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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책·크리틱/김유석/안과 밖의 경계, 사립문을 나서는 시인에게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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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13회 작성일 19-07-1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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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책·크리틱/김유석/안과 밖의 경계, 사립문을 나서는 시인에게 부침


안과 밖의 경계, 사립문을 나서는 시인에게 부침
-박달하 시집 『사립문을 열다』


김유석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는 극사실적인 파이프 하나를 그려놓고 그 밑에 이와 같은 제목을 달았다.
그림이 전시되자 당대의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적잖은 혼란에 빠진다. 파격과 혁신의 미덕이라 박수를 치는 이들의 반면, 우롱 당했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관람객들이 그의 그림 속에서 뒤섞였다. 찬사와 비방이 동시에 쏟아진 잠시, 그러나 현대미술은 그 방향을 크게 선회한다. 훌륭한 작품이란 기존 관행에 충실한 정성을 들인 것을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파격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고루한 사고방식과 삶에 또 다른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로써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아이러니한 제목 하나가 바야흐로 초현실주의의 눈을 열게 한 것이다.
「파이프」 그림을 보고 우리는 ‘파이프’라 명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파이프는 아니다. 단지 파이프를 그린 그림, 파이프라는 사물을 본 뜬 이미지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제(파이프)’와 ‘보이는 것(파이프 그림)’을 구분하지 못하고 파이프라 여기는 시각적 인지에 우선한다. 그런데 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제목을 붙여 사람들을 고민케 하였다. 정밀하게 그린 파이프를 두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러니까, 그가 던진 텍스트는 사물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었다.「이미지의 배반」이란 그림의 원제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가 실제 사물에 대한 감각적 형상이란 생각은 이미 오래 된 관념이다. 이미지는 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인간의 불완전한 지각을 속이는 존재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현대의 문화예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그것의 속성은 더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실제와 상관없이 조합한 가상현실 속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카피copy들이 그렇듯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대상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유추해가는 현대시의 경향 또한 그에 적극적이다.
시적 사유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생성된다. 보이는 것이란 정황(대상이나 소재)이다. 그것을 모티브로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를 끌어가는 것이 보편적인 시작詩作인 점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론하는 화자의 눈인데 그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폭넓게 변주될 수 있으며 때론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 전혀 다른  주제를 설정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령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다’ 했을 경우  두 개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파이프’는 ‘파이프’다 란 등가식적 진술에 의해서도 미학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데 함민복은 “눈물은 왜 짠가”를 통해 눈물이 짤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절절히 보여줬었다. 시의 리얼리티는 언어를 통한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언어로 품는 감정의 전이에 의해 형성되는 공명이란 점을 상기할 때 파이프는 그냥 파이프여도 충분한 사유를 드리울 수 있음이다.
문제는 진경산수화일 뿐이거나 도식적인 틀에 안주하여 자기합리화적 태도를 취할 때이다. 시는 회화와 다르지만, 마그리트에 대한 <미셀 푸코>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코는 마그리트 그림에서 따온 동명의 책을 통해 언어의 지시적 측면을 조명했다. 텍스트는 그 대상을 지시해 준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텍스트 역시 지시 의미이다. 다만 그것이 관습적 용태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사람들의 인식에 혼란을 주는 것인데 푸코는 탈관습적인 텍스트와 이미지의 배치로부터 발생하는 예술의 효과에 대해 말하고자 싶어 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미셀 푸코. 2013) 거리가 있지만 시의 이미지에 상관해서 확대 해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미지를 시의 요소 중의 하나로 전제할 때 시는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이어야 한다. 파이프라는 사물 자체가 가진 이미지를 투영하여 하나의 텍스트를 엮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재의 시단은 이미지즘적인 시편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이전의 이미지에 비해 현대시의 경향은 주지主知적이고 사변思辨적이다. 대상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또 다른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면서 정서를 환기시키기도 하고 생소한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시의 공간을 확장해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실험들을 활발히 진행시키고 있다. 이미지의 중첩은 텍스트를 모호하게 이끌거나 난해함 속으로 스스로를 매몰시키는 함정에 빠지기도 하지만 분명한 점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시의 이미지는 개념적 사고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미적 형상이다. 소재와 정황 등을 통해 시인은 생각하는 관념을 전달하는데 그것을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드는 방법이 곧 이미지다. 시에 있어 관념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며 그에 의해 미적 가치가 더해지기도 한다.


조롱조롱 얼굴 내미는 꽃 무게에 허리가 휘어진다.
휘어지는 조팝나무 사이로 소리 없이 기차가 지나간다.
길섶에 삐죽 고개를 내민 물오리나무 툭 치고 간다.
브레이크 없는 바닷길 따라 미끄러지며 지나간다.
열어둔 하는 구름각시 내려오더니 소나기가 지나간다.
푸른 숨을 내뿜어대는 사월의 청춘이 지나간다.
앞자리 노부부가 이야기꽃을 피운다.
뒷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세월을 이야기한다.

깃발을 든 역무원이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지나간다」전문


태양이 용광로에 시간의 관절을 달구어 한낮을 재생한다.
재생된 열기를 바람에 버무려 노을빛 산마루에 걸어둔다.
산이 한낮의 살점을 따 걸어둔 나무들 사이로 분꽃이 피고,
구름은 기억의 보풀 날리며 늙은 태양의 꼬리를 건드린다.
한낮의 치맛자락이 모퉁이 돌아갈 때 도토리 툭, 떨어지면,

노을이 오방색 보자기에 여름을 동여매고 먼 산을 넘어간다.


                                          ―「한낮의 치맛자락」전문
 
이미지는 묘사에 의해 형성된다.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으로 명료화시키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닌 본질이나 정황에 대한 인상 등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묘사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설명적 묘사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의미와 상징 등을 나타내는 암시적 묘사로 나눌 수 있다. 시의 묘사는 대개의 경우 암시적 묘사를 말하며 이미지와 비유, 상징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박달하는 묘사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인다.「사립문을 열다」를 묘사에 비중하여 읽어도 무방할 듯싶을 만큼 정황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것만으로 개개의 텍스트를 끌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정진이라 할만하다. 그의 묘사는 거시적이며 자연한 질감의 것으로 특징할 수 있다. 거시적이라 함은 사물에 대한 치밀한 부분묘사보다 전체적인 정황묘사를 통해 하나의 텍스트를 완성시킨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경우 집중력을 흩뜨리는 산만함을 주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기교를 배제한 담백함을 주기도 한다.
「지나간다」의 이미지는 감각적이며 신선하다. 꽃 무게에 허리가 휘는 조팝나무 사이 기차는 가고, 물오리나무 툭 치며 지나는 소나기에 노부부의 한담이 들려오는 바닷가 정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이미지가 잘 조화된 작품이다. 꽃은 젊은 날을, 기차와 바닷길은 생을, 그 생의 굴곡은 소나기, 그리고 노부부의 담소는 생의 뒤안길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그러고 나서 ‘깃발을 든 역무원’을 빌어 긍정적 의지로 귀결되는데 생의 파노라마가 길지 않은 한 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할 것이다.
이미지의 구성 또한 치밀하다. 허리를 휘는 꽃과 소리 없는 기차는 시각적 이미지로써 매우 정적이다. 멎어 있는 듯한 이 이미지는 소나기와 푸른 숨을 내뿜는 사월이란 청각적이미지로 치환된다. 그런 후 다시 그 둘을 ‘깃발을 든 역무원’이란 공감각적인 이미지로 엮어 보여주는 치밀함이 잘 짜여 있다. 반복적인 ‘지나간다’의 종결어미 또한 리듬감이 있어 시의 호흡을 가다듬는데 다만, ‘사월의 청춘’과 ‘뒷머리가 희끗희끗한 세월’은 의미의 중복과 함께 다소 상투적인 대구의 느낌을 준다.
반면 「한낮의 치맛자락」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름 한낮을 묘사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나 시의 전개에 있어 전편의 예와 같은 치밀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시 전체가 풍경의 소묘에 머물러 있다.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회화적 진술이 언어의 형식을 빌고 있을 뿐 무엇을 끌어가려 함인지 텍스트가 불분명하다. 텍스트의 유무는 흔히 화자의 부재로부터 나타난다. 시에 개입하는 화자는 주관적 서사를 이끌어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데 이 작품에서 그것을 포착하기 쉽지 않다. 이미지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 선명하지 않다. 이렇다 할 서사가 개입하지 않고 그저 관찰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은 읽고 난 후 공허함을 떨치기 어렵다. 특히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글일수록 그런 느낌이 짙다.
그러나 김춘수의 작품세계에서 엿보이듯 무의미의 의미 또한 시의 텍스트에 포함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읽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한낮의 살점’ ‘늙은 태양의 꼬리’와 같은 절구는 그리 만만치 않은 표상이며 억지스럽지 않은 시적 흐름 역시 자연하다.


물가에 무수한 물푸레나무 위로 달빛이 내려와 꽃을 피웠네.
여름을 녹였던 별들은 유유한 흐름 속에 휘감기며 걸어가고,
휘파람 부는 백천교 말라가는 풀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
유년의 콧물이 묻어있는 방천둑에 달그림자 흔들리며 걸어오네.
둑가에 걸터앉은 돌 틈으로 반딧불이 반짝이다가 사라지면,
다리 밑 도란도란 이끼 낀 돌들은 아이들 웃음소리 기다리고,
도시에서 달려온 피곤한 달빛이 백천교 밑에서 막춤을 추네.
술 마시고 백천교 건너다 동네총각 달빛 속으로 뛰어드네. 


                                    ―「백천교의 달」전문


천년고찰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이 아침을 연다.
해바라기, 연꽃, 국화가 술렁이며 햇빛을 토해낸다.
천년 빗물을 들이마시던 나무에도 천년꽃이 핀다.
우르르 돌담 돌아가던 꽃비가 둥글게 모여 앉는다.
보살님의 간절한 기도가 화사한 연등으로 피었다.
시련은 천년을 피고지다가 부처님 발끝에서 꽃이 된다.
여백이 없는 퇴색한 단청에도 봄은 바구니로 쏟아진다.


                                      ―「내소사의 봄」전문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묘사에 있어 수반되어야 할 한 가지 것은 진술이다. 묘사와 진술은
시의 중요한 두 축을 이룬다. 묘사는 가시적이고 회화적인 반면 진술은 해석적이며 고백적이다. 묘사에 치중한 시는 산뜻하지만 맛의 깊이가 덜하고 진술에 의지한 시는 깊이는 있으나 관념적이기 쉽다.
언어의 사고를 깊이로 체험화시키는 진술은 앞서 지적한 바, 시적 화자 역할을 하며 텍스트를 이끌어 나간다. 작자의 의도를 뒷받침하면서 내면의 공간으로 시를 향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진술의 구체적 힘은 묘사로부터 온다. 묘사가 없는 진술이란 죽은 진술이 되기 쉬울 뿐 아니라 진술적 표현만으로 시를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묘사에 의지에 이루어진 시 또한 공허하기 십상이어서 감동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묘사와 진술이 적절하게 구현될 때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 인용한 두 작품은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사립문을 열다」에는 비슷한 유형의 시들이 눈에 띄게 상재되어 있는데 박달하의 시작은 필경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지 않나 싶다. 또한 대상에 대한 정교한 묘시보다는 거시적 정황 묘사에 일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 전체를 하나의 틀로 하는 묘사는 소재들을 유기적으로 엮어가며 텍스트를 구현해 나간다. 이 경우 대상들의 알레고리가 조금 느슨하고 중첩되는 느낌을 준다. 「백천교의 달」에서 느껴지듯 백천교를 초점으로 하는 풍경들이 약간은 산만하게 열거되고 있다. ‘~네’ ‘~고’ ‘~면’ ‘~네’로 반복되는 단조로운 형식도 도식적인 한가함을 주며 거시적 정황 묘사의 한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난감해 보이는 것은 진술의 부재이다. 텍스트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화자의 개입, 즉 주관적 진술이 필요할 것인데 거시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묘사의 일관은 시적 긴장도를 이완시킴으로써 텍스트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내소사의 봄」도 비슷한 유형이다. 큰 골격만을 추려내는 작자의 미필적 고의인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렇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은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시 창작에 있어 이미지와 비유, 상징은 시적 묘사를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묘사는 그 시적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이는 면만 바라보면 흔히 이발소 그림이 되기 쉽다. 대상의 보편적인 특성을 떠나 드러나 있지 않은 부분을 정교하게 묘사해가는 작업을 통해 텍스트는 물론 시적 상상력을 확보해 나가는 일은 본질적인 요소이다.  



하늘이 육중한 문을 열자 빗소리가 비명을 지른다.      
묵힌 날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발걸음이 바쁘다.
열광하는 초록 군상들이 피를 흘리며 주저앉는다.
온종일 빗속을 배회하던 나비가 젖은 날개를 턴다.

안경을 벗어도 좋다는 시그널이 종소리가 된다.


―「비오는 날」전문


처녀시집을 펼치면 먼저 맡아지는 게 작자의 열정이다. 어떤 얼룩 같은 그것은 기교나 공연한 무게를 얹지 않은 육필이어서 작품론 쓰기를 망설이게 한다. 대부분의 첫 시집은 그래서 읽는 것만으로 감정이 벅차고 뭉클하다.
비교적 담담한 정서로 무위한 시간들을 그려낸 박달하의 시편들은 그의 뒤안길만큼이나 소중한 미덕일 것이다. 다소 투박하고 무른 부분이 없진 않으나 그 점이 오히려 미더운 것은 이제 막 사립문을 연 한 시인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공연한 사족을 단 까닭도 그 때문인데  시인에 대한 좀 더 큰 욕심이라면 그림을 빌어 밝힌 서두일 것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비유일지라도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아이러니와 역설 같은 시의 요소들을 가미할 수 있다면 ‘사립문’으로 엿본 박달하의 시세계는 크게 확장될 것이다.「비오는 날」이 그것을 예시하는 듯하다.       
‘안경을 벗어도 좋다는 시그널’, 그 ‘종소리’를 듣고 싶어 시집을 덮고 젖은 날개를 터는 나비가 된다.          





*김유석 1989년 〈전북일보>,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리토피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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