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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젊은시인조명 작품론/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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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34회 작성일 05-05-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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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자전거

이경수
(문학평론가)



휘발성의 욕망

오래 전에 도시의 골목을 질주하는 아이들의 공포와 환희를 건조하게 그린 시인이 있었다. 13인의 아이가 저마다 느낀 공포의 흔적은 우리의 신체에 깊이 각인되어 ‘지금, 여기’를 사는 현대인의 공포로 계승되고 있다. 김근의 신작시들은 반복적인 일상이 유발하는 공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그 원형으로서 이상(李箱)을 떠올리게 한다. 장소적 의미의 고향은 물론이고 마음의 고향마저 상실한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존재의 무게 자체가 공포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의 힘으로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는 운명이 가져다주는 근원적인 공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어머니의 자궁 바깥에 던져진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또는 그것과의 공존을 모색하면서, 때로는 지독한 좌절과 공포를 체험하고 때로는 존재의 기쁨을 발견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조금씩 낡아가고 안전해진다. 그러나 안전함은 권태와 짝을 이룬다.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김근 시인은 견디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직 젊다.

生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요 그곳에 가면 화르르 불 붙어버릴까요 닳고 닳은 生 사막은 무사한가요 방울뱀 한 마리가 그려놓은 무늬를 따라가 당신이 보았다는 푸른 달 그 밤의 젖가슴 안에 얼굴 파묻고 서른 해 넘긴 복잡한 무늬의 목마름 축이고 또 죽이신다구요 가끔 신기루들이 당신을 붙잡기나 하는지요 신기루들 속에 숨어 모래바람 맞고 있는 내가 한둘쯤 두셋쯤 보이던가요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모래언덕들 맨발로 넘어가면 시간과 함께 모래에 묻힌 도시도 있다지요 도시 한 귀퉁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당신과 나의 미라가 있을까요 당신은 그러나 생선뼈처럼 말라 화석이 되시겠다구요
딱딱한 지층에 눕기 전 낙타나 몇 마리 보내주세요 물혹 사이에서 사람의 생이 몇 번이나 스러진 아주 늙고 지혜로운 놈들로 혹은 뜨거운 바람에 하냥 나부끼는 여인들도 좋아요 마른 살가죽이 천만 개 주름으로 늘어진 자궁을 단, 그래도 낙타의 속눈썹을 지닌 여인들 말이지요 그 여인들과 함께 나는 여기서 순장(殉葬)되겠어요 부장품은 보내시지 않아도 좋아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식욕을 위해 옥수수 몇 낱을 마련해놓았거든요 커다란 항아리만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는 여기 生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요 돌아오지 마세요 불 붙이지 못할 바엔 모래바람에 깎이며 풍화와 퇴적을 반복하는 당신

건조한 땅에서도 당신 生이 슬퍼 울어본 적 있나요?
―「연애편지」 전문

확 하고 끼쳐 오는 휘발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눈물이 핑 돌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그 냄새는 분명 위험한 냄새이다. 냄새에도 성향이 있다면, 휘발유 냄새는 선동적이다. 폭발 직전의 젊음의 냄새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휘발유 냄새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것도 위태위태한 젊은 날의 연인에게 잘 어울린다.
휘발유의 인화성은 사랑과 닮았다. 사랑 역시 언제 “화르르 불 붙어버릴”지 모르므로 ‘위험한 짐승’이다. 사막 같은 삶에 신기루로 다가오기도 하고, 마른 목을 축일 한 줄기 샘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기루는 언제 눈앞에서 사라질지 모르며, 물도 마시고 나면 그때뿐 머지않아 다시 목이 마르게 된다. 욕망은 끝이 없고 사랑은 끝이 분명하다. 연애편지가 쉽사리 감상적이 되는 것도 사랑의 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 타는 사랑의 갈구로 끝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끝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욕망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욕망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다. 사랑과 욕망은 대개 오랜 세월 “풍화와 퇴적을 반복”해 온 지독한 윤회의 고리를 운명처럼 안고 있다. “도시 한 귀퉁이”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당신과 나의 미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원으로 존재하는 당신과 나의 사랑의 원형. 사랑을 하는 순간에는 누구나 영원을 꿈꾸거나 발설하지만, 영원한 사랑 따윈 연애편지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을 철 지난 연인들은 모르지 않는다.
인화성 물질로 가득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그러므로 위태롭다. 언제 어디서 “화르르 불 붙어” 연소되어 버릴지 모르므로. “풍화와 퇴적을 반복”해 온 수많은 연인들이 대를 이어 그러했고, 지금도 역시 그런 것처럼. 하지만 잦은 연소는 대기를 건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건조함은 수많은 연인들의 탓인 걸까?
사랑이 순간 휘발해 버릴까 두려워하는 화자는 사막에 “순장(殉葬)”되기를 꿈꾼다. 순장(殉葬)의 상상력은 기화(氣化)하려는 휘발의 욕망과 팽팽한 긴장을 형성한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성질과 땅속에 묻히려는 성질은 서로 대립된다. 순간성과 영원성의 대립인 것이다. 휘발성은 사라지려는 성질인 데 비해, 매장의 상상력은 영원히 보존하려는 욕망과 관계가 있다. 영(靈)은 물론 육(肉)까지도 영원 속에 가두어두려는 “미라”는 영원을 희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인 셈이다. 영원성에 대한 집착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순간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근 시인이 그려 보여주는 사랑과 욕망은 휘발성 물질처럼 어딘지 위태로운데, 그는 오히려 위태로움에 다가가려고 한다. 위험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화기 장애와 거세 공포

사랑 혹은 욕망과 함께 김근의 신작시에 의미 있게 등장하는 것은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 할머니 등이 이루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은 평화롭거나 자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은 시인에게 결핍의 존재거나 무거운 존재감으로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너는 자전거를 탄다」)로 그려진다. 김근은 몇몇 시에서 장소를 육체화하는 상상력을 보여주는데, 이때의 육체는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병든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근원에는 가족 해체적이거나 부정적인 사유가 자리잡고 있다.

구불텅한 골목이 어미들을 토해놓았다 골목이 토해놓은 어미들이 아이들을 토해놓았다 아이들을 토해놓고 어미들은 골목의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아이들에겐 그러나 토할 입이 없다 아이들은 입 없이 자꾸 웃었다 저녁이 되면 골목을 날아다니는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철인 28호 황금박쥐 짱가 캐산 아이젠보그 아이들은 미사일에 맞고 광선총에 뚫리면서 없는 입으로 자꾸 웃었다 아비들이 돌아오지 않는 골목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없는 입으로 아이들이 노래 부르면 낡은 판잣집이 날아가고 새 판잣집이 골목으로 날아들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어미들은 좁은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고 아비들은 골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도 입이 생겨나지 않았다 없는 입으로 자꾸 웃을 뿐 아이들은 입 대신 똥구멍으로 회충을 토해댔다 숨 막히게 배꽃 피는 밤 아이들은 제 몸에서 성기를 잘라냈다 아이들의 성기가 커다랗게 부풀어 골목을 가득 채워도 골목은 끝내 입 없는 아이들을 토해내지 않았다
―「골목」 전문

부재하는 아버지와 두문불출하는 어머니, 그리고 입이 없는 아이들이 창자와도 같은 “구불텅한 골목”에 있다. 아버지는 부재로써 존재한다. “아비들이 돌아오지 않”고 “어미들”이 “골목의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 뒤 다시는 나오지 않는 골목에서 아이들은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철인 28호” 등 만화 속 주인공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놀거나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노래를 부르며 논다. 부모가 없는 골목이지만, 아이들은 그곳에서 전쟁의 논리와 자본주의적 경제의 논리를 스스로 터득한다. 미사일에 맞고 광선총에 뚫리면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죽음을 체험하고 전쟁의 의미를 배운다. 뿐만 아니라 익숙한 노래를 통해 헌집을 주고 새집을 얻는 불평등한 교환의 논리를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의 노래는 문 닫고 들어간 어머니를 불러내거나 골목 바깥에 있는 아버지를 불러들일 힘조차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이들의 노래는 무기력하다. 마치 이 시대의 노래나 시처럼.
시인의 상상 속에서 골목 전체는 거대한 하나의 몸이 된다. 그런데 이 ‘골목-몸’은 소화기 장애를 앓고 있다. 정상적인 소화와 배설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 데다 출산의 기능까지도 입이 도맡아한다. 밑으로 해야 할 일이 위로 행해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출산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구토를 통해 골목에는 생명체들이 가득하게 된다. 그런데 어미들이 토해놓은 아이들은 입이 없다. 마치 강장동물처럼 입과 항문이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되어 배설과 구토가 하나의 기관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입이 없으므로 항문이 이러한 일을 맡아서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입은 호흡하고 섭취하고 말하는 기관이지만, 입이 없는 아이들은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없거나 다른 기관이 대신하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구순기, 항문기를 지나 남근기에 이르면 아이는 대개 남근에 대한 거세 공포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숨 막히게 배꽃 피는 밤” 아이들이 제 몸에서 성기를 잘라내는 환상은 거세 공포의 위협과 관련되어 있다. 쾌락에 유혹 당한 벌로 거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비들이 골목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거세 공포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된 것일지 모른다. 무사히 거세 공포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하더라도 그 근원적 체험은 아이의 무의식에 외상으로 남는다. 그 흔적은 성장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면 무의식으로부터 솟아오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놀이와 노래 역시 무의식의 원천을 형성하며 아이들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서서히 개조한다. 로봇 합체가 일어나듯이 인간 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골목-몸’은 부풀어오른 성기로 가득 찬 환상 속의 육체이자 병적인 가족이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닮았다.
김근 시인은 “시골집 뒤뜰 감나무 고목 아래”의 “평화”와 “적막”(「시작노트」)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메마른 도시의 풍경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도시는 시인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은 병적이고 위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쩌면 위험하기 때문에 유혹의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에 반복적으로 그려진, “입 없이 자꾸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병적이고 기괴한 공포의 표정은 현대인의 병적인 자의식을 닮았다. 시인은 위험한 도시에 유혹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부서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김근의 시에도 불모의 상상력이 자주 동원된다. 사막과 모래와 바람은 그가 즐겨 찾는 소재이다. 지루하게 풍화와 퇴적을 반복하고 때로는 신기루에 이끌려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헛된 꿈을 좇다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막은 분명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더구나 현대 도시의 불모성은 적지 않은 시인들을 사막의 상상력으로 이끌곤 했다. 김근 시의 경우에도 사막은 황량한 연애를 뜻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생을 상징하기도 하고, 건조하고 삭막한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상상력은 새로울 게 없다. 지구 전체가 거대한 사막이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들에게 사막의 상상력은 낯설기는커녕 익숙한 것이다. 김근 시의 개성은 불모의 땅에서 소멸해 가는 것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데서 오히려 발견된다.

사내가 한 번 웃자
먼지 냄새를 이끌고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가 두 번 웃자
일제히 가로수 이파리들이 뒤집혔다
사내가 여러 번 웃자
시커먼 구름떼가 몰려와 도시를 뒤덮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사내의 몸을 어루만졌다
사내는 조금씩 허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길 위에서 사라졌다
사내의 몸이 다 허물어졌을 때
평생 헝클어져 있던 사내의 머리칼은
물풀들처럼 가지런해졌다

검은 하늘을 향해 사내는 마지막으로
제 몸의 모든 구멍들을 열었다
바람이 사내의 모든 구멍들로 드나들었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구멍들이 하얗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사내의 몸에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그 모든 구멍들에서
사내가 잉태했던 빗방울들이 튀어나왔다
도시는 온통 사내가 낳은 빗방울들로 흐물거렸다

사내가 길에 스며들고 난 뒤
사람들은 무시로 축축한 거리를 흘러다녔다
우산도 없이 미친년처럼 자꾸 웃으며
그 길이 사내인 줄도 모른 채,
―「궂은 날」 전문

비가 쏟아지기 전에는 대개 전조가 있게 마련이다. 바람결에 비릿한 냄새가 묻어오고, 가로수 이파리들이 뒤집힐 정도로 바람이 거세지고, 이윽고 시커먼 구름떼가 몰려와 도시를 뒤덮는다. 냄새와 소리와 빛깔을 동반한 전조 현상을 시인은 사내의 웃음으로 표현한다. 사실 사내의 웃음과 비 오는 전조 현상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지만, 논리 너머를 공략하는 힘이 ‘-자’라는 연결어미로 이어진 두 문장 사이에는 작동한다. 사내의 웃음소리는 비 오기 직전의 소란함을 그럴 듯하게 표상한다.
김근의 신작시들은 웃음에 각별한 예민함을 보인다. 그의 웃음은 하얗게 터뜨려지고 부서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치 웃음이 일으키는 공기의 미세한 파장이 시인의 눈에는 보이는 듯하다. 그의 웃음은 감각적이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하다. 비의 전조로서 바람이 드나드는 모습을 시인은 구멍들이 하얗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웃음은, 특히 소리내어 웃는 웃음은 순간적이다. 한순간 공중에 흩날리듯 흩어져 버린다. 너무 순식간에 흩어지고 마는 것이어서 웃음의 파편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솟구쳤다 낙하하는 분수 주변에 흩날리는 포말처럼 웃음은 순간 사람을 적시지만, 또한 순식간에 사라진다. 김근은 이렇듯 부서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소멸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에는 ‘장소-되기’의 상상력이 종종 등장한다. ‘골목-몸’이나 ‘사내-길’의 상상력은 이전의 시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상상력이다. 이제 우리의 시인들은 ‘동물-되기’나 ‘식물-되기’의 상상력은 넘어서 ‘장소-되기’와 같은 무생물과의 합체를 원하는 것인가? 이러한 상상력은 다분히 만화적이다. 다만 김근 시의 경우에는 ‘장소-되기’의 상상력이 그렇게 발랄한 형식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길이 된 사내는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우산도 없이 미친년처럼 자꾸 웃”는 병적인 분위기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도시는 매혹의 대상이지만, 도시가 앓고 있는 병적인 징후를 그는 예민하게 포착한다. 고향 뒤뜰의 감나무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의 시를 간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속도와 현기증

대도시는 대개 첫인상으로서 현기증을 동반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까마득한 빌딩숲은 물론이고 쉼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멀미를 일으킨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내팽개쳐 둔 채 ‘빨리 감기’를 한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듯이 도시는 숨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그 회전의 한가운데에 있다 보면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진다. 도시인들은 빨리 늙고 빨리 죽는다. 그러므로 도시의 속도는 현기증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네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꽃들이 흐드러진다 꽃 핀 풍경이 바퀴에 감겨든다 바퀴 안에서 색깔들이 뒤섞인다 바퀴에 빨려든 색깔들이 포크를 지나 핸들을 지나 팔을 지나 네 머릿속으로 빨려든다 머릿속이 빙빙 돈다 햇살이 팔목을 긋는다 이상하다 피가 솟아오르지 않는다 페달의 관절이 삐걱일 때마다 네 다리의 관절도 삐걱인다 너는 자전거와 한몸이 된다 자전거에서 내릴 수 없다 너는 웃는다 웃음이 빙빙 돈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억척스럽게 꽃잎들이 네게 달라붙는다 꽃잎들과 함께 시간이 자꾸 네 눈을 가린다 꽃이 지는 것으로 시간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갸우뚱거리자 자전거 바퀴 아래 고양이들의 내장이 터진다 벌써 여러 마리째 납작해진 몸을 일으켜 고양이들은 흩날리는 꽃그늘로 간다 기어를 바꾼다 꽃잎 속에서 고양이들 납작해진 시간을 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들은 모두 네가 버린 애인들이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떨어지는 꽃잎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 네가 중얼거리자 재빨리 물먹은 시체처럼 어머니가 네 등에 매달린다 뼈다귀만 남은 아버지가 네 목에서 덜그럭거린다 페달을 구르는 다리 하나씩 잡고 동생들이 아스팔트 위를 질질 끌려온다 자전거가 네 균형에서 벗어난다 자전거가 너를 버린다 너는 안장에서 굴러 떨어진다 자전거의 바큇살이 네 머리칼을 감아올린다 너는 웃는다 웃음이 빙빙 돈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너는 자전거를 탄다」 전문

자전거는 바퀴의 회전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처음에는 도구에 불과하다. 자전거를 운전하는 주체와 도구로서의 자전거는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일정한 속도가 붙은 후에는 자전거와 자전거를 움직이는 주체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둘은 이미 한몸이다(“너는 자전거와 한몸이 된다”). 따라서 “자전거에서 내릴 수 없다”.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현대인들처럼 탈것과 승객, 혹은 도구와 주체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속도를 제어하고 방향을 조절하는 힘은 더 이상 분리된 주체만의 것이 아니다. ‘폭주기관차-승객’, ‘자전거-너’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 사실 이러한 상상력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오래 운전한 차를 탔을 때의 편안한 승차감, 차가 느끼는 것을 내 몸이 느끼는 경험은 흔히들 해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익숙한 상상력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속도이다.
천천히 자전거를 달릴 때에는 주변의 경치도 돌아보고 바람의 냄새도 맡아보고 무르익은 계절을 느낄 여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속도에 이르러 ‘자전거’와 ‘너’(‘나’를 전제하지 않은 ‘너’는 없다. 마찬가지로 ‘너’를 전제하지 않은 ‘나’는 없다. 타자 없이 주체를 인식할 수도, 주체 없이 타자를 인식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너’는 다름 아닌 ‘나’, ‘너-나’이다.)가 한몸이 되면, 바깥의 풍경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자전거-너’는 도로를 질주하는 무기가 되어버린다. 자전거 바퀴 아래서 “고양이들”이 “납작하게” 깔려 “내장이 터”져 죽는다. 자전거가 죽인 고양이는 ‘너’가 버린 애인과 하나가 된다. ‘자전거-너’가 가해자로서 한몸이므로 ‘고양이-애인’도 피해자로서 한몸이 된다. 고양이의 학살을 딛고 ‘자전거-너’는 점점 더 무서운 속도의 광기 속으로 휩싸인다. 이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질주하는 ‘자전거-너’는 속도에 내몰린 현대인들의 모습을 은유한다. 문명의 광기와 하나가 된 현대인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시인은 가족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먹은 시체처럼” 무거운 “어머니”와 “뼈다귀만 남은” 가여운 “아버지”, 그리고 의지할 데 없는 “동생들”. 그들이 달라붙자 자전거는 ‘너’를 버린다. 그러나 자전거로부터 완전히 놓여난 것은 아니다. “자전거의 바큇살이 네 머리칼을 감아올린다”. 이 엽기적인 장면과 함께 ‘너’는 다시 강제로 자전거에 태워진다. 빙빙 도는 너의 웃음은 현기증을 동반한 것으로 현대인의 분열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독한 반복의 공포에서 벗어날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흔적들

김근 시인의 관심사는 가족과 욕망과 사막 같은 도시의 삶에 놓여 있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적막한 고향의 이미지이다. 시인 스스로 평화롭다고 고백한 고향의 감나무 아래의 시간은 ‘지금, 여기’를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는 있지만,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시인은 평화로운 고향 뒤뜰의 감나무 아래로 도망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시인은 애써 위태로움 가까이 있고자 한다. 평화로운 적막이 중독성이 강하다고 믿는 시인은, 고향이 주는 평화와 안온함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바깥으로 달아나려는 원심력이 김근의 시를 지탱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힘이 풀려서 날아가 버리지 않고 원심력이 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상대적인 힘, 즉 반작용의 힘은 고향의 평화에 있다.
아직은 그의 시에서 고향은 흔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도시의 광기와 정신분열증을 그려내는 데 몰두할수록 반대편에 흔적으로서만 있는 것들이 자꾸 상기되는 것은 왜일까? 시인은 혹시 이 도시의 광기에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유혹을 느끼되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관찰자와 내부에 뿌리박고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장소-되기’와 같은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발랄하기엔 존재 자체가 무겁고, 무거운 존재론적 질문을 감당하기엔 아직 발을 덜 들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웃음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이제 공포와 병적인 웃음과 광기의 표정을 넘어서서(그런 것은 대개 일차적인 반응이기가 쉽다) 좀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아야 할 때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자전거는 결국 헛바퀴만을 돌리게 되지 않을지 솔직히 나는 걱정스럽다. 시인이 그려 보여주는 도시의 병적인 징후가 ‘지금-여기’의 ‘내면 풍경’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질주하는 자전거에 몸을 실은 사람의 하나로서 이제 징후 너머를 들여다볼 때라는 다소 무리한 요구를 욕심내어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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