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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초점/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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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되어버린 역사
―신도 가네토의 <오니바바 Onibaba>를 중심으로―
이은주
1. 들어가는 말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영화들은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 그리고 판타지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제공해 준다. 특히 식민과 반식민의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의 경우, 서구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재현의 관점 또는 주체를 보여준다. 한국의 몇몇 블록버스터형 영화 또한 한반도가 가지는 정치적 특수성과 관련하여 그것을 유발시킨 역사적인 사건들을 불러들인 바 있다. 많은 이슈의 대상이 되었던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그 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유령>이나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의 영화가 그것이다. 최근에 개봉된 <실미도>나 곧 개봉될 예정의 <태극기를 휘날리며>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이들 영화에서 재현되고 불려들여지는 역사적인 기억 또는 트라우마는 일제 점령이나 한국 전쟁, 그리고 독재라는 억압적 정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영화가 역사적인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은 또한 ‘민족‘을 구성해 내는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한 동아시아 영화들의 재현이 서구의 홀로코스트와 다른 것은 식민과 피식민,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정치 역학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 일본이 제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서구 제국주의와는 다른 지정학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주의라는 보편성으로 회귀되지 않는 동아시아 역사의 로컬적인 특성이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동아시아 지역의 각 민족의 주체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구성해 내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풀어가는 다양한 방식 가운데 민족 또는 개인이 그 자신을 역사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 상상하는 재현의 방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재현되는 주체 또는 민족은 역사의 떳떳한 주체로 되살아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희생되거나 부재한 그 무엇 곧 유령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글은 전후 일본 영화에서 식민의 역사와 원폭이라는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비교연구방법론 또는 비교연구 방법론
차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비교연구 또는 비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떤 학문이든 학문 자체가 비교 연구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이해서는 그 대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결국 모든 학문은 차이를 이해하는 지적 작용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학문은 비교연구라 할 수 있다. 또한 뒤집어 얘기하면 비교연구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학문의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학문의 주어진 대상에 차이 연구를 통하여 어떤 보편성이나 공통성이 구성된다면 이렇게 구성된 보편성은 그 보편성의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며 이때 어떤 다른 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다시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고부응, “비교 연구로서의 영화 연구: 차이와 민족 정체성”________________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2002 공개 학술 심포지움, <비교 영화/문화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속 재현에서 민족 또는 개인이 역사의 주체 또는 희생자/가해자로 구성해 내는 방식을 살펴볼 때 나는 비교연구(비교영화연구)라는 방법론을 고려해 보고 싶다. 위의 인용문에서 고부응이 말한 바와 같이 학문이라는 것이(또는 학문의 방법이라는 것이) 이미 비교 연구라는 토대에서 출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또한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의 비교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차이라는 것은 다른 대상(타자)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나 누구나 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의 망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본질론적인 담론에 치우치기 쉽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대만의 근대와 주체 형성의 문제는 그 각각의 민족적 테두리 또는 물리적인 국경을 넘어 그 사이와 경계에 숨어있고 전도되어 있는 듯한 힘의 동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다음에 인용된 글은 후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공식적인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대만의 역사 또는 대만의 민족이 어떻게 소환되는지를 보여준다.
대만의 민족 정체성이 역사적, 사회, 정치적 담론들을 망각으로 형성한 것과 같이, 근대의 역사 주체로서의 ‘대만’은 유사하게 대만의 문화와 영화에서 빠져있었다. 그러므로 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대만 근대사에 대한 협소한 시각에 도전하는 것이다. 대만 뉴웨이브는 영화에 대한 ‘대만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재현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통해, 대만의 ’대중적 기억‘을 위한 영화적 공간을 요구하는 대만적 ’민족’에 대한 정의에 공헌했다. 1982년 을 시작으로 대만 뉴웨이브는 지정학적이고 시대적인 특정성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면서, 과거에 영화적으로 재현되지 않았던 대만의 사회, 정치, 경제적 변화의 이야기들을 스크린에 옮겨왔다. 후 샤오시엔의 경우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영화들은 공적 장치의 역사는 중심에서 비껴서 있고 보통의 대만 가족들의 일상 경험을 보여준다. 공시적인 역사에서 제외된, 그들의 사적이 이야기로 대만의 ‘대중적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 이름과 목소리를 부여한다.
―June Yip, Constucting Nation: Taiwanese History
and the Film of Hou Hsiao-hsien
위의 글은 물론 중국과 대만간의 역학을 보다 깊이 들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대만적인 기억과 주체라는 것이 어떻게 중국과의 관계에서 지워져 왔는지, 대륙과 관계한 대만의 역사적인 소외를 동아시아의 구체적인 역사를 바탕으로 재고하고 있다.
일본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외부에 위임(mandate)에 의해 갑작스럽게 분해되었기 때문에 식민적 질문들을 회피하고, 거부할 수 있었고, 따라서 경제 회복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또한 대만에서 일본이 비워낸 공간은 대만인들이 채운 것이 아니라, 본토에서 건너온 중국군들에 의해 채워졌다. 외성인들의 이식과 부패는 대만에 중국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했고 결국 대만인들은 일본인과의 식민적 관계를 다시 구성하고 다시 상상하게 되었다.
―Leo T. S. Ching, “Becoming Japanese: Colonial Taiwan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Formation”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이기도 하였지만 중국이라는 대륙과 관련되어서는 망각되고 지워진 역사적 유령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 또한 다시 상상한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주체(이는 김소영의 지적대로 글로벌한 자본주의 경제의 시선 하에서 구축된 것이기도 하다) 만들기 또한 어떤 징후적인 지점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곧, 역사와 주체를 소환함에 종종 마치 멜로드라마와 같은 감정적 과잉을 남기거나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롭게 젠더 및 계급과 관련된 정치학을 구사하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경우, 주인공은 근대 한국의 트라우마적인 역사적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처음에는 가해자였지만 나중에는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 전이되며, 이는 관객에게 감정적 동일시를 유발하였다. 그리고 자주 거론되었던 바와 같이 <쉬리>의 여주인공은 역사의 괴물(그녀의 코드명은 히드라이다)로 결국 제거되어야만 하는 유령적이고 악마적인 존재였으며, <파이란>의 여주인공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부터 온 여성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치적인 무의식을 엿보게 하였다.
일본의 경우, 단순히 동아시아의 식민의 역사적 가해자 또는 희생자로써 그 자신을 상상해 내지 않는, 또는 그럴 수 없는 감정적 잉여가 존재한다. 앞서 인용문에서도 이야기되었지만 그들 또한 외부 세력에 의해 권력을 강탈당했으며 히로시마 원폭은 그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트라우마는 서구의 홀로코스터와는 다르게 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죄의식이나 감정적인 동일시를 유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 근대가 형성되는 과정만큼이나 전후 민족을 구성하고 역사적 기억을 소환해 냄에 있어 양가적인 가정을 발생시키는 듯하다. 여기서 잠깐 일본의 근대성, 주체 형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천황제란 일본 역사를 관통한 하나의 제도였지만, 천화의 존엄이라는 것은 이용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실제한 적은 없었다. 후지와라 가문이나 장군들은 왜 천황제를 필요로 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 자신이 최고의 주권을 장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주권을 장악하는 것보다 천황으로 하여금 명령하도록 하여, 자신이 맨 처음 그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명령이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절대적 존엄성을 인민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자신이 천황에게 부복(俯伏)하는 모습을 통해 천황을 신격화하고 같은 행동을 인민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가능한 것이다(…)이는 단지 먼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라 이번 전쟁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________________
가라타니 고진, “일본정신분석“, ≪창작과 비평≫
이와 함께 고진은 일본인이 한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배제(foreclos
-ure), 곧 원억압의 배제, 상징적 거세의 배제가 놓여 있다는 분석하는데, 이러한 거세는 억압에 의해 주체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신경증적인 것이 따라붙고, 거세의 배제는 주체를 충분히 구성하지 않고 정신증(분열병)적인 것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일본이 전후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그 자신을 상상해 내는 방식은 고진이 분석한 근대 주체 형성의 전도적인 방식이나 한자를 수용하는 과정에 있었던 신경증적이고 분열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와 함께 최근 한국 영화에서 관찰되는 역사의 가해자/희생자라는 테마에서 감정적 동일시를 끌어내는 문제나 젠더 정치학적인 측면에서 여성이나 계급이 유령 또는 악마로 형상화되는 문제 등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게 한다.
3. 전후 일본의 판타지
전후 일본 문학의 주인공들에게도 현대 일본의 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은 여전히 강하게 나타난다. 동시에 그러한 도피가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인식한다. 전후 작가들은 진정한 도피가 아니라 현대 세계의 삶이 근본적으로 부조리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환상적이고 부조리한 탐색에 몰두한다.
……전후 소설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의문시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시 1956>(어머니가 남편과 아들을 배신함),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문제 1968>, <그가 내 눈물을 닦아주던 날 1972>(결혼과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며 남성을 미치게 하거나 그로테스크한 환상에 빠져들게 만드는 거세자로서의 어머니) 남성주인공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머니만이 아니다. 여성 전체가 장애와 굴욕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여성은 근대에 대한 복수나 근대로부터 도피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은 다가갈 수 없고 악마적인 ‘타자’가 되어간다.
아베 고보(Abe Kobo)의 작품에서 그들은 묵시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희생자는 아니지만 비사회적이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오에 겐자부로나 마시마 유키오의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사라진 사회에 대한 복수를 한다. 이와 같은 소외된 세계에서 여성은 통제와 복수의 판타지의 중심이 된다. 여성들에 대한 복수는 여성들을 텍스트에서 제거하거나 텍스트 내에서 살인이나 폭력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Woman lost : The dead, damaged, or absent female in postwar fantage"
________________
Susan J. Napier,
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전후 일본 문학에서 어머니나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은 상당히 징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여성이 다가갈 수 없고 악마적인 ‘타자‘가 되어간다는 것이나 통제와 복수의 판타지에 중심이 된다는 것은 전후 일본이 새로운 민족, 새로운 역사의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했느냐를 비판해 보게 한다. 이는 최근 김소영이 “사라지는 남한 여성들”김소영 기획, <한국형 블록버스터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연구, 2001.
에서 제기한 문제 의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동시에 일본의 경우에는 원폭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개입되면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한 트라우마가 어떻게 재현되고 전이되는가는 다양한 글과 영화를 통해 분석될 필요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신도 가네토의 <오니바바 Onibaba>를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4. 신도 가네토1912년 3월 12일 일본 히로시마 태생이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하여 여러 영화사를 전전하다가 쇼치쿠[松竹]를 마지막으로 1951년 자신의 영화사를 설립, 첫번째 장편영화 <애처이야기 愛妻物語>를 발표하였다. 1952년 <원자폭탄의 아이들 原爆の子>을 발표하여 원폭투하로 인한 참혹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려내었고, <벌거벗은 섬 裸の島>으로 1960년 모스크바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하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하수도 どぶ>, <오니바바 鬼婆> 등을 발표하였고, 1975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미조구 치 겐지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생애 : 미조구치 겐지 ある映畵監督の 生涯 : 溝口健二の記錄>를 연출하였다. 이후의 그의 작품으로는 <낙엽수 落葉樹>(1986), <오후의 유언장 午後の遺言狀>(1995) 등이 있다.
의 <오니바바 Onibaba>
“오래된 전설에 근거하는 이 이야기는 전쟁과 비극, 문명화된 겉모양 아래 있는 원시성에 관한 것이다.”
―영화 <오니바바> 중에서
<오니바바>는 시어머니와 그녀의 며느리의 원시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들은 전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무라이들을 함정을 파서 죽이고 그들의 갑옷을 팔아 음식을 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메마르고 황량한 갈대밭 한 가운데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러한 동업은 하치가 등장함에 따라 위협받는다. 그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의 남편이 죽었다고 말하고 성적 본능이 충만한 며느리와 관계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며느리에 의해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들의 성적인 에너지의 표출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 때 갑자기 끔찍한 가면을 쓴 사무라이가 등장하여 시어머니에게 길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사람들을 죽였던 어두운 구멍으로 인도하여 죽이고 그의 가면을 벗긴다. 가면 뒤의 얼굴을 화상을 입은 듯이 일그러진 흉한 괴물의 형상이다.________________
이를 원폭으로 인한 상처로 해석이자 그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시어머니는 잠깐 놀라지만 곧 그 가면을 하치를 찾아가는 며느리를 겁주기 위해 사용한다. 며느리는 혼외정사를 한 이들이 혹독한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가면을 쓴 시어머니를 악마로 착각하고 무서워하지만 또 다시 하치를 찾아간다. 영화는 소름끼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시어머니가 쓴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은 것이다. 며느리가 가까스로 가면을 도끼로 부수어 떼어 주지만 그 뒤에 남는 얼굴은 사무라이의 얼굴과 같이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다. 그리고 영화는 “난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다“는 시어머니의 외침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줄거리를 길게 서술한 것은 영화가 상당히 기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오니바바>에서 ‘오니바바‘는 마귀할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Jyotsna Kapur는 <오니바바>에서 두 가지 중심적인 모티브로 갈대와 가면을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서 갈대는 성적 에너지를 대변한다고 한다.Horror international》, Ed. Steven Jay Schneider & Tony Williams,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2003ꡒThe Return of History: Onibaba and the Atomic BombꡓJyotsna Kapur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Carbondale.
내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두 번째 모티브인 가면이다. 이는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 또는 역사의 주체와 역사의 유령이라는 정치학과 관련하여 소름끼치는 전이와 처벌, 복수라는 테마를 형상화 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전후 일본 문학에서 나타나는 어머니, 여성의 재현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 곧, 여성이 다가갈 수 없고 악마적인 ‘타자‘가 되어간다는 것, 또한 그녀들이 통제와 복수의 판타지에 중심에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어머니는 전쟁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비참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역사의 희생자인 동시에, 전쟁 중에 길을 잃은 사무라이들을 죽인 살인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면이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게 되는 소름끼치는 순간, 우리는 복수와 처벌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가해자이고 희생자이기도 한 그녀에게 이러한 처벌과 복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전쟁으로 인한 불합리함, 죄의식의 감정이 끔찍한 괴물 그 자체, 인간이 되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버린 그녀의 형상에서 폭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 <오니바바>는 전이적이고 분열적이며, 일본 역사의 언캐니한 순간들을 상기시킨다.
5. 나오는 말
이 글은 동아시아 지역, 그 가운데 특히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역사를 소환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여기서 영화 <오니바바>를 흥미로운 텍스트로 여기고 분석해 보았다. 동아시아 역사의 특수성을 염두하고 전후 일본 영화를 비교연구방법적인 시각에서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일본 영화를 거론하기 전에 대만과 한국의 몇 가지 특징적인 지점들을 이야기했으나 그것이 아직 일관된 지도를 만들어내지 못함에 아쉬움을 느끼며 글을 맺는다.
이은주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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