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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설하한/작품론/죽음으로 생명을―『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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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설하한/작품론/죽음으로 생명을―『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을 중심으로
죽음으로 생명을―『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을 중심으로
설하한
이병일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묘한 겹쳐짐이 발견된다. 삶과 죽음, 어둠과 빛, 동물과 인간, 자연과 인공물 등의 대립쌍들의 겹침들. 그의 첫 시집 『옆구리의 발견』에 수록된 「월식」으로 그러한 겹침을 살펴보자.
능구렁이 배때기가 통통해지고 있었다. 꽃뱀을 꾸역꾸역 시커먼 아가리 속으로 절여 넣었다.
(……)
아버지가 능구렁이를 잽싸게 붙잡아 유리병에 담고 대병소주를 부었다.
(……)
능구렁이가 잡아먹은 꽃뱀 뱃속의 참개구리가 X-ray사진을 찍은 듯 훤히 보였다.
―「월식」 부분
능구렁이는 꽃뱀을 잡아먹는다. 꽃뱀의 죽음은 능구렁이의 생명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러나 생명에너지를 얻었던 능구렁이는 잡혀서 아버지가 약주로 한 잔씩 마실 뱀술이 된다. 죽음이 삶으로 이어지고 다시 삶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쇄는 꽃뱀-능구렁이-아버지에서 멈추지 않고 청개구리를 통해 뻗어나간다. 이러한 연쇄는 이병일의 시에서 발견되는 겹침의 이유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보인다. 연쇄가 ‘X-ray사진을 찍은 듯 훤히 보였다’는 시인의 적극적인 진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월식」에서 삶과 죽음의 연쇄는, 시인의 적극적 진술을 통해 과거를 복귀하며 이루어진다. 신작시 「아무르 호랑이의 쓸모」에서는 연쇄는 반대의 방향으로, 즉 미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일곱 가지의 병을 가진 아이를 위해, 호랑이는 코와 이빨과 발톱과 눈동자를 꺼내준다 삶에도 죽음도 이르지 못한 아이, 입과 귀가 뚫린다 호랑이 가죽을 옷을 입고 자란다 이제는 벌판을 휘젓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아무르 호랑이의 쓸모」 부분
아버지와 달리 아이는 성장할 것이며, 아버지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삶에도 죽음에도 이르지 못한 존재였다. 아이는 죽음에도 삶에도 속하지 않아 미래를 향해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은 존재로 있을 뿐인 존재였다. 죽은 호랑이의 신체가 아이를 삶으로 이끈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미래로 열린 존재가 된다. 그런데 아이는 무언가 달라졌다. 아이는 일반적인 아이가 아닌 ‘벌판을 휘젓는’ 호랑이-아이가 되었다.
이병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이하 『아흔아홉』)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 당나귀, 기린, 사슴, 멧돼지, 화사 등. 여러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들뢰즈의 동물-되기를 이병일 시인이 각 시편마다 실천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흔아홉』에 수록된 「결백의 시」에서는 화자가 쥐-되기를 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쥐는 (……) 제 어미와 아비를 불렀다.
(……)
어미와 아비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끈끈이 속으로 차례차례 걸려들었으니
(……)
아버지의 작업화는 허락도 없이 쥐 일가를 짓밟아버렸으니 (……) 엉뚱하게도 나는 수수방관죄로, 내 결백을 증명할 시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결백의 시」 부분
화자는 끈끈이에 걸린 몇 마리의 쥐를 아버지가 밟아 죽이는 것을 본다. 쥐는 곡식을 갉아먹으며 병을 옮기는 존재다. 아버지는 마땅히 그것들을 밟아 죽인다. 그러나 화자인 아이는 쥐들 중 하나를 아이 쥐로 설정하고 나머지 쥐를 각각 아비 어미 할아버지로 설정하고 쥐 일가의 죽음을 연민한다. 이러한 연민은 쥐-되기로 가능해진 것이다. 같은 시집에 실린 「백상아리」에서는 화자는 죽은 백상아리를 보고 ‘나를 기억해낸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해낸 것이 아니라 화자는 1연에서 언급된 ‘요나’ 신화적 요소에 접속하여 ‘가시 이빨이 가득해서 흰 것들의 무늬가 아름다워 진다고 믿’는 백상아리-되기를 실천한 것이다. 「아무르」에서 아이가 호랑이-아이 된 것은 『아흔아홉』의 동물-되기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다만 『아흔아홉』에 수록된 시와의 차이점은 신작시에서 동물-되기를 통해 아이가 미래를 향해 열린다면, 『아흔아홉』에서의 동물-되기는 과거의 사건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병일 시인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일련의 과정은 죽음으로 보인다.
자주 등장하고 있는 시어인 ‘뿔’(종종 어금니로도 등장한다)은 ‘죽음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며’, ‘연거푸 허공을 치받아 죽음보다 더 깊이 있는 태고’를 깨우는 것으로 진술되는 것을 보아 죽음과 밀접해 보인다. 뿔에 대한 시는 『아흔아홉』에서는 「물사슴의 계절」, 「멧돼지의 철학」 등이 있으며, 신작시에서는 「뿔의 향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거야
(……)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지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부분
뿔을 해석하기 위해선 죽음을 먼저 보아야 한다. 여기서 뿔은 새벽을 긁으며 새 아침이 도래하도록 기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깊게 눈을 감으면 생명의 공간인 아프리카 고원의 하루가 보이고, 실눈을 뜨면 죽음인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보인다는 점이다. 눈을 깊게 감아야지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 이러한 역설은 다른 시에서 ‘살기 위해 강물에 몸을 던지는’ 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역설은 동물-되기의 다른 표현 방식으로 보인다. 동물-되기는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내는 일임과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얻기 전의 존재인 유기체(「아무르」의 아픈 아이, 「결백의 시」의 동물-되기 이전의 화자 등)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흔아홉』에 수록된 「검은 구두의 시」나 신작시 「홍어의 시」에서는 이러한 죽음을 완전히 맞이하지 못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제 나는 어둡고 축축한 신발장 안에서
(……)
한때 나는 텅 빈 초원에서
스스로의 일생을 점칠 수 있는 뿔 달린 짐승이었다
분분히 몇몇 안 되는 발굽들의 무리를 이끌고
(……)
그러나 죽음은 숨이 툭툭 휘어질 때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이생에서 내생으로 너무 많은 길을 운반한 죄로
다시 탄탄한 근육을 가진 짐승으로 환생했던 거다
그때 한번이라도 나를 신어본 신사복들은
근엄한 야망을 피력하기 위해 물광을 자주 내곤 했다
검은 영혼을 가진 구두코 거울 속에서
나는 운명을 점지하는 흉기가 되었고
계단의 각도에 따라 나를 찌르는 아침 혹은 저녁이
발바닥과 굽의 중심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은 구두의 시」 부분
사슴은 자신의 일생을 점칠 수 있었다. 그러한 일생은 아무런 가치도 생성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더함도 부족도 없이 이해하는 일은 아무런 우연을 낳지 못하는 꽉 짜여진 유기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검은 구두의 시」에 등장하는 사슴의 뿔은 이병일 시인의 다른 시에 등장하는 뿔과 달리 작동하지 않는다) 사슴은 죽어서 구두가 된다. 그러나 환생은 아무 가치도 생성하지 못했다. 착용자의 경제력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인 구두로 환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 변환은 생성이 아닌 재생산일 뿐이다. 이는 사슴이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을 뿐 정말 죽음에 다다르진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슴은 죽어서도 운명을 점지한다. 사슴은 신체의 죽음을 맞이했으나, 유기체적 죽음은 맞이하지 못했다.
‘눈 감으면 끝인데, 나를 지고 가는 산천,/내 혼은 항아리에서 졸고 있으니 (……) 그러니까 나는 점점 빨라지거나 영원히 숨을 놓치고/죽음은 뒤돌아서서 아직 속까지 썩지 않았다고 말한다 (……) 나는 캄캄한 짚 항아리에서 한 계절 피 흘려도 좋았다’ 신작시 「홍어의 시」에 나오는 홍어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슴은 죽은 후에도 유기체적 존재를 유지하며 구두의 시점에 얽매여 있는데 반해서, 홍어는 유기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있다. 또한 시는 홍어의 시점을 통해 진행되지만 시점이 홍어를 초과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구두와 달리 홍어는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넘어가려는 존재인 것이다.
아무도 닿은 적이 없어 늘 발가벗고 있는 깊은 산, 벌거벗은 아흔아홉개의 계곡을 가진 깊은 산에 홀리고 싶어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물소리를 붙잡고 싶어
산부전나비 쫓다가 무심하게 건드린 벌집, 나는 또 캄캄하게 절벽으로 밀리고 급기야 날숨 희어질 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바위 그늘 밑 어스름을 좋아하는 모래무지가 되었다
도깨비불과 접신하기 좋은 나의 에덴! 깊은 산으로 가자, 미친 것들 푸르러지고, 죽은 것들 되살아나는 깊은 산으로 가자, 산빛에 젖어갈수록 나는 감감해지고 그림자는 쓸데없이 또렷해진다
―「나의 에덴」 전문
이병일 시의 시적 이상향은 에덴으로 표상되는데, 이 에덴은 모래무지가 되었다가 도깨비에 들릴 수 있는 곳이며 아흔아홉개의 계곡에 홀려, 자아는 감감해지나 그림자가 또렷해지는 곳이다. 자아는 존재자를 일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존재자를 한계 짓는다. 그러나 자아를 포함한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내면 남는 존재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빛을 가리는 그늘을 만드는 물체 없이도 존재하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낸 존재자는 흐릿해지는 일로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는 것이다.
이제 이병일 시 세계에서 뿔을 이야기할 수 있다. 뿔은 목적이자 수단이다. 상술했다시피 뿔은 죽음이후를 생명을 불러오는 것이며, ‘당나귀의 등엔 잎의 뒷면과 껍질이 희고 차가운 나무가 자란다’, ‘자목련나무는 엘크사슴 머리통에서 자랐다’ 같은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성과 식물성의 죽음이후에 찾아온 동식물성이라는 새로운 생명이다. 뿔은 그 하나하나가 계곡이며 빛이다. 이것들이 모여 에덴을 만든다.
들뢰즈에 따르면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죽음 이후에 도래한다. 시인이 오랫동안 과거를 이야기한 이후에야 미래를 향해 열린 시를 내놓는 이유는 그러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1)들뢰즈의 되기devenir는 거칠게 설명하자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재생산이 아닌 생성이다. 되기는 기존의 것이 아니며 전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다. devenir는 때에 한국어 문맥에 따라 되기 또는 생성으로 번역되며, 동물-되기라고 번역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되는 것으로 된 것’이라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동물-생성으로 변역되기도 한다는 점을 밝힌다.
*설하한 2019년 〈한경〉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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