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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문화산책/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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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vs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 주 연
1.
영화는 초기부터 연극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신기한 볼거리만을 보여주던 초창기 영화가 이야기를 담으려는 한 방법으로 연극공연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등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영화 언어들이 개발되면서 영화는 연극을 그대로 담지 않고 연극의 원안을 영화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해 각색을 하게 되었다. 각색의 대상은 연극의 대본인 희곡뿐 아니라 소설도 그것에 포함된다. 이런 경향이 점차 증가됨에 따라 원작이 있는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많은 논란들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예를 들면, “원작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영화-원작에 수정을 가한, 즉 각색을 의미한다-도 좋은 영화라 할 수 있는가?” 등의 의문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의문점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의 “미학적인 가치 기준을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까지도 제시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 대하여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작품의 영화화에 관한 책을 저술한 잭 조전스(Jack J. Jorgens)는 원작과 영화의 관계를 상연(presentation), 해석(interpretation), 각색(adaptation)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2-14).
첫째, 상연은 예술가가 어떠한 대안이나 왜곡 없이 원작 그대로를 전달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단점으로는 극에 대한 본질과 이해력, 감정, 상상력에 대하여 치명적인 오해를 재현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해석은 원작에 관한 뚜렷한 ‘견해’에 따라서 극을 공연하고 구체화시킨다. 셋째, 각색의 경우는 개념화․구체화․재이미지화의 해석의 과정이 각색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조전스도 역시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떠한 것이 더 미학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확실하고 명쾌한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 따라 ‘각색’이라는 것은 작품을 만들게 되는 사람의 주관적인 견해를 간과 할 수 없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각색’은 조전스가 설명하고 있는 ‘각색’과 다를 바 없다. 더불어 원작이 각색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 둘 간의 차이는 당연히 발생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 차이로 인해 생기는 원작과의 괴리는 오히려 원작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제공하게 되는 아이러닉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원작의 각색에 있어서 논란의 대상으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제작됐던 작품들이다. 1920년에 시작된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대(studio period)’라 불리는 시기는 197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특히 이때 만들어진 작품들이 바로 그 논란의 대상이다. (물론, 이후에 제작된 원작이 있는 영화들도 이런 경향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이 시기 제작자들의 최대 목표는 오로지 흥행의 성공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얻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작자들은 관객에게 빠르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텍스트의 영화화였다. 일단 연극에서 성공한 작품이므로 작품성은 이미 검증 받은 것이고, 게다가 홍보의 측면에서도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제작자의 욕구를 모두 충족 시켜주는 요소였다. 그러나 이때 제작자들은 근본적으로 연극을 보는 관객과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연극을 관람하는 주된 관객은 지적 수준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의 영화가 제시하는 해피 엔딩과 유형적인 인물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에, 무엇보다도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일반 계층의 사람들은 영화관의 입장료(5센트)가 그리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불과 5센트의 비용으로 현실에서의 고통과 좌절감을 결말이 해피 엔딩인 영화 통해서 그들이 실연하지 못하는 꿈을 이루어 보거나 아니면 문화적인 욕구도 해소하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이런 할리우드의 독특한 영화적 특성들은 관객의 기대감과 부합하면서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상황과 영합하게 된다. 다음은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테네시 윌리엄즈(Tennessee Williams)의 대표 작품인 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ꡕ(Streetcar Named Desire)와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Elia Kazan)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차이를 짚어가면서, 영화로 만들어졌을 당시의 할리우드에 영향을 미쳤던 사항들에 대해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냉전시대가 시작되던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는 미국 내부의 할리우드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다. 미국 정부는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제약을 가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산주의에 관한 열정은 공화당원들과 상원의원인 맥카시(Senator Joseph McCarthy)가 주도했던 반미행동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의해 표출되었다. 이들은 미국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손상시키는 공산주의자들과 동성애자들을 색출해 내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런 시행들은 다시 말하면,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타자들을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조치들은 역설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정부의 의도대로 쉽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극약 처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는 국가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가정에까지도 영향이 미쳤다. 일레인 타일러 메이(Elaine Tyler May)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시기 동안의 가정의 정치학을 분석하였다. 그녀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내 정책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면서 가정에 관한 정치학과 미국 내에서의 제도화된 다양한 억압-경제적, 성적, 인종적-양상들도 분석하고 있다. 특히 그녀는 ‘국내판 억제 정책(the domestic version of containment)’을 설명하기 위해 중산층 핵가족의 구성을 연구하였다. 메이에 따르면, 가정에서 아버지이며 동시에 남편인 남성은 ‘버는 사람(bread-winner)’ 즉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득(income)’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여성은 자손을 낳아서 그 아이들을 잘 보살피며 가정의 풍요로운 삶과 재산을 위해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이가 언급한 가족에 관한 핵심적인 사항들이다(Savran 6-7, 재인용).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적인 가족 개념의 심층에는 정치적,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성 역할(sex role)’을 다시 한 번 더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미국에서 이런 성 역할에서 벗어나는 남성과 여성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이상한 사람들이며 미국의 보편적 기준을 넘어서는 타자-예를 들면 동성애자(이는 맥카시가 공산주의주자를 색출하면서 포함시켰던 부류였다)-로 간주되었다. 가정 내에서의 맡고 있는 성 역할의 임무는 바로 메이가 언급했던 ‘국내판 억제 정책’으로 작용되며 이런 기준은 정부가 국가를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통제의 수단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영화에도 ‘검열(censorship)’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즉 예를 들면 동성애 장면 등과 같이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요소들은 검열이라는 의례를 거치면서 수정되거나 삭제된다. 1940년대후반할리우드영화에많은검열과통제를가하게된 것은 PCA(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라는 기관이다. 바튼 팔머(R. Barton Palmer)에 따르면, 규정(code)과 그 규정을 시행하던 검열관들(censors)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되지 말아야 할 부류의 인간상을 규정했으며, 19세기 멜로드라마의 주된 원칙-‘도덕적 가치의 보상(compensating moral value)’에 의해 악은 처벌받고, 선은 보답 받는-을 지키도록 영화산업측에 요구했다. 즉 1940년대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관객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인 감정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상화된 미국의 가치와 사회를 더욱 더 촉진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208). 이렇듯 당시의 영화의 제작 규정은 매우 엄격했으므로 동성애, 마약 중독, 성에 관련된 사항들, 강간 등이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사용되었다면 그 영화는 반드시 PCA에 의해 수정을 요구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제작 규정은 특히 원작이 있는 영화에서 원작과 영화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들의 결혼으로 끝맺도록 하는 것이다. 또는 사회 규범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사항들은 삭제되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슬쩍 넘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특이할 만한 사항은 당시 브로드웨이의 무대 공연이 할리우드의 경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윌리엄스의 희곡 작품들은 당시 사회적인 많은 논란거리, 즉 전통적 사회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들(마약중독, 매춘, 동성애 등)을 포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어떤 특별한 삭제나 수정을 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공연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연에 있어서 어떠한 수정이나 삭제를 특정 기관으로부터 요구받지도 않았으며, 이를 관람했던 관객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당시 가치 기준의 잣대에서 벗어난다는 어떤 비난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될 때는 수정 또는 삭제를 요구받았다. 그 이유는 당시의 정치인 및 종교인들은 영화라는 것은 일반 대중들이 가장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적 수단으로써 상당한 교육 및 교정의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대중들을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영화라는 친숙한 매체를 통해 무의식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때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기관이 바로 PCA이며, 조직 위원이었던 조셉 브린(Joseph Breen)은 특히 윌리엄스의 작품이 영화화될 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에 원작이 수정과 삭제라는 각색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차이들을 드러내게 된다. 다음 부분에서는 윌리엄스의 작품 중 영화화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나타나고 있는 원작과 영화의 차이를 살펴보겠다.
3.
1947년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후 성공을 거둔 윌리엄스의 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ꡕ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고 싶어하는 최우선 순위의 작품이었다. 특히 규정에 의해 금지된 사항-성에 관한 주제-과 블랜치(Blanche Dubois)와 스탠리(Stanley Kowalsky) 두 주인공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구도를 다루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영화 제작자였던 찰스 펠드만(Charles Feldman)은 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ꡕ가 지니고 있는 성적 강박 관념과 폭력성이 영화 관객들을 사로잡을 만한 충분한 요소라고 판단했으며, 특히 이런 사항들을 이전의 영화들이 다루지 못했었기 때문에 호감을 살 만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품을 영화화하는데 윌리엄스의 도움을 청하였으나 즉시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펠드만은 좌절하지 않고 이 작품의 연극 연출을 맡았던, 그리고 영화감독이기도 한 엘리아 카잔(Elia Kazan)에게 감독을 맡아줄 것을 권유하고 그의 승낙을 얻어냈다. 펠드만은 이런 상황들을 윌리엄스에게 알리고 마침내 영화 각본을 위해 동참할 것에 대한 승낙을 받아냈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와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이기도 한 엘리아 카잔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윌리엄스에게 퓰리처상과 극비평가협회상을 안겨준 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ꡕ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때 연출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카잔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의 교분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카잔은 그 해에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라는 연기술을 배우들에게 훈련시키는 기관, 특히 윌리엄스의 극에 어울리는 연기술을 배우들에게 훈련시키는 기관을 설립하였다. 윌리엄스의 극은 사실주의 극이라기보다는 서정성과 상징성이 풍부한 감성의 극(the play of sensibility)이었기 때문에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술을 미국에 도입시켜 만든 “미국식 연기법(The American Method)’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기관에 속해 있었던 대표적인 배우들로는 말론 브란도, 제럴딘 페이지, 몽고메리 클리프트, 폴 뉴먼등 윌리엄스의 극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있다. 특히, 말론 브란도는 연극뿐만 아니라 카잔이 감독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론트>에도 기용되었다. 액터스 스튜디오의 전성기는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윌리엄스의 전성기와도 맞물려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카잔은 이후에도 윌리엄스의 극을 영화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세 사람이 넘어야할 커다란 산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PCA의 영화 상영 가능 판정을 받는 것이었고 쉽사리 넘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관객의 관심을 사로잡을 요소라고 생각했던 사항들이 바로 PCA에서 문제점으로 보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PCA와 브린은 극작품에서 블랜치의 남편이 동성애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을 나약한 남성으로 단순하게, 어린 소년에 대한 블랜치의 성적 굶주림-50년대 용어로 ‘성욕 이상 항진증(nymphomania)’-에 관한 표현은 어린 관객들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그러나 성인 관객들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수정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PCA는 스탠리가 처형인 블랜치를 강간하는 장면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했으나, 윌리엄스와 감독인 카잔은 이 장면이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임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이 장면만은 거의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외부적인 강력한 압력 때문에 영화의 내용은 원작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극 텍스트의 결말과 영화의 결말은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특별히 영화의 결말 부분을 해피 엔딩과 권선징악의 주제를 반드시 담으라는 PCA의 제안은 없었으나, 서로 대조되는 두 주인공들의 세계를 살펴보다 보면 관객들은 은근히 해피 엔딩과 권선징악을 바라게 된다. 동물적이고 강한 인물인 스탠리(Stanley Kowalsky)는 나약하고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블랜치(Blanche DuBois)를 항상 공격하고 그녀의 환상을 깨뜨리고 있으며, 이 두 인물들은 공격자/희생자(aggressor/victim)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대립되는 인물 중 대부분의 관객은 힘없는 희생자인 블랜치에게 많은 동정을 가질 것이며, 그로 인해 공격자이자 파괴자인 스탠리가 어떤 형태로든지 처벌받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윌리엄스는 극에서는 이 관계를 냉정한 시각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결국 희생자인 블랜치의 과거가 낱낱이 폭로되고 그로 인해 더욱 심각해진 정신이상 상태로 인해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향하는, 즉 파괴되고 마는 결말을 도출해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랜치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형을 강간까지 한 스탠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자식과 아내가 있는 가정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회귀한다. 이런 결말은 영화화되었을 때 해피 엔딩과 권선징악적인 주제에 익숙한 관객들의 호감을 얻지 못할 것이며 PCA 같은 검열기관, 그리고 당시를 지배했던 ‘도덕적 보상 기준’이 작동하던 정치, 사회, 문화적 기준과도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작품의 영화판 감독까지 맡게 된 카잔도 영화에서는 스탠리보다는 오히려 블랜치에 좀더 비중을 두어 제작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스의 극 텍스트와 영화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한 학자인 모리스 야코워(Maurice Yacowar)는 두 텍스트간의 결말의 차이를 “스탠리가 승리하는 세계는 연극이고, 블랜치가 승리하는 세계는 영화이다.”(23)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만을 살펴보아도 나약하고 예민해 보이는 블랜치의 사실상의 승리를 보여주려는 카잔의 의도가 영화의 결말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도출해 내기 위하여 카잔은 영화의 도입부부터 블랜치의 입장에서 보도록 관객을 유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블랜치가 뉴올리언즈의 기차역에서 기차가 내뿜는 증기 구름 속에 서 있는 영화의 첫 장면은 스탠리가 지배하는 세계인 그의 집에서 연극을 시작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카잔은 이 장면을 통해서 관객이 블랜치와 동일시하여 그녀에 대해서 동정심을 끝까지 갖도록 하는 의도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더불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블랜치가 겪게 되는 기본적인 고통의 요소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차의 증기와 땀을 흘리면서 서로 밀치고 있는 군중들은 블랜치가 헤어날 수 없는 덫에 갇힌 상황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는 카잔의 의도 중 하나이다. 은유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기차역의 소음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이 소음은 블랜치의 현실을 암시하는 거친 소리로 사용되며, 왈츠와 재즈 등 음악 등은 그녀의 감상적인 환상의 세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특히 기찻길 장면에서 빛이 그녀에게 비칠 때 관객은 빛에 대한 그녀의 불쾌감을 그녀의 시각에서 경험한다. 그녀는 빛보다는 그림자를 더욱 좋아한다. 중국식 전등에 갓을 씌우는 것은 작열하는 백열등의 불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스탠리의 경우 그녀와는 반대로 어둠을 좋아한다(결혼식 날 밤 그가 전구를 깨뜨리는 장면). 빛이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장면들은 필름 느와르(film noir)적인 요소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청각적인 효과는 원작에서도 아주 세밀하게 지문에 묘사되고 있으며 연극을 상연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주인공인 블랜치의 정신적인 상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기 위함이다. 연극에서 드러나는 이런 영화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영화에 적용되면서 오히려 연극보다 더 큰 효과를 창출해 내고 있다.
블랜치에게 초점을 맞추고 영화를 전개 시켜오던 카잔은 블랜치가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침입 당하는 장면을 아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카메라는 하이 앵글 샷으로 웅크리고 있는 블랜치를 보여주면서 스탠리가 미치(Mitch)에게 그녀의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장면은 블랜치의 모든 것이 노출되는 장면이며 그녀의 환상의 세계도 스탠리에 의해 파괴되어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블랜치를 어려움에 빠뜨려 놨다가 극적으로 회생토록 카잔이 의도한 이유는 좀더 관객의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토록 하려는 데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결말은 원작과 가장 많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원작에서는 스텔라가 스탠리의 팔에 안겨서 끝나지만 영화에서는 스텔라가 스탠리를 거절(“Don't you touch me. Don't you ever touch me again.")하면서 이층으로 도망친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태도는 어둠의 자식이며 영원한 공격자였던 스탠리가 부인인 스텔라에게 거절당함으로써 처벌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스텔라가 스탠리의 팔에 안겨서 끝나는 연극의 장면보다는 영화가 다소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된 이유는 영화에서 스탠리는 마치 맹수들이 암컷을 부를 때 울부짖듯이 소리치며 가정을 상징하는 부인 스텔라를 찾지만, 그녀는 이미 아이를 데리고 스탠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이며 스탠리가 지배했던 영역인 그의 집을 떠나 이층으로 도피한다. 다시 말하면, 영화의 결말은 권선징악적인 측면으로 볼 때 공격자이며 약자를 괴롭혔던 그리고 부도덕한 강간을 저지른 인물인 스탠리에게서 그의 유일한 안식처인 부인 스텔라를 떠나가게 함으로써 충분한 ‘도덕적 가치보상’의 측면을 드러내주는 해피 엔딩(주인공인 블랜치는 정신병원으로 향하지만)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연극에서 제시하고 있는 스텔라가 스탠리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겉으로는 해피 엔딩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앞으로 전개될 그들의 미래는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 때문에 계속적으로 악순환 될 것이라는 엄청나게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카잔의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위와 같은 결말을 전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PCA와 같은 검열기관과 관객의 입맛을 ‘도덕적 가치에 관한 보상’의 측면을 통해서 동시에 만족시켜주고 있다.
4.
윌리엄스는 영화화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할리우드식의 결말에 의해서 약간의 손상은 입었지만 영화는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루어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Yacowar 24). PCA와 같은 조직과 주변부의 영향에 의해서 작품에 수정-블랜치의 죽은 남편의 동성애 문제와 그녀의 어린 남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묘사한 부분에 대한 것, 그리고 결말-을 가하게 되는 것 자체는 그리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결과 영화의 결말에서 연극의 결말에서 보지 못했던 아이러니를 표현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경우처럼 미국 영화계에서의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작품 중 세 부분을 PCA의 규정과 맞게 타협하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윌리엄스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제적인 특징들을 완곡하게 표현하여 제한적이나마 성인들은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탈리아 영화인 <자전거 도둑>이 미국에서 상영된 후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성인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 성인 주제가 표현된 후 1950년대는 느슨해진 제작규정의 틈을 타서 마릴린 몬로가 등장하는 섹스 코미디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정치,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되던 1940, 50, 60년대의 미국은 할리우드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에 규정에 거스르는 내용들-윌리엄스가 작품에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완곡하게나마 표현할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그런 내용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관객들이 성숙해진 점 등은 미국 영화계에 시금석을 놓아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브로드웨이의 경우는 할리우드와 같은 제약을 받지 않았던 탓에 작가나 연출가는 그들이 원하는 내용과 표현들을 동시대에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할리우드의 입장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그 시작으로 PCA와 같은 규정이 완화되게 되었다는 점 또한 이 영화가 기여한바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원작을 근거로 영화화하기 위해 행하게 되는 자의적 타의적 수정과 삭제는 경우에 따라서 관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그 빌미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 감독의 것으로 자리매김되는 영화를 통해 색다른 관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측면은 더욱 그러하다 할 수 있다. 최초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는 아니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후 할리우드에선 원작을 지닌 많은 영화들이 등장했다. 현재도 그 현상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고전을 영화화하는 현상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어떤 형태를 취하든지 원작의 영화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욕망이라는 전차:(감독: 엘리아 카잔/각색: 테네시 윌리엄스/출연: 비비안 리(블랜치 역), 말론 브란도 (스탠리 역), 킴 헌터(스텔라 역), 칼 몰든-미치 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때 함께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동일하게 영화에도 등장했었으나, 블랜치 역을 연극에서 맡았던 제시카 탠디는 제외되었다. 이유는 지명도가 다소 약하다는 할리우드적인 발상 때문에 대신 그 역은 비비안 리가 맡아서 열연을 펼친다. 그녀는 영국에서 연극 공연(로렌스 올리비에 연출) 때 블랜치 역할을 이미 경험한 상태였다. 비비안 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이후 또 한번의 미국 남부 여인상을 연기하면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한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인 카잔은 아카데미 감독상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헌터(스텔라 역)와 몰든(미치 역)는 아카데미 여우 조연, 남우 조연 부분을 수상했다.
참고 자료
Palmer, R Barton. "Hollywood in Crisis: Tennessee Williams and the Evolution of the Adult
Film," The Cambridge Companion To Tennessee Williams. ed. Matthew C. Roudane.
New York: Cambridge UP, 1997. 204-231.
Savran, David. Communist, Cowboys, and Queer.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92.
Yacowar, Maurice. Tennessee Williams And Film. New York: Frederick Ungar, 1977.
이주연
․영화평론가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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