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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신작시/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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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밤의 노동
저 숱한 불빛들,
길의 가르마를 갈라도
스스로 아침을 땋을 수 없는 것
검은 뱃가죽 늘어뜨리고
숙면에 든
산의 잠꼬대가 들려와도
질기고 독한 가로등은
에틸렌 불꽃으로
구멍 난 어둠의 쇠가죽을
새벽까지 때울 기세다
흑백사진
일곱 살 때 찍은 흑백사진
나는 아버지와 엄마 틈에 있었다
한쪽 팔은 엄마 무릎에 걸치고
다른 팔은 아버지 어깨에 기대고 있다
서로 걸친 어깨가
더 긴 이야기로 묶여진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드나들 간격이 따로 없었으므로
일가(一家)는 덩이째 깊어졌다
매미의 몸통처럼
숱한 얘기를 풀어낸 나는
양 날개 사이에서
얼마나 꼬무작거렸을까
혼자만 훌쩍, 키가 자랐다
몇 마디의 기억만 남기고
내 몸 슬쩍 빼나오니
쩌억쩍 금 가는 흑백사진
아버지와 엄마는 사진 속에서
내가 벗은 허물로 남아 있었다
천수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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