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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허 신작시/박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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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5회 작성일 05-03-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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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호

레슬러 잭의 은퇴 선언



나는 죽음을 탐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는 게 지겨울 뿐이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레슬링은 쇼다. 당신들은 알고 있다. 당신들은 내가 얻어터지는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 환호한다. 모든 경기가 각본 있는 드라마다. 각본 없는 예상 밖의 경기는 당신들을 지루하게 할 뿐이다.
오늘의 드라마에 대해서 말해 줄까? 나는 오늘 26피트 높이의 철창에서 링 바닥을 뚫고 패대기쳐지기로 되어 있다. 구사일생으로 링에 올라와서 상대 선수의 필살기를 맞고 바닥에 뿌려진 수백 개의 압정 위에 얼굴이 처박히기로 되어 있다. 일명 데드매치. 즉 죽음의 경기. 재미있지 않은가? 죽음의 각본이란.
상대 선수의 손이 올라가고 경기가 끝나면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갈 것이다. 나는 안다. 당신들은 다 죽어 가는 나의 패배에 더 열광한다는 거. 다음 경기에서 더 처절하게 죽어 가는 내 연기를 기대한다는 거.
모든 게 각본이지만 위험은 진실이다. 절반이나 씹어버린 내 혀와 부러진 앞니, 마모된 양쪽 귀, 진단서 없는 골병이 내 진실의 이력이다. 부상은 당신들을 위한 적절한 배반이다. 예기치 못한 부상은 각본을 위장한다. 당신들은 내 연기의 리얼함에 감동하겠지만 나는 오늘 내장이 파열될 수도 있고 눈알이 깨질 수도 있다.
모든 경기가 각본이지만 나는 각본대로 사는 게 싫어서 각본을 가끔씩 배반하는 데드매치를 한다. 15년의 경력. 매번 죽기 직전까지만 얻어 터졌다. 부상 입는 장면에서 어김없이 터지는 당신들의 환호성. 진실은 거짓의 내출혈일 뿐. 내 러시아 친구 빅토르는 말했다. 거짓을 말하기는 싫어. 하지만 이젠 진실도 지겨워. 그는 진짜로 실려 나갔다. 오직 죽은 자들만 링 밖으로 실려 나갈 수 있다. 반창고를 마시고 활명수를 붙여왔던 내 뒤틀린 인생. 오늘은 진짜 데드매치를 하고 싶다. 이젠 레슬링도 지겹다.



팽이 소년


십오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갑니다. 내겐 아버지가 셋입니다. 낳아주신 아버지는 신설동에서 죽었습니다. 의붓아버지는 신림동에서 죽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입양했습니다. 입양된 아버지는 내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집 나온 십오 년 동안 개처럼 두들겨 맞았습니다. 아비 없는 것들은 얻어맞기 십상이죠. 상처가 곪아터질 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이제 하나 남은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갑니다. 골목길이 조금 좁아졌을 뿐 변한 것은 없습니다. 열쇠를 꽂고 현관문을 엽니다. 현관 옆에는 오래 된 광이 하나 있지요. 물이 마른 마당을 지나 안방의 문을 엽니다. 입양된 아버지가 온열기 위에서 굽은 척추를 교정하고 계십니다. 삐―삐― 온열기의 비프음에 맞춰 아버지는 숨을 고르며 잠든 척 하십니다. 온열기 밑에 누워 아버지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내겐 내성적인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온열기 위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삐―삐― 낳아주신 아버지는 내게 팽이를 돌려주었습니다. 의붓아버지는 팽이도 못 돌리는 내 이마에 수채 구멍을 팠습니다. 등에 채찍질을 했습니다. 팽이는 수채 구멍에서 헛돌았고 나는 채찍을 맞고 잘 돌았습니다. 삐―삐― 광에 가서 피묻은 팽이끈과 팽이를 가지고 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수채 구멍에 던질 겁니다. 온열기에 누우신 아버지를 내려다봅니다. 온열기 위로 눈물이 떨어집니다. 삐―삐― 팽이끈으로 아버지의 목을 조릅니다. 아버지는 숨을 쉬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편안하십니다. 삐―삐― 팽이로 아버지의 이마를 찍습니다. 아버지의 이마에 수채 구멍이 생깁니다. 몇 번 더 팽이질을 합니다. 팽이로 후려칠수록 아버지는 편안해지십니다. 삐―삐― 수채 구멍으로 아버지가 빠져나오십니다. 온열기 밑에 내 수채 구멍을 받치고 아버지를 받습니다. 구멍의 구경은 같습니다. 삐―삐― 온열기의 비프음은 계속 울립니다. 내겐 아버지가 셋입니다. 비로소 세 아버지들이 하나가 됩니다. 아버지와 나의 피가 묻은 팽이끈과 팽이를 광에 넣고 대문을 잠그고 집을 나섭니다. 삐―삐― 온열기의 비프음은 계속 들립니다. 내 핏속에서 아버지는 나를 안고 돕니다. 삐―삐 나는 나를 개같이 두들겨 팼던 삐―삐 내 아버지를 쪼개 죽인 삐―삐― 진짜 아버지를 찾아 삐―삐― 돕니다.

박장호
․1975년 서울 출생
․2003년 ≪시와 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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