가방을 소중한 물건처럼 다루었다. 그래서 청년에게 더욱 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 길다란 가방이 무언가를 저지를 불순한 물건처럼 보였으니까.
그때 같이 온 양 사장은 스물도 채 안 돼 보이는 여자애와 블루스를 추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맥주를 들이켰다. 양 사장은 여자애를 껴안은 채 연신 싱글거렸다. 그러나 여자애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신사복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점잖게 몸을 흔드는 남자. 그 남자와 여자애는 어느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들은 다음의 파트너로 서로를 확인했다. 무대 위의 밴드는 막 블루스를 끝내고 하드 락으로 연주를 바꾸는 중이었다. 그때 청년이 길다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청년의 움직임은 어딘가 매끄럽지 않았다. 홀을 가로질러가다가 탁자에 부딪치기도 하고, 의자를 넘어뜨리기도 했다. 얼굴 표정도 경직되고 어두워 보였다. 청년은 긴 화장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서도 무언가에 쫓기듯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년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와 부딪쳤을 때까지도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청년은 쓰러진 여자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칠하고 있을 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정중한 태도로 묻는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남자는 이런 상황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처럼 표정 깊숙이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내가 가졌던 경계심은 역시 여자만의 피해의식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을 동물적 본능에 좌우되는 인간으로 치부한 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술이 있어요?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눈을 크게 뜬다. 침실의 대형 냉장고 안에는 양주가 가득할 것이다. 물론 모두 가짜겠지만. 영국산 위스키인 킹 오브 킹스나 프랑스 산 브랜디 헤네시, 독일 산 슈왈츠 월드, 스페인 산 마디라 와인은 모두 가짜 술이다. 남자가 들고 나올 술은 싸구려 국산 양주일 게 뻔하다.
“여기 커티 샥하고 화이트 레이블이 있네요.”
남자의 들뜬 목소리가 침실 쪽에서 들려온다. 얼음도 있고요. 남자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탄성을 지른다. 칵테일 좋아하죠? 남자가 들고 나온 건 영국산 위스키들이다. 커티 샥과 화이트 레이블을 아는 걸 보니 양주에 대한 상식이 보통은 넘는 것 같다. 제가 칵테일을 만들어 드릴게요. 남자는 계속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남자의 천진난만한 모습에서 순수함이 느껴진다, 경서처럼……. 위스키 샤워가 좋겠다, 날씨도 덥고 하니……. 남자는 지금 어두컴컴한 밀실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재료가 있을까요? 내 말에 남자는 힘을 얻은 사람처럼 큰소리로 말한다.
“즉흥적으로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레몬주스 대신 축배 사이다를 넣고.”
남자는 다시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간이 욕실까지 갖추어져 있다. 남자는 그 방의 용도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VIP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별실. 위스키 샤워를 만들려면 오렌지 슬라이스 한 조각하고, 레몬주스 약간하고, 슈거 시럽이 필요하죠. 남자는 정말로 칵테일을 만들어 보려는 것 같다. 그냥 마시는 것도 괜찮아요. 나는 남자의 성의를 가볍게 거절한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내 말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남자는 이런 상황 아래서는 무엇이든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잔 쭉 들이키면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남자는 슬쩍 내 표정을 살핀다. 내가 싫은 기색이라도 보인다면 남자는 아마 실망한 나머지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남자는 오렌지색의 화이트 레이블에 축배 사이다를 넣는다. 그리고 크림 대신 우유를 붓고, 미네랄 워터 대신 오리엔탈 식수를 섞는다. 그런 다음 커다란 동작으로 흔든다. 격렬하고도 리드미컬하게. 그는 이러한 동작을 반복한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조차도 경서와 비슷하다. 그를 이런 곳이 아니라 커피숍 같은 데서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 번쯤 돌아보는 것으로 낯선 남자와의 조우를 끝냈을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좁은 밀실 안에……, 그것도 두 남녀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우연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소다수나 미네랄 워터가 없으니까 맛이 좀 밍밍할 겁니다. 그래도 위스키가 가지고 있는 톡 쏘는 맛은 살아 있을 거예요. 남자는 얼굴에 홍조까지 띤 채 바라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남자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는다. 남자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긴장감이 풀어져 느긋하다.
“고급문화가 옷을 벗으면 빠르게 대중화에 물들게 돼 있지.”
경서와 나는 콜렉터란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연극을 관람한 그는 불만스런 얼굴로 투덜거렸다. 에로티시즘이 돈을 목적으로 이용될 땐 곧바로 저급한 상품으로 전락되고 마는 거야. 투쟁도 마찬가지지. 대중과의 호흡이 비도덕적이 되면 투쟁은 빛을 잃어. 연극 동아리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반정부 투쟁은 고비를 맞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언제나 대중의 성원이 없는 투쟁은 헛된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확실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연극이 관중의 외면을 받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그를 투쟁가에서 연극인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는 계속 예전 연극이 더 연극다웠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그의 주장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너무 너그러워졌어. 성을 포함한 모든 규제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풀려서 거리로 뛰쳐나왔어. 깊이 잠들어 있던 대중들이 에로티시즘에 눈을 뜨니까 너도나도 벗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거기에 발맞춰 새로운 패러다임이 연극계에도 나타난 거지. 그게 사람의 몸을 상품화하는 누디즘으로 발전하고…….”
경서의 흥분된 어조 때문에 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여자의 고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계속 열이 오른 목소리로 연극의 상업성과 예술성에 대해 늘어놓았다. 난 지금 형의 아이를 임신했어요.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벌써 사 개월이 되었단 말이에요. 연극이 살려면 벗느냐 안 벗느냐를 판단하기보다 어떻게 예술적으로 표현되었느냐를 우선적으로 판단해야겠지. 경서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다가 모든 게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어. 청소년들도 그렇고……, 사람들은 이제 잠시도 참지 못해. 아니, 참는다는 것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타인의 목숨도 가볍게 빼앗곤 하지. 그게 문제야. 그런 대중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사상 학습밖에 없어. 경서는 삶을 연극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게 무리였다. 나는 그날 그의 아이를 떼러 가지 않았다.
“부상당한…… 있으면…… 밖으로…… 바란다.”
단편소설|최 인․
다시 칙칙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칵테일잔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쳐든다. 남자는 들고 있던 글라스에 얼음 조각을 몇 개 더 넣는다. 다친 사람이 있나 보죠? 남자의 목소리는 이제 다소 방관적이기까지 하다. 몇 모금의 술이 팽팽하게 일었던 긴장을 풀어주고, 그 위에 여유까지 덧붙여 주었는지 모른다. 죽은 건 아닌지 몰라요. 나는 갑자기 소름이 돋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떤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총소리가 여러 번 들렸으니까 다친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럴까요? 나는 남자의 푸근한 마음에 조금은 안도한다.
“진수야…… 어여…… 이…… 어미가…….”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유화 작전으로 나오는 듯 일제히 앰프 방송을 시작한다. 그런다고 나가겠습니까? 목적이 있을 텐데……. 목적이라니요? 내 말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탈영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변심한 애인을 만나러 왔다든가…… 뭐 대부분 그런 거겠지만……. 애인?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어감이 생경하다. 애인…….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한때는 그 말에 얽매여 인생까지 걸었다. 이제는 거의 사어가 된 말. 남자도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아마 고답스럽고 경직된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온 탈영병만이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이나 지난 거죠?”
남자가 궁금한 듯 묻는다. 아마 서너 시간은 흘렀을 거예요. 나는 같은 은신자의 심정으로 대답한다. 남자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탈주한 죄수들처럼. 아니, 아직 탈주에 성공하지 못한 죄수가 더 알맞을 것이다. 어둠과 불안이라는 형체 없는 틀에 갇혀 있으니까. 더구나 그와 나는 남자와 여자였다. 그것도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신뢰감을 나눌 뿐이다. 이름은 물론이고, 무슨 일을 하며 왜 이곳에 왔는가도 궁금하지 않다. 이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건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는 길뿐이니까. 다행히 남자에게는 건강한 시선과 느낌이 있다.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남자의 눈빛, 그러니까 가라앉고 침착해 보이는 눈빛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긴장감이 그걸 말해준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남자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야, 한번 놀자!”
누군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애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홀 안을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던 여자애. 아니 여자애라기보다 학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이는 앳된 모습이었다. 엷은 베이지색 개더 스커트에 노출이 심한 슬리브리스를 가볍게 입은 모습은 차라리 귀여웠다. 더구나 술이 올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요염하기까지 했다. 남자들의 노골적인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테이지를 돌아다니던 여자애. 그 애가 왜 자꾸 눈에 들어오는지 몰랐다. 싱그럽고 발랄한 모습보다는 너무나 어려 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젊은애들보다 나이가 든 중년 남자들을 상대로 춤을 추거나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뚜렷한 목적 없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낄낄거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다가도, 또는 춤을 추다가도 시선을 더듬어 여자애를 찾았다. 여자애도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몇 번은 마주 바라보았다. 애교스럽게 웃기까지 하면서. 아마 나는 그때, 여자애의 모습에서 지난 시절의 나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던 시절을…….
여자애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려고 진하게 화장도 하고 머리도 볶았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앳된 모습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나이보다 키는 컸고, 엉덩이와 가슴도 불룩했다. 여자애는 그걸 자랑스럽게 흔들며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자애만이 아니었다. 그 애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불건전한 시선이 더 문제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그렇게 써 있었다. 언제라도 기회만 온다면 화끈하게 놀아주겠다. 여자애의 들뜬 눈빛은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온몸에 느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랬다. 여자애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몸을 파는 아이든가, 무언가 남의 것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취하는 아이가 분명했다.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싶어하는 도발적인 시선과 모든 걸 뛰어넘어 버린 듯한 표정. 단 한순간도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역동적인 움직임. 나는 그런 여자애를 쳐다보면서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화가 났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죠?”
내 말에 남자는 양복을 벗다 말고 돌아본다. 혹시 상황이 끝난 거 아니에요? 아직은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의 몸은 생각보다 건강하다. 흰 와이셔츠 겉으로 드러난 탄탄해 보이는 근육이 그걸 말해준다. 협상이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고요. 남자는 덥다는 듯이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하얗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 안에 욕실 없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금방 후회한다. 그곳에 욕실이 있다는 건 남자도 아직 모른다. 욕실이 있었습니까? 남자가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묻는다. 아 아니, 침실이 있으면…… 욕실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내 말에 남자는 뒤를 돌아다본다.
“아, 욕실이 있었군요.”
남자는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지금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곳에 오게 된 동기나 지난 일 따위를……. 아니,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여자와의 섹스일 수도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니스커트를 끌어내린다. 이러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에 꽉 낀 스커트는 좀체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킥 웃는다. 내가 웃는 걸 본 그도 덩달아 웃는다. 남자의 눈과 내 눈이 잠시 허공에서 부딪친다. 아주 짧게. 그렇지만 그 순간 나와 남자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무언가를 서로 용인하겠다는 그 눈빛은 강렬하면서도 짜릿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꾸며지는 음모처럼. 진수란 탈영병은 가족이 전부 동원됐는데…… 다른 한 명은 아무도 오지 않았군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두 명의 탈영병과 한 명의 가족……, 하긴 연락이 미처 안 됐을 수도 있겠죠. 남자는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결론 내린다. 하지만 또 한 명의 탈영병은 가족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홀어머니하고 단둘이 살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형제나 남매끼리 오순도순 살았을 수도 있고. 그런 환경 속에서 큰 아이들이 대개 그런 일을 저지르니까. 그건 탈영병 사정이니까요. 남자는 그야말로 방관자처럼 말한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탈영병의 가족이 떼로 몰려오건, 몰려오지 않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만 무사하면 됐지. 나는 남자를 지그시 건너다본다.
“답답하면 세수라도 하든지요.”
내 말에 남자는 싱끗 웃는다. 나보다는 그쪽에서 먼저 씻어야 될 것 같군요. 나는 얼굴에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다.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벽에 걸린 여배우 사진 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편이 내 몸을 훔쳐보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의 상상은 아직까지 나의 몸을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건 남자의 흔들리고 있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자는 나의 외모와 이미지와 차림새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기며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남자의 상상에 동참한다.
여자는 처음부터 야했다. 테크닉 컬러의 타탄 스커트에 광택이 눈부신 새틴 소재 미니 재킷을 받쳐입은 모습이 그랬다. 특히 진한 화장과 붉게 물들인 머리는 여자의 인상을 조금은 이국적으로 보이게 했다. 거기에다가 둥근 버클이 달린 벨트와 굽이 약간 있는 샌들은 여자의 볼륨 있는 몸매와 어느 정도 어울렸다. 하지만 싸구려 핸드백과 액세서리는 여자의 궁핍한 처지를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모든 것으로 보아 여자는 술집을 전전하며 사는 부류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조그마한 카페라도 차려놓고 놈팡이들과 어울리며 적당히 인생을 즐기는 술집 마담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교양이 밴 얼굴과 리듬을 탈 줄 아는 말투로 보아 대학물은 먹은 듯했다. 그렇지만 여자의 얼굴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온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자리에서는 어는 정도 남자의 기분을 맞출 줄 아는 세련미도 있어 보였다. 물론 침대 위에서의 테크닉은 보통 이상이겠지. 거기다가 아이 하나쯤은 낳아본 것 같고, 가족은 그다지 많을 것 같지 않았다. 기껏해야 여동생 하나 아니며, 남동생 하나쯤은 있어 보였다. 지금은 군대에라도 가 있을 만한 남동생이…….
“소방차가 온 것 같죠?”
남자가 불쑥 소리친다.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든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작전이 벌어졌구만. 남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들떠 있다. 방금 전의 여유 있고 침착했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앰프 소리가 들려온다. 이 일병…… 전 일병…… 나…… 인데…… 귀대하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비상구를 따고 검거조가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검거조요? 나는 청년을 빤히 올려다본다.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밀실 안을 서성거린다. 십분 간…… 주겠다…… 안…… 나오면……. 지금 몇 시죠? 남자는 탁자를 빙빙 돌며 앰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구둣발 소리가 들려온다.
“경서 군입니다.”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내려놓은 건 흰 상자였다. 남자는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지난번 시위 때 분신했죠. 남자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서 군은…… 육신을 불살라 우매한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만이 진정한 투사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죽여서…… 새로운 이념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이걸 나한테 가져온 거죠? 남자는 그때서야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강 열사 유서에 따라서…… 전 지금 바빠요. 일하러 가야 되거든요. 지금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굶어요. 남자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때 정말로 바빴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커피숍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울면서 걷고 또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발을 밟기도 했다. 그런 후에 다시 커피숍으로 돌아갔을 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경서의 유골 상자도……. 그날 저녁 나는 평소처럼 이곳으로 출근했다. 바로 이 나이트클럽 밀실로.
“안에 아무도 없습니까?”
문밖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남자는 숨을 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핀다. 문밖의 사람들은 몇 차례 더 확인하고 물러간다. 정확하면서도 절제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누구죠? 탈영병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외부에서 들어온 검거조 아니면 저격병들이 분명해요. 남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럼 문을 열지 그랬어요? 그런데…… 혹시나 해서요. 남자는 그들이 탈영병의 일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탈영병은 두 명이 틀림없죠? 남자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글쎄요?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총소리나 앰프 방송에 의하면 두 명이 분명하다. 진수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전 일병. 전 일병…… 전…….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리가 없다. 내 태도를 보고 남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왜? 아는 사람입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나하고 성이 같아서……. 아, 탈영병 성이 전씨였습니까? 남자는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인다. 얼마 전에…… 군대에 간 동생이 있거든요. 세호라고……. 아, 네에…….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다. 남자는 소파 위에 걸쳐놓았던 양복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입는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단추가 잘 꿰어지지 않는다. 허둥대는 남자의 모습에서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빛을 향한 갈구가 느껴진다. 현실을 정확히 읽고 대처하는 사람. 그런 점만은 경서와 다르다. 체제에 대항하고 항거한 경서……. 체제 자체를 부정한 탈영병……. 물론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순응하는 남자의 진지한 모습이 아름답다. 어쭙잖은 이념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거나, 인생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보다.
“내가 나가 보겠습니다.”
남자는 성큼 문 앞으로 다가선다. 그 사람들…… 정말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죠? 틀림없어요. 아마…… 잠시 후면 상황이 끝날 겁니다. 특공대가 들어왔으니까. 아, 덮다. 촛불도 꺼져가고…….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문고리에 손을 댄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내 목소리에 문을 열려던 남자가 주춤 멈춰 선다. 남자도 그 순간 자신이 지나치게 허둥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럴까요? 서두를 건 없잖아요. 어차피 여긴 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또 지금은 위험하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상황이 끝난 다음 나가도 되겠어요. 남자는 목이 타는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나…… 대대장…… 인데…… 요구한…… 여자…… 테니까.”
앰프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총성이 울린다. 아, 여자를 들여보내라고 했군요. 남자는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히죽 웃는다. 역시 요즘 젊은애들은 여자나 애인 따위에 과감히 목숨을 걸지. 진수야…… 제발…… 이 형…… 말 좀……. 그들은 마지막 공세를 취하는 것처럼 일제히 앰프 방송을 해댄다. 끝날 때가 된 것 같군요. 남자가 중얼거린다. 그때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밝아진 불빛으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다.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인다. 남자도 눈을 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젠장! 남자가 투덜거린다. 잠시 후 남자가 천천히 팔을 내린다. 그 순간 다시 불이 나가며 총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한 발, 두 발, 세 발. 이에 대응하는 자동소총 소리. 그 소리에 이어 연속해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고함 소리. 남자는 밀실 바닥으로 재빨리 몸을 던진다. 나도 남자처럼 배를 깔고 엎드린다.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동공을 조절한다. 그러나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남자의 모습은 거무스레한,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처럼 보일 뿐이다. 나는 남자 곁으로 기어간다. 총소리에 이어 뛰어다니는 구둣발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들려온다. 나는 다시 남자를 쳐다본다. 그때 나는 남자의 손과 내 손이 마주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가 손을 빼려 한다. 나는 남자의 손을 꽉 움켜쥔다.
“탈영병은 사살됐습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소리친다. 그와 동시에 밝은 불빛이……, 전기가 들어온다. 마치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강렬한 충격과 함께. 이진수 일병하고 전세호 일병 사체를 수습하라구! 지휘관인 듯한 남자의 굵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모든 것을 끝냈다는 듯이. 전세호 일병…… 전세호…….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극심한 현기증이 엄습해 온다. 세호가……. 왜 아는 사람입니까? 남자가 약간은 경직된 어조로 묻는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귀가 멍멍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탈영병이…… 아는 사람입니까? 남자가 재차 다그친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는 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마치 어둠을 향해 돌진하듯이.


최 인
․1963년 경기 여주 출생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로 등단
․주요 작품 「비어 있는 방. 안개 속에서 춤을 추다」 등
․2002년 1억원 고료 국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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