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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문화산책/정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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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89회 작성일 05-03-0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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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인 감독들의 ‘휴먼 코미디’와 가족주의의 결합

정 영 권



신인감독의 전성시대
언제부터인지 한국영화에서는 감독의 이름이 사라졌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의 이름은 한국영화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1980년대 이장호, 배창호 등의 스타감독, 1990년대 장현수, 김영빈, 김성수, 김의석 등의 감독들은 대중 상업영화를 만들면서도 자신들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던 사람들이다. 물론 요즘의 한국영화에도 감독의 이름이 중요한 경우는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소위 ‘작가’라고 부르는 감독군이 있다. 임권택, 홍상수 등이 대표적이며 그 뒤를 허진호, 김기덕 등이 이어가고 있다. 그 다음엔 보다 대중적인 상업영화를 만들면서도 자신의 분명한 색깔을 집어넣는 감독군이 있다. 이를테면 박찬욱, 류승완, 김상진 등의 감독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은 결코 감독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2년 기획영화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결혼이야기>가 개봉한 지 10년 만에 기획 상품으로써의 영화는 이제 한국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듯하다. 비슷비슷한 시나리오와 대동소이한 캐릭터의 설정, 광고나 TV 출신 배우들의 캐스팅 등은 요즘 한국영화제작의 한 세태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대중적 성공이 야기시킨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붐은 제목이나 이야기, 캐릭터가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계속 양산해 낼 예정이다. 지금 촬영 중이거나 촬영 준비 중인 영화들, 귀여니 원작의 <늑대의 유혹>이나 <그놈은 멋있었다>, 이햇님 원작의 <내사랑 싸가지> 등이 그런 예이다. 이들 영화들은 하나같이 상큼발랄 코미디를 표방하며 ‘무대뽀 얼짱 남자’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 ‘엽기발랄 평범녀’의 옥신각신 사랑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잘 짜여진, 탄탄한 시나리오보다는 당대 젊은이들의 유행이나 대중적인 코드에 더 충실한 영화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신인감독들이다. 일단 이들은 나이가 비교적 젊기 때문에 영화의 주수요층인 10, 20대 젊은이들의 코드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제작사가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들을 많이 기용하는 것은 이들이 아직 현장 장악력이 없고 감독으로서의 명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이나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제작사의 주문에 따라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올해 최고의 데뷔작이라는 호평을 들었던 <지구를 지켜라!>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들 신인감독들은 데뷔작이 흥행에 성공을 하지 못한다면 영영 ‘영화판’에 발붙이기 힘들기 때문에 대체로 제작사가 모델링한 기획영화의 컨셉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코미디영화의 진화?
신인감독들이 승부수를 던지는 영화들은 대체로 코미디 장르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코미디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사들은 굴러다니는 시나리오의 90% 이상이 코미디라고 말한다. 조폭 코미디, 엽기 코미디, 휴먼 코미디, 코믹 잔혹극 등 한국영화만의 특이한 하위장르도 생성되고 있다. 최근 2, 3년간 한국 코미디영화를 주도했던 것은 이른바 조폭 코미디였다. 1994년 <게임의 법칙>의 흥행 성공으로 시작된 조폭영화의 붐은 대략 1997년을 기점으로 하여 급속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나에게 오라>, <깡패수업> 등 이들 조폭영화들은 2000년 이후에 나왔던 조폭 코미디와는 달리 상당히 진지한 하드보일드 영화들이었다. 조폭 코미디의 효시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조폭 코미디가 갖고 있는 ‘쌈마이’ 정서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영화는 <넘버 3>(1997)였고, <주유소 습격사건>(1998)도 향후 코미디영화를 주도할 모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역시 조폭 코미디에 불을 당긴 것은 코미디영화는 아니었지만 ‘조폭의 신화’가 한국영화에서 반복재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준 <친구>(2001)의 엄청난 성공이었다. 사실, <친구> 이후에는 코미디 장르를 차용하지 않은 진지한 조폭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2001년 추석 시즌을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영화들, <조폭 마누라>, <신라의 달밤> 등은 장르 사이클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 등이 뒤를 이었다. 작년에도 <가문의 영광>, <광복절 특사> 등의 코미디영화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올해 들어 코미디영화는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올 상반기 박스오피스에서 수위를 차지한 두 편의 영화로부터 나왔는데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한 청춘 코미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시골 분교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훈훈한 휴먼 코미디 <선생 김봉두>가 그것이다. 이들 영화들은 이전 조폭영화들이 갖고 있었던 몇 가지 특징들, 즉 질펀한 욕설과 잦은 패싸움, 이야기보다는 상황상황 발생하는 웃음의 코드, 엽기적인 캐릭터의 설정들을 배제하고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웰 메이드라고 할 만큼의 탄탄한 구성력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이야기의 얼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폭으로 상징되는 ‘쌈마이’ 정서를 배제하고 있다. 일단,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영화의 흥행<선생 김봉두>
성공으로 비롯된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붐은 현재 진행 중에 있으며, 아마도 내년이나 되어야 영화들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영화들은 <선생 김봉두>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코미디영화들이다. 그래봐야 몇 편에 불과하지만 상반기에 개봉한 <선생 김봉두>와 추석 시즌에 동시 개봉한 <오! 브라더스>, <불어라 봄바람>은 조폭 코미디나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같은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청춘 코미디와는 구별되는 영화들인데, 홍보마케팅을 담당하는 홍보사의 카피를 그대로 따온다면 ‘휴먼 코미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 영화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최근의 한국 코미디의 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선생 김봉두>는 메가히트를 기록했으며 <오! 브라더스>는 추석 시즌 흥행 1위를 기록하더니 약 한달 간 박스오피스의 상위권을 지켰다. <불어라 봄바람>은 <오! 브라더스>에 밀려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그런대로 선전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장편영화 경력 한두 편을 연출한 경력이 있는 신인감독들의 작품들이다. <선생 김봉두>는 작년 한국 최초의 패러디 코미디 <재밌는 영화>를 연출했던 장규성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며,<오! 브라더스>는 김용화감독의장편 데뷔작이다. 김용화감독은단편 영화 <자반고등어>(2000)로 로체스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재능을인정받은 감독이다.<불어라봄바람>은 방송 개그작가로서 이름을 높여왔으며 작년 <라이터를 켜라>로 장편 데뷔했던 장항준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다.
<선생 김봉두>
몇몇 언론매체에서는 얼마 전 개봉한 <위대한 유산>까지 포함하여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쌈마이’, ‘조폭’의 정서와 거리를 둔 휴먼코미디를 평가하며 ‘코미디영화의 진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진화라는 말이 발전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들은 조폭 코미디보다 발전된 영화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그러한 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웰 메이드 코미디라고까지 표현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적어도 억지로 웃음을 강요하거나 눈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재미와 감동이라는 부분이 홍해 바다 갈라지듯 탁 갈라지면서 기획 상품으로서의 영화라는 측면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다. 이 부분에서는 웃겨야지, 이 부분에서는 울려야지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울고 웃는 부분부분이 전체적인 영화적 흐름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 상황 연출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다.
나는 솔직히 이들 영화들이 코미디영화의 진화인 줄은 잘 모르겠다. 분명히 조폭 코미디와는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진화라는 거창한 표현까지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선생 김봉두>나 <오! 브라더스> 류의 휴먼 코미디 이외에도 올해에는 <남남북녀>, <동해물과 백두산이> 같은 북한 소재 코미디, <은장도> 같은 섹스 코미디, <낭만자객> 같은 ‘퓨전 코믹 사극’ 등 여러 성격의 코미디영화들이 제작되었거나 제작 중에 있다. 그런 점에서 진화라는 말은 좀 성급한 표현인 것 같다. 적어도 그 표현에는 한국 코미디 장르의 전체를 담지할 만한 어떤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조폭 코미디를 벗어나 보다 다양한 소재의 코미디가 만들어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진화라기보다는 소재 다양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여튼 신인감독들의 휴먼 코미디는 조폭 코미디 ‘이후’의 영화를 보여주는 한 트렌드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아직 서너 편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영화들을 놓고 섣불리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들 영화들이 하나의 공통적인 주제 내지는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고향, 가족과 같은 말들이다.
고향과 가족, 점점 착해지는 코미디영화
지난 해 <집으로…>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둔 후 한국의 코미디영화에 생긴 작은 변화 중 하나는 ‘착한’ 영화에 대한 이끌림이다. 한참 동안 배꼽 빠지게 웃기다가도 종반부로 갈수록 감동을 주어야 하겠다는 강박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착한 감성에 호소한다. 그래서 세상을 약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불현듯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선생 김봉두>의 촌지 밝히는 선생, <오! 브라더스>의 불륜 현장 ‘찍사’, <불어라 봄바람>의 쫌팽이 작가가 그렇고, 개봉했다가 일찍 막을 내리긴 했지만 <역전에 산다>의 카드 회사 직원과 <위대한 유산>의 백수들이 그러하다. 또한,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이들을 깨우쳐 주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나 고향에 대한 정서 같은 것들이다.
<선생 김봉두>는 가족보다는 마음속 고향의 판타지를 그려낸다. 촌지 밝히기 좋아하는 불량선생 김봉두(차승원)가 벽지의 분교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코믹한 상황들이 전해 주는 웃음은 맑고 신선하다. 잇속 차리기 좋아하는 도시 교사와 교사의 뻔한 요구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시골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웃지 못할 실랑이는 재미있다. 영화는 갈수록 코미디에서 휴먼드라마로 전환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뜯어내려는’ 봉두의 이기적인 노력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시골 주민들의 순박한 대응에 좌절되고 마침내 봉두는 그들의 순박함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사실 봉두가 순박한 시골 사람들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은 그 연결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처럼 거짓말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시가 시골에 부여하는 판타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염된 도시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영화 속 벽촌과 같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 브라더스>는 노골적으로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코미디영화이다. 불륜 현장을 촬영해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 상우(이정재)는 어느 날 집 나간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그는 아버지가 진 빚까지 떠맡게 된다. 상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전 본 적도 없는 이복동생 봉구(이범수)를 수소문한다. 봉구는 열두 살이지만 상우보다 더 늙어 보이는 조로증 환자다. 상우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봉구 덕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당뇨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봉구의 팔뚝은 마약주사 같은 ‘위협용’으로 변신하고, 늙어 보이면서도 어린애같이 떼쓰는 봉구의 행동은 채무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훌륭한 기술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동생을 이용하여 약삭빠르게 사업을 벌이던 상우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은 선생 김봉두가 시골 아이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 동심이나 마음의 고향 같은 정서와 닮아 있다. <오! 브라더스>는 감동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둔다. 채무자의 돈을 폭력적으로 받아내는 것 이외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던 상우지만 봉구와의

<오! 브라더스>
우애를 쌓아가는 와중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전개상 별로 무리한 설정은 아니지만 후반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위해서 지극히 계산된 연출이다. 결론은 뻔하다. 상우와 봉구는 돈을 뜯는 전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전문이 된다.
<불어라 봄바람>은 위의 두 편의 영화에 비해서는 로맨틱 코미디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좀팽이 같은 소설가 선국(김승우)과 천박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다방 아가씨 화정(김정은)이 어떻게 사랑에 골인하는가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다소 이기적인 인물과 착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인물의 대립 구도는 유용하게 쓰인다. 봉두와 시골 사람들, 상우와 봉구 형제가 그러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선국과 화정이 그러하다. 선국은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성당에 무단 투척할 만큼, 춥다고 호소하는 문하생에게 내복 입으라고 다그칠 만큼 쩨쩨한 남자다. 이에 비해 화정은 배고픈 아이들을 하숙집에 데려와 밥을 먹일 정도로 박애주의적인 여자다. 물론 선국이 화정에게 이끌리는 과정이 이러한 대조적인 성격과 항상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적 수준이나 취향, 성격 등이 전혀 다른 두 남녀가 성공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는 훈훈한 인간미와 소박함의 정서가 깔려 있다.<오! 브라더스>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선국의 부모 이야기이다. 특히, 부재하는 아버지의 힘은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선국의 집에 화정이 하숙하게 된 것도 아버지가 전세값을 몰래 챙기는 대신 세도 놓지 않은 집에 화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선국은 화정을 사랑하게 되니 화정은 아버지의 ‘선물’이자 선국의 책 제목처럼 ‘아버지의 사랑’인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존재감은 결말부에서 아버지와의 삶을 추억하는 어머니의 고백에서 더 두드러진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상기한 세 편의 영화에서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은 영화 속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서 그려지지는 않는다. 대신 힘없는 존재이거나 죽은 존재이거나 추억의 대상일 뿐이다.




부재하는 아버지들의 힘
1998년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 정원(한석규)의 아버지(신구)가 이 시대 무력한 아버지의 표상처럼 된 이래, 한국의 아버지들은 영화 속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영화 속에서 그 존재감을 거의 확인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한국영화 속에서 가부장들은 무너져내린 것인가? 표면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영화 속에서 부재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으며 딸이 아닌 아들을 향해 일정 정도의 힘을 행사한다. <선생 김봉두>에서 봉두의 아버지는 평생을 시골에서 교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봉두는 그런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시의 화려함을 좋아하는 봉두에게 그런 삶은 실패자의 삶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봉두의 이기적인 목적이 번번이 아이들의 동심과 순박함에 걸려 좌초하게 될 때, 그의 생활은 점점 아버지의 삶과 닮아간다. 아들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소원은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폐교 통보서가 도착할 때쯤 되어서야, 폐교를 바랐던 자신을 뉘우치고 안타까워하듯이, 아버지가 죽을 때쯤 되서야 봉두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전언’은 <오! 브라더스>에서도 드러난다. 상우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채무를 떠맡으면서 만나본 적도 없었던 이복동생 봉구와 조우한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동생 봉구를 진정한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커갈수록 사그라든다. 마침내 봉구가 형 상우에게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상우, 봉구 형제에게 남긴 ‘유산’, 즉 반씩 찢어서 남겨준 지폐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에 대한 상우의 증오의 감정은 마침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화한다. 찢어진 지폐가 합쳐져야 돈의 역할을 하듯이 서로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형제가 된다는 아버지의 유언은 유난히 가족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주제와도 같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가장 가까운 <불어라 봄바람>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의식이 드러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전해 주는 교훈은 마치 봄날에 살랑살랑 순풍이 불듯 사람은 자연스럽게, 순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순리란 영화 속 어머니의 말 속에 담겨 있듯이 바람기와도 같은 것이다. 선국의 어머니는 남편이 숱하게 바람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앞에서 “난 그래도 니 아버지가 좋았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마치 동물들이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짝짓기를 하듯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기쁨과 슬픔을 같이해 온 남편에게서 느꼈음직한 조강지처의 마음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전수되는 것은 왠지 씁쓸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비녀는 선국이 화정에게 줌으로써 대물림되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게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2003 한국영화 속의 가족, 그 이율배반의 사회학
다시 앞서 거론했던 신인감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기획된 코미디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사실상, 그 사람이 신인이든 중견이든 감독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해 보인다. 그래서 최근 개봉한 <영어완전정복>의 감독이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등 일련의 액션 영화에서 장인의 기질을 선보였던 김성수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신인 감독들의 코미디영화에서 나타나는 보수적 가족주의의<불어라 봄바람>
혐의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가족이 주요한 소재가 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으며, 가족을 다루었다고 그것 자체가 보수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해 개봉하여 어느 정도 대중적 성공을 거둔 세 편의 영화 <선생 김봉두>나 <오! 브라더스>, <불어라 봄바람>은 그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영화들 속에서 가족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의 사랑과 갈등, 문제와 해결책의 복합적인 공론의 장으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티 일반’이라는 추상적인 공동체로서 다루어진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만고의 진리는 또 한번 증명되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또 다시 방기된다.
확실히 이 영화들은 흥행에도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평단으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얻은 영화들이다. 올해에도 언급하기조차 꺼려지는 수준미달의 코미디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오! 해피데이>, <남남북녀>, <은장도>, <최후의 만찬> 등등. 이런 영화들은 일단 제쳐놓고 한국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소위 휴먼 코미디의 전략이 쉽게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가족 모티브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특히, 이제 한두 편을 연출했을 뿐인 신인감독들의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잘 포장된 기획 상업영화를 연출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안온한 보수주의의 혐의가 짙은 가족에의 이끌림이다. 한마디로 요즘의 한국 대중영화 속에는 반항하는 아들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부장이라고 표현하기조차 무색한 무력한 아버지들 속에서 마냥 착하기만 한 아들들은 그렇게 ‘착한 영화’들을 양산해 내며 아버지의 법칙에 순응해 간다.
<불어라 봄바람>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아버지가 공고하게 세워놓았다고 여겨지는 가족사회는 분열을 거듭하면서 부서져 나가고 있다. 급증하는 이혼율과 날로 늘어가는 가족 동반 자살은 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서서히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올해 유난히 많이 제작되었던 공포 영화들 속에는 바로 그러한 징후들이 드러나 있다. <장화, 홍련>에서 두 딸과 새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한 명의 남자(아버지 혹은 남편)를 사이에 놓고 여자들끼리 벌이는 ‘사랑의 쟁탈전’은 지극히 반동적이지만 무력해 보이는 아버지(김갑수)에 비해, 새어머니와 딸이 갖고 있는 살의의 에너지는 전복적일 만큼 충만해 있다. <4인용 식탁>과 <아카시아> 같은 공포영화에서 가족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광기를 드러낸다. <4인용 식탁>의 가족은 한 젊은 여성을 신경증적인 세계로 몰고 간다.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어린 아이를 떨어뜨릴 때, 완벽한 가족을 상징하는 ‘4인용 식탁’은 유령들의 안식처가 된다. <아카시아>에서도 완벽한 가족에 대한 강박관념은 재앙을 불러온다. 입양한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은 아이가 없다는 것 외에는 부족할 것이 없는 한 중산층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가족사회의 흔들림을 정면에서 공박하는 영화 <바람난 가족>까지 놓고 본다면 2003년 한국영화에서 가족은 위기의 진원지와도 같아 보인다.
이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이 단순히 코미디와 공포영화라는 장르상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올해 한국영화에서는 꽤 많은 신인감독들이 신고식을 마쳤지만 그 이름을 기억할 만한 감독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흥행에 실패했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나 <4인용 식탁>의 이수연은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들이다. 단편영화부터 쌓아온 이들의 탄탄한 기본기는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재능이 되어줄 것이다. 올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엄청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한 <내츄럴 시티>의 민병천은 단 두 편의 영화를 연출했을 뿐이지만 이제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성장을 거듭한 감독들이다. 이에 비해 올해 코미디영화의 히트작들인 <선생 김봉두>의 장규성이나 <오! 브라더스>의 김용화, <불어라 봄바람>의 장항준 등은 쉽사리 기억되는 이름은 아니다(이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적인 성공을 이끌어낼 만큼의 재능은 갖고 있는 신인감독들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장규성의 패러디 코미디 <재밌는 영화>는 한국영화 최초의 장르 실험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였으며,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의 색깔이 더 강했다 할지라도 <라이터를 켜라!>에서 장항준이 보여주었던 초라해져 가는 남성성의 초상은 통렬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용화의 데뷔작 <오! 브라더스>는 웃음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이제 막 단편영화에서 충무로 장편영화로 옮겨온 신인감독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영리해 보인다. 그리고 이들 휴먼 코미디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부재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어 착한 아들의 순응주의를 심어놓고,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손쉬운 전략으로서 가족주의가 내포한 보수성에 쉽사리 투항하는 것은 어딘지 신인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들 감독들이 이야기의 전체 얼개를 흩트려 놓지 않고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전달해 주는 비교적 매끈한 연출력에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는 상업영화 속에 몸을 의탁한 신인감독들에게서 대단한 실험이나 혁신적인 주제를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업영화의 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적어도 시스템이 강요하는 보수적인 전략 속에서 재능이 저당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주제와 소재는 낡았더라도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보다 참신하기를 바란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주는 무리 없는 연출력이 해될 것은 없지만, 영리한 안전주의가 신인감독에 대한 칭찬이 될 수는 없다.


정영권
․1974년생 ․동국대 대학원 영화학과 석사
․현 nkino 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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