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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북-리뷰/엄경희 평론집 <질주와 산책>-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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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과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비평
--엄경희 평론집 '질주와 산책'
이성혁
(문학평론가)
엄경희의 두 번째 평론집이 ‘질주와 산책’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그녀의 평론집을 읽어나가면서, 질주는 자본주의가 증폭시키는 욕망의 속성을 가리키며 산책은 그 욕망에 저항해 나가는 시 쓰기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평론집인 ꡔ빙벽의 언어ꡕ에서는, 그 서문을 읽어도 알 수 있듯이 “언어의 씨앗을 수확하는 자”인 시인의 ‘빙벽’을 오르는 언어들을 찾아 드러내는 데 비평이 치중했다면, 이 두 번째 비평집은 ‘질주’라고 표현되는 자본주의의 시간 구조에 대항하여 ‘산책’으로 표현되는 시인들의 저항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첫 번째 평론집 역시 사회 비평적 시각이 비평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언어의 씨앗을 수확하는 행위는 인간성이 교환가치화되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는 독특성과 개성을 생명으로 삼는 미와는 상관없다. 교환가치는 모든 차이들을 동질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평론집은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산시키는 소외 구조로부터 벗어나 탈소 외에 다가가려는 시인들의 개별적 저항들이 조명된다. 그런데 두 번째 평론집에서는 자본주의에 또 다른 비판적 개념의 조명이 가해진다. 그 개념은 속도이다. 더 나아가 이 비평집에서는 빠른 속도로 질주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삶이 적극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책’하는 삶, 느림의 삶인데, 이 삶은 에코페미니즘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통해 그 의의가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평론집은 첫 번째 평론집보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더 날카로워졌고 적극성을 띤다. 이와 함께 보다 거시적이고 큰 대안을 안고 있는 시각을 통해 비평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비평에 임하는 근본적 태도 역시 다소 변화가 있다. 첫 번째 평론집이 시에 대한 경외와 믿음 속에서 언어 속의 씨앗을 심는 시인들의 시작에 주목하였다면, 두 번째 비평집은 비평가의 세계관이 강하게 작용하여 비평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엄경희 자신이 ꡔ질주와 산책ꡕ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비평 태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진정한 문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노동자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과 불만 말이다. 청탁에 응해 특정 시인의 시를 단지 해설하고만 있다는 불만이 그것일 터인데, 그래서 아마 시대와 사회와 삶의 문제를 좀더 거시적이고도 철학적으로 근본적인 인식을 하고 이를 통해 엄정한 비평의 자세를 갖추려 한 것 같다. 비평가로서의 이러한 불안은, 역시 청탁을 수락하고는 생각이 아직 여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글을 써내고 있는 ‘문학적 노동자’인 나 역시도 부딪치는 불안이다. 그것은 탄탄한 문제의식과 몇 년이 가도 소진되지 않을 지식과 시야, 그리고 문학과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력을 갖추지 못한 채 실제 비평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비평문을 낸 후에도 항상 미진한 느낌에 빠지고 작품에 내가 끌려 다녔을 뿐이지 정말 비평 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 엄경희 역시 나와 같은 우울함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이 평론집의 비평들이 엄경희가 의도한 엄정한 비평에까지 이르렀는가의 여부는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평론집이 비평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소산이라는 점, 사회와 문단을 향해 어떤 비판적 발언을 행하면서 평자 나름대로의 문학적 크기와 깊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철학적이고도 문예학적인 대안적 사상과 이념을 갖추고 시의 의미 있는 어떤 경향을 포착하려고 하면서도, 첫 번째 비평집에서 다소 느껴졌던 작품 해설자로서의 비평가라는 문학적 노동자의 작업이 이 평론집에는 동시에 드러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 평론집을 내면서 그녀는 서문에서 밝힌 고통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이번 평론집에서 엄경희가 역설하는 사회비평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욕망의 천박성과, 그 욕망이 이끄는 속도로 질주하면서 아우라가 상실되어버리는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이다. 근래 한국 시단의 중요한 한 맥을 에코페미니즘이란 이념을 통해 잡아내고 있는, 총론격인 1부뿐만 아니라 시인론과 시집 평을 전개하고 있는 2․3부의 비평문에서도 그 사회 비평은 산견된다. 그녀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실용적 가치’만 뒤쫓도록 인간을 이끈다고 비판한다. 그녀에 의하면 “현대의 문명은 자본을 토대로 오로지 생산과 소비로 이루어진 도시의 생활 시스템을 건설하고 그 안에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묶어놓는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상품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본(자연)은 잊혀지고 사람들은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다.”(89쪽) 그리고 이 욕망의 노예로 만드는 메카니즘은 “꿈이 욕망으로 전치되는 과정을 촉진시키는 도시의 막강한 에너지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와 비례하는 결핍감을 교묘히 내장시키는 이중의 역학성을 지닌다. 이 이중의 역학성이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만드는 은폐된 구조이다.”(64쪽) 이 결핍감은 강박적인 욕망의 달성-속도에의 집착을 낳을 터인데, 그리하여 이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시간은 한순간에 삼켜지고 의식은 다른 시간을 향해 질주해”가게 되어 “생의 식탁에 차려져 있는 시간의 맛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이에 속도의 강박 속에 빠져나간 삶을 되찾기 위해선 “오래 머물기, 지연시키기, 천천히 우회하기를 통해서 시간은 비로소 의미와 가치로 기억 속에 남겨”(238쪽)져야 한다. 그래서 느림의 시간을 쟁취하는 시인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호의적으로 평해진다. 이러한 비평 논리에 맞추어, 엄경희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 도리어 더욱 과도한 이미지들을 남발하는 시인들에 대해선 자극의 극대화로 욕망의 팽창을 이끄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공모한다는 혐의를 갖는다.
과도한 욕망과 그것을 해소시키기 위한 다양한 자본주의적 소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현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비천해지거나, 아주 간단하게 비인간화된다. 시가 담박한 서정을 지양하고 과장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자극적인 비속어, 이질적인 것들의 무차별한 조합 등으로 난해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0년대 문학 비평이 욕망에 대한 해석과 비판에 집중되는 경향-물론 라캉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을 사대적으로 신봉한 탓도 크지만-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65쪽)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욕망 자체에 대해 다소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일 것이다. 좀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될 때, 정말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욕망하게 될 때, 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뺄셈이 아니라 덧셈을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특정 시 경향과 문학 비평에 대해 자본주의적 소비 시스템의 반영으로 파악한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없지만, 소비 시스템에 대한 매개 없는 부정이 아니라 그 시스템에 깊이 파고드는 천착을 통해서야 비로소 뒤집기-전복이 가능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자본주의의 반영이라고 한다면, 특정 시 경향이 자본주의 소비 시스템의 반영이라고 모두 그 노예는 아니며, 도리어 자극을 극단으로 더 밀고 나감으로써 소비 시스템의 자기 모순이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근본적인 이념적 문제이기도 해서 무척 논쟁의 소지가 있는 주제이므로 여기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필자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엄경희의 사유는 시대에 끌려 다니지 않는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데에 그 미덕이 있다. 문학과 비평 역시 ‘과도함’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그래야 사람들의 눈을 끌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그 ‘과도함’은 결국 자본주의 소비 시스템에 포섭된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그녀는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축으로 자극적인 이미지나 포즈에 의문을 던지는 그녀의 비평은 다소 온건한 입장의 에코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여성시의 거점도 모성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의 논리보다는 여성의 가치를 폄하하고 수단화하는 남성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더 날카롭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 자신도 임신, 출산, 수유와 같이 부정할 수 없는 강한 긍정 의식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가족의 일원으로서 바람직한 부성성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여성시에는 이러한 발상이 매우 희박한 편이라 할 수 있는데-여성에게 부여된 가족 자아의 무게를 나누어 가지는 지혜 또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20-21쪽)라는 진술은 남성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과격 페미니즘의 입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엄경희 역시 여성을 “순응적이고 온건한 이미지를 여성의 미덕으로 고착시”키는 남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임신, 출산, 수유’를 하는 여성의 특성을 생태적 상상력과 연결시켜 그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남성을 그 여성성으로 포용하는 페미니즘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남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기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상을 해체시키기 위해 보다 과격하고 대담한 여성이미지를 창출”하는 일부 ‘여성시’에 대해서는 “그러나 모든 과격함이 곧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때로 여성시에 나타난 과격함은 과도함으로 보여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21쪽)라는 비판을 한다.
첫 번째 비평집에서 보여주었던 김언희 시에 대한 비판도 이런 다소 온건한 입장에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언희의 상상력은 가족의 신성함을 찢고 모욕하기와 연결되어 있는데 엄경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가족 이미지의 훼손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 혹은 자연이 지닌 치유력, 보살핌, 조화력”이 “남성중심주의적 세계에 내재해 있는 결핍을 넘어서고자 하는 에코페미니즘적 비전”(114쪽)이고 이를 묶어낼 수 있는 개념이 풍요로운 모성성이라고 한다면, 이 모성성이 깃들어 있고 발견될 수 있는 곳도 가족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김언희에 대한 비판에서 엄경희는 그 엽기성과 자본주의의 엽기 유행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좀 지나친 것이다. 대중적으로 유행된 엽기 시리즈의 의미는 순화된 엽기, 비정상적이지만 귀‘엽기’도 한 엽기였다. 그러나 김언희의 시는 이와 달리 불쾌감을 준다. 이를 시의 제도화된 통념을 깨뜨리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의 에코 페미니즘은 그러니까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대지적-모성적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
여하튼 여성시에 대해 호평 일변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가치 평가를 내리는 비평행위는 분명 필요한 것이다. 최영미의 「Personal Computer」와 양선희의 「노상에서의 휴일」, 박서원의 「간음」에 대해 비판한 대목은 무척 설득력 있다. 온건한 입장이든 과격한 입장이든 간에 평자가 자기 중심을 잡고 가치 평가를 내리는 일은 현 시 평단에서 그렇게 보기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과도한 포즈로서의 과격함은 우리 시단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유행을 낳을 수 있는 것이어서, 이런 가치평가는 하나의 해독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엄경희 비평이 갖고 있는 ‘강한 온건성’과 ‘부드러운 엄격성’은 유행이나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자극하고 있는 특정 경향의 결을 거스르려는 강인함과 관련된다. 이 강인함은 그녀의 사유의 단단함, 폭과 깊이를 돋보이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이론적 유행에 대해 휩쓸리지 않고 의심한다. 회자되던 탈구조주의나 ‘몸’ 담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반제도적인 과도함에 대한 엄경희의 의혹은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벌이는 포스트모던적 사상 경향에 대한 의혹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이성 능력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자연을 착취와 도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태도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과 존중,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자존심이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과 불가항력적인 자연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노력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서구 인간중심주의의 양가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문학적 생태담론은 그 거점을 달리할 필요성을 갖는다. 우리의 근대로의 이행 과정 속에 과연 인간 존재에 대한 자존심이 있었던가?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집요한 반성 철학이 있었던가? 혹은 홍익인간이나 인내천 사상과 같은 인간 존중의 전통이 계승되었던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식민지와 6․25, 그리고 산업화로 점철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두했던 것은 ‘실용적 가치’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78쪽)
즉 반인간주의가 주장되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도 천박한 속류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어서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고, 양면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서구 휴머니즘에 대한 유행적 배척은 결국 실용적 가치를 몰두하는 자본주의의 천박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 현실에 기초한 균형 있는 태도는 ‘몸’ 담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한다. 즉 정신을 구시대적 유물과 같이 폐기하려는 조류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
정신만을 문제삼을 때 몸이 소외되듯이, 몸만을 강조할 때 인간의 고유한 능력 또한 소외되고 만다. 부연하자면 정신만을 강조할 때 인간의 본능은 말살되고, 몸만을 강조할 때 도덕적 타락은 교묘하게 은폐된다. 보다 온전한 인간학을 위해서는 양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균형감을 잃지 않는 통합적 사유가 필요할 것이다.(278쪽)
‘몸’ 담론의 과격함과 대담한 여성 이미지의 과도한 사용은 ‘도덕적 타락을 교묘하게 은폐’한다는 비판은, 균형을 중시하고 온건한 그녀의 입장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는 몸과 정신의 균형을 이루는 통합적 사유를 중시하는 것이지 도덕적 정신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의 칼날은 그래서 계몽적으로 시인의 사상을 독자에게 제시하려는 교조주의에 날카롭게 가해지기도 한다. 가령, “죽음에 대한 고통을 제거한 채 해탈을 논리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논리로 독자에게 호소한다는 점에서 차창룡의 생멸관은 교조적 성격을 갖게 된다.”는 차창룡 시에 대한 비판이 그렇다. 또한 시인들이 쓰는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에 대해 가한 비판은 통쾌한 느낌까지 준다. 필자 역시 그 ‘어른 동화’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참에 평자가 조목조목 그 계몽적 목소리의 상투적 상상력에 대해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도현의 ꡔ연어ꡕ에 대해 “작가가 직접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연어의 생태가 아니라 인간의 부정적 삶의 태도이다. 궁극적으로 이 동화가 은빛 연어의 여행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정당한 방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설교할 것이 아니라 연어와 인간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사건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51쪽)라고 비판하는 대목은 비평가 자신의 세계관으로 작품의 내용 구성을 주문하는 다소 독단적이고 계몽적인 비평 태도가 보임이 사실이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을 배제한 작품 구성 역시 정당할 수 있다. 이러한 ‘과도한’ 비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엄경희의 작업은 문학 노동자에서 벗어나 튼튼한 문예학적 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온전한 비평의 자세-가치평가 행위를 하고자 노력하고자 한다. 그런데 비평행위가 자신의 가치의식을 전개하는 행위라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개진하는 비평가로서는, 그러나 잘못하면 독단론으로 빠질 수도 있다. 텍스트에서 의미화되고 있는 바를 도출하고 이에 대해 가치평가를 내릴 때, 비평가의 세계관에 의해 텍스트가 재단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 평가와 객관적인 가치 평가의 꼬임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그래서 비평가는 이 가치평가의 의지와 객관적 설명의 의지 사이에서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엄경희의 비평 역시 이러한 긴장 속에서 비평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긴장을 잃어버릴 때 시인에게 작품 내용을 주문하는 계몽적 비평으로 빠지기 쉽다. 그러면 비평가의 가치 의식이 텍스트 위에 지나치게 드리워지게 되어 틀 지운 해석, 또는 과도한 해석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엄경희의 비판에서도 그런 모습이 간혹 발견되기도 한다. 안도현에 대한 비평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에코페미니즘이란 관점이 텍스트 해석에 지나치게 투여될 땐 상이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들의 텍스트에 비슷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엄경희는 성실하게 각 시인의 텍스트들을 텍스트 그대로 읽어나가면서 그 개성적 시 세계를 도출해내면서도, 어떻게 그 시인이 상생적 세계관으로 나아가게 되는가의 도정을 그리는데 치중하는 평이 많다. 그래서 몇몇 평문의 결론이 다소 반복적이다. 가령, 개성이 다른 시인들의 시 세계에서 “이질적인 것, 대립적인 것들의 조화와 화해”(구상론-127쪽), “지배욕과 탐욕, 그리고 실용주의로 가득한 이 세계를 장난과 타인에 대한 배려로 바꿔놓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적 상생의 원리”(오규원론-163쪽) “놀이는 또한 독존적 존재성을 벗어 상생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자연과 우주의 조화로운 운행”(신현정론-241쪽)이라는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상이한 시를 보여주는 시인들도 어떤 지점에서 서로 시 세계가 교차될 있다고 본다면 나의 지적이 사소한 부분에 맞춘 지나친 비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평자의 세계관에 시인의 시 세계가 맞추어진다는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엄경희의 비평이 성실하다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해당 시인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고 평자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여러 작품들이 제때 인용되어 시인의 시로 하여금 비평문을 만들게 하는 효과를 냄으로써 객관성을 살리려는 방법도 눈에 띈다. 또한 엄정한 문예학적 측면에서의 비판을 잊지 않는다. 초기시의 긴장과 활달을 잃었다는 강은교 시에 대한 지적과 지나치게 한 빛깔이며 동일한 기법을 반복한다는 노향림 시에 대한 지적, 차창룡에 대한 비판과 알레고리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이 그 예일 것이다. 내용 면에서 시를 해설하고 비평하는데 그치지 않고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는 평자의 성실함은, 주례사가 아닌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라는 비평의 역할에 대해 한시도 그녀가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몇몇 비평에서 보이는 약간의 흠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도 보인다. 그 흠은 비평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긴장 속에서 빠질 수 있는, 어쩌면 모든 비평가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덫에 걸려든 것에서 나온 것일 게다. 하지만 그녀는 특유의 성실함과 우직함을 가지고 그 덫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으리란 믿음을 준다. 문학노동자가 아닌 문학자인 비평가로서,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성실성과 평자의 선비평적인 이념이 서로 간의 긴장을 넘어 조화를 이루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그녀가 옹골찬 비평을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성혁
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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