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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문화산책/최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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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흐르는 공간과 기호
최 민 성
1.
잡지나 텔레비전을 볼 때 제일 재미있는 것은? 정답은 광고. 아무리 훌륭한 기사나 프로그램도 광고의 주목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설령 우리의 의식이 기사나 프로그램을 더 인지한다고 해도 무의식 속에서 광고는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행동을 조정하는 영향력을 끼친다. 광고는 짧은 시간에 굉장한 힘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욕망을 통제한다.
이 글은 광고가 어떻게 현대인의 욕망을 끌어 모아 자신이 광고하고 있는 상품 속에 심어놓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또 역으로 광고가 어떻게 상품 광고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을 확산시키는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런 일을 해내기 위해 광고는 매우 예술적이고 심리적인 방법을 통해 현대인의 의식을 좌지우지한다는 점도 살필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심화되고, 지구적으로 단일화된 자본주의 숲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욕망, 삶의 현장이 드러나리라고 기대해 본다.
2.
또 다른 질문. 부자를 어떻게 구별할까. 부자를 척 보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부자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부자와 빈자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문화적 상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계급을 유지하는 힘이다. 빈자에게는 계급 상승의 욕망을, 부자에게는 계급 유지의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하기 때문이다. 브르디외는 이에 대해 “계급이란 사회․경제적인(객관적․물적) 차이가 상징적으로 구분․차별․인지될 수 있는 ‘생활양식’으로 전환됨으로써 서로에게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결국 부자는 부자들만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빈자와 구별된다.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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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무엇보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그들은 넓은 평수의 아파트나 빌라 등에서 살며, 훨씬 안락하고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대형차를 몰고 다닌다. 그들이 밥을 먹는 레스토랑은 한적하고 천장이 높은 곳이며, 그들이 레저를 즐기는 휴식 공간도 여유롭다. 그에 비해 가난한 자는 식구들이 복닥이는 집에서 살며 자기 방 갖기를 꿈꾸고, 밥때가 되면 미어터지는 식당을 주로 이용하며, 소형차나 경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며, 어쩌다 천장이 높은 호텔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주눅이 들게 된다. 아니 그조차 누리기 힘든 경우도 많다. 결국 부와 가난은 그들을 둘러싼 공간의 용적량에 따라 구분된다. 부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현실은 바로 그 체제의 꽃인 광고에 반영된다. 다음 두 광고를 참조해 보자.
<그림 1>에서 이 제품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보자. 하나의 상품이 한 면의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다. 반면 <그림 2>에서는 하나의 상품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저 자기 이미지를 올려놓을 정도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이 공간의 차이가 낳는 효과는 명백하다. <그림1>의 광고는 고급스러우며 매우 비싼 제품이라는 메시지를, <그림 2>의 광고는 여기 소개된 제품이 매우 싸며 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유 있는 공간의 향수는 매우 고급스러운 것이며, 빈 틈 없는 공간의 제품들은 ‘떨이’라는 고백이 광고 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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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대열에 진입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광고가 호소력이 있을 지는 물어 보나마나일 것이다. 실제로 ‘충격세일’ 광고에 난 제품을 살 수밖에 없는 소비자일지라도 그 지향점은 여유로운 향수 광고로 향할 수밖에 없다. 아니, 사람들은 그 향수를 소비함으로써 자신도 광고에 드러난 드넓은 공간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공간이야말로 부를 상징하는 문화 상징이 아닌가. <그림 1>의 향수 광고는 공간이 지니는 문화 상징을 활용해서 부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을 상품 속으로 결집시킨다. 무서운 내공으로. 광고의 배경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회생활 잘 하려면 든든한 배경이 필요하다고 여기듯이, 아니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광고 속의 상품도 배경을 잘 만나야 한다. 배경이 상품의 속성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림 3>을 보자. 거기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저씨에게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누가 보더라도 이 아저씨는 상당한 엘리트로 보인다. 그를 엘리트로<그림 >
‘해독’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책이라는 배경이다. 우리는 금장이 박힌 고급스런 책, 원서로 보이는 책 때문에 그를 세련되고 서구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해석한다(지구의도 한몫을 한다). 그가 실제로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이미지에서 중요하지 않다. 이미지는 인접성을 곧바로 인과관계로 전환시키는 특성이 있다. 무엇과 가까이 있느냐, 무엇을 배경으로 하느냐는 곧 그것이 무엇이냐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변이된다.
이런 이미지의 특성을 어찌 체득했는지, 국회의원들은 인터뷰 장소를 되도록 자신의 서재로 정한다. 그 서재엔 물론 손도 안 댔을 것 같은 전집류들로 가득하다. 어쨌든 서재에서의 인터뷰는 국회의원에게 지적 특성을 부여하는데 한몫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권위를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명한 사람들과 한 장 사신을 박으려고 한다. 이미지는 그들의 권위를 같이 찍은 사람에게 전이시키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 앞에서, 그것들을 거느리고 사진을 찍는다. 자신의 별장, 자신의 고급 승용차 앞에서. 또 골프장 위에서, 아무나 갈 수 없는 멋진 휴양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이 거느린 부의 상징이고, 그것은 곧장 자신에게 부자라는 각인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갖가지 배경을 활용해서 사진 속의 나를 부자로 포장하려 하고, 그렇게 찍힌 사진으로 거실을 장식한다.
사진의 배경에는 이렇게 부에 대한 욕망, 자본주의적 상승의 욕구, 권위의 욕구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광고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광고 속 인물들은 우리 사회가 지닌 이런 부의 욕구를 등장 인물이나 상품의 배경에다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를 동반 상승시키고, 동시에 대중의 부에 대한 욕망을 확산시키고 장려한다.
3.
IMF가 터지면서,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졌고, 정년은 갑자기 짧아졌다. 사오정(사십오 세면 정년이다)이니 오륙도(오십육 세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이다)니 하는 말이 유행하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정신없이 휘둘려야 했다. 영어회화에 컴퓨터에 무엇무엇 등등.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이 결국 우리가 서구적 가치에 대해 완전히 자기를 내던지는 것에 다름 아님을 아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 것을 버리고 서구 선진국을 모델로 중단 없이 전진해 왔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부족한 게 있었던 것이다. 경제 구조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구조가 아직도 서구의 잣대에 못미쳤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하고 있는 미국의 기준에 따르지 못하고, 미국화가 덜 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무한 경쟁 체제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구축한 나라가 미국이 아닌가. 어느 기업 총수의 말마따나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서, 겉모습부터 내면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기준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입만 열면 외치는 개발이었다.
얼굴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맨’(박민규의 소설 ꡔ지구영웅전설ꡕ의 주인공을 보라)을 만들어야 하는 지상과제는, 이런 현실의 욕망을 첨예하게 실어나르는 광고에 가장 신속하게 드러난다. 다음의 시계 광고<그림 4>를 보자.
우아함은 태도에서 나온다는 한 시계 광고이다. 여기서 ‘우아함’을 상징하는 인물은 헐리웃의 스타 햅번이다. 우아함은 여러 곳에서 발산될 수 있으나, 가장 강력한 것이 헐리웃의 스타라는 것이다. 이런 광고가 가능한<그림 >
것은 우리에게 ‘오드리 햅번=우아함’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햅번이라는 약호(約號)를 해석할 수 없다면 메시지 전달에 실패하고 말 광고이다. 결국 이런 광고가 우리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은 헐리웃의 스타를 기호 해석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로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 문화의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을 요하는 광고의 특성상 햅번이라는 기호를 해석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만큼 즉각적으로 햅번을 우아함에 연결시킬 수 있을 정도로 헐리웃의 약호를 내면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한국의 광고에서 서구인 여성 모델을 직접 등장시키는 일은 80년대만 해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IMF 이후에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현재는 오히려 서양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 상품(특히 화장품이나 악세서리 같은 미적 상품)의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전에는 무의식의 미적 기준이 서구적이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광고에서는 그것을 감추고 서구적 한국인을 내세우는 일말의 민족적 도덕성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IMF 이후 그 일말의 도덕성마저도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발가벗은 이런 서구지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조차 정말로 서구인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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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최근에 TV에 나오고 있는 한 카드회사의 광고(그림 5)는 분석의 대상이 될 만하다. 기존 카드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미니 카드’를 선전하는 이 광고의 공간적 배경은 서구다. 미니 치마를 입은 서구(정확하게는 미국)의 남자들을 보여주면서 ‘미니 카드’의 유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이 광고야말로 ‘우리’의 유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우리’보다 멋지고 세련된 유행은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낡고 후진적인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광고는 채근한다. 이제 서구라는 지향점은 미적 상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상품에 이르기까지 안 나타나는 곳이 없다. 멋진 집은 서구의 ‘캐슬’이어야 하고, 새 자동차는 서구의 호텔 앞에서 서구인을 태우고 외국산 개와 함께 멈춰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적 기준으로 개혁한다는 구호의 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왜 노란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4.
광고는 이렇게 공간과, 인물로 대표되는 기호를 통해 현재의 욕망을 실어나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더라도 이런 광고가 일깨우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광고는 자기 안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방법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이미지가 어떻게 인간의 시선과 무의식을 사로잡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림 4>를 보자. 이 광고를 볼 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우리는 가장 큰 인물인, 아빠로 보이는 남자를 먼저 주목하게 된다. 그 후 시선은 선을 따라 다른 가족들에게 향하게 되고 그 끝에서 “행복 전쟁”이라는 문구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관습적으로 글자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다<그림 >
마침내 오른쪽 맨 끝에 있는 회사의 로고에서 시선을 멈추게 된다. 회사의 로고가 그래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인물 하나하나부터 글, 회사의 로고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살피게 하는 시선의 경로가, 이 광고 안에는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광고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내 눈을 내 맘대로 조절한다고 느끼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광고의 의도대로, 아니 광고를 만든 사람들의 의도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광고가 고도의 전략적 매체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덫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미적, 공학적 구조 때문이다.
앞에 들어놓은 광고들도 다 우리를 어딘가로 이끄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림 1>의 향수 광고는 화면의 중심에 상품을 배치했다. 그래서 상품의 중심적 위치는 여유 있는 공간, 무색의 배경과 어우러져 상품에 상당한 권위를 부여한다. 우리의 시선은 상품에 붙박히고 주변 공간과 달리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상품의 구석구석을 훑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인지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또 <그림 3>의 햅번 광고는 시각의 은유적 설정을 통해 상품을 각인시킨다. 햅번의 자세와 시계의 모습은 닮아 있다. 이 유사성이 ‘햅번=시계’라는 은유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내면화된 햅번=우아함이라는 해석이 작동하고 나면, 형태의 유사성을 통해 햅번=시계, 즉 우아함=시계라는 은유가 성립된다. 결국 이 구조는 그 시계를 차야만 우아해질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런 시각적 은유는 광고에서 빈번히 쓰는, 의식을 결정하는 구조적 장치이다. 은유야말로 지적 통제에 가깝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광고가 요구하는 지적 결론으로 조종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광고는 이렇게 효과적이고 능동적으로 우리를 현실의 욕망 속으로 빠뜨리고, 그것을 통해 상품을 소비하게 하고, 현실의 욕망을 유지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눈과 의식과 무의식을 광고에 기탁하게 된다.
5.
우리는 광고에서조차 공간이라는 부의 상징으로 구별, 혹은 차별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숱한 광고들이 끊임없이 넓은 공간으로 날아가라고, 그럴듯한 배경을 갖추라고 가난한 자들을 부추긴다. 그 세상은 ‘한국의 부자들’, ‘10억 벌기’ 등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부자 아빠’가 아니면 창피하거나 못난 아빠라는 인식이 횡행하는 곳이다. 세상은 못난 아빠를 양산하면서 좋은 부자 아빠를 위해 달리기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또 글로벌하게(미국식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뒤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나약한 인간으로 분류된다. 우리의 본질, 그 노란 본질이 무엇인지 자꾸만 잊어가고 있는 시대이다. 함석헌이 말한 씨알이 무엇인지, 신동엽이 말한 알맹이가 무엇인지 이제 기억이 가물거린다.
광고는 이런 문화를 반영하고, 또 역으로 이런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이 끊임없는 순환은 어디서 멈출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광고를 타고 흘러 다니는 욕망의 실체를 깨닫는 일이다. 그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칠 때만이 그것을 넘어서 가로지를 수 있는 자유의 한 자락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광고에 범람하는 욕망을 가로지르는 길은 광고를 아주 잘 읽어야 하는 길이다. 이 역설 속에서 우리는 광고를 넘어서고 획일적인,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숲에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민성
․1969년 출생
․공저 ꡔ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ꡕ
․한양대 강사. 한국미래문화연구소 연구원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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