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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책·크리틱/백인덕/위엄과 잔인 사이, 시의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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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07회 작성일 19-07-1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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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책·크리틱/백인덕/위엄과 잔인 사이, 시의 전율


위엄과 잔인 사이, 시의 전율
-고창수, 『말이 꾸는 꿈』


백인덕



1.
속수무책이다. 시의 위의를 말하기 전에 시의 역할을 다하라는 압력이 무언의 단계를 지나 노골화하고 있다. 요구받는 여러 기능들은 결국 ‘정의’로 결집되고 그 척도는 진정성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비관적인 전망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시가 속수무책인 까닭은 시대, 사회, 세계가 온통 ‘사실(팩트)’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연쇄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고 종국에는 생 전체를 끔찍한 전율에 던져진 것으로 이해하도록 몰아세운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이 속수무책에 망연자실한 것은 아니다.


찰나와 찰나 사이에
쐐기를 박는 연습을 한다
사람에게 한 숨 여유도 주지 않는
빽빽이 이어진 찰나들의 행진
음식을 입에 넣으면
서로 다투어 끌어당기는

혀, 목구멍, 식도의 끈질긴 운동 같은
하지만 필요할 땐
빙산의 크레바스처럼 벌어져
사람의 목숨쯤은 단숨에 삼키기도 하고
영겁의 번갯불을 잠시 보여주기도 하는
찰나와 찰나 사이의 간격


찰나와 찰나 사이에
쐐기를 박고
내 번뇌나 거드름
또는 세상 실경을 한동안 끼워 넣는
그런 연습을 한다


―「찰나」 전문


고창수 시인은 “찰나와 찰나 사이에/쐐기를 박는 연습을 한다”고 밝힌다. 물론 이 연습을 이제 막 시작한 것도 아니고, 굳이 이 시대와 상황을 겨냥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업의 출발선에서부터 시간과 존재의 명멸에 대해 깊이 사유해왔기에, 그리고 이 연습은 또한 제 일의적으로 언어(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국어’, ‘민족어’)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 작품의 1연이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로 다투어 끌어당기는/혀, 목구멍, 식도의 끈질긴 운동 같은” 생명현상을 겨냥한 것이었다면, 2연은 조금 다른 방향을 지시한다. “내 번뇌나 거드름/또는 세상 실경을 한동안 끼워 넣”기 위해서 ‘찰나’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는 것이다. 숨 가쁜 연쇄에 기어이 틈(정지)을 만들어 과연 시인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 대답은 이번 시집, 『말이 꾸는 꿈』 속에 부드러운 위장을 한 채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아니다. 가령 중요하게 등장하는 어휘 중에 ‘거울’의 쓰임이나 상징의 변화를 세심하게 따라가면 독자는 누구나 나름의 대답게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시의 이해에 있어, 특히 시인론의 경우에는 시세계의 변모를 주제의 변화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제도로서 문학연구와 교육의 문제가 있지만, 이 방법론이 지나치게 일반화 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가령, 등단 초기부터 다양한 문제에 대한 사유와 천착으로 여러 주제를 다룬 시인이 일생을 지속하면서 변주시킨 개별 주제의 양상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에 따라 종종 전혀 무의미한 평가나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너의 밝은 얼굴은
어느 다른 세상의 거울 속에도 나타난다
너는 너의 독특한 표정으로
사물에 도장을 찍는다
네가 존재 속으로 시선을 던지면
존재는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미소 짓는다
오래 오래 기다려온 사물들이
눈을 어렴풋이 뜬다
사물들은 나지막한 날개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포르르 포르르 날개를 치면서
아가야 너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아가에게」 부분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일종의 ‘생명예찬’이다. 그러나 기대하는 일반적 진술과는 조금 다르다. 탄생을 온전히 ‘아가(새 생명)’의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쉽게 삶, 인생을 운운하지만 우리가 진공 상태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너무 빨리 잊는다.
우리는 사물 속에 있고, 함께 자연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 사물이 위대한 성인이나 혈육이나 심지어 릴케가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들음으로써 발견한 것에 그치지 않음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아가’가 ‘존재’를 개시했을 때, “오래 오래 기다려온 사물들이/눈을 어렴풋이 뜬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가르쳐준다. 여기에는 존재는 오직 자신의 사물들을 발견하고 명명하고 향유하고 상실함으로써 자기의 궤적을 완성할 뿐이라는 깊은 사색이 담겨 있다.


2.
생의 깊이에서 저절로 울려나오는 지혜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속수무책이다. 시대와 사회와 세계가 우리에게 청맹과니일 것을 갖가지 이름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의 위상에서는 딱 어줍지 않은 소리지만, 우리의 생은 한 가지 만족을 통해 구원받지도 못하고 수십 개의 고통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즐거움은 고통을 다 끄지 못한다
당신의 예술은 인간 희망과 번뇌의 작열하는 모래 속에서
타고 있다
당신의 예술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의
위엄과 잔인 사이에 고뇌하고 있다


―「사진 영상-Sebastiao Salgado 환경사진작가 사진전에서」 부분


고창수 시인은 시적 계기를 창작의 원동력으로 끌어가는데 있어 안정적이면서도 참신한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앞 작품은 ‘환경사진작가 사진전’이라는 부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인류의 문명적 욕망이 자기 환경에 가한 끔찍한 테러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시인이 읽어 낸 것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의/위엄과 잔인 사이에 고뇌하고” 있는 ‘예술’이다. 굳이 파스칼을 인용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멸망(죽음)을 인식할 때 우주보다 위대해진다. 그러나 포착된 오브제는 그저 ‘잔인’의 표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딜레마는 시인이 읽음으로써 자기화한 내용이다.
물론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시인이 시원에 대한 천착의 자세를 지녔다는 것은 역으로 만들어나갈 미래에 대한 긍정의 힘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의 사진은 열렬한 항의, 행동이고/기도이고  보시이다/인간의 희망과 절망의 꺼질듯한 촛불은/결국 사람을 행동으로 몰고 갈 것이다/영상은 인간의 여정을 바꿔놓을 것이다”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이 곧 추종한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나의 참 목적은 예술이 아니다
나의 참 목적은 그대의 가슴을 사로잡는 일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다 함께 손뼉을 쳐서
결합보다 더 깊은 교제를 이룩하고
우리를 피와 뼈에서 풀어주는 일이다
내 노래는 하늘을 쳐다보며
간절한 기도를 해온 사람들의
환상과 현실을 담기도 한다
내 노래는 사람의 영혼을 우주적 황홀로 끌어올리고
내 곡조는 시간과 무시간을 결합시킨다


―「파키스탄 민요를 들으며」 부분


시인은 먼 이국(요즘의 공간 인식에서는 결코 멀지 않지만)의 민요를 들으며, 어떤 ‘가락’, ‘곡조’의 힘을 생각한다. 민요는 말 그대로 민간의 노래이기에 거추장스런 의식의 억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 가락이 시인의 피 속에도 내재해있음을 발견하면서, 시인은 “나의 참 목적은 예술이 아니다/나의 참 목적은 그대의 가슴을 사로잡는 일도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경지나 현상의 공감을 너머서는, 아니 그 저변을 흐르는 것. 시인은 자신의 ‘노래(시)’를 “사람의 영혼을 우주적 황홀로 끌어올리고/내 곡조는 시간과 무시간을 결합시킨다”고 한다. 결국 어떤 목표가 아니라 지향으로 시작이 추동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강변에 살면서’ 쏟아지는 ‘달빛’의 사색을 통해 “내 서정의 밤엔/달빛은 강바닥의 깊은 거울에 부딪쳐/은빛 종소리를 내고/귀울음으로/내 안에 울려 퍼진다/나는 저승인양 강을 오래 명상하고/강물에 비친 화랑 기파랑의 모습도 본다/지수화풍으로 사색하는/내 넋의 형상을/강물은 서늘히 비쳐주고/가청주파수 너머 목소리로/나를 불러준다”(「달빛-강변에 살면서」)는 화합의 순간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지수화풍으로 사색하는’ 것은 결국 ‘서정의 밤’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는 ‘달빛’(그 자체가 자기 성찰을 상징한다. 특히 어두운 밤의 달빛은 성찰과 계시라는 강한 상징이 된다)이 ‘강바닥의 깊은 거울’까지 닿음으로써 시인에게 ‘죽음의 사색’을 지나 ‘화랑 기파랑’(향가 ‘찬기파랑가’의 주인공)에게 연결되는 고창수 시인의 시세계의 한 특질도 드러난다.


3.
이글을 시작하면서 ‘시의 전율’이라 했지만, 사실은 ‘전율의 시’라 하고 싶었다. 이유는 ‘위엄과 잔인 사이’가 바로 문명뿐만 아니라 시가 처해있는 자리고 시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담아볼까 하는 욕심에서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이번 시집의 특색인 명징한 이미지와 결 고운 시어의 선택 등이 폄훼될 우려가 있어 바꾸었다.
고창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없이 깊은 사색과 관심 두고 있는 여러 방면의 사유 내용 그리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철학, 시에 대한 지론 등을 다채롭게 펼쳐 보여준다.


시인은
모국어에 난 상처를
자신의 시 속에
되살리는 사람
시인은 타고난 시력으로
우주의 실체를
그려내는 사람
시의 얼굴 위엔
낯선 나라의 꽃과 나무,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이여!


―「시인」 전문


덧붙일 말이 무엇이랴, 시인의 정의로서 고창수 시인이 지향하는 바를 오롯이 담고 있는 바에야, 굳이 덧붙이자면 「시론·9」의 정의 중에서 “한 사람의 목청에 떨리는 우주의 진동/집단무의식의 강물에 떠내려 오는 이름 모를 형상/침묵의 바위틈에서 울려 나오는 순금의 빗살무늬”와 같은 작품을 빚어내기 위한 방법을 세밀하게 찾아봐야겠다. 물론 시인은 그 대답도 시집 속에 담아 두었다.


장님 걸인이 차 칸에 들어서더니
흔히 그러듯 하모니카 같은 것을 불며
물건을 파는 게 아니고
녹음기에 새소리를 채집한 것을 틀면서
차 안을 지나갔다
혼잡 속에서도
까치, 뻐꾹새, 참새 
여러 새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보통 걸인에게는 냉담하던 사람들
무엇엔가 감동한 눈치였다
새소리는 마치 펄펄 뛰는 금붕어 몇 마리를
손바닥에 얹어놓고 오는 것 같았다


―「장님 걸인」 전문


어떤 주의나 방법론에 대한 교설보다 앞의 작품은 ‘낯설게하기’의 묘미를 적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장님 걸인’이 일상의 무수히 반복하는 혼잡 속에서 ‘여러 새소리’를 통해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감동을 시인은 다시 “새소리는 마치 펄펄 뛰는 금붕어 몇 마리를/손바닥에 얹어놓고 오는 것 같았다”라고 생생하게 되살려준다. 노시인의 깊은 배려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아라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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