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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단편/엄광용/나무와 결혼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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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신작단편/엄광용/나무와 결혼한 남자
나무와 결혼한 남자
엄광용
설치미술가 추씨는 강변마을 카페 빈트리BEAN TREE에서 우두커니 창밖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아직 봄이 오기는 이른 날씨였다. 바람과 함께 지푸라기며 비닐 조각 같은 것들이 날려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동생이 결혼한다고 했다. 오래 전 그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고, 이번에는 또 그 밑의 남동생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추씨가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은 창밖이지만, 그의 생각은 자신의 우울한 마음속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일곱 살이나 손아래인 남동생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도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당연히 축하해 마땅한 일인데도 며칠 전 남동생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낚시의 미늘처럼 마음에 걸렸다.
생각난 김에 휴대폰을 꺼낸 추씨는 다시 남동생이 보낸 문자를 찾아 읽어보았다.
‘형, 죄송! 내가 먼저 결혼하게 됐어. 장남인 형이 먼저 해야 하는데,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
문자를 읽다가 추씨는 피식, 웃었다. 남동생의 ‘송구스러울 따름’이란 말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고, 그 표현으로만 볼 때 남동생이 오히려 장남처럼 생각되기조차 했던 것이다.
“……짜아식!”
추씨는 저 혼자 킬킬 웃었다.
“커피 가져왔어요. 근데 뭐가 우스우세요?”
카페 주인 미스 공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으며 추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 미스 빈! 이걸 보고 내가 웃지 않을 수 있게 됐냐 말이야.”
추씨는 자신이 보던 휴대폰 문자를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미스 공을 꼭 카페 이름 ‘빈트리’에서 따다 ‘미스 빈’이라고 불렀다. ‘빈트리’는 우리말로 ‘콩나무’이므로, ‘공’씨라는 성과 ‘콩’이 비슷하다 해서, 그는 호칭을 그렇게 붙여주었던 것이다.
“오머머! 남동생이 몇 살인데 벌써 결혼을 해요?”
“올해 서른여덟!”
“좋겠다, 나보다 한 살이나 적네!”
“미스 빈이 그럼 올해 서른아홉?”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틀렸지 뭐!”
미스 공은 말끝에 포옥, 한숨을 깨물었다.
“아직 이른 봄이니 일 년 가까이 여유가 있잖아?”
“어른들이 그러는데 아홉수에는 결혼하는 게 아니래요. 그런데, 남동생이 결혼한다는 문자를 보고 왜 킬킬 웃으세요, 피터 씨는?”
미스 공은 고개를 갸웃이 숙여 추씨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이 서른아홉답지 않게 귀여운 인상이었다. 추씨를 ‘피터 씨’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미 고인이 된 연극배우 ‘추 아무개’의 대표작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따다 그녀가 붙여준 호칭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만이 가지는 호칭을 공유하고 있었다.
“짜아식, 일곱 살이나 많은 형님을 두고 제 놈이 더 나이 먹은 척 송구스럽다는 둥 엉너리를 떨다니, 그게 우습잖아?”
추씨는 소리 없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허긴 장남을 놔두고 차남이 먼저 장가를 가게 됐으니……. 헌데, 피터 씨가 나보다 여섯 살 많네?”
“그런 셈인가?”
“실망하지 말아요. 아직 쉰이 되려면 멀었는데, 뭘.”
“지금 누굴 놀리는 거요?”
추씨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였다.
“놀리긴요? 요즘 쉰 넘은 노총각들 내 주위에도 수두룩해요. 에고, 나도 그런 신세가 됐지만……. 요즘 노총각, 노처녀들 전성시댄가 봐요.”
미스 공은 또 다시 말끝에 한숨을 빼어 물었다.
“하늘 무너지겠네!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우중충한 판인데…….”
추씨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쪽 남동생도 그렇지만, 요즘 왜들 결혼을 그렇게 늦게 한다냐?”
미스 공의 말이 그랬다.
“요즘 젊은 애들 고생하기 싫어서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결혼 안 해요. 적어도 아파트 전세정도는 얻을 능력 돼야지, 자가용도 있어야지…….”
“그쪽 동생은 능력 있네!”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에 다니니까. 대리인데, 곧 과장으로 올라간다고 하던데……. 그 동안 번 돈으로 아파트 전세 정도야 얻겠지.”
“그쪽은 여태까지 뭐했어?”
“아직도 이곳 강변마을에서 셋방살이 신세로 지냅니다요. 예술이 밥 먹여 주나? 설치미술? 그거 가뭄에 콩 나듯 일이 생기니, 돈이 안 돼! 전엔 그래도 건설법이 있어 빌딩 들어서면 그 앞에 석조 미술이라도 세웠지. 그러나 그것도 몇몇 유명 조가가 차지야. 나처럼 맨손 빠는 작가들은 굶어죽을 노릇이라구요.”
어쩌다 추씨의 말은 신세한탄이 되었다.
그때 카페 앞으로 지나가는 도로 건너편 가로수에 사다리차가 서더니 인부들이 전기톱으로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카페 앞길은 구도로여서 가로수로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들 몸통이 한 아름도 넘을 정도였다. 나무가 너무 커서 전선줄이 걸리는 걸 막기 위해서일까 해마다 가지치기를 했다. 그런데 거의 목이며 팔뚝을 다 잘라낼 정도로, 뻗어나간 가지들을 무작스럽게 톱으로 베어 넘겼다. 사다리차 뒤를 1톤 트럭이 따라가며, 인부들은 잘려나간 가지들을 싣고 있었다. 가지치기가 다 끝난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마치 기린이나 사슴 같은 꼴로 멀뚱하게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몸통이나 굵은 가지가 모두 회색바탕에 흰색 무늬로 얼룩덜룩한 색깔을 띠고 있는 데다, 머리 위로 솟은 가지가 잘려나간 뿔 모양으로 보여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후 두 세에서 세 시 사이, 매일 이 시간쯤에는 카페에 손님이 드물었다. 점심시간에 식사 끝내고 차를 마시러 오는 손님이 빠져나가고 나면 저녁때가 될 때까지 거의 한산한 편이었다. 간혹 뜨내기손님이 한두 명 찾아들 뿐, 오후시간에는 단골손님도 드물어 추씨 혼자 썰렁한 카페에 지킬 때도 많았다.
그래서 추씨는 주로 손님이 없어 조용한 오후 시간에 빈트리를 찾곤 했다. 직장인들 같으면 오후 시간이 바쁘지만, 그는 작품에 매달릴 때를 제외하곤 따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빈트리 앞 도로를 건너면 바로 강변이었고, 그곳은 설치미술 작품들의 상설전시장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위시하여 많은 설치미술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관심이 있는 미술 애호가나 추억을 남기려는 연인들, 간혹 작품을 건지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그곳을 찾곤 했다. 그러나 겨울에는 강변 바람이 유독 센 데다 물가여서 다른 곳보다 춥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목이라 가뜩이나 스산해 보이는데, 저렇게 사정없이 가지를 잘라버리면 어떡해? 나무들이 너무 불쌍하다.”
미스 공이 추씨를 따라 무심코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다가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저 행위가 요즘 인간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이지요. 눈앞에 거추장스런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잘라내고 보는 행위……. 득이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생각이 거세된 자들의 세상이, 저 플라타너스를 희생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 나무들은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이 자연의 힘입니다. 봄이 되면 저 몸뚱어리뿐인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가고 이파리가 무성해지니, 플라타너스의 생명력은 대단하지요. 지금 문득 생각해 낸 건데, 저 목과 팔이 잘려 몸통만 남은 플라타너스 나무에 면사포라도 걸어주어야 하겠군!”
“네에?”
추씨의 말에 미스 공이 토끼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미스 빈이 나목의 팔이 잘려 불쌍하다고 했잖아요? 그 불쌍한 나무에 인격을 부여해주려는 거요. 저 나무에 면사포 씌우고, 웨딩드레스를 입히면 멋져 보일 것 같지 않습니까? 나무 신부가 되는 것이지요.”
“역시 설치미술가 다운 발상이네요. 나무 신부를 만든다구요?”
“그래요. 올 봄에 결혼하는 남동생에게 축하의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어요. 형보다 먼저 결혼하는 그 녀석 심정도 알만하니, 내가 먼저 결혼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추씨의 표정은 아주 진지해졌다.
“설마 저 헐벗은 플라타너스와 결혼한다는 얘긴 아니겠죠?”
미스 공이 의혹에 찬 눈길을 던졌다.
“왜 아니겠습니까? 저 목과 팔이 잘린 나무를 보다 문득 인도의 풍습이 생각났어요. 인도에선 간혹 나무와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남편감을 찾지 못한 하층민, 즉 카스트 계급의 처녀들이 사라수와 결혼을 하지요.”
추씨는 책을 읽다가 어느 글에선가 본 내용을 기억해냈다.
나무와 결혼하는 것은 일종의 미신에서 기인한 인도의 풍속이었다. 붓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을 때 사라수沙羅樹 가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고도 하고, 또한 붓다가 쿠시나가라의 숲속에서 열반에 들 때에도 사방에 여덟 그루의 사라수가 서 있었다고 해서 인도에서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있었다. 인도 하층민 처녀들 중에는 나무와 먼저 결혼하고 나면 남편감을 찾기가 다소 수월해진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결혼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이나 질병 또는 사고 같은 것을 나무가 먼저 대신해 주는 일종의 주술 같은 예방책 중의 하나라고 했다.
“오머머! 정말 피터 씨가 나무에 면사포를 씌워주고 결혼을 하겠다는 거예요?”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추씨를 쳐다보던 미스 공이 입을 가리고 호호거리며 웃었다.
“그렇지요. 내가 나무와 먼저 결혼을 하면, 올 봄에 결혼을 하게 될 남동생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웃긴다, 정말 웃겨.”
“비웃지 마세요. 나는 시방 정색을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추씨의 얼굴은 장난기가 전혀 없이 정말 진지해보였다.
“인도에선 처녀가 나무와 결혼을 한다는데, 피터 씨는 나무 신부와 결혼을 하겠다니 이건 코미디 아니에요?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네. 그런데 왜 슬픈 생각이 들지?”
미스 공의 웃던 얼굴이 다소 일그러지더니 연민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남자라고 나무와 결혼 못하리란 법이 있습니까? 인도 남자들 중 장남보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되면, 그 장유의 순서가 뒤바뀌니까 형이 나무와 먼저 결혼해서 길을 터준다고 합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한 남성은 정말 나무와 결혼식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는 환경운동가로 환경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곳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종의 퍼포먼스를 한 것인데, 나무 앞에서 결혼반지도 끼고, 나무에 입을 맞추며 부케까지 던졌지요.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설치미술가가 나무와 결혼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고 해서 흠이 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나무와 결혼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실 거예요?”
미스 공도 추씨의 태도로 봐서 장난을 하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않구요? 축하객을 초대하지는 않겠지만, 미스 빈이 나의 결혼식에 증인이 돼주어야 합니다. 인증 샷도 찍어서 남동생에게 보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로군. 어서 집에 가서 준비물을 챙겨야지.”
추씨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이내 일어섰다.
“피터 씨, 나무와 결혼식을 올리는 날짜는 언젠가요?”
아직도 긴가민가해서 미스 공은 커피 잔을 챙기며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추씨를 향해 물었다.
“바로 내일!”
추씨는 카페에서 나가 바로 앞의 가지가 잘린 플라타너스 나무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푸웃!”
미스 공은 창밖으로 추씨의 그런 뒷모습을 보며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날렸다.
다음날 오후 3시경, 추씨는 정말 어깨에 접이식 간이 사다리를 메고 배낭까지 짊어진 채 나타났다. 그는 사다리를 카페 밖의 한쪽 편에 세워둔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웬 배낭?”
미스 공이 물었다.
“면사포와 웨딩드레스. 어제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헌옷창고를 뒤져 마련해온 것이오. 작업하기 전에 커피 한 잔은 해야겠지?”
“정말 퍼포먼스를 하게요?”
“자, 증인이 되어준다는 약속부터 해요.”
추씨가 손을 내밀었다.
“오머머?”
미스 공은 추씨가 내미는 손을 잡고 오른손 엄지로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듯 잔뜩 흐려 있었다. 바람 부는 날씨에 햇빛도 없어 기온은 영하로 내려간 것처럼 춥게 느껴졌다.
추씨는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즐겼다. 미스 공도 다른 손님이 없어 한가했으므로, 자신이 마실 커피를 한 잔을 타가지고 와서 탁자를 마주한 채 앉았다.
“미스 빈! 내가 설치미술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시오?”
추씨는 그날따라 미스 공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웬만해선 아무에게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털어놓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고해성사를 하듯 누구에겐가 마음속에 든 무엇을 모두 비워내어 홀가분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저도 피터 씨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들려주세요.”
미스 공은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려 턱을 고인 채 말끄러미 추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씨가 스페인 여행을 떠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그는 회화과에서 추상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때까지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한국화를 전공했는데, 2년 후 추상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는 미술에 대한 능력내지는 자신감이 없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였어요. 미로박물관을 관람하는데, 거기서 호안 미로의 작품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미로의 다양한 작품들이 각 전시실마다 주제와 특성을 살려 전시되고 있었지요. 그 중 한 전시실에 들어가니 바닥에 잡동사니가 곳곳에 어수선하게 놓여 있고, 붉은 빛깔에 독특한 형태의 소파도 보였습니다. 관람객이 줄을 서서 바닥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곳에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러나 궁금해 하던 차에, 나도 그곳에 올라가 바닥을 내려다보았지요. 그런데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 같은 설치물들의 전체적인 구도가 바로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었던 겁니다.”
추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미스 공을 바라보았다.
“미릴린 먼로? 미국 여배우 말예요?”
“네, 바로 그 마릴린 먼로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어요. 그 순간 미로의 아이디어가 나의 기를 질리게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얼키설키 된 그물과 밧줄을 늘어놓은 것이 먼로의 은회색 머리가 되었고, 기묘한 모양의 붉은 소파가 바로 그녀의 입술이었습니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버려진 쓰레기들을 모아서 생명을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죽은 생명, 혹은 죽어가는 생명에 숨길을 불어넣는 일, 그것은 예술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어머, 너무 너무 환상적이다!”
미소 공이 추임새를 넣었다. 추씨는 이미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예술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백남준을 만났지요.”
“백남준이라면 비디오아트를 하는 그 유명한 사람?”
“쓰레기장에 버려진 텔레비전을 모아서 예술로 재탄생시킨 신의 손을 가진 마력의 예술가!”
“피터 씨가 그 유명한 백남준을 직접 만났단 말예요?”
“아뇨. 어느 날 책을 보다가 백남준의 기이하고도 파격적인 퍼포먼스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죠.”
“기이하고도 파격적인?”
“네. 백남준은 독일에 유학 갔을 때 무대 위에서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도끼로 때려 부수는 전위적인 공연을 한 적이 있었죠. 객석은 캄캄하고 무대에만 조명이 들어오는 가운데, 피아노 한 대만 덜렁 놓여 있었지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백남준이 무대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건반을 두드리다 말고, 갑자기 도끼로 피아노를 때려 부수기 시작하는 겁니다. 피아노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무대에서 객석까지 날아갈 정도로 광란의 몸부림을 치는 장면이 연출되었죠. 관객들은 그 기괴한 행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퍼포먼스를 감상했습니다. 백남준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었고, 무대 위의 피아노는 그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도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대의 조명이 꺼집니다. 그것이 퍼포먼스의 끝입니다. 그러자 객석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두들 기립박수를 치면서 무대와 객석이 밝아옵니다. 박수 소리에 무대 뒤로 물러갔던 백남준이 나와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합니다.”
여기서 추씨는 숨을 돌리며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백남준의 피아노 퍼포먼스를 이야기할 때 그는 정말 숨도 쉬지 않고 몰입했던 것 같았다.
“오, 정말 기이한 퍼포먼스네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 감동해 기립박수까지 쳤을까요?”
“무대 위의 백남준은 파괴자이고, 객석의 관객들은 그 피아노를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 대리만족을 체험합니다. 그 감동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괴는 죽음이지만, 감동은 생명의 탄생입니다. 역설 같지만, 이 세상은 두 가지 정반대되는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 실체적 의미를 탄생시키지요. 죽음과 탄생이 그렇고,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 하늘과 땅, 남과 여, 해와 달……. 이러한 반대 개념이 서로 조응할 때 실체적 의미가 우리에게 가장 밀착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나는 죽은 땅에서 생명의 씨앗이 움트는,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지금 이 계절을 좋아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 나는 그런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내가 저 목과 팔이 다 잘린 플라타너스를 신부로 만들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 불쌍한 플라타너스처럼 팔이 잘려 신음하는 많은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것이 내가 설치미술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오늘 나는 저 플라타너스 나무에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나무 신부와 결혼을 할 겁니다.”
추씨는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한 듯 맞은편에 앉은 미스 공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눈길은 두 사람 사이의 어느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물리적인 시선을 허공에 매달아둔 채 그의 심상은 자기 내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미스 공은 어떤 감동으로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 끝으로 자꾸만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귀로는 추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은 자신의 과거 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 공은 의상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영하던 염색공장이 망하는 바람에 가정이 파산되어 대학 진학을 못했다. 담보로 잡힌 집까지 넘어가 가족들은 방 하나의 셋방살이로 전락했다. 어머니와 3남2녀의 자녀가 한 방에서 뒹굴어야 했다. 아버지는 빚쟁이들 때문에 명절이면 1년에 한두 번 밤에 몰래 다녀갈 뿐,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몰래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사채를 얻어달라고 해서, 그것으로 다시 일어서 보려고 한 것 같았으나 번번이 실패만 거듭한 모양이었다. 몇 번의 거듭된 실패 끝에 아버지는 객사를 하고 말았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병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 역시 충격을 받아 가슴앓이 병으로 몇 년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났다. 결국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생활 전선으로 나갔다.
미스 공도 대학에 진학해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고생 끝에 방배동에 여성의류를 파는 조그만 옷가게를 차렸다. 그런데 의외로 옷가게는 잘 됐다. 동대문에서 보세의류를 떼어다 파는데,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그녀의 감각은 일명 ‘황금보세’를 찾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보세의류는 일단 원단이 좋아야 하고, 재봉 마감 처리가 훌륭해 백화점 브랜드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을 고르는 눈이 있어야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 파는 것보다 세 배는 싸게 팔면서 이문은 두 배 이상 남겨, 돈벌이가 제법 쏠쏠한 편이었다.
보세의류 가게를 10여 년 운영한 미스 공은 돈도 많이 벌었다. 강남에 아파트도 사고 가게 매장도 크게 늘렸다.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동대문 시장에 나돌자, 봉제공장 사장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동업을 해서 백화점 브랜드를 만들어 납품해보자는 제의였다. 욕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봉제공장을 키운다, 고급 원단을 사들인다, 백화점 납품을 위해 로비를 한다, 해서 봉제공장 사장은 목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파트 담보까지 맡겨 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는 사이 다 날려버렸고, 봉제공장 사장은 잠수를 탔다.
미스 공은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갔고, 고급 가구들도 헐값으로 팔았다. 방배동 보세의류 가게를 정리하고 나니, 남는 돈이 불과 몇 천만 원이었다. 그 후 그녀는 서울에서 열차를 차고 한 시간 이상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이곳 강변마을로 찾아들어 조그만 찻집을 열었다. 그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추씨가 목과 팔이 잘린 플라타너스 나무 이야기를 할 때, 미스 공은 5년 전 이곳 강변마을로 들어올 때 자신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방배동 보세의류 가게를 정리하면서 그녀는 저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목과 팔이 잘려 죽어가는 생명이었다. 강변마을에 카페를 차렸지만, 찾아드는 손님이 적어 겨우 현상유지를 하며 5년을 지탱해 왔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겨우 죽지 못해 생명을 이어가는 삶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런데, 피터 씨! 저렇게 목과 팔이 다 잘렸는데, 플라타너스 나무에 웨딩드레스를 입힌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정말 죽어가는 생명이 되살아날까요?”
미스 공이 울먹이는 목소리가 되어 물었다.
“미스 빈! 시방 울고 있는 거요? 눈에 티가 들어갔나?”
추씨는 빙그레 웃다가, 빈정거리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리지 말고, 얘기해 봐요. 저렇게 목이며 팔이며 다 잘려나갔는데, 살아날 수 있냐구요?”
“미스 빈! 자연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화창한 봄이 되면 보십시오. 저 플라타너스의 몸통에서 새로운 가지가 마치 장미 가시처럼 돋아나기 시작할 겁니다. 목과 팔이 잘리면서 플라타너스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한 것이죠. 있는 힘을 다해 뿌리에서 영양분을 뽑아 올려 새로운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를 무더기로 피워 올립니다. 플라타너스 나무 자체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이지요.”
“정말요?”
미스 공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 자국을 지우며 토끼 눈을 하고 추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기는……. 여기서 카페를 오래 했으니,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저 플라타너스 나무가 무작스레 목과 팔이 잘리는 장면을 목격했을 거 아닙니까? 볼품은 사납지만 여름만 되어 보세요. 푸른 이파리가 하늘을 가릴 겁니다. 원,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사정없이 가지를 다 잘라버리는 사람들이 어딨나, 그래? 양심도 없지.”
추씨는 마침내 웨딩드레스가 든 배낭을 들고 일어섰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추씨는 접이식 간이 사다리를 빈트리 카페 바로 맞은편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세웠다. 미스 공이 카페 입구에 나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커서 추씨는 배낭을 멘 채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나무의 목과 팔이 잘린 곳까지는 사다리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나무 위에 올라간 추씨는 배낭에서 면사포를 꺼냈다.
“피터 씨! 조심하세요.”
바람이 불자 미스 공이 팔짱을 낀 채 으스스 몸을 떨며 소리쳤다. 그녀는 티셔츠 위에 털실로 짠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장사 한두 번 합니까? 염려 붙들어 매세요.”
막 추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익, 바람이 불면서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면사포를 낚아채갔다.
“아앗, 거 보세요. 조심하라니까.”
“이런 제기랄!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추씨가 바람에 날려가는 면사포를 바라보며 투덜대자, 미스 공이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다.
미스 공은 땅에 떨어져 굴러가는 면사포를 겨우 잡아 추씨에게 가져다주었다. 키가 닿지 않아 그녀도 사다리를 타고 조금 높이 올라가야만 했다.
“미스 빈! 조심해요.”
이번에는 추씨가 미스 공의 걱정을 했다.
미스 공에게서 면사포를 건네받은 추씨는 그것을 공예용 철사로 플라타너스 나무 꼭대기에 고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웨딩드레스를 꺼내 나무에게 옷을 입혔다. 그것도 역시 공예용 철사로 나무의 몸통과 부러진 팔에 고정시키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작업을 끝내고 나무에서 내려온 추씨는 바람에 날리는 웨딩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퍼포먼스치고는 너무 시시하네요. 다 끝난 거예요?”
미스 공이 추씨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퍼포먼스는 이제부터입니다. 거 신부가 잘도 생겼다. 어때요? 오늘 나와 결혼할 신부입니다. 비스 빈은 오늘 우리의 결혼 축하객이면서, 증인입니다.”
추씨는 양손을 벌려 미스 공에게 플라타너스 나무 신부를 소개했다.
“별 걸 다해보네요. 나도 그럼 이번 퍼포먼스의 옵서버로 등장하는 건가요?”
미스 공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옵서버라니? 아주 중요한 배역입니다. 자, 증거를 남기기 위해 신부와 사진부터 찍어야겠지? 그래야 내 남동생이 믿고 부담 없이 결혼식을 올리지. 인증 샷, 잘 좀 부탁합니다.”
추씨는 미스 공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미스 공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멀찌감치 벗어나 사진 찍을 자세를 취했다.
“나무가 다 보여야 되겠죠?”
“그럼 사진에서도 나무의 목을 자르면 안 되죠. 면사포까지 보여야 신부인 줄 아니까.”
추씨가 나무 곁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신랑이 너무 작아 보인다? 신부의 몸통에 달라붙은 매미 같아.”
미스 공은 깔깔대고 웃으며 자꾸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자칫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어이쿠, 조심하셔야죠. 제가 찍어드릴게요.”
강변 설치미술 상설전시장에서 촬영을 마치고 카페 쪽으로 걸어오던 털모자 쓴 사내가 미스 공에게 말했다. 어깨에 멘 백과 손에 든 카메라만 보고도 금세 그가 사진 전문가임을 알 수 있었다.
“어머, 사진작가세요?”
“작가라기보다 아직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저 나무에 면사포를 씌우고 웨딩드레스를 입하는 장면이 너무 이색적이어서 아까부터 관심을 갖고 보았습니다. 기왕이면 저 남자분과 같이 가서 서세요. 그래야 제대로 어울리는 장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아, 그게 아닌데…….”
미스 공은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오늘의 증인이니 같이 와서 찍어도 무방해요. 이리 오세요.”
추씨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손짓으로 미스 공을 불렀다.
미스 공은 곧 추씨 옆에 가서 섰다.
“자, 찍습니다. 그림이 좋습니다.”
사내가 휴대폰 액정 화면을 바라보며 구도를 맞추고 있었다.
“기왕이면 우리 빈트리 카페도 나오게 찍어주세요.”
미스 공이 소리쳤다.
그때 하늘에서 풀풀 목화솜 같은 설편이 날렸다.
“두 사람을 축복하는 봄눈까지 내리네요.”
사내가 추씨와 미스 공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
사진을 찍어준 사내는 가고, 두 사람은 곧 빈트리 카페로 들어갔다. 미스 공이 따뜻한 녹차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 추씨는 방금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남동생에게 보냈다.
‘오늘 이 형은 나무와 결혼했다. 내 옆에 증인도 있으니, 사실 맞아. 이제 부담 갖지 말고 결혼 준비를 해라.’
미스 공이 녹차를 가지고 다탁으로 와 앉았을 때, 추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동생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었다.
‘오, 그 옆의 여자 분 미인이시다. 우와, 신난다. 나도 이제 형수님이 생겼네.’
추씨는 문자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무슨 문잔데 그래요? 나도 보여줘요.”
미스 공이 추씨 쪽으로 바짝 턱을 들이대며 말했다.
“방금 남동생한테 나무와 결혼한 사진을 보냈더니 이런 문자가 왔네요!”
추씨는 휴대폰을 미스 공의 손에 넘겨주며 여전히 낄낄대며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창밖으로 제법 굵은 설편이 사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의 자락도 설편과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끝>
*엄광용 1990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소설 『벽속의 새』가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장편소설 『황제수염』, 『꿈의 벽 저쪽』, 『사냥꾼들』, 『사라진 금오신화』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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