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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미니서사/김혜정/녹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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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73회 작성일 19-07-0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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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미니서사/김혜정/녹나무


녹나무


김혜정



  오후 네 시, 박 노인과 며느리 선자 씨 둘 뿐인 집안은 괴괴한 적막에 휩싸였다.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선 녹나무로 인해 집은 음울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오늘따라 녹나무 향이 더 짙었다. 선자 씨는 녹나무 향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오 년 전 겨울 낙엽을 태운 날 나무 아래 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는데, 녹나무 향이 뱀을 죽인 거였다. 이제 녹나무도 중풍과 치매를 앓은 박 노인처럼 늙고 쇠락했다. 선자 씨는 이참에 녹나무를 베어버리고 싶었다. 녹나무가 재앙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술, 술 가져 와. 술 가져 오라니까.”
  박 노인의 고함소리가 새어나왔다. 선자 씨는 또 시작이구나 싶어 가슴이 덜컹하고 와락 짜증이 났다. 이틀 전 일을 생각하면 오싹했다. 저녁 무렵, 박 노인이 소주를 가져오라고 해서 소주에 물을 타서 가져다주었다. 박 노인이 금세 알아채고는 소주병으로 그녀의 머리를 쳤다. 순간, 그녀는 정말 죽는구나 했다. 박 노인이 아무리 떼를 써도 다시는 술을 가져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년아, 술 가져 와. 이 시아비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선자 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박 노인이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선자 씨는 하는 수 없이 소주와 안주를 챙겨 박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주 반 병을 마신 박 노인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내 방안에 구린내가 진동했다. 그것이 녹나무 향을 한순간에 지워주었다. 선자 씨는 기저귀와 비닐장갑, 물수건을 준비해 박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박 노인이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선자 씨가 수발을 끝내자 박 노인이 선자 씨를 쳐다봤다. 
“오늘은 날씨도 좋은 거 같은데 바깥바람을 좀 쐬고 싶다.”
  박 노인이 건강했을 때의 목소리였다. 마당은커녕 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은 박 노인인데 이상했다. 
  선자 씨는 휠체어에 박 노인을 앉힌 채 현관문을 열었다. 마당까지는 계단으로 이어졌다. 선자 씨가 슬쩍만 밀어도 휠체어는 아래로 굴러 떨어질 거였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도리질을 쳤다. 박 노인이 그녀를 불렀다.
“저 녹나무 말이다. 이제 베어버릴 때가 된 거 같다.”
  박 노인의 말에 선자 씨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박 노인의 집에 개미 끓듯 사람이 드나들 때까지만 해도 박 노인은 녹나무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녹나무를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무의 키가 오십 센티미터였을 때 첫째 아들을 낳았고, 칠십 센티미터였을 때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나뭇잎이 무성해진 여름날 손주가 태어났다는 식으로 나무와 자신을 연관시켜 말하곤 했다.
“제발 부탁이니, 나를 여기서 밀어다오.”
  선자 씨가 화들짝 놀라 휠체어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휠체어가 앞으로 나아갔다.
선자 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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