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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문화산책/류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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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15회 작성일 05-03-07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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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원작이 있는 영화․2


소설과 영화, ‘각색의 윤리학’ 조루즈 베르난노스와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


류상욱
(영화평론가)



1. 한국영화에서의 각색에 대한 태도
어떤 영화가 원작을 가지고 있는 경우, 한국의 영화평론이 그 원작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거나 원작과 각색된 텍스트를 비교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영화평론가들이 영화의 원작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필립 K. 딕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는 윌리엄 버로우즈의 소설을 각색했다. 이 두 영화를 해설하면서 필립 K. 딕이나 윌리엄 버로우즈의 작품세계를 함께 논의하는 것은 이 땅에서 영화평론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물며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고 있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을 J.R.R.톨킨의 원작과 함께 평론하는 경우도 보기 드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영화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다른 예술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이렇게 원작과 각색의 결과 생산된 영화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연 좋은 각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원작을 충실하게 옮기면 좋은 것인가? 영화작가가 원작을 대폭 수정하여 다른 내용의 영화를 만든 것은 원작을 배신한 행위인가? 이 고전적인 질문들은 여전히 해결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가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2. 바쟁과 트뤼포의 견해
하지만 1950년대 프랑스에서는 이에 대한 훌륭한 연구가 존재했었다. 앙드레 바쟁과 프랑소와 트뤼포의 글을 읽으면 당시에 원작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문제에 대해 그들이 많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트뤼포의 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는 그 유명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썼다. 지금 이 글을 읽어본다면 트뤼포의 주장에 무리한 측면이 있었음을 충분히 비판적 거리를 두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된 1954년 프랑스 영화계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후 누벨바그의 마니페스토로 평가되는 데에 이르는 이 글은 당시 프랑스 주류 영화계 인사들의 격렬한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다.________________
류상욱, 프랑소와 트뤼포, ꡔ호모 시네마쿠스ꡕ, 아웃사이더, 2003, p.43.
그렇게 된 데에는 트뤼포의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그 원인을 제공했다. 그는 프랑스 영화를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와 작가영화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는 시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 즉 양질의 전통la tradition de qualité에 속하는 영화들은 모두 몇몇 시나리오 작가들이 각색한 소설에 의존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각색의 윤리학’이 문제된다고 주장한다. 불순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인 시나리오 작가인 장 오랑쉬와 피에르 보스트는 문학작품을 각색하면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눈다. 그러면서 영화로 만들 수 없는 것을 생략해 버리고 그것과 동등한 것을 발명해 낸다. 조루즈 베르난노스의 소설 「시골사제의 일기」는 처음에 장 오랑쉬에 의해 각색되었다. 그러나 그 각색된 시나리오는 원작자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이유에 대해 트뤼포는, 오랑쉬가 영화로 만들 수 없는 장면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제멋대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트뤼포는 그 시나리오 작가들이 근본적으로 영화인이 아니고 문학인들이기 때문에 영화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그들이 문제가 있는 세계관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각색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원작의 의미마저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________________
Francois Truffaut, 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e, Le Plaisir des Yeux, Flammarion, 1987, p.217.

결국 트뤼포의 주장은 각색의 윤리학이라는 문제에 귀착한다. 아마도 이 문제의 해답은 트뤼포의 글보다 2년 먼저 출간된 앙드레 바쟁의 글인 「비순수 영화를 위하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는 ‘각색의 옹호’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바쟁은 영화의 존재론이란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비평가이자 이론가였다. 그에게는 영화와 다른 예술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이 도래한 예술인 영화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문학사와 미술사 등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영화의 존재론을 논의할 때 필연적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소설과 연극, 회화에게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상에 등장한 이래로 이러한 다른 예술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감정을 안고 있었다. 바로 영화가 새로이 만들어지고 다른 예술을 모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러한 열등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바쟁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로 생긴 예술인 영화가 선배 예술을 모방하고 조금씩 자신만의 법칙과 테마를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것은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각색을 둘러싼 문제들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가 다른 예술의 영향을 받았고 다른 예술에서 원작을 가져와 각색만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예술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바쟁은 미국소설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흔해빠진 이야기라고 말한다. 레이몽 끄노의 소설이나 도스 파소스,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영화적 기법을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식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영화와 다른 예술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어느 것이 우월하고 열등한가를 따지는 것은 논의의 깊이를 더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색의 윤리학이라는 문제는 어떠할까? 일단 소설과 영화를 생각할 때, 두 예술이 서로 다른 매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때 필연적으로 단순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영화작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바쟁의 말처럼, 그들의 배반은 상대적인 것이고 문학이 거기에서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봐리 부인>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각색된 영화는 미학적인 측면에서 수준의 차이를 보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설령 형편없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소설 「보봐리 부인」의 작품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 텍스트를 놓고 각각의 미학적인 가치를 논의하는 것뿐이다.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이 각색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한하게 된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각기 고유한 표현방법을 가지고 있고, 이 두 예술이 독자와 관객에게 주는 효과도 같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각색을 하는 영화작가에게 더 많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요구하는 전제가 된다. 우리는 각색에 있어서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영상에 옮기려는 각색,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용과 표현방식을 바꾸는 각색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바쟁의 말처럼, 좋은 각색은 문자와 정신의 본질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고, 우리는 개별 텍스트를 평가하는 작업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________________
앙드레 바쟁, (박상규 역), ꡔ영화란 무엇인가ꡕ, 시각과 언어, 1998, p.131.

바쟁이 그 평가의 재료로 제시하는 것은 조르주 베르난노스의 「시골사제의 일기」이다. 로베르 브레송은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작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각색한다는 것이 아니라, 삽화적 인물들을 제거하면서 원작의 본질적인 것의 주변에 있는 쓸데없는 가지들을 쳐내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인 단순화의 과정이지만 시골 사제의 근심스러운 경의의 표정은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창조적인 자유의 가장 은근하고도 침투력 있는 형태의 충실성이다. 물론 이것은 바쟁의 평가이다. 베르난노스를 영화로 각색하는 데에 브레송이 가장 대표적인 영화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여기서 더 이상 논의를 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물론 베르난노스와 브레송 사이에 놓여 있는 텍스트 각색 역시 다시 한 번 연구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이지만, 이것을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두고 또 다른 베르난노스 각색을 한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평가해보기로 하자.
3.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
1925년에 태어난 모리스 피알라는 2003년에 사망했다. 그는 원래 화가였다가 자신의 예술적인 영감을 표현하는 데에 회화라는 매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화가로서의 경력을 모두 포기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반 고호에 대한 독특한 전기영화를 찍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유일하게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찍었는데, 그것이 바로 조루즈 베르난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Sous le soleil de Satan」이다. 이 영화는 1987년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이것은 소란스러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프랑스 영화에 상을 주려는 의도가 보이는 결과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위에서 논의했던 ‘각색의 윤리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과연 매우 엄격한 영상미학을 추구했던 피알라가 신과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어떻게 각색했는가의 문제는, 브레송의 각색과 더불어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각색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도 제기하게 만든다.
소설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처음은 ‘무셰트Mouchette 이야기’이고 다음은 ‘절망의 유혹’이며 마지막은 ‘룅부르의 성자’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16세의 소녀인 무셰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고, 도니상Donissan 신부와 메누-스그레Menou-Segrais 사제장과의 관계, 그리고 사탄과 대면한 이후의 도니상 신부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영화는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맡고 있는 도니상 신부에 대한 묘사가 먼저 나오고, 상드린 보네르가 연기하는 무셰트의 살인 장면이 다음에 나온다. 기적을 행하는 도니상 신부와 그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사실 앞에서 브레송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단순화의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누가 각색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무셰트의 가족관계 등을 길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한정된 시간 안에 모두 영화장면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소설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일단 모리스 피알라는 지독한 페시미스트이다. 그는 소설의 한 장章이 가지고 있는 제목이기도 한 무시무시하고 사탄과 같은 ‘절망의 유혹tentation du désespoir’에 대면하는 베르나노스적인 주제를 영화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피알라의 인물들에서 드러난다. 원작을 각색하면서 피알라는 독특한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먼저 피알라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므누-스그레 사제장이 있다. 소설보다 영화에서 이 늙은 신부의 캐릭터는 좀더 회의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카톨릭적 세계관을 가진 베르나노스에 비해 무신론적 불가지론의 세계관을 가진 피알라가 서로 충돌하면서 융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비 당통과 모리스 피알라가 함께 한 각색은 액션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아나톨 프랑스를 모델로 한 생-마랭의 작가는 영화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 피알라가 소설의 액션을 강조하는 각색을 선호했다고 하더라도, 이성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앙과 회의주의를 대비시키는 것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에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것은 영화에서 생략의 형태로 나타난다. 도니상 신부의 카톨릭 신앙에 대한 열정은 영화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그런데 도니상 신부와 무셰트와의 관계는 영화에서 소설에서보다 더 생략적이다. 그는 사탄과 맞닥뜨리고 난 후 무셰트를 보고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것을 단숨에 알아차린다. 이 두 인물 사이에는 초자연적인 성격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무셰트의 육체를 통해서 그녀의 영혼과 그녀가 저지른 범죄까지 도니상 신부는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무셰트가 원하기만 했던 성당의 제단에서 죽어가는 소원을 영화에서는 도니상 신부가 실제로 실현시킨다.________________
Joel Magny, Maurice Pialat, Cahiers du cinema, 1992, p.99.

이 ‘초자연성’이라는 주제는 영화에서는 자연적으로 처리된다. 이것은 모리스 피알라가 결코 신비주의적으로 이 소설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심리주의적인 접근을 한다. 소설과는 달리 므누-스그레 사제장과 도니상 신부와의 대화도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 대신 피알라는 소설에서 도니상 신부와 무셰트와의 대면 그리고 육체를 가진 사탄과 몸으로 대면하는 도니상 신부를 영화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이것은 베르난노스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베르나노스의 신은 현실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고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렇다면 사탄 역시 육체를 가진 존재인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피알라의 영화는 다른 종교 영화와는 달리 신비적인 요소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 사탄은 마필 중개상으로 도니상 신부의 길동무로 등장한다. 어둠의 왕자인 그 사탄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등장하지만, 그 사탄은 도니상 신부나 무셰트나 심지어 므누-스그레 사제장의 내면에서조차 존재한다. 이것이 또한 피알라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神性)과 악마성은 하나의 존재 안에서 서로 길항하는 것들이다. 사탄은 한 존재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그것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다. 사탄은 성자의 영혼 속에 있고, 신은 범죄자의 영혼 깊숙한 곳에 존재한다.
피알라의 영화에서 육체성은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다. 영화는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표현해야 한다. 도니상 신부가 가지고 있는 자신 없는 성격과 신앙에 대한 회의는 육체에 대한 학대로 표현된다. 건장한 체구의 도니상 신부는 채찍으로 자신을 내리치기도 하지만, 길을 걸어가면서도 몸이 부서질 듯한 느낌을 주며 걷는다. 그의 내면의 투쟁은 차갑고 불안한 육체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숨소리는 거칠고 검은 사제복에 파묻힌 그의 몸은 답답한 느낌을 준다. 좌우로 흔들리는 그의 몸은 영혼을 갉아먹는 의심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직무, 즉 신에 대한 헌신이라는 직무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 그것은 자신이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또한 그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신에 대한 헌신과 사탄의 유혹 사이에서 그는 방황한다. 므누-스그레 신부에게는 그런 회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나이든 사람의 현명함으로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젊은 도니상 신부에게는, 악마가 그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사탄이 승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셰트는 16살 소녀로 카디냥 후작과 시의원이자 의사인 갈레라는 중년 남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명의 애인 사이에서 결국 카디냥 후작을 총으로 쏴 죽게 만든다. 영화의 이 장면에서 무셰트는 화면 밖에 위치하고 있다.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러한 연출은 그녀에게 살인의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도니상 신부는 그녀가 이미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도니상 신부가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사탄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 살인은 곧 무셰트의 자살과 연결된다. 이 살인에서 자살로 이어지는 시퀀스의 피알라의 연출은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모호한 측면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원작과는 다르게 도니상 신부가 무셰트를 성당의 제단에 갖다놓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 이것은 신에게 의지한 것인가 아니면 사탄에게 부활을 기원하는 것인가? 이 장면이 베르난노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피알라의 세계관에 따른 연출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고 도니상 신부는 기적을 행하는 신부로 세상에 알려진다. 어느 날 도니상 신부는 뇌수막염에 걸린 아이를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이가 살고 있는 마을에도 신부가 있다고 말하면서 도니상 신부는 그 부탁을 거절하려 하지만, 결국 그 마을에 가게 된다. 죽은 아이를 들어올리고 아이는 다시 살아난다. 그가 기적을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영화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도니상 신부와 죽은 아이의 어머니만이 아이가 되살아난 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 아이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낳게 만든다. 그러나 피알라가 연출한 장면에서는 마을 사람들 역시 그 아이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비록 아이가 정말로 되살아났는지 확실하게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결국 므누-스그레 사제장은 도니상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는 곳에서 죽었음을 확인하고 그의 눈을 감게 한다. 모리스 피알라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므누-스그레 신부는 도니상 신부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모리스 피알라는 상드린 보네르가 출연했던 <사랑 이야기A nos amours>에서도 억압적으로 보이는 아버지로 직접 출연해서 결국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다. 이렇게 그는 노인이 되어가는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의 방황을 지켜보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있다. 세상을 지켜보는 피알라의 눈에 세상은 혼란스럽고 죽음이 지배하고 파괴와 슬픔이 가득 찬 곳이다.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가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인공 소녀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온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베르난노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신앙의 문제이다. 그러나 모리스 피알라의 세계는 신뢰의 문제이다. 과연 아버지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은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왜 피알라는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선택한 것일까? 그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는 텍스트를 선택한 것은 어떤 새로운 결과를 생각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 시도는 실패를 예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도니상 신부가 사탄에 의해 광기와 죽음에 이르게 되었듯이, 피알라 역시 각색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되는 베르난노스의 텍스트에 도전함으로써 그 악마적인 광기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모리스 피알라가 연기하는 므누-스그레 사제장은 “현명함은 노인들의 광기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도니상 신부는 “신이 당신을 부르는 이곳에서, 당신은 기어오르고 또 올라야 하고, 당신은 길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피알라는 결국 길을 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 영화는 영화로 만들고 싶게 만드는 유혹을 던지는 영화의 사탄과 동시에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천사 사이의 투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괴로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인가?
4. 또 다른 텍스트의 창조
베르난노스의 독자라면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에 불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각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단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그러나 바쟁의 말처럼, 베르난노스의 텍스트가 각색자를 위해 “그의 이야기를 새로이 꿈꿀de rêver à nouveau son histoire" 권리를 인정했다면, 피알라의 텍스트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피알라는 베르난노스의 텍스트를 각색하면서 자신의 세계관대로 원작을 바꾸었다. 이것은 각색의 윤리학이라는 측면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한가? 베르난노스와 브레송의 세계가 초월적이라면, 피알라의 세계는 육체적이고 자연적이다. 그러나 비관주의와 어둠의 그림자가 지배하는 피알라의 세계와 베르난노스의 만남은 어긋난 것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미묘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여지는 있겠지만, 베르난노스의 텍스트 자체가 죽음과 부정과 배신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피알라는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에 비추어 재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피알라의 영화는 베르난노스의 소설보다 혹은 브레송의 영화보다 더 좋은 혹은 나쁜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또 다른 좋은’ 영화이다.


류상욱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졸업
․저서 ꡔ호모 시네마쿠스ꡕ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박사과정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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