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4호/집중조명/박현주/신작시/우리라고 말해서 외 4편
페이지 정보

본문
74호/집중조명/박현주/신작시/우리라고 말해서 외 4편
우리라고 말해서 외 4편
박현주
멍이 그려진 당신의 손목
보라의 손을 가졌구나
나는 나의 자라나는 얼굴이 어떤지 모르고
절룩이는 다리를 키워간다
단추를 채우지 못하는 혀 위로
흰 목소리가 얹힌다
반지를 끼워주기 전에 손가락이 사라진다
당신이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은 순간이 되고
줄 끊고 달아나지 못한 낮
줄 끊고 조용하게 옮겨가는 얼룩보라
우리라고 말하지 못해 최후의 측면을 새긴다
악순환으로 다가오는 실내의 연속 계단
가장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당신
보라의 손을 가졌구나
당신
언니들에게
남해의 끝방에서 녹슨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단단하게 잠긴 후크가 문을 열 듯
가슴으로부터 폭염을
가슴으로부터 바닥이 자라 마른 상류를 걸어간다
절벽의 보폭으로 색색의 실이 이어져 있다
피의 줄기를 좇는 한 발로
한 번에 쏘아버린 방의 끝으로
지는 노을 속으로 옥수수 알이 붉게 박힌다. 등을 가르는 햇볕을 지붕 위로 널고
붉게 저민 해일을 흔들며 노을 아래
무릎까지 차오르는 우리들의 신성
소리 내어 언니라 부른 적 없어서, 그녀는 언니
양배춧국이 스미는 저녁. 차차차 리듬에 맞춰 양팔을 높이 들고 보름달을 부른다 바다를 덮는 멀고 가까운 거리
〉
원뿔의 유방 속 여린 동물을 버리고. 간다. 우리들, 우리들의 언니. 오래 전 나의 언니들에게
연습
누군가 내게 돌을 던졌다
남아있는 왼뺨이 부끄러워 울었다
작은 씨 하나의 후패해지는 숲을 꿈꿨다
하나의 문장을 쥐고 처마를 지나간다
먼 뿌리로부터 날개가 될지도 몰라
피부 안쪽은 무덤들이
동백처럼 붉게 적혀 있다
발 없는 아침과 사라진 머리가 먹이는 어린 짐승
이곳을 비추는 건 이상하게도 풀빛 같은 죽음
잘 으깨어지는 구름과
뒤척이는 순록의 상상으로
간다
녹지 않는 눈을 만진 팔 없는 소매가 흩어지고
돌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고
이 모든 것들을 건너면 다시 나
부음
후숙되고 있다
영 발견되지 못할 생각으로
더 멀어질 방법으로
채광
위에 있는 것을 치우니
위가 보였다
환하고
선명하게 어두운
그게 나라서 계속 도망가리라 생각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 위는 더 잘 보여야 했다
더 어둠을 찾을 수 있다면
도망자로 영영 이름이 남을 수도
손을 치워달라고 하지 않아
팔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들의 이빨이 으르릉거린다
누군가의 비명인지 알지 못한 채
시론/너라는 하품과 눈물
1.
밤새 돌아가는 어둠의 날개 끝에
잉잉거리는 목소리가 걸려 있다
자꾸 뒤돌아본다
나인가 하고
2.
오른팔이 결려 오른쪽을 만질 때 요가 선생은 아플수록 아프게 하여 고여 있는 것들이 뛰쳐나오는 소리를 듣도록 했다. 우희처럼 우희가 되어.
우희가 운다. 눈물 안에 갇혀 운다. 눈썹 밖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볼을 타고 살을 트게 하는. 푸른 레시피 검은 마스카라. 우희는 갇히기 위해 운다. 긴 새 다리로 건물 후면 그늘을 따라 운다.
우희의 눈물이 우희의 눈물을 위해 운다. 눈 안쪽 검은 숲이 타들어가도 꺼지지 않는다. 비파를 닮은 비아 호수. 눈물 가득 눈물. 눈물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눈물. 얼굴을 뒤로 보낸 우희 안에 흐른다. 우희 안으로 스민 눈물. 슬프고 슬퍼 기쁜 우희. 우희의 눈물은 우희의 눈물.
─「우희」
그리고 기다린다. 언제든 멈춰 설 준비를 하며 기다리지 않는 척 일상을 산다. 대기 속 낯선 공기를 새롭게 받아들일 문장을 기대하며.
그냥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봄이 왔다. 죄책감이나 유전이나 질책이나 한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원하던 소식이 오면 신음소리에 가까운 허밍소리를 낼지도 몰라 입술을 꾹 누를 수 있으면. 그것은 끝이자 시작이고,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 할 수 있는 일 너머 하고 있는 일. 그 모든 일들은 한꺼번에 일어나고 한 번에 무너진다. 두려워 밤을 붙든다. 충만한 것들이 텅 비는 순간의 나를 위해. 익숙한 부름이 어디에도 없다
나는 내게 고백한다
그렇게 왔구나 너라는, 존재
너라는, 하품과 눈물
조용하다 아프다
멀리 가려 사라지려 가라앉으려 허용하며 허용하지 않으며
저어 섞는다
섞이지 않는 것들 가라앉는 것을 골라 밤 공원을 걷는다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아이들의 소곤거리는 말 속에 나를 밀어넣고
개가 나인 것처럼 걷는다 벽 속으로 스미고 싶은 나의 성대가
아무데나 짖고 아무데나 토하고 아무데나 주저앉아
목줄을 당겨도 버틴다 어디로 이동하나
아무데나 한 그루 까마귀로 자라고
유일하게 불 밝힌 살롱 드 네일샵에 들어가 나를
내가 내가 아닐 때까지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코끼리가 하늘을 난 것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미 오래전 지금이 지금이 아닌 것처럼
3.
수십 명의 현주가 한꺼번에 눈을 뜬다. 서로 다른 현주들이 서로 쳐다보고. 줄 끊고 달아나지 못한 밤. 서로 다른 현주를 주시하며 모른 체한다. 현주가 피어나 현주들의 가슴으로 번진다. 안쪽 내부를 비추어볼 현주의 랜턴이 다른 현주의, 시가 된다.
*박현주 2010년 《시평》으로 등단.
- 이전글74호/집중조명/최은묵/작품론/불안한 떨림을 넘어 새로운 발아까지─박현주의 시세계 20.01.06
- 다음글74호/집중조명/설하한/작품론/죽음으로 생명을―『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을 중심으로 20.01.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