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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젊은시인조명/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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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신작시
연애편지 외 7편
生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요 그곳에 가면 화르르 불 붙어버릴까요 닳고 닳은 生 사막은 무사한가요 방울뱀 한 마리가 그려놓은 무늬를 따라가 당신이 보았다는 푸른 달 그 밤의 젖가슴 안에 얼굴 파묻고 서른 해 넘긴 복잡한 무늬의 목마름 축이고 또 죽이신다구요 가끔 신기루들이 당신을 붙잡기나 하는지요 신기루들 속에 숨어 모래바람 맞고 있는 내가 한둘쯤 두셋쯤 보이던가요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모래언덕들 맨발로 넘어가면 시간과 함께 모래에 묻힌 도시도 있다지요 도시 한 귀퉁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당신과 나의 미라가 있을까요 당신은 그러나 생선뼈처럼 말라 화석이 되시겠다구요
딱딱한 지층에 눕기 전 낙타나 몇 마리 보내주세요 물혹 사이에서 사람의 생이 몇 번이나 스러진 아주 늙고 지혜로운 놈들로 혹은 뜨거운 바람에 하냥 나부끼는 여인들도 좋아요 마른 살가죽이 천만 개 주름으로 늘어진 자궁을 단, 그래도 낙타의 속눈썹을 지닌 여인들 말이지요 그 여인들과 함께 나는 여기서 순장(殉葬)되겠어요 부장품은 보내시지 않아도 좋아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식욕을 위해 옥수수 몇 낱을 마련해놓았거든요 커다란 항아리만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는 여기 生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요 돌아오지 마세요 불 붙이지 못할 바엔 모래바람에 깎이며 풍화와 퇴적을 반복하는 당신
건조한 땅에서도 당신 生이 슬퍼 울어본 적 있나요?
너는 자전거를 탄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네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꽃들이 흐드러진다 꽃 핀 풍경이 바퀴에 감겨든다 바퀴 안에서 색깔들이 뒤섞인다 바퀴에 빨려든 색깔들이 포크를 지나 핸들을 지나 팔을 지나 네 머릿속으로 빨려든다 머릿속이 빙빙 돈다 햇살이 팔목을 긋는다 이상하다 피가 솟아오르지 않는다 페달의 관절이 삐걱일 때마다 네 다리의 관절도 삐걱인다 너는 자전거와 한몸이 된다 자전거에서 내릴 수 없다 너는 웃는다 웃음이 빙빙 돈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억척스럽게 꽃잎들이 네게 달라붙는다 꽃잎들과 함께 시간이 자꾸 네 눈을 가린다 꽃이 지는 것으로 시간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갸우뚱거리자 자전거 바퀴 아래 고양이들의 내장이 터진다 벌써 여러 마리째 납작해진 몸을 일으켜 고양이들은 흩날리는 꽃그늘로 간다 기어를 바꾼다 꽃잎 속에서 고양이들 납작해진 시간을 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들은 모두 네가 버린 애인들이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떨어지는 꽃잎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 네가 중얼거리자 재빨리 물먹은 시체처럼 어머니가 네 등에 매달린다 뼈다귀만 남은 아버지가 네 목에서 덜그럭거린다 페달을 구르는 다리 하나씩 잡고 동생들이 아스팔트 위를 질질 끌려온다 자전거가 네 균형에서 벗어난다 자전거가 너를 버린다 너는 안장에서 굴러 떨어진다 자전거의 바큇살이 네 머리칼을 감아올린다 너는 웃는다 웃음이 빙빙 돈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골목
구불텅한 골목이 어미들을 토해놓았다 골목이 토해놓은 어미들이 아이들을 토해놓았다 아이들을 토해놓고 어미들은 골목의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아이들에겐 그러나 토할 입이 없다 아이들은 입 없이 자꾸 웃었다 저녁이 되면 골목을 날아다니는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철인 28호 황금박쥐 짱가 캐산 아이젠보그 아이들은 미사일에 맞고 광선총에 뚫리면서 없는 입으로 자꾸 웃었다 아비들이 돌아오지 않는 골목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없는 입으로 아이들이 노래 부르면 낡은 판잣집이 날아가고 새 판잣집이 골목으로 날아들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어미들은 좁은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고 아비들은 골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도 입이 생겨나지 않았다 없는 입으로 자꾸 웃을 뿐 아이들은 입 대신 똥구멍으로 회충을 토해댔다 숨 막히게 배꽃 피는 밤 아이들은 제 몸에서 성기를 잘라냈다 아이들의 성기가 커다랗게 부풀어 골목을 가득 채워도 골목은 끝내 입 없는 아이들을 토해내지 않았다
할미는 하루 종일 꽃뱀과 논다
정원이 할미를 가두었다 정원에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꽃들 피어나고 밤마다 부풀어 올라 삐죽거리는 꽃들의 입술 입술 사이에서 밤새 아기들이 태어나고 할미의 마른 젖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젖 검은 젖을 먹고 아기들은 꽃처럼 시든다 아침이 되기 전에 할미는 제 몸에 구멍을 파고 시든 아기들을 심는다 아기를 심은 자리마다 번져가는 징그러운 꽃무늬들 한번 밤으로 간 할미의 눈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할미는 영원히 늙고 바스락거리는 허물을 벗지 못한다 정원에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꽃들 무시로 피어나고,
할미는 하루 종일 꽃뱀과 논다
저녁
푸른 몸의 사내 위를 걷고 있었다
푸른 발바닥을 지나 푸른 무르팍
푸른 음모와 푸른 성기를 지나
푸른 배꼽 푸른 젖꼭지
푸른 입술 푸른 콧잔등
푸른 눈썹과 푸른 눈동자
헝클어진 푸른 머리카락
사내의 푸른 성기가
푸른 정액을 뿜어 올렸다
대기에 번지는
비릿하고 푸른 냄새
푸른 냄새를 뚫고
푸른 새들이 날았다
태어나지 못한 푸른 아기들
푸르게 까르륵거렸다
푸른 몸의 사내 위를 걷고 있었다
푸른 몸의 사내가
푸른 손을 들어올렸다
푸른 손가락들은 모두
푸른 나무가 되어 사내를 뒤덮었다
푸른 나무는 자라고 자라
뿌리를 벗어나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푸른 아기들이 사내의 몸에서
푸른 심장을 꺼내자
사내의 푸른 몸도 가볍고 투명하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내의 옆구리쯤
내가 흘려낸 말들
소리를 버리고
푸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궂은 날
사내가 한 번 웃자
먼지 냄새를 이끌고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가 두 번 웃자
일제히 가로수 이파리들이 뒤집혔다
사내가 여러 번 웃자
시커먼 구름떼가 몰려와 도시를 뒤덮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사내의 몸을 어루만졌다
사내는 조금씩 허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길 위에서 사라졌다
사내의 몸이 다 허물어졌을 때
평생 헝클어져 있던 사내의 머리칼은
물풀들처럼 가지런해졌다
검은 하늘을 향해 사내는 마지막으로
제 몸의 모든 구멍들을 열었다
바람이 사내의 모든 구멍들로 드나들었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구멍들이 하얗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사내의 몸에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그 모든 구멍들에서
사내가 잉태했던 빗방울들이 튀어나왔다
도시는 온통 사내가 낳은 빗방울들로 흐물거렸다
사내가 길에 스며들고 난 뒤
사람들은 무시로 축축한 거리를 흘러다녔다
우산도 없이 미친년처럼 자꾸 웃으며
그 길이 사내인 줄도 모른 채,
햇볕 좋은 날
시간이 창자 속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굵은 소금을 창자에 흩어 뿌린 뒤 박박
문질러 씻어라 제대로 씻지 않으면 말장 헛 거다
다 씻었으면 빨랫줄에 한나절쯤 널어둬라
꼬득꼬득해질 때까지 마르면 되는 거다
다 말랐으면 다시 꾸역꾸역 삼키면 된다
이제 좀 시원한가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늙은이들
저들의 창자도 한번 씻어서 말려주고 싶다
햇볕 좋은 날, 다 갔다
정육점 불빛처럼 물드는 하늘 쪽으로
아뿔싸, 널어놓은 창자를 쪼아 물고
비둘기들이 난다
길게 창자가 하늘을 가른다
여의사
여자는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부어오른 눈두덩을 굴려댔다
실핏줄 가득한 커다란 눈알이
내 빈약한 몸을 핥고 있었다
여자의 눈알이 움직일 때마다
청진기에서 전해진 냉기가
손가락 끝까지 마비시켰다
여자는 내 입을 열어
목구멍을 들여다봤다
어안거울 같은 눈알 안에서
내 목젖이 위태로웠다
약 알레르기는?
주사 알레르기는?
담배 피우지?
담배 끊어
밤에는 공기가 나빠
여자가 빠르게 쏟아놓은 말들이
직설적으로 내 몸을 더듬었다
간호사가 주사약을 준비했지만
여자는 재빨리 주사기를 빼앗았다
여자는 나를 의료용 침대로 밀어붙였다
내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철썩 갈겼다
내 엉덩이에 주사기를 찔러 넣고
여자가 한쪽 입술로 웃었다
아직 바지도 올리지 못한 나를
여자의 커다란 눈알이 핥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밤에는 공기가 나빠
다음에 한 번 더 와
◈시작노트
시골집 뒤뜰 감나무 고목 아래 앉아 있었다.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바람이 불었다. 감꽃이 지고 있었다. 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만 빼면 그곳은 적막하다. 사실 잉잉거리는 소리는 적막의 일부다. 적막을 더 적막이게 하는 것은 벌들이다. 감꽃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벌들은 오래된 감나무의 수관 전체로 적막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나는 그 적막을 사랑한다. 오로지 그곳에서만 나는 평화로워진다.
그 평화로움 속에 몸을 맡기면 사는 일의 번잡스러움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나는 왜 시를 쓰느라고 골머리를 썩는가 하고 몇 년 전에 생각한 적이 있다. 적막은 중독성이다. 그러므로 적막 안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위험해진다.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 적막에서 재빨리 몸을 빼내야 한다. 나는 아직 감기약처럼 나른한 평화로움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김근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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