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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신작단편/이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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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79회 작성일 05-05-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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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가 피었다

이호림





시장에 가면 그녀가 있다.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시장에 들르는 시각에는 있다. 그녀가 시장에 나와 있는 시간대를 내가 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시장에 나올 때쯤 해서 시장으로 나간다. 꼭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를 보면 괜시리 기분이 상승되고 즐거워지고 그녀를 보지 못하면 마치 목적의식을 상실한 사람처럼 되는 것을 보면, 그녀를 보는 것이 시장에 나가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이다시피 시장에 나가는 습관을 붙이게 된 것은 그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녀를 발견하기 이전에 나는 시장에 나가야 할 이유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내가 시장에 나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이다.
나는 푸른 장미를 사러 시장에 나갔었다, 시장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고 세상의 온갖 물건을 다 파는 거니까 당연히 푸른 장미도 있을 줄로 알고. 장미꽃을 사려면 꽃가게를 찾아야지 시장을 찾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핀잔을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체로 성미가 불같이 성급한 사람이 그러할 텐데, 그런다고 나는, 전후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대뜸 핀잔부터 내놓는 그 사람의 불같은 성정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꽃을 사려면 꽃가게에 가야 한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푸른 장미를 사러 꽃가게를 찾았었다.
“장미가 있습니까.”
내가 장미를 찾으면 꽃가게의 주인은 자신 있게 ‘있지요’ 말하면서 한아름은 되는 장미꽃을 보여주고는 했다. 빨간 장미, 흰 장미, 흑 장미, 노란 장미. 그러나 늘, 내가 찾는 푸른 장미는 꽃가게의 주인이 보여주는 한아름의 장미다발 속에 없었다. 나는 실망하여,
“내가 찾는 장미는 푸른 장미인데요.”라고 말하면 꽃가게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 말한다.
“푸른 장미요? 세상에, 푸른 장미가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실망스럽다 못해 난감하다. 꽃가게의 주인이 장미의 종류에 어떤 게 있는지도 모르고 외려 손님에게 되물어 오냐는 거다. 꽃가게의 주인이 꽃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꽃가게의 주인이라면 손님이 찾는 꽃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꽃가게는 운영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손님을 위해서나 주인 자신을 위해서나. 모두 다 난감해지는 일이니까.
나는 푸른 장미를 사러 적잖은 꽃가게를 돌아다녔었다. 나의 가짜 프로스펙스 신발의 밑창이 헤져 신발을 다시 구입해야 했을 만큼.
푸른 장미를 찾는 나의 찾음에 대한 꽃가게 주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세상에 푸른 장미가 있느냐고 되레 내게 물어오는 경우와 세상에 푸른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는 경우였다. 세상에 푸른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는 꽃가게의 주인들은 세상에 없는 푸른 장미를 찾는 나를 불쾌히 여겼다, 꼭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들처럼. 그러나 나는 기필코 나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나는 결코 그런 꽃가게의 주인들을 모욕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새로 신발을 구입하던 날-나는 이번에는 가짜 나이키 신발을 구입했는데 가짜 프로스펙스 신발은 튼튼하지 않고 너무 쉽게 닳아버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꽃가게에서는 푸른 장미를 구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꽃가게는 찾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꽃의 공장, 도시 외곽에 위치한 화원을 찾았다. 그 중에서도 당연히 장미의 화원을 찾았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꽃의 공장, 화원은 직접 꽃을 재배하는 곳이니까 그곳에 가면 없는 꽃이 없을 것이었다. 찾는 꽃이 없으면 지금 당장은 없더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하면 만들어서 줄 것이다.
“푸른 장미가 있습니까?”
“푸른 장미? 그런 장미는 없소.”
“그럼 주문을 해놓지요. 언제까지 만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죽고 당신이 죽고 할 때까지도 만들 수 없소. 세상에 푸른 장미는 없고 만들 수도 없는 거니까.”
“아니, 꽃의 공장인 화원에서 푸른 장미를 만들 수 없단 말입니까?”
“그래, 어쩔 테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꽃의 공장인 화원에서도 푸른 장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니. 나는 이 화원은 엉망인 화원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지체 없이 그곳을 나와 다른 화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화원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장미가 있는 화원도 없었고, 푸른 장미를 만들어주겠다고 주문을 받는 화원도 없었다. 모두가 다 푸른 장미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두르거나 혀를 차거나 내게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푸른 장미를 찾기 위하여 도시 외곽에 있는 적잖은 화원들을 돌아다녔다, 새로 산 가짜 나이키 신발이 밑창이 닳아 헤어질 만큼. 나는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 신발이나 그게 그거, 튼튼하지 않고 밑창이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번에는 가짜 아디다스 신발을 사 신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짜 아디다스 신발은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보다는 튼튼하고 밑창이 실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가짜 아디다스 신발을 구입하던 날, 나는 약간의 재정상의 궁핍을 느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한달 새에 비록 가짜이기는 하지만 두 켤레의 신발을 사 신어야 했던 까닭이었다. 나는 재혼을 해서 나보다 조금은 사정이 나아진 엄마에게 SOS를 청해볼까도 싶었지만 꾹 참고 약간의 궁핍 속에서 결론지었다. 세상에 푸른 장미는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고 푸른 장미를 구입하는 일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고. 세상에 푸른 장미는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였지만 사실은 재정상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새로 구입한 나의 가짜 아디다스 신발이 전의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 신발보다 튼튼하고 밑창이 실한지를 자신할 수가 없었다. 나의 가짜 아디다스 신발이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보다 튼튼하고 밑창이 실하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하고 그것들과 진배없다면, 내가 푸른 장미를 계속해서 찾아나설 경우, 조만간에 또 한 켤레의 신발을 구입해야 한다는 얘기가 될 텐데, 그건 지금의 나의 재정 상태로는 거의, 아니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짜 아디다스 신발가게에서 대로를 향해 정확히 십오 보 떨어진 곳에서였다. 나의 발걸음으로 그렇다는 거고 다른 사람의 발걸음으로는 십사 보가 될 수도 십육 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경찰모자에 검은 우산을 든 키가 내 어깨만큼밖에 오지 않는 노인이었다. 비가 오기는커녕 햇볕이 말짱한데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은 좀 이상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진작에 노인을 시야에 두고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노인이 내가 가짜 아디다스 신발 가게를 나와 정확히 십오 보째 발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내게 말을 붙여왔다. 그러니까 노인은 나의 발걸음으로 가짜 아디다스 신발가게에서 대로를 향해 십오 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자네, 푸른 장미를 찾나?”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랬다. ‘이 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중얼거려야 하는 내가 비참하게 여겨졌다. 내 어깨만큼밖에 오지 않는 노인을 나는 결단코 무시하는 눈빛이 아니고는 바라볼 수가 없었는데, 무시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노인이 나의 깊은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에서였다.
“그런 건 왜 묻소.”
“이유만 타당하다면 내가 자네에게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알려주려고 하지.”
믿을 수 없었다. 내 어깨밖에 안 오는 작은, 난쟁이 같은 노인이 그보다 얼굴 두 배는 더 큰 나도 모르는 장소를 안다는 게 도시 가당찮았다.
“노인이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안단 말이오?”
“그렇지. 알지.”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이걸 보면 믿겠나?”
노인이 내게 건네 보인 것은 부채꼴 모양의 푸른 깃털이었다. 얼핏 들여다보아서 깃털 같아 보였다는 거고, 사실 그것은 깃털은 아니었다. 꽃이파리였다.
“푸른 장미꽃의 이파리일세.”
“이게 푸른 장미꽃의 이파리라는 걸 어떻게 보증한단 말이오.”
“글쎄, 난 자네에게 증거를 보였고, 내가 제시한 증거를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자네한테 달린 문제지. 자네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나는 안 온 것처럼 돌아갈 밖에.”
노인이 돌아섰다. 노인이 건네준, 노인이 푸른 장미의 꽃이파리라고 주장하는 이파리가 나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라지려는 노인의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내가 내 어깨밖에 안 오는 난쟁이 같은 노인에게 매달려야 한다는 게 몹시 언짢게 여겨지는 일이긴 하였지만, 나는 마침내 노인을 불러 세웠다.
“그래, 푸른 장미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노인이 다시 내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푸른 장미를 찾으려는 이유를 대면, 그 이유가 내게 타당하게 들리면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내가 푸른 장미를 찾는 이유를 대란 말이지?”
“그렇네.”
노인은 참 까다로운 인물이라는 생각이었다. 노인은 누구나 다 까다로운 거겠지만, 이 자는 그 도가 특히 심한 듯했다. 내가 푸른 장미를 찾는 이유(?), 그 이유를 들어보고 그의 귀에 타당하게 들리면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타당하게 들리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겠다, 신경질나는 조건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귀에 타당하게 들리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결국 그, 노인의 비위에 맞는 이유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물여덟 해 동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일들 가운데의 하나였다. 스물여덟 해 동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일을 지금에사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너무도 어려운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돈이 드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전에 푸른 장미를 바치고 싶어서 그러오. 나의 어머니는 작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나는 어머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어머니의 여린 가슴에 못을 박고 있었나를 깨닫게 된 거요. 그때 나는 감옥에 있었고, 감옥 안에서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접했던 거요. 감옥 안에서 나는 맹세했었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어머니를 닮은 푸른 장미를 갖다 어머니 영전에 바치고 세상이 다 아는 불효자로서의 나를 속죄하겠노라고 말이오.”
나의 얘기는 노인의 귀에 타당하게 들렸던 것 같았다. 노인이 꽤 감동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이윽고 말했다.
“자네의 얘기가 내 귀에 타당하게 들리는군.”
이로써 나는 스물여덟 해 동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성공한 셈이었다.
“자네에게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네. 자네가 세들어 사는 동네에서 시내 방면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네. 그 재래시장을 뒤져보게. 분명히 자네가 찾고자 하는 푸른 장미를 찾을 수 있을 걸세.”
내가 세들어 사는 동네에서 시내 방면으로 두 정거장이라면, 뻔했다.
“길암시장을 말하는 거요?”
“그 시장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모르겠네. 길암시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여간 그 시장을 찾아보게.”
그리고는 노인은 가겠다는 말도 없이, 지극히 불손하게 돌아서서는 성큼성큼 나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간단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불손하게 돌아서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노인을 세워놓고 한번 따지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잠시 참으면 내가 노인을 세워놓고 따지지 않은 게 현명한 처사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이미 노인으로부터 푸른 장미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고, 내가 노인으로부터 알아내고자 하는 것을 알아낸 이상 노인이야 사라지든 말든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사라질 일이라면 사라지는 데 조금 예의와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불러 세워 왈가왈부하는 건 시간 낭비겠다.
길암시장에 가면 푸른 장미를 찾을 수 있다는 노인의 말을 나는 믿었다고도 믿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노인의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노인을 만난 다음날부터 내가 세들어 사는 동네에서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길암시장을 찾았다. 나는 매일 길암시장으로 나갔고 그리고 푸른 장미를 찾았다. 나는 꼭 한달 하고도 나흘을 길암시장으로 나가 푸른 장미를 찾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푸른 장미를 찾지 못하였다. 그동안 내 가짜 아디다스 신발의 밑창이 닳아 헤지고 말았다. 내 가짜 아디다스 신발의 밑창이 닳아 헤지던 날 나는 길암시장에는 푸른 장미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내가 찾을 수 없는 장소에 꼭꼭 숨어있거나 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밑창이 닳아 헤진 내 진짜 아디다스 신발의 밑창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내가 만난 노인을 생각했고, 이윽고 노인을 욕했다.
나는 노인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내가 한 거짓말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길암시장에 없는 푸른 장미를 있다고 했다는 거고, 내가 한 거짓말에 복수를 하려 한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꾸며서 한 것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멀쩡히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잘 살고 있기까지 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물건을 훔치고 감방을 갔다 오고 밑창이 헤진 가짜 신발들만을 신고 다니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어머니는 전혀 가진 게 없지는 않은 놈팽이를 꾀어 차고 앉아 행당동에서 누구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었다. 내가 푸른 장미를 찾는 것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내가 푸른 장미를 찾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어머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감방에 있을 때, 내가 감방에 있었던 것은 1998년 봄에서 2000년 여름까지였으니까 그 사이의 언제쯤이었을 텐데, 감방의 쇠창살 너머 들판에 5월에서 6월 사이가 되면 푸른 장미가 피었다. 나는 그때 푸른 장미를 처음 보았는데, 내게 푸른 장미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형형색색의 수많은 장미꽃들을 보아왔지만 푸른 장미를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지 싶다. 발견이란 늘 경이로운 것이었다, 비록 감방의 어두운 쇠창살 안에 홀로 갇혀 있다 하더라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더욱 경이롭게, 더욱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쇠창살 너머로 들판의 푸른 장미를 바라보면서, 정확히는 훔쳐보면서 경이로운 한편으로 자유를 느꼈고, 내가 어두운 쇠창살의 감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푸른 장미를 바라보면서 경이로운 한편으로 자유로워지던 나는 언제부턴가 저 푸른 장미가 틀림없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뜬금없는 확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푸른 장미를 내 수중에 넣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리 되리라는 확신이었다.
출옥하던 날, 무엇보다도 먼저 푸른 장미가 피어있는 그 감옥소 옆 들판을 찾았다. 내가 출옥한 것은 6월초, 그때까지 아직 장미의 시절이었는데, 나로서는 무척 바란,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나에게 행운과 행복을 줄 푸른 장미를 수중에 넣어 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 들판에 푸른 장미는 없었다. 온통 빨간, 앵두서닛빛 장미들뿐이었다. 나는, 내가 들판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여 내가 있던 감옥소를 중심으로 하여 몇 번을 푸른 장미가 있던 들판의 위치를 재확인해야 했다. 확인 결과는 내가 정확한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 막무가내로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던 푸른 장미는 그곳에 없었다. 온통 빨간 장미들뿐이었다. 나는 나의 행운에 대하여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빨간 장미가 핀 것을 푸른 장미가 핀 것으로 착각했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하였지만 잠시였다. 나는 나의 행운에의 기대는 늘 배반당해 왔고, 지금 푸른 장미들이 돌연 빨간 장미가 된 것은 나의 행운을 방해하는 그 엿 같은 부조화의 손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행운에의 기대를 배반당한 나는 당연히 분노했다. 그의 갈증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무화과가 그 기대를 저버리자 저주를 내렸던 예수처럼, 나 역시 빨간 장미에게 화가 났다. 빨간 장미에게 저주를 내렸다. 일일이 빨간 장미들의 목을 따 땅에 내버린 후 발로 밟아 짓뭉갰다. 그 작업을 하는데 거의 반나절이 걸렸고 나는 한 송이 장미도 결코 남겨놓지 않았는데, 버려져 짓밟힌 장미가 주위의 들판을 핏빛처럼 붉게 물들였을 정도였다. 누군가 나처럼, 감옥소 안에서 푸른 장미를 보며 마음을 설레고 있다면 오늘 나의 이 행위를 저주하며 가슴 아파하며,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제로 듣기에 결코 좋지 않은, 귀에 거슬리는 욕지거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 무지몽매한 도적놈의 새끼. 연약한 꽃은 왜 꺾고 짓밟는 거야’. 나는 귀에 거슬리는 욕이었지만 괘념하지 않고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감옥소 밖에 있고, 자식은 감옥소 안에 있었으니까. 자식이 무슨 욕을 하든, 욕을 통해 내 신경을 자극하려 하든, 결국 배알이 꼴리고 아니꼬워질 건 자식일 뿐이었다.
단 한 송이의 예외도 남겨 놓지 않고 장미꽃을 처형시킨 후 찾아간 곳은 어머니였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내가 어머니를 찾아간 것은 적잖은 실수였다. 어머니는 내가 감옥소에 들어가 있던 그동안 재혼을 했고, 어머니의 재혼한 남편, 나의 새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장성한 나 같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새아버지에게 나의 존재에 대하여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존재가 새아버지에게 알려지게 될까봐 전전긍긍해했다. 어머니의 그 모습은 몹시 안쓰러운 바가 있었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런 안쓰러운 감정을 보였다면 감정이 상코 뻗대는 심정이 일었겠지만 상대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나는 뻗대는 마음이 없었다. 나는 새아버지에게 나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 어머니의 집을 나가기로 했고, 어머니는 고분고분 사라져주는 내게 고마움과 함께 미안스러움을 느꼈는지 나의 손에 두툼한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나는 보지 않고도 그 꾸러미 안의 내용물을 짐작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이럴 필요 없어. 늘 하는 얘기지만 나는 이미 어른이고,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갈 수가 있으니까.”
“받아둬. 이 돈은 어차피 네 거니까. 네 이름으로 들어두었던 적금을 탄 거야. 네가 나오면 줄려고 일년 전부터 보관해 두고 있었던 거야.”
“그럼 엄마, 엄마 재혼에 참석도 못 했는데 그 돈을 내 부조돈으로 받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받아 가. 당장 한끼 끼니도 해결할 능력이 없을 녀석이. 또 도적질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
나는 가짜 아디다스 신발의 밑창이 닳아 헤지던 날, 갈등에 사로잡혔다. 푸른 장미를 찾아 길암시장을 계속 헤매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짜 아디다스 신발 역시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 신발과 진배없었다. 가짜 아디다스 신발은 가짜 프로스펙스나 가짜 나이키 신발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으나, 기대는 한달 하고도 나흘 만에 가짜 아디다스 신발의 밑창이 닳아 헤짐으로써 여지없이 무너졌다. 가짜는 하는 수 없었다. 가짜에 기대를 건 내가 잘못이었다. 나는 가짜 신발들에 화가 났고, 신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짜 신발들을 신고는 결코 푸른 장미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푸른 장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가짜가 아닌 진짜 신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갈등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나는 진짜 프로스펙스 진짜 나이키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사 신을 만한 돈이 없었다. 진짜는 고사하고 가짜 신발들마저 사 신을 만한 돈이 없었다. 넉 달 전 어머니가 나에게 주었던 돈은 이제 거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전에 이렇게 엄청난 고민에 빠진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나의 행운을 찾아야 했다. 그게 나의 인생에 대한 나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는 나의 행운을 찾아 나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 프로스펙스 진짜 나이키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사 신을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해볼까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는데, 어머니가 잘 살고 있지 않다면 도움을 청해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도움을 청하기가 뭣했다. 어머니가 돈을 주면서 나를 배웅했을 때 나는 그것이, ‘너와는 이것으로 끝이다’라는 뜻이라는 걸 감지했었다.
머리가 빠질 정도의 고민은 나와는 체질적으로 운명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오래 고민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나의 아주 오래되고도 고약한 습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습관이 고개를 드는 탓이었다.
감옥을 나오면서, 이번이 세 번째 출소였는데, 나는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푸른 장미가 있었으니까. 앞으로의 나의 인생은 행운뿐이라는 뜬금없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들판의 푸른 장미가 하루아침에 빨간 장미로 돌변해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었다. 재수가 옴봍은 놈은 순식간에 푸른 장미가 빨간 장미가 되고 빨간 장미가 노란 장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푸른 장미를 찾아갔다가 빨간 장미 밖에는 보지 못하고 만 경험은 뼈저린 경험이었다.
나는 이번 딱 한번만이라는 전제를 깔고, 남의 물건을 다시 한번 훔치기로 했다. 가짜 신발들이 아닌 진짜 신발을 훔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제서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민이 가라앉았다. 나는 불안에서 탈출했고 안정을 되찾았다.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의 본업으로 돌아왔으므로 나는 바빴다. 훔칠 물건과 장소를 물색해야 했고, 어느 시간에 훔쳐야 가장 안전하고 소리가 없을까를 측정해야 했다. 이 일을 하는데 나는 꼬박 이틀을 투자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내가 점찍어둔 아디다스 매장에 이미 살핀 가장 안정된 시간에 나갔다. 내가 훔치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대로 확정한 시간은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였다. 그때가 저녁시간대였고 해가 기우는 시간대이기도 해서 사람들의 주의가 산만해지고 흩어지는 까닭이었다. 나는 찍어두었던 아디다스 신발을 훔치고, 내가 매장에 들어갔을 때 네 명의 손님들이 매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그들 네 명의 지갑을 털고, 금고 안에 든 동전은 빼고 지폐를 몽땅 털어갖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는데 채 15분이 안 걸렸다. 내가 진짜 아디다스 신발과 손님들의 지갑과 금고 안의 지폐를 털어갖고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고, 아무도 몰랐다. CCTV에조차도 나의 절도행각은 잡히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의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만사는 불여튼튼인 게 좋았다. 기계는 사람 같지 않고 빈틈이 없어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CCTV가 있는 매장은 빼고 없는 매장을 골랐다. 나는 사람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되었고, 기계는 의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푸른 장미를 찾아 길암시장을 헤매는 나의 모습은 폼이 났다. 시장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았을지 몰라도 나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랬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푸른 장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젊은양반, 얼마 전부터 난 매일 젊은양반을 보는데, 한번도 무언가를 사들고 가는 모습은 보질 못했소. 시장에 나오면서 아무것도 사 가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소. 그럼 아예 시장엘 나오지 말든가. 혹시 우리 재래시장의 물건을 무시하는 게 아니시오.”
“무시하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만 제가 찾는 물건이 없어서 빈손으로 가는 것뿐이지요.”
“젊은양반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데.”
“장미지요. 장미 중에서도 푸른 장미.”
“푸른 장미? 그거라면 꽃집엘 가야 할 게 아니오.”
“제가 찾는 장미는 푸른 장미라니까요. 일반 장미가 아니고요.”
“푸른 장미는 뭐 특별한 게 있소?”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군요. 푸른 장미는 특별해 일반 화원에서는 팔지 않지요. 이런 시장에서만 구할 수가 있는 거라구요.”
“아, 그게 그런 거였소?”
때로 나의 얼굴을 익힌 시장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때로 나는 그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기도 하고 때로 불친절하게 대답하지 않기도 했다.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던 것은 그들이 질문을 해와서였고, 불친절하게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귀찮아서였다. 예를 들자면, 방금 전에 생선가게 주인과 나의 푸른 장미에 대하여 얘기를 주고받고 왔는데, 이번에는 잡화물가게 주인이 또 물어올 때와 같은 경우였다. 한번 얘기했으면 그만이지 묻는 사람이 다르다 하더라도 두 번씩 얘기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시장에서 나에 관한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하나는 내가 아주 친절하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몹시 불친절한 청년이라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엇갈린 소문 때문에 시장 주인들 사이에서 언쟁이 오고가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주먹다짐까지 오고간 경우가 있었다고까지 했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다가.
헌데 너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놀라운 일이냐고? 혹시 푸른 장미를 찾은 게 아니냐고? 아니다. 푸른 장미를 찾은 게 무슨 놀라운 일이냐. 당연한 일이지.
너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진짜 아디다스 신발 말이다, 그것의 밑창이 헤졌다는 것이다. 보름 만에 말이다. 가짜도 한달은 가는데 진짜가 보름 만에 헤졌다는 것은 놀랍다 못해 까무러칠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기보다 너무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훔쳐온 그 매장을 찾아갔다. 여기서 가져간―차마 훔쳐갔다고는 할 수 없어 가져갔다는 다소 완곡한 표현을 쓴 건데―진짜 아디다스 신발이 보름 만에 밑창이 헤졌다고 하자, 매장 점원이 그럴 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내가 건네준 나의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한참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건 자기네 매장에서 판 물건이 아니라고 힘을 주어 단언했다. 점원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보름 만에 밑창이 헤진 이 진짜 아디다스 신발은 이 매장에서 판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매장에 있던 물건이 분명하다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손님. 하지만 이 신발은 저희가 판 물건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팔았든 안 팔았든 이 신발이 보름 전에는 이곳에 진열되어 있었다니까.”
“손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희가 그 신발을 판 적이 없다는 겁니다. 팔지 않은 이상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거지요.”
점원의 확고부동한 태도가 내 안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혹시 이 점원이 이 신발이 도난당한 물품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점원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 건방진 점원이 이 신발이 도난당한 물품이고, 나를 그 도난의 범인으로 의심하고, 나를 신고기관에 신고하는 게 아닌가 싶어져서였다. 적당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점원에게 따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매장의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캭 가래침을 끌어올려, 탁 하고 길바닥에 내뱉었다. 가짜보다도 못한 진짜 아디다스 신발과 가짜보다도 못한 진짜 아디다스 신발을 파는 점원에 대하여 한마디 항변조차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워서였다. 캭, 나는 다시 한번 가래침을 끌어올려 보라와 푸른색 보도블록의 길바닥에 내뱉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터벅터벅 길을 내려갔고, 시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 내가 시장을 찾은 것은 아마도 몸에 밴 습관 탓이었을 것이었다. 그날은 푸른 장미를 찾을 생각이 없었고, 푸른 장미는 안중에 없었으니까.
시장통에 들어서서 몇 걸음 걷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시장통의 초입에서 몹시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시장통은 늘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곳이지만, 그날 무심코 내가 들은 시끄러움은 종류가 달랐다. 심하게 다투는 소리였다. 나의 시선은 자연히 심하게 다투는 쪽으로 갔다. 어깨가 분명한, 돼지처럼 살이 디룩디룩한 두 명의 젊은 녀석이 길가로 나와 있는 채소가게의 좌판을 뒤집어 엎어대고 있었다. 채소가게 주인인 듯한 아저씨는 일찌감치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채 망연해하고 있었는데, 돼지처럼 디룩디룩한 두 명의 젊은 녀석들이 일찌감치 패대기를 치고 기를 빼놓은 탓 같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옳다구나’ 싶었다. 도적질이 내 전공분야라면 싸움은 부전공쯤 되었다. 진짜 아디다스 신발의 부실함과 아디다스 매장의 점원놈 때문에 열을 받고 있던 터라, 나의 이 고열을 풀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싸움이 고맙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나는 성큼성큼 싸움의 장소로 갔고, 전후사정 가릴 것 없이,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고 다짜고짜 그랬다.
“어이 형씨들, 광명한 대낮에 이거 무슨 행패야.”
“어, 행패? 이거 뭐하는 새끼야. 너 다시 한번 지껄여봐.”
“귀가 시궁창으로 뚫렸나. 한번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무슨 리바이벌을 바래. 리바이벌은 공짜가 없지.”
“어, 이 새끼가 간땡이가 물에 부었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조동아리를 놀리고 지랄하는 거야.”
참, 새끼가 입도 걸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맞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누가 나를 새끼라거니 지랄을 떤다거니 간땡이가 부었다거니 하는, 상식 밖의 말을 퍼부어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내 기억이 가 닿을 수 있는 어린시절부터 그랬는데, 그러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박질을 했고, 내 기억은 니미씨팔놈이라고 나를 욕한 녀석과의 싸움박질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새끼라고 욕한 녀석에게로 번개처럼 나아가 면상을 두 대 후려갈겼다. 나는 결코 먼저 폭력을 사용할 의향은 아니었다. 나는 돼지처럼 디룩디룩 살이 찐 두 명의 젊은 녀석들이 먼저 폭력을 휘둘러오면 그제서야 방어차원에서 폭력을 사용할 참이었었다. 그런 내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은 녀석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사실의 방증이었다. 싸가지가 없는 놈들은 매가 약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그게 옛말인지는 불확실한 거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거니까, 나는 일단 매를 든 거니까 녀석을 물씬 패주기로 했다. 그래서 녀석을 훈육시키기로 했다. 내가 그의 동료를 물씬 패주면서 훈육시키자 그의 동료를 안 되게 여겼든지 다른 한놈이 내게 덤벼왔다. 나는 놈의 공격을 제비처럼 날래게 피하면서 놈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서, 놈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놈도 물씬 패주었다. 훈육시켰다. 옛말에 그른 건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기고만장이고 안하무인이던 녀석들이 몇 대 쥐어맞고 나니까, 실은 떡이 되게 맞은 거지만, 설설 기면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는 녀석들을 좀더 패줄까도 싶었지만, 아디다스 매장에서 받은 화도 이미 풀렸고, 꽁무니를 빼는 녀석들을 더 팬다는 것은 매의 낭비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그만두었다. 녀석들은 이때다 싶게 줄행랑을 놓았고, 젊은 사람을 다시 보아야겠는 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인지 모르겠는 그 말은, 그러나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매일 할 일 없이 하염없이 시장통을 뒤지고 다니는 나를 놈들과 한통속으로 알았다가 그게 아닌 걸 알고 새삼스러워져 내뱉는 소리였다.
“고맙네. 젊은양반.”
내가 녀석들을 패는 동안 정신을 차린 채소가게 주인이었다.
“아닙니다. 이 일에 내게 고마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나는 단지 아디다스 매장에서 받은 나의 화풀이를 한 것뿐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신가. 내 채소를 구해주고 지켜주었는데.”
그때였다, 내가 푸른 장미를 본 것은.
나는 시장에 가면 푸른 장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날 내가 만났던 낯선 노인의 말을 진작에 의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가짜 아디다스 신발은 진작에 결단이 났고 훔친 진짜 아디다스 신발마저도 보름을 못 넘기고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인은 얼토당토않은 노인이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장통을 어슬렁거리며 다니기를 그만두지 않았던 것은 미련 때문이었다. 노인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앞으로 얼마가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여전히 남아있는 내 인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인생이 회복되기를 원했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인생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행운이 필요했다. 행운이 내게 찾아오지 않는 한 나의 미래는 나의 과거나 현재만큼이나 암담했다.
아니다. 내가 본 것은 푸른 장미가 아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착각에 빠졌을 뿐이었다.
아가씨였다. 채소가게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가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채소가게 안에 있었던 건지 지금 막 도착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결에 나타난 그녀가 모처럼 몸을 풀어 땀이 나는 나의 얼굴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었던 것이었다. 푸른 꽃무늬의 손수건. 내가 푸른 장미라고 착각했던 것은 그 푸른 꽃무늬의 손수건이었다.
“땀을 닦으세요. 땀이 비 오듯 해요.”
“아, 예.”
나에게 건네질 때는 빳빳하게 다려져 깔끔하던 손수건이 나의 땀으로 금세 걸레처럼 젖어들었다. 손수건을 되돌려주는 나의 손이 약간 떨렸다. 민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문 닫힌 아디다스 매장으로 가서 식은죽 먹기로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아디다스 신발 열 켤레를 훔쳐 나왔다. 그러면서 나는 훔친다는 감정은 없고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뿐이었는데, 그래서 열 켤레의 아디다스 신발을 훔쳐 나오기 직전 매장 한복판에 오줌까지 깔기고 나왔다. 내가 열 켤레의 아디다스 신발을 훔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켤레면 족한데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은, 진짜 아디다스 신발이 가짜 아디다스 신발보다 못한 것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매장 점원의 야비한 오리발에 일침을 놓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는 다음날부터 훔친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시장으로 나갔다. 나는 여전히 푸른 장미를 찾는 나였다. 나는 아직 푸른 장미를 못 찾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시장에 나가는 한 가지 목적이 더 생겨나 있었다. 채소가게 주인의 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유치원 보모였는데, 일을 끝내고 여섯시 이후로는 그녀의 부모를 대신하거나 아니면 부모와 함께 채소가게를 지켰다. 그러니까 여섯시 이후에 시장에 나가면 꼭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보다 일찍 혹은 늦게 나오는 수도 있었다, 유치원 일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거나 늦게 끝나거나 할 경우였다.
나를 보면 그녀는 늘 환한,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여주고는 했다. 그녀의 환한 미소와 만나면 나는 기분이 좋았다. 몹시 기분이 우울하거나 나쁘거나 하더라도 그녀의 미소에 맞닥뜨리면 봄눈 녹듯 풀리고 좋아졌다. 미소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내게 말을 붙이기도 했고, 때로는 지나가는 나를 붙들어 세우고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차나 다과를 제공하기도 했다. 나는 저녁 여섯시 이후에 시장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낙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진짜 아디다스 신발이 보름꼴로 밑창이 닳아 헤지더라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훔쳐온 열 켤레의 아디다스 신발 중에서 두 켤레가 밑창이 닳아 헤졌을 때였다, 나는 그녀의 채소가게 앞을 지나다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나를 바라보는 환한 미소와 마주치고는 기분이 좋아졌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녀가 내가 신발 밑창이 닳도록 찾아 헤매고 있는 그 푸른 장미가 아닐까. 그 생각이 나의 뇌리 속을 뜬금없이 스치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랬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나는 시장을 나가지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생각을 한 그 후유증이지 싶다.
사흘 만에 시장에 나갔는데 시장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시장의 땅주인이 풀어놓은 동네 양아치들이 땅주인의 계획에 반대하는 시장 사람들 가게를 찾아다니며 난동을 피웠던 것이었다. 우연찮게 채소가게 주인을 도와준 꼴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나는 서너 차례 더 시장사람들을 도왔었다. 복수를 하겠다고 그들 패거리들을 끌고 나타난, 그 살이 디룩디룩 찐 두 명의 젊은 놈팽이와 그 패거리들을 혼내준 것을 빼고서도. 내가 새치 형님의 직계이고 새치 형님의 어떤 특명을 받고 시장에 특파되었다는 소문이 양아치들 사이에 퍼지면서―실상 나는 새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얼마 전부터 양아치들의 시장 내 출현이 잠잠해졌었다. 헌데 이틀 동안 내가 나타나지 않자 녀석들이 그 동안을 이용해 또 난동을 피웠던 것이다.
일년 전쯤 길암시장이 구로부터 재개발 승인이 났던 모양이다. 시장의 땅주인이 추진한 일이었는데, 그는 이곳에 시장을 정리하고 중․소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형성하려 하고 있었다. 시장사람들은 재개발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활터전인 시장이 그대로 존속되기를 당연히 바라고 있었고, 땅주인과 충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입자들이야 세를 빼주고 내보내면 상관이 없었지만, 건물을 소유한 시장 사람들의 경우가 땅주인의 골칫거리였다. 아무리 해도 설득이 되지 않던 것이었다. 그래서 땅의 소유권을 미끼로 건물이 불법점유라 하면서 동네 양아치들을 풀어 시장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다시 시장에 나타나자 난장판 속에서, 사람들의 나에 대한 환영이 아주 대단했다.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단 듯한 태도들이었고, 내가 어디서 사는지 나의 주소나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자네 우리 재래시장조합에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시게나.”
채소가게 주인이었다.
“하지만 저는 시장에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우리 가게에 세입자로 들어오면 되지. 자네도 채소가게 주인이 되는 걸세.”
“그래, 그게 좋으시겠네.”
“근데,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요.”
“우린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우리 재래시장의 정식 조합원이 돼서 우리 재래시장을 위해 싸워달라는 것이네. 우리 재래시장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과든 말일세.”
난 어쨌으면 좋을지 몰랐다. 재래시장과 재래시장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싸운다고(?)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여지껏 나는 싸움이 좋아서 싸웠고, 위해서 싸운다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싸웠을 뿐이었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흘끗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와 같은 청탁은 거절하는 게 마땅했는데, 그러나 나는 선뜻 거절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선뜻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가 실상은 탐색되어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환대한 탓일 수도 있었다.
문득 나를 향해 내밀어지는 손길이 있었다. 채소가게 주인의 딸의 손길이었고, 그녀의 손에 예의 그 푸른 꽃무늬의 손수건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땀을 닦으세요. 땀이 비 오듯 해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던 나머지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흘러내리도록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거냐 저거냐 선택의 고민에 빠지면 나는 늘 그렇게 땀이 비 오듯 하는 얄궂은 습성이 있었다. 나는 그런 선택의 고민에 빠지는 게 제일 싫었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고 그로 인해 걸레처럼 흠뻑 젖고 만 푸른 꽃무늬의 손수건을 채소가게 주인의 딸에게 되돌렸다. 손수건을 건네받은 채소가게 주인의 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이틀 전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이 다시 나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내가 찾고 있던 그 푸른 장미가 아닐까. 나의 입에서 작지만, 흔들림 없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호림
≪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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