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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최은묵/작품론/불안한 떨림을 넘어 새로운 발아까지─박현주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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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집중조명/최은묵/작품론/불안한 떨림을 넘어 새로운 발아까지─박현주의 시세계
불안한 떨림을 넘어 새로운 발아까지─박현주의 시세계
최은묵
1.
심리학이 문학비평의 범주에 온전히 들어오진 못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심리학적 접근 방식으로 문학을 읽는 건 유의미하다. ‘창조적인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독창적인 창작물을 만들며 삶의 희열을 경험한다’는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며 다양한 경험은 스스로 방향성을 지녀 창작의 영역에서 고유한 세계를 지향한다. 잠재력을 발휘해야 하는 창작에 비춰볼 때 이것은 로저스가 말한 ‘자아실현경향성’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은 지난하다. 그것은 끝없이 멀어지는 과정이며 고적한 걸음이다. 이런 여정에서 믿을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절실함이다.
시인이 독립된 시세계를 이루고자 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몇 편의 작품으로 시인이 겪었을 깊고 오랜 고뇌를 들여다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2.
박현주 시인의 신작시 「연습」외 4편에는 자아와 타자의 혼재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고단함이 드러난다. 하지만 다섯 편의 작품에서 공히 표출되는 어떤 불안한 떨림은 불편하다. 시적 발화를 일으키는 자극은 작품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내면의 소리를 시어로 전달할 때 뻗지 못하고 안으로 움츠러드는 목소리는 무게감이 적다. 이런 원인이 내부로부터 발생한 것인지 외적 요인인지는 차치하고, 무언가를 의식하거나 자기검열에 언어를 가둬버리는 순간 시인이 지닌 독창적인 잠재력은 스스로를 수동적인 형태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다.
시가 지닌 울림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정도가 아니라 거칠어도 당당할 때 발생한다고 할 때, 박현주의 시어는 몇 번을 정독해도 여전히 불안하다. 이것을 독특한 어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파형을 따라가면 경직된 목소리가 지닌 지점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진동은 박현주 시인이 자신만의 세계를 위해 “더 멀어질 방법”을 찾고자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돌을 던졌다
남아있는 왼뺨이 부끄러워 울었다
작은 씨 하나의 후패해지는 숲을 꿈꿨다
하나의 문장을 쥐고 처마를 지나간다
먼 뿌리로부터 날개가 될지도 몰라
피부 안쪽은 무덤들이
동백처럼 붉게 적혀 있다
발 없는 아침과 사라진 머리가 먹이는 어린 짐승
이곳을 비추는 건 이상하게도 풀빛 같은 죽음
─「연습」 부분
「연습」은 시인의 목소리를 유추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 두 연을 성경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5:39)에 적용시켜보면 공통적으로 타자와의 갈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부로부터 파고든 것이 내부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순간 그것은 혼란이 되고 감정적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안’과 ‘밖’의 불균형이 창작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 사물에 투사되어야 할 시어는 감정에 흔들린다. 그럼에도 “하나의 문장을 쥐고 처마를 지나”간 까닭이 스스로의 언어를 밀알 같은 존재로 삼고자 함이라면 박현주의 ‘연습’은 새로운 걸음을 위한 시도일 것이다.
싹이 돋고 열매를 맺기까지 혼자 견디는 건 쉽지 않다. 지금 시인의 시세계는 “발 없는 아침과 사라진 머리가 먹이는 어린 짐승”처럼 맹수들의 이빨에 노출된 상황일수도 있다. 이런 야생에서 공포는 당연하다. 하지만 두려움이 현상에 머물지 않고 “풀빛 같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질감을 지닐 때 시인은 그만큼의 세계를 확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을 치우니
위가 보였다
환하고
선명하게 어두운
그게 나라서 계속 도망가리라 생각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 위는 더 잘 보여야 했다
더 어둠을 찾을 수 있다면
도망자로 영영 이름이 남을 수도
─「채광」 부분
「채광」은 적극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위에 있는 것”을 치움으로써 “위”를 본다는 것은 비움으로써 자신을 실현화하는 행위다. 이때 “위”는 욕망일 수도 있고 자아일 수도 있다. 날것 그대로가 아니라 포장된 가치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다.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비록 뚜렷한 “어둠”일지라도 본질의 나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의미 있는 전환이다.
무언가를 캐내기 위한 채광採鑛으로 읽어도, 빛을 받아들이는 채광採光으로 읽어도, 그 대상이 “어둠”을 확인하는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은 결코 절망의 공간이 아니다. “도망자로 영영 이름이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건 그러지 않겠다는 다른 표현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박현주 시인이 추구하는 “위”는 시인 자신을 관통한 세계일 것이다. 지금은 “환하고” “선명하게 어두운” 혼돈의 모습일지라도 “위” 너머의 “위”를 바라보기 위해 “돌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연습」)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시인이 상상하는 세계에 다다르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나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이 시인의 세계라고 한다면,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 첫 번째 대상이 “나”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멍이 그려진 당신의 손목
보라의 손을 가졌구나
나는 나의 자라나는 얼굴이 어떤지 모르고
절룩이는 다리를 키워간다
단추를 채우지 못하는 혀 위로
흰 목소리가 얹힌다
반지를 끼워주기 전에 손가락이 사라진다
당신이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은 순간이 되고
줄 끊고 달아나지 못한 낮
줄 끊고 조용하게 옮겨가는 얼룩보라
우리라고 말하지 못해 최후의 측면을 새긴다
악순환으로 다가오는 실내의 연속 계단
가장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당신
보라의 손을 가졌구나
당신
─「우리라고 말해서」전문
「우리라고 말해서」에서 “당신”과 “나”의 관계는 세계의 무엇과도 연관 지을 수 있다. “당신”을 내적자아로 읽는다면 당신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잘 으깨어지는 구름과/뒤척이는 순록의 상상으로”(「연습」)가는 길은 오롯이 혼자의 몫이다. 시인의 세계는 높고 낮음이 아니라 가깝거나 먼 시선을 갖는 일이다. 그런 걸음에 같은 방향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시적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경험이 된다.
“무덤들이/동백처럼 붉게 적혀 있”는 “피부 안쪽”(「연습」)이나, “멍이 그려진 당신의 손목”은 동질의 갈등이다. 이때 “무덤”과 “멍”은 내적갈등과 외적요인의 이미지이며, 박현주 시인이 자신의 언어로 밀고 나가야 할 벽인 셈이다. 그러니 “절룩이는 다리”에 시선을 두지 말고 “위”를 바라보기로 하자. “단추를 채우지 못하는 혀”는 치환된 언어 대신 직관적 언어를 드러낸다. 이것은 “손가락이 사라”지거나 “순간이 되”는 “당신”처럼 결합되지 못하는 대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를 공유하는 세계라고 할 때, “최후의 측면”은 막다른 영역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스스로 갇힌 세계에서 표출되는 갈등을 시어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시인의 시도는 예민하다. 머지않아 “멍”이 빠지고 그 자리에서 낯선 “비명”을 꺼낼 시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피의 줄기를 좇는 한 발로
한 번에 쏘아버린 방의 끝으로
지는 노을 속으로 옥수수 알이 붉게 박힌다. 등을 가르는 햇볕을 지붕 위로 널고
붉게 저민 해일을 흔들며 노을 아래
무릎까지 차오르는 우리들의 신성
소리 내어 언니라 부른 적 없어서, 그녀는 언니
양배춧국이 스미는 저녁. 차차차 리듬에 맞춰 양팔을 높이 들고 보름달을 부른다 바다를 덮는 멀고 가까운 거리
원뿔의 유방 속 여린 동물을 버리고. 간다. 우리들, 우리들의 언니. 오래 전 나의 언니들에게
─「언니들에게」 부분
「언니들에게」에서 “언니들”은 자신을 실현화하기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 “녹슨 브래지어를/벗어던졌다”는 것은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며 이것은 외부로부터 형성된 시선을 의식하지 않겠다는 시도다.
“상류”는 「채광」에서 꺼낸 “위”의 가치를 지니며, 화자가 응시하고 걸어가는 곳은 마침내 구체적인 시인의 세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절벽의 보폭”이나 “피의 줄기를 좇는 한 발로”는 순탄치 않다. 현실은 매번 이상을 파괴한다. 그럼에도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한 “신성”은 앞서 걸었던 “언니들”을 통해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언니라 부른 적 없어서”와 “우리라고 말하지 못해” 이르지 못한 심정적 거리는 화자를 내세운 시인의 진솔한 고백이다.
“우리”는 이곳에도 나타난다. 어쩌면 박현주 시인은 “우리”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향하고 있는 세계를 스스로 확인하고 동의를 얻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언니들이 걸어간 길을 더듬어 시의 방향을 다짐하려는, 그리고 “여린 동물”을 버림으로써 다짐을 구체화하는 시인의 모습은 “간다”라는 단호한 어조를 통해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다.
후숙되고 있다
영 발견되지 못할 생각으로
더 멀어질 방법으로
─「부음」 전문
「부음」이란 죽음을 알리는 것이고, 죽음이 무엇의 비유인지는 앞서 읽었던 시편을 통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즉, 부음은 불안한 떨림과 단절하겠다는 공표이며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점인 셈이다. 이런 계기가 자의든 타의든 발아는 머지않았다. 휴면기를 거치면 웅크린 자아는 마침내 튀어오를 것이다. 그 세계가 어디이든 상관없다. 박현주 시인이 “더 멀어질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는 시세계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작품으로 구축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시인은 전면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건너면 다시 나”(「연습」)의 본질을 되찾을 것이다.
「부음」은 그런 다짐이며 약속이다. 포장된 “나”를 버리고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것.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얻는 과정에 “후숙”은 소중한 상징이다.
그러니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들의 이빨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먼 뿌리로부터 날개가”되는 모습이, “보라의 손”이 뿌리는 색깔이, “등을 가르는 햇볕”의 뜨거움이 박현주 시인을 관통하여 싹을 틔우는 매순간을 우리는 새로운 언어로 읽게 될 것이다.
3.
자아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조직화된다. 그 어디쯤에서 한 시인의 세계를 살펴본다는 것은 여전히 무리다. 시인이 바라보는 어떤 대상은 시인의 목소리를 거쳐 표출된다. 로저스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인간은 각기 다르게 현실을 지각하고 외부보다는 자신의 내부적인 경험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것으로 걸음에 동행할 수 있다.
“가슴으로부터 바닥이 자라”는 것과, 또 “날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기대를 품게 한다. 박현주 시인이 지닌 절실함이 짓눌림이 아니라 방향으로 다가올 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고 뻗어나갈 것이라 믿는다.
불안한 떨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는 결국 혼자의 몫이라 하더라도, 박현주 시인의 상상을 가미한 목소리는 무척 흥미롭다. “나”를 모두 비운 자리에 뿌린 씨앗이 어떤 대상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발아할지 지금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시인의 목소리에 침몰당할 준비와, 기꺼이 그 세계를 여망할 뿐이다.
*최은묵 2007년 《월간문학》,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괜찮아』.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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