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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신작시/정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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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
응시
가장 낮은 곳, ―거기가 바로 벼랑 끝이다
올라설 수도 내려설 수도 없는 비탈이 치밀한 발을 만든다
태고를 돌아온 바람은 안다
바위보다 단단한 손이 바위틈에 걸린다는 걸
절벽을 움켜쥐고 날아오른 나무야말로 태양의 빛이라는 걸
그를 ‘문인목’이라 부른다는 걸
절망에 먹힐 때마다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고 바람은 나무를 잡고 흔든다
빙벽 부푸는 삼동 신음조차 내려놓는다
바람은 거듭 짚는다
참는 법을 버티는 법을 멈추었다가 내딛는 법을……
풀잎도, 돌도, 능선과 능선을 잇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바람을 타고 물이 오른다
태고를 돌아온 바람은 안다
하느님은 결코 다알리아를 암벽에 심지 않는다는 걸
의지는 혹한에 더 푸르다는 걸
자살권조차 빼앗겨버린 나무…… 나무…… 나무……
귀도 발도 얼굴도 없는 바람이, ―바람이 산을 세운다
無爲集․4
―독사떼
갈채가 몰리는 광장으로 현자들이 모여든다
너도나도 달리기 높이뛰기 앞 뒤 없이 매달린다
가장자리 표목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다
먼 데 구름만이 풍경을 헤아린다
―현자들은 저마다 복색이 희한하다
―희한한 옷 없는 자 어울려 뛸 수 없다
―이 저자에선 연결고리가 으뜸고리다
06:00 자명종 소리가 칼날을 들이댄다
시계바늘이 발빠른 현자처럼 순식간에 직립한다
빛을 차려입은 시간이 광장으로 기어나간다
현자였다니! 시간마저도……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하나 둘 셋……
종으로 횡으로 현자들이 버린 웃음
대기권 깊숙이 슬픈 구멍을 내고 있다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부용)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ꡔ감성채집기ꡕ ꡔ정읍사의 달밤처럼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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