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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신작시/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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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무대의 조명을 꺼버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서 언제나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랍니다.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던 당신의 젊은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내 노래에 맞추어 박자를 짚어내던 손가락의 짧은 주파수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내 귀에서 한다발의 악보들을 빼내어 보여드릴까요. 내 눈동자 속에 담겨진 당신의 첫사랑의 곡조들을 연주할까요. 환호와 화려한 무대조명이 아직도 내 꿈속 구석구석을 밝게 비춰요.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 난 노래 한 소절이면 배가 불렀어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지요.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요. 넓은 무대에서 당신과 난 하나였지요. 무대에는 언제나 꽃들이 피고 서러운 계절들이 성급하게 몰려들어요. 난 더 이상 꽃이 아니듯 당신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내 눈가의 주름마다 당신의 추억들이 접혀져 있어요. 당신의 기억이 언제나 나를 노래 부르게 해요. 아직도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풋내기 가수랍니다. 나를 비웃지 마세요. 그 절정의 끝에서 나는 노래합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절정이지요.
서른아홉의 진술서
나는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의 곱슬거리는 은회색 머리칼과
오래된 알타미라동굴처럼 깊은 어둠을 가진
그녀의 이력을 남김없이 흔들었다
그녀가 녹지 않은 천년설과 맘모스와
오래된 벽화 속의 불씨를 뜨겁게 토해냈다
마음속에 오래 지녀 녹이 슬은 붉은 단검들과
손상된 금화들과 쭈그러진 상처들을
필기체로 쏟아내었다
그녀의 동굴을 흔들었을 때
그녀는 수없이 많은 고독들을 쏟아내었고
그녀는 허공에서 스스로 허공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흔들어 나를 쓰고
나는 그녀를 흔들어 시가 되었고
그녀의 갈색 추억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이내 어떤 형상이 되려 몹시 애를 썼다
갈팡질팡하는 그녀를 나는 몹시도 흔들었고
서안나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ꡔ푸른 수첩을 찢다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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