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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신연수/인천 근대문학 100년─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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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28회 작성일 20-01-0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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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신연수/인천 근대문학 100년─시詩


인천 근대문학 100년

─시詩


신연수



근대문학은 1908년 11월 《소년少年》 창간호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발표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10여년 후인 1919년 2월 일본에서 나온 《창조創造》에 주요한朱耀翰이 자유시 「불노리」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현대시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면 인천에서의 현대문학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1927년 2월 진우촌(秦雨村, 본명 宗爀)이 창간한 문예잡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기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습작시대》 이전인 1920년 2월에 나온 향토잡지 《개척開拓》에도 시와 소설이 실려 있다. 하지만 《개척》은 일회성에 그침으로써 인천문학의 출발로 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습작시대》의 창간은 인천에서 첫 문예잡지가 출현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그동안 서울로만 한정되던 문예지의 발간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습작시대》 발간 이듬해인 1928년 1월 평양에서 《백치白雉》, 2월에는 공주에서 《백웅白熊》, 3월에는 황주에서 《생生의 성聲》, 8월에는 진주에서 《신시단新詩壇》이 잇달아 창간되고 또 1930년대에도 중강진의 《시건설詩建設》, 원산의 《초원草原》이 계속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 《습작시대》 창간, 인천 현대문학의 출발로
인천의 현대문학시대를 연 《습작시대》 창간호를 보면 ‘창작시’라는 분류를 별도로 두고 10명의 시 14편을 수록하고 있다. 「국경國境의 밤」의 시인 김동환金東煥의 「월미도해녀곡月尾島海女曲」을 비롯하여 박팔양朴八陽으로 잘 알려진 김려수金麗水의 「인천항仁川港」 등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인천사람인 한형택韓亨澤, 변추풍邊秋風 등의 시도 실려 있다.


   조선의 서편 항구 제물포의 부두
   세관의 기旗는 바닷바람에 퍼덕 거린다
   젖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潮水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情景이여
─김려수의 시 「인천항」 일부


이 밖에도 진주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엄흥섭嚴興燮이 「내 마음 사는 곳」, 시인 유도순劉道順이 「과부」와 「눈」, 아동문학가 한정동韓晶東이 「꿈」 등을 발표했다.


《습작시대》는 모두 4호까지 발간됐다. 그러나 2호와 4호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창간호는 필자가, 그리고 3호는 연세대학교에 각각 한 권씩 보관되어 있다. 3호에는 『심화心火』의 시인 박아지朴芽枝의 민요시 「흰 나라」와 「봄 기다리는 마음」, 우이동인牛耳洞人의 「봄 물결」, 종교시를 많이 쓴 장정심張貞心의 「네 맘도」와 「주主시여」, 진우촌의 「이별江邊」 등이 실려 있다.

《습작시대》 이후 인천의 문학운동은 몇몇 개인 외에는 보이지 않다가 10년 후인 1937년 1월 김도인金道仁의 《월미月尾》 창간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미》는 창간호를 내고 종간이 되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시와 소설, 수필은 물론 아동문학까지 골고루 다뤄 《습작시대》에 비해 진일보했다. 시작품은 월미시단月尾詩壇과 규수소곡閨秀小曲으로 남녀를 나누어 놓았는데, 월미시단에는 『산제비』의 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월야月夜의 계명사鷄鳴寺」, 『청색마靑色馬』의 시인 김해강金海剛의 「천공天空을 머리에 이고」, 극작가 함세덕咸世德의 「고개」가 실려 있다. 이 중 김해강은 시작품에 “새봄을 맞으며 인천의 젊은 동무들께”라는 부제를 붙여 주목을 받았다. 또 규수소곡에는 김성희金星熙와 최수경崔秀京이 「괴로운 밤」과 「꿈」을 발표했다.

이후 1940년대는 광복이 될 때까지 암흑의 시대를 맞는다. 극작가인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김동석金東錫 등이 가끔 시를 쓰는 것 외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광복 후 최초의 동인지는 1945년 창간된《문예탑文藝塔》


광복 후 이 땅에서 처음 나온 동인지는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탑文藝塔》이다. 《문예탑》은 시인 김차영金次榮을 비롯해 신영순申永淳, 동화작가 우봉준禹奉俊, 나중에 <대중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한 시인 윤기홍尹基洪,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인 시인 한상억韓相億 등이 참여, 1945년 11월에 창간호가 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문예탑》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는 비단 《문예탑》뿐만 아니라 《시詩와산문散文》 등 해방공간에 나온 다른 문예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공간 인천시문학에 대해서는 김차영과 흑인시를 쓴 배인철裵仁哲, 그리고 안성사람으로 한때 인천에서 교사로 근무한 조병화趙炳華 및 나시인癩詩人 한하운韓何雲 외에는 언급할 것이 없다.

먼저 김차영은 강화 출신으로 해방이 되는 날 인천에서 제물포문학동인회를 결성, 그해 11월 《문예탑》, 그리고 다음해 2월 《시와산문》 등을 발간하다가 한국전쟁 후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옮겨감으로써 인천과는 멀어졌다.

배인철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와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영문과에서 공부를 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新藝術家協會를 결성, 회지발간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배인철은 1947년 2월 인천에 문을 연 해양대학교에서 영어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월미도에 주둔하던 미군부대에 출입하며 흑인시를 발표하기 시작해 1947년 5월 서울 남산에서 괴한이 쏜 총에 피살될 때까지 모두 5편의 흑인시를 남겼다. 그 중 「노예해안」, 「흑인녀」, 「쪼 루이스에게」, 「인종선─흑인 쫀슨에게」 등 4편은 생존시 발표된 것이고 「흑인부대」는 사후 조병화가 공개한 것이다.

인천중학교에서 배인철과 함께 근무한 조병화도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잡지나 신문에 발표하기 보다는 시집을 발간하는 방법을 택했다. 첫 시집은 1949년 7월에 나온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이다. 이후 1950년 4월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慰安』 등을 잇달아 냄으로써 인천중학교 제자들에게 시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인천과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면서도 고향인 안성의 시인으로 불리웠을 뿐 인천시인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조병화의 인천중학교 제자로는 시인 김영달金泳達과 김용배金容培, 평론가 김양수金良洙 등이 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또 변화시킨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로 인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문학은 더욱 심했다. 일제강점기 인천문학을 이끌던 진우촌과 김동석, 현덕玄德, 함세덕, 김도인, 이규원李揆元 등은 사망하거나 월북 또는 행방불명되었으며 김차영과 조병화는 서울로 옮겨 갔다. 대신 북한에서 이인석李仁石, 임진수林鎭洙, 한무학韓無學 등이 내려와 자리바꿈을 했다.

한국전쟁 후 1950년대는 인천에 문단이 형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정부수립전인 1947년 2월 12일 창립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일명 문총)는 전쟁 중 문총구국대가 되었다가 전쟁 후에는 한국문학가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천도 전쟁 발발전인 1950년 6월 12일 문총인천지부가 결성, 수차 이름이 바뀌다가 1962년 현재의 인천문인협회(정식명칭은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로 재탄생,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대 인천문학의 출발은 1952년 1월 창간된 《신진新進》이라 할 수 있다. 《신진》은 전쟁 중 북에서 내려온 시인 이인석을 비롯하여 인천 출신의 소설가 조수일趙守逸과 고봉인高鳳仁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동인지로, 시와 수필, 단편소설 등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이 중 시는 이인석의 「북진北進」, 조수일의 「마음」, 고봉인의 「우리의 선언宣言」 등 있다. 같은 해 10월 역시 월남한 시인 임진수林鎭洙와 소설가 김찬도金贊道는 《노정路程》이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여기에는 임진수의 시 「한가위」가 실렸다. 《신진》이나 《노정》은 모두 창간호만을 내고 더 이상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동인지는 아니지만 1953년 6월 《북진北進》이라는 실향민들을 위한 잡지가 나왔다. 소설가 김창황金昌璜이 편집한 《북진》도 시와 수필, 소설 등 문예란을 마련, 인천 문인들의 작품이 실렸다. 먼저 창간호에는 이인석과 고봉인, 한상억, 신경수申景洙, 강중선姜重善 등, 다음해 신춘호에는 이경희李京禧와 임진수, 이원복李元馥, 최곡토崔谷土, 최성연崔聖淵 등의 시가 각각 실렸다. 이처럼 1950년대에는 여러 동인회가 결성되고 또 동인지를 발간함으로써 본격적인 동인지 시대를 열었다.


전쟁 후 개인 시집 발간 봇물, 인천에서는 52년 『아류』가 처음


이밖에도 동인지는 1952년 최병구崔炳九가 만든 《초원草原》을 비롯 1955년 4월 김영달과 김용배, 홍명희洪明姬, 조한길趙漢吉 등이 참여한 《소택지대沼澤地帶》, 같은 해 7월 이정태李鼎泰와 손재준孫載駿이 중심이 돼 만든 《사파砂波》 등이 있다. 그리고 1957년 3월 김두성金斗星, 김창황金昌璜, 조수일趙守逸이 만든 소설동인지 《해협海峽》, 1959년 9월 이일우李一愚와 김병제金秉濟, 곽중신郭重信의 《표풍飄風》도 나왔다. 이 중 《소택지대》와 《표풍》은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았지만 《초원》과 《사파》는 수년 동안 발간, 많은 작품이 발표됐다. 특히 《사파》에는 이일우, 김병제, 곽중신 외에도 차경택車京澤, 김재화金在華, 안심해安深海, 최영일崔永一, 이관제李寬濟, 낭승만浪承萬, 변승무邊承武 등 여러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 무렵에는 또 고등학생들의 문학활동도 활발했다. 알려진 것은 당시 인천고등학교 학생인 이중흡李重洽, 황원黃源, 김만길金萬吉, 윤중원尹重元, 최수진崔秀鎭, 장현기張玹基 등이 1955년 12월 낸 등사판 동인지 《벽壁》이 있다. 이들은 당시 모 신문사 주최 문예백일장에서 입상한 학생으로 후에 시집을 내는 등 대부분 시인의 길을 걷는가 하면 인천문학의 중추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50년대 동인지 중 대표적인 것은 《인천문학仁川文學》이라 할 수 있다. 《인천문학》은 전쟁 초기 《초원》을 낸 바 있는 최병구가 1956년 12월에 창간, 1981년 작고할 때까지 발간하다가 시인 손설향孫雪鄕이 이어 받아 1984년 4월 제8집을 내고 폐간된 인천의 대표 문예지이다. 창간 당시는 동인지를 표방했지만 1972년 2집을 낼 때부터는 인천 문인들이 참여하기 시작하고 76년 3집부터는 인천문인 대다수가 참여한 인천 유일의 종합문예지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인천문학》을 통해 발표된 시작품은 일일이 언급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창간호만 보더라도 이인석, 한상억, 한무학, 임진수, 조한길, 낭승만, 윤부현尹富鉉, 홍윤기洪潤基, 석보경石寶慶, 홍원태洪元泰, 최창섭崔昌燮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인천문학》의 발행인인 최병구는 또 인천시인협회를 만들어 1977년 『인천시인전집』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재정문제로 간행되지 못했다.

또 1950년대는 개인들의 시집이 발간되기 시작, 봇물을 이루기도 했다. 인천의 경우 《주간 상아탑象牙塔》을 발행하던 수필가이며 평론가인 김동석이 1946년 정음사에서 시집 『길』을 처음 발간하고 1949년 나시인 한하운의 시집 『한하운시초』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 시집들이 인천의 시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1950년대 인천의 시집은 어떤 것이 있는가?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소택지대』 동인인 김영달金泳達과 홍명희洪明姬가 1952년 11월 5일 펴낸 2인 시집 『아류亞流』가 처음이다. 46판, 48면의 흑갈색 등사판인 『아류』에는 김영달의 「피곤한 낙서」와 「침실」 등 7편, 홍명희의 「황혼의 서신」 등 6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뒤를 이어 1953년 2월 한무학의 첫 시집 『새로운 초秒의 속도速度』, 1954년 3월 조병화의 제4시집 『인간고도人間孤島』, 1955년 1월 이인석의 첫 시집 『사랑』, 같은 해 12월 최성연崔聖淵의 첫 시집 『은어銀魚』, 1957년 6월 손재준孫載俊의 첫 시집 『여정旅程』, 같은해 12월 이광훈李廣薰의 첫 시집 『추억追憶』, 1959년 1월 최승렬崔承烈의 첫 시집 『원정園丁』, 1959년 4월 최병구의 첫 시집 『원죄근처原罪近處』 등이 발간됐다. 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태식申泰植이 1958년 3월 『미래未來를 위한 기도祈禱』, 학생인 오광철(吳光哲, 전 인천일보 주필)이 1959년 11월 등사판 동시집 『코스모스』를 각각 펴냈다. 오광철의 동시집은 인천에서 나온 첫 동시집이다.

그러나 1950년대는 문인들도 문총구국대 등의 일원으로 종군하거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이 전쟁과 관련되거나 전쟁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는 문학활동이라고 해봐애 <멸공 문화인궐기대회>나 위문행사 등이 대부분이었으며 시화전도 두꺼운 종이에 쓴 시를 벽에 붙이는 벽璧시화전이 고작이었다.


1962년 인천문인협회 창립, 문인협회 중심 시대 열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학계는 또 큰 변화의 시대를 맞는다. 1961년 5.16혁명정부는 모든 예술문화단체의 해산을 명령, 그동안 몇 개로 나뉘어 다툼을 벌이던 문학단체가 모두 해체된다. 그리고 1962년 새로운 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예총)가 탄생한다. 인천에서도 1962년 2월 17일 한국문인협회인천지부가 새롭게 창립, 초대 지부장에 조수일, 상임간사에 조한길, 시분과 간사에 한상억이 각각 선출된다. 또 3월에는 예총경기도지부가 창립, 문협 회원인 한상억이 지부장으로 선출된다. 문협인천지부는 예총경기도지부에 소속된 것이다.

이 해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세종문화 큰잔치> 행사의 하나로 학생백일장이 열렸는데 이것을 인천문협이 주관했다. 이어 창간된 《경기예총京畿藝總》도 문협이 맡아서 제작했다. 《경기예총》은 이후 매년 발간되었는데 인천문인들의 글들이 주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인천문협은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협 창립 이후에는 문인들의 활동이 문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물론 1960년대부터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문인들의 발표지면이 줄어들자 문협이 회지 등을 발간하고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천의 경우도 문협이 창립되기 전에는 회지를 발간한 적이 없었는데 문협이 창립된 이후에는 예총과 함께 만든 《경기예총》을 비롯하여 《경기문단》과 《경기문예》, 《경기문학》, 《인천예총》, 《인천문예》 등이 이름을 달리해 계속 발간된 것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물론 1960년대도 문학동인회 활동이나 개인적인 작품집 발간은 계속됐다. 1960년 11월 창간호를 낸 《중앙문학中央文學》은 68년까지 3집을 냈고 1961년 4월 소설가 김창흡金昌洽이 편집한 《창작》과 같은 해 최건 등이 만든 등사판 시동인지 《습작시대》는 겨우 창간호를 내는데 그치기도 했다. 개인들의 시집발간도 이어졌다. 1961년 3월 김영달이 『여정旅程』, 같은 해 5월 한상억이 『평행선平行線의 대결對決』, 1965년 11월 윤부현이 『꽃과 여인女人과 과목果木』, 1967년 4월 박송朴松이 『외인부대外人部隊』, 1968년 8월 김연식金蓮植이 『꽃으로 서서』, 같은 해 10월 최경섭崔璟涉이 『종·종·종鐘·鐘·鐘』, 1969년 9월 김차영이 『상아환상象牙幻想』을 각각 발간했다.

이 같은 활동은 197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졌다. 문학동인은 1961년 결성된 「타원他圓」이 「삼우문학三愚文學」으로, 또 1974년 「경기시문학동인회京畿詩文學同人會」로 이름을 바꾸어 동인지인 《시류詩流》를 3집까지 발간하는가 하면, 1970년대 초에는 노두식盧斗植이 만든 《이인異人》은 1974년 4집까지 내기도 했다. 이밖에 「사라호」, 「문혼文魂」 등의 동인회는 시낭송회를 여는 등  문학의 저변확대에 노력했지만 끝내 동인지를 발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는 어느 때보다 많은 시집이 발간됐다. 대표적인 것만 들어도 1970년 1월 낭승만浪承萬의 『사계四季의 노래』를 비롯해 같은 달 임진수의 『아이들과 와라와라』, 9월 이석인李錫寅의 『산우가山雨歌』, 12월 한순홍韓順虹의 『방황彷徨하는 잎새』, 1974년 4월 윤중원尹重元 유고시집 『주시注視』, 같은 달에 나온 김구연金丘衍의 『꽃불』, 10월 장현기張玹基의 『달팽이』, 1976년 5월 최시호崔始昊의 『해변海邊의 사연』, 1977년 4월 손설향의 『부두埠頭의 편력遍歷』, 1979년 3월 홍명희의 『범부凡婦의 서書』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 맞아 문학계도 새로운 변화 모색


역사의 전환점인 1980년대는 문학에 있어서도 변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70년대 유신독재와 5공에 대한 저항운동이 민중문학시대를 낳았으며, 이는 기존 문인협회를 부정하고 민족문학과 참여문학을 주창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금기시되던 월북문인들의 작품도 1989년 대부분 해금됨으로써 반쪽이었던 한국문학이 더욱 풍성해지기도 했다. 초창기 인천문학의 선구자인 진우촌과 김동석, 함세덕, 현덕, 이규원 등도 인천문학사에 편입될 수 있었다.

1980년대는 문협의 조직적인 움직임보다 청년 문학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81년 김구연과 조우성趙宇星을 중심으로 발족한 인천청년문학가회가 대표적인 것으로, 동회는 같은 해 12월 《문학청년文學靑年』을 선보여 4집까지 낸 후 1985년 《월미문학月尾文學》으로 제호를 변경, 7집까지 발간했다. 앞서 1981년 7월에는 경기시문학동인회에 뿌리를 둔 내항문학회가 《내항內港》 제1집을 낸 후 지금까지 39년이나 계속 발간, 《내항》은 인천의 최장수 동인지 및 동인회로 기록됐다. 이밖에 여자시작업女子詩作業 동인도 1984년 3월 첫 동인지를 낸 이래 1999년까지 13집을 발간했고, 1980년대 빈민촌貧民村문학회가 《백옥白屋》, 묵시동인회가 《묵시黙示》를 내는 등 1980년대도 끊임없이 새로운 동인회가 탄생하고 또 사라졌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갯벌문학》을 비롯해 《굴포문학》, 《남동문학》, 《청라문학》 등이 생겨나 현재까지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1991년 12월 인천문협이 일반 문학애호가들을 위해 만든 계간지 《학산문학鶴山文學》은 단 한 권도 결호 없이 발간, 2019년 봄으로 103호가 나와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중 가장 많은 통권을 기록했다.

1998년 12월 인천에는 인천문인협회와 성격이 전혀 다른 문인단체가 창립된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인천지회다. 보수적인 성격의 문협과 진보적인 성격의 작가회의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인천작가회의는 그 동안 계간지인 《작가들》 발간을 비롯해 「작가포럼」과 「민족문학제」, 「통일백일장」 등을 개최하고 「작가와의 대화」 등으로 문학의 저변확대에 애쓰고 있다. 또 2005년 12월 회원 17인 신작시집인 『자연바다』를 처음으로 낸 이래 2006년 2집 『꽃이 핀다 푸른 줄기에』, 2007년 3집 『세이한 고비』 등을 잇달아 냈다. 작가회의의 신작시집은 2017년까지 모두 10집이 나왔다. 반면에 인천문협은 2008년 12월 『작고문인선집 1(시)』를 낸 후 2009년 소설, 2010년 희곡과평론, 2011년 수필과 아동문학 편을 잇달아 내기도 했다. 문협의 작고문인선집에는 최경섭, 최성연, 한상억, 최시호, 배인철, 최승렬, 김차영, 최병구, 손설향, 조한길, 허욱許旭, 이석인, 최무영崔戊榮, 송서해(宋西海 본명 泳栢), 이효윤李孝潤, 이영유(본명 李圭熙) 등의 시작품 10편씩이 실려 있다. 한편 작가회의에서도 작고회원인 박영근朴永根, 강태열姜泰烈, 이가림李嘉林 시인의 추모제나 유고집 발간 및 시비 건립 등으로 고인들의 시세계를 기려 왔다.


인천 근대문학 100년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한 준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인천은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보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같은 인식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어떤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한 말은 인천문학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우리를 안심하게 만든다.

발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던 날들이 지나갔다/그것이 시가 되었다//우리는 좀 더 어두워지겠지만/흰 빛들을 끌어 모을 것이다/그 빛들은 눈송이를 끌고 다닐 것이다/마침내 눈은 쌓여 어둠을 덮을 것이다/생의 골목골목은 광장이 되고/광장은 시가 될 것이다. (내 시의 본적이 되어준 인천에서)




*신연수 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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