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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소시집/강우식/야간비행·3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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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소시집/강우식/야간비행·3 외 4편
야간비행·3
강우식
한때 내가 한 사랑에
동네 개 취급당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와 있는 지구가 싫었다.
어디든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별나라로 가고 싶었다.
스스로 내 생애에 가장 슬프면서도
행복한 이별을 맞으려고
야간비행기에 탑승했다.
떠나고 싶은 나와
떠나고 싶지 않은 내가 있었다.
돌아오고 싶은 나와
머물 싶은 내가 탔다.
내리고 싶은 나와 어쩔 수 없이
지정된 좌석에 타고 가야만 하는
야간비행이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가 아닌
옆의 나와 나와 같은 나와 나와 비슷한 나와
나와 같은 방향의 나의 나로 만원이었다.
인간은 모두 나와 비슷한 꿈들을 꾼다.
결국 야간비행의 나는 누구인가.
동네 개처럼 떠나지 못하는
늘 그리워 그녀 집 둘레를 돌고 돌던
도로 아미타불의 탑돌이인가.
어린왕자와 같이 가는 야간비행은
우리가 어렸을 때 잠시 꿔보는
꿈속에나 있는 것인가.
야간비행·4
야간비행을 하면서
우주의 미아처럼 소리 소문 없이
계집으로부터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하늘바다 팔라우로 잠적하였다.
그대는 어이하여 나를 늘
집밖을 배회하는 개 취급 했느냐.
개 취급당했으면 실컷 짖어나 보지.
가정을 꾸리고 나니
행복한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짖지 못하는 개가 되어 있었다.
하늘나라 팔라우로 가고 싶었다.
아무리 발광해도 이승에서는
이 한 생애가 종쳐야 마감하는
가시방석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장미가시여서
찔리면 아프고 후회만 남으니
팔자려니 피를 흘리며 살라했다.
가정이라는 십자가의 예수가 되려고 했다.
〉
하늘바다 팔라우에서 천국으로 가는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었다.
야간비행의 기착지는 결국은 귀착지.
팔라우는 짜디짠 펠로우fellow였다.
모든 야간비행은
떠나도 되돌아오는 죽는 연습과 같은
그대가 있는 지상이었다.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니
어른이 되어서 어린왕자의 흉내를 내는 꿈도
자연히 사라졌다.
야간비행·5
어린왕자가 되자.
어른이 되어서는 꿈들도
자기 욕심이 아닌 것은 가질 수 없다.
지구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어린이가 되어
무지개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꿈을 꿀 수 있는 밤이 되어
별이 돋아나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가고 싶고
야간비행을 하고 싶어진다.
어린왕자가 되는 꿈을 가지고 싶다면
야간비행을 하여 한 번쯤은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보다
더 고도를 높여 떠보고
케이프타운 희망봉 끝자락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과 서로 갈리는
바다 물길에 어디로 갈지 점도 쳐보자.
어른이 되어서 가질 수 없던 꿈
어른이면서 어린이가 되는 야간비행을 하면서
내 별들을 하나씩 둘씩 밤하늘에 수놓자.
야간비행·6
모든 별들은 대기권 밖에서 산다.
기질 수 없다.
가질 수 없기에 갖고 싶은 꿈을 꾼다.
어린왕자가 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깆고 싶은
어린왕자였을 때가 있었다.
누가 태워주지 않아도 스스로
비행기를 타고 날고
누군가가 갈 수 없는 별나라를 말하지 않아도
별나라로 가는 꿈꾸며 하늘운동장을 뛰었다.
그 별에서 나 아닌 나를 만나고 싶었다.
꿈을 가질수록 좋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만유인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 날엔가 모든 별들이
가까운 이웃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 사랑하는 어머니가 가신 영원한 나라기 때문에
세상이 무너져도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지금도 별나라에서 잘 계시겠지요.
모든 별들은 대기권 밖이어서 그립다.
그 그리운 것들을 어른이 되어서
어른이 된 것만으로도 다 잊어버렸다.
늘 보기만 하고 갈 수 없는 별들이다.
오늘밤도 나는 별들이 괴롭도록 그리워서
미아가 된 어린왕자를 찾아 야간비행을 한다.
어른들은 왜 자기 분신인 어린왕자를 찾을
꿈조차 꾸지 않으며 밤하늘을 볼까.
야간비행·7
젊어서는 야간비행을 하면서
어린왕자를 만나는 꿈도 없이 살았다.
인생은 꿈꾸며 꿈에 젖어 사는 것인데
돌이켜보면 슬퍼라.
내 찾던 어린왕자는 어디 갔는가.
어린왕자란 무엇인가.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희망이거나 밤하늘의 등불인 줄 알았는데
내 항로의 목표는 그 왕자를 찾아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고
오늘도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었는데
어린왕자가 사라진 내 항로는
늘 떠나도 어디로 떠나는 줄도 모르고
왜 떠나야 하는지도 모르는 항로였다.
그 어린왕자가 아내가 죽은 뒤에
어릴 때 보던 밤하늘의 별이 되어 나타났다.
굳이 야간비행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십자성 같은 것이었다.
〉
내가 별을 좇는다는 것은
꿈에라도 보고 싶던 아내를 만나는 것이다.
만나서는 살아서 못 다한 얘기들
그 중에서 사랑한다는 사랑했다는
아직도 죽어서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랑타령을 판소리 완판본처럼 하는 것이었다.
오호 슬퍼라. 그 사랑은
어느새 향기가 되어 증발하고
어린왕자는 심인광고를 내도 깜깜 무소식이고
쳐다보는 별에서는 라베다 향기만이 아련하다.
별을 흔들어 아내의 향기라도 맡듯 풍기는
라벤다 향이라고 맡아야겠다.
*강우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행시초』, 『고려의 눈보라』,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 『물의 혼』, 『설연집』, 『어머니의 물감상자』, 『바보산수』, 『바보산수 가을 봄』, 『마추픽추』, 『사행시초2』, 『꽁치』,『하늘 사람人 땅』, 『가을 인생』, 『바이칼』발간.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펜클럽 문학상 시 부문,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 김만중문학상 수상.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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