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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소설 계간평/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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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74회 작성일 05-03-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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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의 층위와 권역


서 영 인
(문학평론가)



1.
최근 발간된 ≪비평과 전망≫ 7호는 ‘체험의 귀환과 꿈꿀 권리’라는 제목 하에 신작특집을 싣고 있다. 가상 현실과 주관적 내면의 침잠이 풍미했던 시기를 지나 바야흐로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체험들이 소설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신작을 통해 확인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의 산물이다. 같은 책에 실린 고명철의 「박병례 론」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주류적 서사로부터 소외되었던 ‘현실의 구체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비평과 전망≫ 7호, 145쪽)을 젊은 작가들의 서사에서 징후적으로 읽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작특집에 실린 작품들의 면면은 야심찬 기획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랑의 신작은 예의 영등포 시장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ꡔ삼오식당ꡕ에서 보여주었던 질펀한 체험과 콧날 시큰한 감동을 되살리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심윤경의 신작은 ꡔ나....의 아름다운... 정원ꡕ이 전했던 어눌하지만 따뜻하고도 포용력 있는 시선을 떠올리기에는 어딘가 작위적이고도 황당한 면이 있다. 고명철이 거론하고 있는 신진작가들 중에서도 예컨대 전성태나 김종광, 박정애 같은 작가들의 근작은 체험의 생생함과 삶에의 새로운 천착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그 활력이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오늘의 우리 문학에 대해서는 “한국소설이 격심한 변화의 와중에 일종의 조정 국면을 맞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한편으로 신진작가들이 너무 쉽게 피로 현상을 보이고 있”(방민호,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소설-황순원 문학상 예심평」, 문예중앙, 2003년 가을, 14쪽)다는 진단이 더 정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신매체에 대한 환상, 가상현실에 대한 과도한 기대, 환상과 상상의 권능을 현실을 보는 눈에 대비시켜 강조하는 경향”(방민호, 같은 글, 16쪽) 속에서 종횡무진 질주했던 우리 소설들이 적절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곳에서 서사의 일시 소강상태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의 구체성과 체험의 영역은 이 소강상태의 서사가 출구를 찾기 위해 타진하고 있는 여러 모색 중 하나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과 전망≫의 기획이나 고명철의 진단은 우리 서사의 징후를 발견하는 작업, 그 징후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찾고자 하는 기대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진단과 기대가 당대의 작품들이 성취해 낸 성과나 잠재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으로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언제나 비평이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 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할 때, 혼란과 변화에 잠재된 징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것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징후나 기대라 할지라도 체험의 의미를 엄밀히 고민해 보는 것은 이 시점에서 분명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을 ‘귀환’이라 해야 할지, 혹은 ‘회귀’라 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이라 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체험과 현실성의 영역이 소박한 의미의 경험주의나 소재론적 반영을 넘어서는 실로 복잡하고도 섬세한 체험의 다면성을 환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재음미가 무색해지리라는 것이다. 아직 충분히 발아하지 않은 새로운 서사의 움직임을 기대하고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지난 계절의 문학지에 발표된 소설들을 점검하면서 이 체험과 현실성의 의미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천운영의 「멍게 뒷맛」(≪파라 21≫)은 여러 가지로 체험에 대한 착잡한 생각들을 곱씹게 하는 작품이다. 천운영은 입맛과 식욕이 가지는 화려하고도 미세한 감각을 소설의 강렬한 이미지로 전화시키는 데 남다른 솜씨를 가졌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작가이다. 천운영이 이 소설에서 내세우는 ‘맛’은 제목에서 예견할 수 있듯이 멍게의 맛이다. 멍게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여자가 있다. 이 두 여자는 말없이 멍게를 음미한다. 그 맛에 대한 묘사와 감각의 섬세함이 소설을 풀어가는 중심 화두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맛을 먼저 느껴 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멍게를 삼키는 당신의 얼굴에 작은 파랑이 일었다. 멍게 돌기를 오독오독 씹을 때는 바위에 부딪치는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입안에는 바다가 들어왔다. 멍게를 한입 넣었다. 새콤한 맛이 콧구멍부터 목젖까지 아련하게 번져왔다. 나도 당신이 하는 것처럼 멍게를 삼킨 다음 물을 마셨다. 싸하고 신맛이 가시면서 단맛만 남았다. 열정적인 키스를 건네 오는 연인의 혓바닥을 받아들이듯 나는 어느새 보드라운 멍게 살에 빠져들고 있었다.(166쪽)

멍게를 삼키는 얼굴에서 작은 파랑을 일으키는 ‘당신’은 확실히 ‘나’보다 멍게맛을 느끼는데 있어서는 한 수 위다. 당신이 전해 주는 멍게의 맛, 그것의 요체는 ‘콧구멍부터 목젖까지 아련하게 번져’오는 첫맛의 강렬함,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담백한 단맛이다. 그리고 이 맛을 느끼면서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져요,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166쪽)라고 말하는 ‘당신’의 삶과 이 멍게의 맛은 아마도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의 삶은 이질적인 두 맛이 함께 녹아 있는 멍게처럼 신묘한 데가 있다. “당신은 행복할 줄밖에 모르는 여자”였고, “당신 얼굴에는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만 있을 뿐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162쪽)다. 그런 당신을 나는 질투한다. 하루 종일 우중충한 방안에서 오징어를 자르고 구부려 폐백용 꽃을 만드는 ‘나’는 자신이 만드는 꽃이 가짜 꽃일 뿐임을 당신을 통해서 명백히 깨닫는다. 그래서 삶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신의 행복과 온화함과 평화로움을 질투한다. 분명 ‘나’가 아는 삶이란 어둡고 쾨쾨한, 냄새나는 가짜 꽃일 뿐이다. 그것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그녀는 신비하고 부럽기 그지없지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에 그 행복과 평화가 질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가 남편에게 매일 구타당하고 슬픔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내심 흥분하고, 그 흥분은 알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킨다.
「멍게 뒷맛」에서 천운영이 불러오는 이미지들은 화려하고 선연하다. 찝찔하고 쾨쾨한 오징어 꽃, 쓰레기 봉지에서 터져 나오는 썩은 양파와 묵은 김치, 새빨간 동백꽃과 그 꽃송이를 닮은 새빨간 원피스, 당신의 하늘거리는 꽃무늬 치맛자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멍게의 알싸하고 미묘한 맛. 소설은 서사가 이끌어내어야 할 모든 구체성을 너무나 감각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얼얼한 이미지로 대신한다. 그리고 이 구체적 감각들의 뒤편으로 정작 삶의 실재성, 그 체험의 구체성들은 흐려진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졌던 당신의 과거, 사랑을 가장한 남편의 구타와 폭력, 그리고 그 슬픔과 어두움을 벗어던지고 평온과 행복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모습에는 멍게의 맛처럼 극단적인 체험이, 이미지가 맞붙어 있다.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체험과 발견의 순간들이 오가고 스러지고 상처입고 다시 일어섰을까. 멍게의 아리고 달착지근한 맛을 반복해서 되씹으며 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당신의 희망은 그 속에 어떤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까. 당신은 내가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묘한 복수심과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아파트의 난간에서 슬픈 눈빛으로 아래를 바라보다가 몸을 던져 사라져 버렸다. ‘멍게 뒷맛’이 불러온 그녀에 대한 나의 복수심과 질투심은, 아마도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으며 비루하고 우울하게 지속될 수밖에 없어서 근근이 버텨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대비되는, 그녀의 아름다움, 화사함에 대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자신의 비루함에 대한 분노, 음습하고 침침한 곳에서 꾸물거리는 삶의 남루함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그녀는 그 속에 무언가 신비로운 도약의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게 만들기에 나는 그녀를 질투하고 욕망한다. 그녀가 사라진 순간 그 화사함에 대비되었던 칙칙함은, 분노와 부정이 살아 있기에 더 생생했던 비루함은 달라질 것도 대비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녀가 사라진 후 혼자 먹는 멍게가 아린 신맛과 단맛의 짜릿하고 보드라운 감촉 대신에 역한 냄새만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일 터이다.
멍게의 싸한 신맛과 단맛에서 시작하여 상한 멍게의 쓰디쓴 맛으로 끝맺는 소설은 그러나 시종일관 나의 시선에, 나의 감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사라진 그녀, 타자의 구체적 삶은 더욱 아쉽다. 나의 시선에 잡힌 그녀말고 다른 삶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슬픈 눈빛과 하늘하늘한 옷자락, 화사하고 뽀얀 그녀의 웃음이 알고 있는 멍게의 맛이란 신비롭기만 해서, 오히려 그것이 위장과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남긴다. 감각적 체험은 강렬하고 선명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읽을 수 없는 글자처럼 오히려 추상적이다. 그리고 그 강렬함 때문에 그 속에 숨어 움직이고 함축된 삶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잠깐 잊게 만든다. 이미지 뒤에 숨은 삶, 아마도 강렬한 감각을 불러 일깨우는 단초가 되고 근거가 되었을 삶들이 서사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몸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이미지들의 매혹은 그 삶들로 되돌아와 더 깊고 날카롭게 각인될 것이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감각적 체험의 강렬함이 삶의 실재성을 덮고 있다면, 박병례의 「화투공방을 놀아보자」(≪리토피아≫)에서는 구어의 능청맞음과 무심함 아래에 서사의 맥락이 숨겨져 있다. 남편이 죽고 자식들도 떠나고, 한적하고 괴괴한 농촌의 빈방에서 늘그막의 여성들이 펼치는 화투공방의 현재성은 과거 속에 묻힌 기억들과 혼재되어 있고 그래서 서사는 언뜻 보기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승패에 관심 없는 화투장처럼 툭툭 내던지는 구어들은 그 사투리의 현장감과 말머리와 꼬리를 잡을 길 없는 뜬금없음으로 어지럽고, 그런 왁자한 대화로만 구성된 서사는 가닥잡기가 쉽지 않다.

“돼서 물 부니께 묽구 또 묽어서 가루 풀다보니께 이 화상이 됐구먼. 그냥 저냥 먹어둬. 아까 저수지 너머 여편네들 왔을 때 먹고 남은 거라 퉁퉁 불긴 했어도 집이 가봐야 뭐 벨시럴 거여. 아침은 그럭저럭 입맛없어 안 먹었을 테고 저녁은 잘 때니께 구찮어서 건너뛸 거 아녀? 밀가루라 금방 삭어. 접때도 그 얘기했지만 늙긴 늙었나 가끔 그게 생각나. 허구헌날 남의 콩대 꺾어 구워 처먹지 않었어?”
“누구? 미친 것! 그 얘기는 뭐러 자꾸 할려고그려.”
“저녁이 누우면 잠은 안 오고 그게 죽었나 살었나 궁금하대.”
“나 뜨거운 거 즐기는 줄 번연히 알면서 이뤃게 차게 했뜌?”
“꼴에 또…… 여러 질이다! 여러 질!”(240쪽)

아낙들의 대화는 두서없이 오가고 그 안에 숨겨진 삶의 만만치 않은 사연들은 알듯 말듯 슬쩍 단서만 남겨두고 사라진다. 작가는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과 각각의 인물들의 시선을 능숙하게 교차시키면서 그들이 떠올리는 기억을 근거로 숨겨진 사건들의 구체성을 조금씩 밝혀 나간다. 사건의 전모를 알기 힘들게 했던 이 걸판진 구어체 대화들은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기억 속에 만만치 않은 사연들이 숨겨져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사연들이 좀처럼 꺼내놓기 힘든 것들이어서 대화판에서 한참을 겉돈 끝에야 힘겹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려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순태네의 변덕과 성화는 오늘따라 극성맞아서 집과 텃밭을 남의 손에 넘기게 된 사정 말고도 다른 연유가 있는 듯하다. 순태네가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면서도 또 간간이 표나게 편을 들어주기도 하는 영분네와의 사이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 둘 사이에 얽힌 기막힌 사연은 인물들의 대화와 기억을 통해 조금씩 단서를 드러내고, 이것을 조각조각 맞추어 나가는 독자는 마침내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전모를 알 수 있게 된다.
미친 여자와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돌만큼 여자 문제가 시끄러웠던 순태네 남편은 영분네를 겁탈했고 영분네는 쌍둥이를 낳았다. 누가 알까 낳자마자 아비를 빼닮은 아들을 미친 여자의 손에 넘겼고, 그래서 순태는 순태 아버지가 미친 여자를 덮쳐 낳은 아이로 동네에 알려졌던 것이다. 순태네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채 쥐어뜯는 씨앗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순태를 미친 여자의 아이로 만들기 위해 오히려 미친 여자와 남편의 관계를 윤색하여 떠벌리고 다녀야 했다. 이 두 여자 사이에 분노와 질투와 미안함과 억울함이, 배척과 연민과 증오가 뒤범벅이 되어 오랜 세월을 흘러왔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상 두 여자가 서로의 처지를 알고 이해하기만 해서, 같은 남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당해온 피해자의 동질감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비밀을 지켰던 것은 아닐 것이다. 순태네는 소문 나쁘고 행세 더러운 남편이라도 거기에 기대 살 수밖에 없기에 진실을 숨겼고, 마을 사람들에게 몰매 맞아 쫓겨나지 않기 위해 끙끙대며 분노와 화를 삭였다. 영분네는 자신의 억울함과는 상관없이 행실 나쁜 여편네가 되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알려진 후 닥쳐올 고난을 피하기 위해 어쨌거나 제 속으로 난 자식이 남의 집에서 커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말미에서 두 여자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건들을 넌지시 털어놓고 귀밑머리에 장다리꽃을 꽂고 헤어지는 장면은 흐뭇하지만, 이 화해는 마음 놓고 감동받기에는 너무 무거운 화해이다. 뻘밭에 발목을 담그듯 그들의 나날을 죄어오는 삶의 무거움과 신산함 때문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와, 무심하기에 더욱 치명적인 소문들 속에서 숨기고 억눌러야만 했던 그들의 분노와 한은 겹겹이 주름진 질곡의 상처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삶의 구체성과 체험의 생생함이란, 고된 노동과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부당한 줄 알지만 감당할 수밖에 없는 가족제도의 모순, 여성성의 연대나 삶의 힘겨움에 대한 연민과 분노를 포함하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선다. 그래서 쉽게 화해할 수도 체념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그 삶들은, 체험과 체험이 꼬리를 물고 얽히고설키는 복잡함 속에서 조금씩 그 구체적 실감들을 만들어낸다. 마치 화투판의 어디로 튀고 연결될지 알 수 없는 대화의 어지러움을 끈질기게 쫓아가듯이, 삶의 구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은 그래서 끝나지 않는 미로 속을 끝없이 뒤쫓아 가면서 조금씩 살을 붙이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흔해 빠진 불륜과 운명의 장난들을 다소 작위적으로 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박병례의 소설이 통속성과 상투성에 함몰되지 않는 것은 그 체험의 겹과 주름들을 이해하고 있고, 그것들을 쉽게 단순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3.
‘빨치산의 딸’이라는 신변적 요소와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작가 정지아의 소설, 그것도 자전적 요소가 짙은 「행복」(≪창작과 비평≫)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시대적 체험, 역사적 체험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때로 개인적이고 신변적인 문제가 그것 자체로 한 시대와 역사를 대표하는 경우가 있고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르거니와, 「행복」의 ‘나’의 부모, 빨치산의 삶이 그러하다.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에 관한 역사적 독법의 문제에서든, 일상적 삶과 이념적 삶의 접근성 문제에서든, 혹은 여전히 현재 남한사회 갈등 구조의 한 핵심인 반공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든 빨치산의 존재는 우리의 시대와 역사를 읽는 핵심 코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행복」에 옮겨진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역사적 존재로서의 빨치산들, 그들의 이념과 신념, 혹은 우리 시대의 상처와 모순에 관한 이야기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과거에 빨치산이었고, 평생 빨치산으로서의 삶과 긍지를 버리지 않았던 부모는 이미 늙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은 쓸쓸함과 착잡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딸은 그 늙은 부모를 바라보면서 ‘행복’에 관해 묻는다.

웬일인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하는 소소하나 서서히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과 함께, 연탄재가 쌓인 골목길에서 아빠와 함께 썰매를 타고 한나절 신나게 놀 수 있었던 그, 고사리손으로 사진첩에 사진을 끼워 넣고 그 밑에 ‘아빠와 썰매를’이라고 정성들여 써놓은 후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진 속의 한때를 추억했을 그가 갑자기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뭔가가 서걱거리며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163쪽)

사상범으로 10여 년을 복역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악으로 버티며 고된 농사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와 함께 보낸 생활은 평범한 가정의 소소한 행복이나 훈훈한 애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남편의 사진첩의 겉표지에는 ‘Happiness’라고 쓰여 있었고 아마도 그것은 너무 평범해서 상투적이기조차 한 행복의 일상적 모습일 터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이후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들과 사진을 찍고 사진첩을 만들어도 결코 맛볼 수 없는 행복이다. 삶이 그처럼 평안하고 소소한 감동과 따뜻한 추억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일찍부터 알고 오랫동안 느껴온 사람들에게 행복은 그렇게 단순한 상징을 통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음식은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소중하고도 엄숙한 먹거리이고, 술은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는 음료수일 뿐이며, 추억을 위한 사진은 영정사진을 찍을 때나 필요하다고 여기는 부모가, 대화가 오가는 따뜻한 식탁과 한잔의 술이 불러일으키는 흥취와 여유, 일상의 작지만 소중한 즐거움을 기억하는 행위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을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또한 침침한 눈으로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을 챙겨 보고 역사와 신념에 대해서 누구보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가서 마음속의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 “슬픔을 넘어선 잔혹이라고나 해야 적확할”(186쪽) 모습을 지닌 그들은 행복하지도 않다. 이 행복도 불행도 아닌 곳에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쓸쓸하고도 착잡한 눈이 있다. 부모의 이념과 견결한 생활을 존중하지만, 돈과 간판과 잇속만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들의 삶은 무력하고, 경박한 삶의 위력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자신도 거기에 섞여 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이다.
「행복」에는 부모의 삶과 현실의 세태를 마주 놓고 그것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복합적 시선을 증명하는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한다. 교사 초년 시절 아이들과 찾아갔던 폐사지의 침묵과 고요는 부박하고 살벌한 현실이 결코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자연과 삶의 엄숙함에 대한 비유일 테지만, 또한 그것이 주는 울림과 위안은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 되지 못한다. 어머니의 제 2의 고향이라 할 만한 운포는 추억 속의 궁벽한 어촌 마을이 아니라 산과 들이 바뀌어버린 한물 간 관광지가 되어 있고 그래서 어머니는 추억마저도 가난하다. 늙고 지친 노인네들이 되어버린 부모들이 아름다웠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징표들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백일홍의 전설에서, 이무기의 붉은 피로 물들은 돛은 사실은 승리와 소망의 성취를 알리는 흰 돛이었으니 처녀가 죽어서도 바랐던 소망은 이미 죽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의 삶에서 승리나 소망의 성취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으며 그들의 인생은 “배신과 실패마저 제 심장과 동맥으로 삼아 앞으로든 뒤로든 뛰든 기든 여하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유토피아를 향한 멈출 수 없는 마라톤”(208쪽)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모의 삶을 참혹하고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평범한 가정의 상투적 행복을 결코 느낄 수 없는 ‘나’는, 그런 소망조차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부모가 가진 소망을 갖기에는 이 삭막한 현실이 너무나 위력적임을 잘 알고 있다.
견결한 혁명 전사였던 빨치산도 늙고 그들이 함께했던 역사도 늙는다. 그러나 너무나 빨리 변하고 빨리 망각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마라톤을 멈추지 않기에 역사적 체험은 오래 지속된다. 정지아의 「행복」은 부모의 삶을 과거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그들의 현재 속에서 잡아내면서, 또한 그 부모와 함께 이루었던 가정이 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깊은 침묵을 체험한 ‘나’의 시선을 거기에 겹쳐 놓음으로써, 역사적 체험을 풍부하고도 세밀한 일상의 감각으로 채워 넣는다. 그래서 역사란 간명한 명제나 감동적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정리될 수 없는, 착잡하고 씁쓸하며 서운하고도 따뜻한 수많은 감정과 회한들이 오고 가는 다양한 삶들의 집적물이 되는 것이다.
정지아의 또 다른 단편 「민들레 화분」(≪실천문학≫)에서 아버지에게 분노와 배신감만 심어주었던 한씨의 삶이 다시 드러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시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세하는 가문의 종손임을 평생의 자존심으로 내세우면서 집안일은 뒷전이었던 아버지가 돈푼께나 모은 친족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얻은 직장은 소읍에 하나밖에 없는 흉물스런 고층 아파트의 경비실이다. 그 아버지는 집안의 대물림 종복이었던 한씨를 경비실 동료로 만난다. 좁은 경비실에서 더 이상 종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안 대소사에 종처럼 부렸던 한씨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내팽개쳐진 아버지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참혹하게 짓밟았을 것이다. 관리비 논란 때문에 경비 월급을 깎는다는 통보가 오는 와중에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던 한씨가 운영위원장에게 멧돼지를 갖다 바치고, 다툼 끝에 아버지를 밀쳐 넘어뜨리기까지 하자 아버지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시간강사인 아들 또한 예전의 우등생, 가문의 종손으로서 받았던 예우와 존중을 잃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친척들에게 공부를 많이 했다거나 뼈대 있는 집 자손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는 그저 비전 없고 돈 안 나오는 일에 미련하게 매달려 있는 궁색하고 초라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나가 워디 가서 사십을 벌겄능가?”, “아부님이 뭐라 그래도 나는 할랑마. 사십이 아니라 삼십이라도 나는 해야 써.”(233쪽)라는 한씨의 발언은 아버지의 헛된 자존심, 부박한 세태, 아들의 착잡하고 복잡한 심경을 넘어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 한씨의 절박함 앞에서 무너진 아버지의 자존심이나 아들의 씁쓸함, 혹은 부당한 노동조건이나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심에 대한 분노는 할 말을 잊는다. 한씨의 절박한 항변 때문에 정당한 대우나 권리를 위한 연대는 깨질 수밖에 없지만 또한 그것은 더 깊은 연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한씨의 속내를 이해하고 그의 삶을 인정한다면 한씨와 새롭게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계기를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지아의 소설들은 ‘역사’나 ‘노동’에 대한 익숙한 문법을 비껴나 있다. 그것은 한 인물이나 사건, 의미에 고정되지 않은, 타자의 삶과 체험들을 깊이 살피고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들과 대화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반추하는 ‘나’에 의해 역사나 노동, 혹은 정의나 신념과 같은 단어들은 섬세하게 흔들리면서 그 속에 또 다른 의미들을 축적해 나간다. 때로 타자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깊어서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 그 저마다의 진정성이 지나치게 수평적으로 포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인물들의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수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정지아가 그려낸 결코 일축할 수 없는 삶의 다면성을 폭넓게 감상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기도 하다. 이미 대화하고 이해하기 시작한 타자들이 그 존재를 드러낸 이상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웅성이며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삶의 다양한 국면들이 맺는 관계를 엄밀히 되짚어 보고, 부당함과 정당함의 층위를 가늠하는 일은 더 오랜 관찰과 숙고의 시간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 될 것 같다.
4.
천운영의 ‘멍게 뒷맛’으로 시작했으니 한지혜의 ‘묵 맛’으로 마무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자전거 타는 여자」(≪비평과 전망≫)에서 ‘나’가 맛본 묵 맛은 죽음의 맛이자 삶의 맛이다. 쓰고도 떫은 묵 맛, 그것은 ‘나’가 죽음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떠올리는 맛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만난 최초의 죽음과 함께 했던 맛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옆방에 살던 노부부의 방 앞에 놓여 있던 밥상,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묵이 탐나서 몰래 집어 삼켰지만 그 묵의 맛은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 찰지고 말캉말캉한 감칠맛 대신 묵은 쓰고도 텁텁한 맛으로 목구멍을 역류했다. 마침 그 맛을 본 날에 그 방에 살던 노인이 죽었다. 보드라운 감칠맛에 대한 기대와 쓰고 텁텁한 맛의 배신으로 겹쳐지는 묵의 맛은 그러므로 역설적이고도 알 수 없으며, 순순히 삼킬 수 없는 삶의 맛이기도 하다. 방 안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방 밖에는 매끄러운 묵이 자아내는 살아 있음의 식욕이 있다. 그 비정하고 엄연한 엇갈림 때문에 묵의 맛은 더욱 쓰고 역했으리라.
그래서 아버지가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후, 어머니와 딸은 죽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지쳐 갈 수밖에 없으며 그 무력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다. “아버지는 작은 방 화분에 담겨 시름없이 자라고, 엄마와 나는 옆방에서 뱅글뱅글 어깨에 손을 걸고 춤을 추던 저녁과 저녁들.”(37쪽) 그 시간은 춤을 배우고 요리를 하며 장을 보러 외출을 하고 헤어진 애인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죽음의 한켠에서 요동치는 삶을 주시해야 하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유품을 태우면서 잠시 비감에 젖는 딸을 향해 달려오는 엄마의 자전거.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두고 혼자 자전거를 연습했을 엄마의 나날들이야말로 목구멍을 역류하는 쓰고도 독한 삶의 맛일 터이다. “죽은 아버지를 안고도 느끼지 못했던 그 떫은맛이 산 엄마를 보는 순간 목구멍을 역류”(46쪽)했던 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터져 나오는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자전거 타는 여자」에서 느껴지는 묵의 맛은 천운영의 ‘멍게 뒷맛’과 유사하다. 삶은 멍게처럼 아리고 시고 달콤하며, 묵처럼 촉촉하고 쌉싸름하면서도 텁텁하다. 그 여자가 죽은 후 멍게의 맛은 쓰고 역한 맛으로 변했고, 죽음을 알게 된 후 묵은 목구멍을 역류하며 구토를 일으킨다. 「멍게 뒷맛」에서 그 여자가 죽은 후 ‘나’도 함께 죽어갔다면, 「자전거를 탄 여자」에서 아버지의 죽음 후 평안히 먹은 짬뽕을 토해내며 ‘나’는 살아나간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그 차이는 아마도 죽음과 삶의 경계, 나와 타자의 경계, 그 엇갈린 역설의 비좁은 틈에 어떻게 머무느냐의 차이일 것 같다. 천운영이 그 사이에 이미지를 채워 넣으면서 삶의 비관성을 강조한다면 한지혜는 그 틈을 더 벌리면서 또 다른 체험이 깃들 순간들을 남겨 놓는다. 그러나 이 비관과 낙관은 결코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될 수 없는 성찰의 깊이를 숨기고 있다. 이 비관과 낙관, 그리고 일상과 역사, 삶과 죽음, 나와 타자들, 그 사이에서 새로운 발견의 순간들이 더욱 섬세하게 창출될 때, 우리는 체험의 새로운 권역을 실감하면서 그 비정하고도 잔인하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의 구체성들을 더욱 풍부하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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