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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소시집/박태건/물어봐줘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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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87회 작성일 20-01-0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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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소시집/박태건/물어봐줘서 외 4편


물어봐줘서


박태건



술 먹자는 전화는 오고


뭐해?


갓 출소한 사내처럼

나는


뭐해?


차디 찬 밤, 만경강 건너는
네 발을 생각해


뭐해?


눈 길에 고라니를 묻고 온
사내의 가슴을 생각해


뭐해?


내 몫의 술을 다 마신
억새처럼


뭐해?

지푸라기 같은 겨울 볕을
다 마시고


뭐해?


예감했던 일도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고


뭐해?


좋아하던 여자가 살던
그 집 앞
목련나무 아래서


뭐해?


술 먹자는 전화는 자꾸 오고
당신이 먼저 끊을까 봐
나는,


뭐해?





떠도는 고향·1



내가 다니던 사무실 창밖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언젠가 먼 하늘을 건너
작은 새 한 마리가 찾아와
가장 먼 가지에서
저보다 큰 나뭇가지를 건드려 보곤 하였습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적마다
세계는 지진이 난 것 같았겠지만
새는 나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새의 장난이라 무심히 지나쳤으나
흔들리던 한 세계가
오래도록 생각났습니다


새는
봄을 붙들고 희롱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어느 이른 봄날
나무는 꽃을 피워 이름을 얻고


처음 보는 꽃나무 아래를 지나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가지 않았으나


언뜻, 새의 둥지를
본 듯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나무는 온몸을 흔들어
작은 새를 붙들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떠도는 고향·2



큰 비가 지나간 나무는
구름을 둥지로 품고 있습디다


가는 가지로 기초를 엮은
구름의 내역이 못내 궁금했으나
차마 들춰 보진 못했습니다


   밤이면 작은 별들이
   옛 이야길 졸라댔겠지만…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스무 해를 갓 넘기고
제일 좋아하는 계절에 떠났습니다


그때 나는 너무 슬퍼서
한 조각 남은
나의 고향도 가져갔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러나 내 슬퍼하던 마음도
한 여름, 구름같이 모두 흩어질 쯤에는


나무는 빈 가지로
하늘을 더듬어
장님처럼 서 있었습니다


갈 곳 없이 서 있었습니다





회상은 부정의 품사겠지요



밤은 명사, 낮은 동사
회상은 현실의 부정이지만
부정은 현실의 희망이겠지요


햇살의 각도와
햇볕의 온도를 계산해
커피를 내리는
오전의 황홀


밤을 흔적이라 하오면
나는 무척 감상적이 되어
찻잔의 커피 자국을 손가락으로 읽으며
당신의 속마음이라 하겠네


밤은 명사, 낮은 동사
사랑이 순간이 고플 때가 있다면
그 순간을 나는
밤의 품사로 생각하겠지요





도가니집



늙은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全州의 오래된 식당인데
낡은 식탁은 좁아서 한 식구 같다


혼자 온 사람, 함께 온 사람, 늙은이, 대머리, 잠바때기, 츄리닝 차림 모두
뽀얀 김이 나는 국밥을 앞에 두고
머리를 숙인다


식당 강아지도 제 밥그릇에
머리를 숙인다


나는 무슨 경건한 의식의 사제처럼
아버지의 수저에 깍두기 한 알을
경건하게 얹으며


CT 모니터 속의 주름과
갑작스런 나의 실업과


어느새 지나간 봄과
다가올 계절을 생각는다





시작메모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옥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는 빌라 옥상에는 이사 간 앞집 여자가 두고 간 된장 항아리가 있다. 항아리 뚜껑은 깨져서 파리와 참나무 잎 몇 장이 반쯤 남은 된장 위에 내려앉았다. 뚜껑 없는 항아리와 나는 혼자여서 자주 옥상에 올라가서 항아리 옆에 앉았다 오곤 했다. 나는 옥상의 햇볕과 바람과 된장 냄새와 댓잎사귀들이 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를 좋아한다.
집에 있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앞산에 가곤 하는데 오늘은 멧돼지를 잡는다고 해서 산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냄새가 희미해지는 된장 항아리 옆에 앉아서 방수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에 풀씨가 날아와 뿌리를 뻗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시멘트 바닥 속으로 뿌리를 뻗는 풀씨와, 앞산을 횡대로 서서 헤집고 다닐 포수들과, 대나무 숲을 헤맬 멧돼지 가족을 생각하며 이 힘든 시기를 모두 잘 넘겼으면 하고 바랐다.





*박태건 1995년 《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와반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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