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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이병일/신작시/홍어의 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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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14회 작성일 20-01-0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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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이병일/신작시/홍어의 시 외 4편


홍어의 시 외 4편


이병일



그해 늦봄, 무엇이 나를 뭍으로 오게 했을까?
눈 감으면 끝인데, 나를 지고 가는 산천山川,
내 혼은 항아리에서 졸고 있으니, 그냥 아름다워라


태양보다 작은 달이 지구 가까이 올 즈음
어미는 삼칠일동안 저공비행을 할 거라고 했다
스물네 시간을 물결이 아닌 더운 핏줄에 접었다
곡선을 숨겨놓지 못한 꼬리와
넓고 팔락거리는 침묵과 함께
내 눈眼의 저편으로 빛이 지나갈 때까지


그러나 처음부터 모래로 지어진 이 몸은
볕 속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우우우 몸을 떨면서 우는 바다에 밀봉되었다
흐르는 족족 검은빛이 되는 파도는
그렇게 부서지고도 그 밖에 무엇을 가져봤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코와 입술을 오므렸다 펼치니까
조용히 피로 불타는 아가미로 나는 심해를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점점 빨라지거나 영원히 숨을 놓치고
죽음은 뒤돌아서서 아직 속까지 썩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느 집의 칼은 고동무치* 코와 입술을 가르고
숨 녹아 차가운 애는, 목포의 눈물로 씻겨나온다
나는 더 캄캄한 짚 항아리에서 한 계절 피 흘려도 좋았다


   *홍어.





고미나루에서



강물이 해를 지고 돌아눕는 저녁
별똥별은 하늘과 땅을 꿴 눈과 피와 허벅지로 솟구친다
심장은 새소리와 꽃빛을 모아 어금니와 잇몸과 입술을 만든다
눈 밑까지 금세 차오른 기억 따위야 딱히 말할 수 없으니까
곰은 아무 생각 없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지느러미 치는 물소리만한 약이 없다고
낮엔 곰, 밤엔 여자였으니까, 제 숨을 다시 풀어놓는다
곰은 킁킁, 까맣게 빛나는 코를 들면서
어디로 간들 이 몸뚱이 들락날락할 곳은 있다고 생각한다


감은 눈 번쩍 뜨듯 물 밖은 아직 찬데
아무렇지도 않은 새날이 와서 곰은 미끈한 두 다리를 얻었다
해와 달이 서로 봄이라 누울 곳을 찾듯이
몸 안의 곰 그림자마저 지운 여자는 어탕국수집 마루에 숨어
몸을 떨고 있었는데
검은 돌산에서 나오는 바위 같은 남자를 쫓아 나섰다


두 발로 나란히 선다는 일, 더 이상 물속 절벽으로 발길 돌리지 않게
여자는 버드나무 곁에서 까막눈이 되었고
어느새 발등에 검은 털 나고 등짝 깊은 아이 둘을 두었다
사나흘에 한 번 짐승의 살과 피가 몹시 당겼는데
쇄골이 얼마나 화한지 옷고름 거머쥐면서 날 것을 멀리하였다
그때 산 목숨 잡아먹고 산 죄가 핏빛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뿔의 향연



연평도와 백령도 연안의 물개들이 낮달로 떠오른다
봄볕이 약해서 금세 눈과 코가 감기듯
물이 움트는 자목련나무는 엘크사슴 머리통에서 자랐다


골짜기 없는 철망 속에서 한낮의 뿔이 자랐다
냄새는 벌써 낮잠이 춥다고 산책을 나간다
봄날은 난장판 세계인데 뿔은 철망을 긁는다
꼴같잖은 힘이 뾰족하게 간지러운지
아지랑이는 철망을 가물가물 땅그늘로 휘감는다


자목련나무에 기생하는 엘크사슴은 태양을 감출 목간이 없다
꽃망울이 성좌일 때, 뿔은 수직성으로 어두운 세상을 긋는다
엘크사슴이 울고 잠들려 애쓰는 동안
봄밤은 달을 벗으며 눈을 번쩍 뜨는데
저 뿔은 이끼 그림자로 가득해진다


뿔끝에 머문 황혼과 지빠귀 울음이 침묵으로 통교할 때
아버지는 봄눈과 북풍을 쑤시는 저녁을 자른다
엘크사슴은 달의 종족이니까 빛 가득한 세계수 위로 몸을 옮긴다
오늘은 삼목향기와 땅거미 끌고 가는 산책로 너머까지 뛰쳐나간다
상처엔 돌에 속하지 않는 피의 향연이 더 높은 곳에 가닿는다
긁을 수 없는 봄의 대곡선과 별자리도 흉터를 숨기고 살듯이
엘크사슴은 붉고 엷은 어스름 지붕을 세우고 다시 발굽을 세운다





한옥韓屋



쉿, 아궁이와 방고래는 불타는 중이에요
불새는 재로 변하지 않고
그 몸은 투명해지고
조용히 방을 밀며 날아요
불길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한옥,
그늘이 되기에 좋은 처마가 크게 숨을 뱉어요
연기는 굴뚝을 향해 나선형 나사가 되었어요


그때 엷고 푸른 지빠귀의 낮이 지나가요
목 없는 나무들의 골짜기, 봄이었으니까
햇빛을 안고서 그늘이 움직이죠
언덕길을 오르던 봄눈, 그 멍든 발가락은
몸을 지운 담장 밑에 그림자를 두고 떠났어요


아버지의 군불 때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한쪽엔 겨울 한쪽엔 봄이었으니까
오후 3시의 부뚜막이 불새를 자꾸 날렸어요


거북이처럼 단단하게 천 년을 산다는 한옥
해열제를 먹고 자는 아이는 가을을 앓는 중이예요





아무르 호랑이의 쓸모



금속 신경을 가질 것, 비상은 굼뜨고 볼품이 없을 것, 빳빳한 수염으로 명상에 잠길 것, 피로 입술 자국을 찾을 것, 그러니까 핏줄 속으로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두려워하지 말자


아직도 아무르 강가의 사냥꾼은 호랑이를 산채로 잡는다 첫눈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호랑이를 잡는다 호랑이 잡는 일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추우니까 허드렛고기가 필요하니까


염소를 나무 위에 매달아둔다고 했다 물론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대를 깎아 박아두고, 새끼 거미줄로 산 그림자를 붙인다고 했다


불쑥 구름에 씻긴 자작나무숲, 발갛게 타는 올빼미는 미동조차 없다 호랑이를 감출 행간이 없으니까 가까스로 감지되는 눈동자, 잠의 눈꺼풀 속으로 뛰어든다 흑요석무늬 자정도 사냥꾼의 잠으로 반사된다 그때 호랑이는 드렁드렁 피가래를 뱉는다


일곱 가지의 병을 가진 아이를 위해, 호랑이는 코와 이빨과 발톱과 눈동자를 꺼내준다 삶에도 죽음에도 이르지 못한 아이, 입과 귀가 뚫린다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자란다 이제는 벌판을 휘젓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이병일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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