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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2003년 겨울호) 북-리뷰/백무산 시집 '初心'--권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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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16회 작성일 05-03-07 11:51

본문

다시 들려오는 그대 아름다운 목소리
--백무산 시집 '初心'

권 경 아
(문학평론가)



1.
백무산의 ꡔ初心ꡕ은 ꡔ인간의 시간ꡕ 이후 그가 보여주던 경계인으로서의 혼란과 갈등의 끝에서 솟아난 ‘탑’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탑’은 고통과 환멸의 대상인 현실의 공간을 벗어난 탈속적 세계,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ꡔ초심ꡕ에 나타나는 ‘탑’은 초월적 세계에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억압이 지배하는 현실 위에 서 있다. 초월적 세계의 상징물인 ‘탑’이 고통과 환멸의 대상인 현실 속에 서 있는 것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경계인으로서의 혼란과 갈등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모든 억압과 폭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려는 저항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탑’의 이미지는 ꡔ초심ꡕ에서 이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탑’은 현실의 속박을 벗어난 탈속적 세계,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통해 ꡔ인간의 시간ꡕ(1996)과 ꡔ길은 광야의 것이다ꡕ(1999)에서 그 동안 그가 겪고 있던 경계인으로서의 혼란과 갈등이 이번 시집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러한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솟아있는 ‘탑’의 형상을 통해 억압의 현실에 “넉넉한 저항”으로 맞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ꡔ만국의 노동자여ꡕ에서 노동자 시인으로서 노동해방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백무산의 시세계는 세 번째 시집 ꡔ인간의 시간ꡕ(1996)을 기점으로 하나의 변화가 시도된다.  
1988년 첫시집 ꡔ만국의 노동자여ꡕ에서 노동가와 자본가의 대립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위치를 자각하던 백무산은 ꡔ통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ꡕ(1990)에서는 1988년말에서 1989년 초까지 전개된 현대중공업 파업에 대한 생생한 현장감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계급의식이 드러나는 시편들을 담아내고 있다. ꡔ만국의 노동자여ꡕ에서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의 주체이면서도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각성이 방향 없는 자각의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면 ꡔ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ꡕ에서는 노동자의 정치획득을 위한 정치적인 전위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이후 백무산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거치며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서 더 이상 이념이라는 거대서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함을 목격하게 된다. 두 번째 시집 이후 그가 긴 침묵으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의식은 ꡔ인간의 시간ꡕ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계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념이라는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에서 이제 인간이나 일상이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라 할 수 있다.
ꡔ인간의 시간ꡕ과 ꡔ길은 광야의 것이다ꡕ(1999)로 이어졌던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는 ꡔ초심ꡕ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ꡔ초심ꡕ에서 그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환멸의 현실 속에 솟아 오른 ‘탑’을 통해 백무산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넉넉한 저항”의 의지를 그려낸다.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불빛을 그는 피워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2.
ꡔ인간의 시간ꡕ은 지난 길과 새 길 사이에서의 혼란과 갈등으로 채워져 있다.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경계」)에서와 같이 나아가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곳에 서 있던 시인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관심은 ꡔ길은 광야의 것이다ꡕ에서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으로 이어져 “‘나’라는 야만과 ‘권력’이라는 폭력과 소외와 억압의 기제”(후기)를 비워내는 것으로 ‘광야’라는 길을  발견한다. ‘광야’는 길의 끝이며 시작으로,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길은 광야의 것이다」)이다. 그러나 시작이며 끝인, 시작도 끝도 아닌 무한 공간으로서의 ‘광야’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관념의 차원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그 동안 시인이 몰두했던 폭력과 소외, 억압이 만연한 세계와의 투쟁은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앞에서 희석되어버린 듯 보였다. 이러한 방향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ꡔ초심ꡕ에서 나타나는 ‘탑’의 이미지이다.
‘탑’은 고통과 환멸의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탑’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은 폭력과 억압이 만연한 공간이다.

열여덟 꿈에 부풀어 찾아온 이 거리
늦은 밤일을 마치고 땀에 절은 작업복으로
야간수업을 위해 달려오던 이 거리
스물여섯 내 동무 공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주검을
부둥켜안고 울며 지나던 이 거리
막차를 태워 보내던 그 아이 비에 젖은 손
그 작은 날개를 흔들며 떠나던 날의 이 거리

(중략)

네거리에서의 우리 꿈은 언제나
희망과 배반 믿음과 좌절이 교차하며 찾아오고
우린 분노와 열정에 넘쳐
싸늘한 아스팔트 위에
뜨거운 눈물 기꺼이 흘렸지
―「시계탑 네거리에서」 부분

시계탑 네거리에서 시인은 수배를 당해 쫓기는 사람을 기다린다. 고단하고 쓸쓸한 삶은 불빛을 그리워하곤 했지만 이 거리는 잿빛 어둠으로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피로 물든 내 동무의 주검을 안고 지나던 거리, 포승줄에 끌려가던 벗들의 눈물이 떨어졌던 거리, 군홧발이 점령하던 이 거리는 아직도 평화를 찾지 못했다. “희망과 배반 믿음과 좌절이 교차”하는 이 거리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온다는 그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이러한 환멸의 현실 속에 시계탑은 서 있고, 이곳에서 시인은 벗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장 건물 안 생선 좌판이 놓인
비린내 절은 페인트 벽에 달력 한 장
반석 위에 낡은 탑 하나 찍힌
눈을 맞고 서 있는 사진 한 장
2월 달력인데 여름 가고 가을 가도록 그대로다
생선 파는 중년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일을 하다가도 문득
저 사진만 보면 그만
가슴이 터엉 울린다고
―「말에 갇힐까 봐」 부분

삶의 중심에 ‘탑’은 서 있다. 눈 속에 서 있는 “반석 위에 낡은 탑”은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가슴을 “터엉” 울려준다. 그러나 ‘탑’은 현실의 억압과 고통이 없는 그 곳이 아닌 “비린내 절은 페인트 벽에 달력 한 장”으로 서 있다.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에 없는 ‘탑’으로 인해 인간은 갈등한다.
「홍수」에서 시인은 홍수에 불어난 강을 힘겹게 건너서는 뒤돌아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뒤돌아보며 확인하고 건넜음을 확신하는 몸짓이 아직도 “떠내려가면서 허우적이는 발버둥”이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삶은 건너는 일이다. 끊임없이 쓸려가기만 하는 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은 다음 시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저 불빛 지시에 따라 다들 충실하게 오가고
도시의 불빛 얼마에 삶을 내던지기도 하는데
달아, 저리 긴 강을 눈앞에 두고
이제 이 삶을 어쩌라는 것이냐
아직도 이리 아득하기만 한데

오라 하지도 가라 하지도 않고
머물라 하지도 솟아라 하지도 않고
어쩌라는 것이냐
입을 열어라 다물어라 하지도 않고
사랑하라 미워하라 하지도 않고
이제 어쩌라고 덩실 신호만 하는 건가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냐
떠올라라, 나더러 그만 놓고 덩실
떠올라라 하는 것이냐
―「달빛 신호등」 부분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시인은 문득 둥근 달 하나 덩실 걸려있음을 보게 된다. 오라 하지도 가라 하지도 않고, 머물라, 솟아라 하지도 않고 덩실 신호만 하고 있는 달 앞에서 시인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무 신호도 없이 신호하고 있는 달을 향해 “이제 이 삶을 어쩌라는 것이냐”는 흐느낌만을 토해내는 것이다. “떠올라라, 나더라 그만 놓고 덩실 떠올라라 하는 것이냐”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혼란과 갈등이 극한까지 치닫고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동시에 스스로를 비우기 시작하는 첫 단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폐사지의 가을
서 있는 것은 오직 돌탑 하나뿐

천지 만물은 허물어진다는 걸
뱉고 나면 허물어질 말로 말해야 하고
허물어지기 전에 이미 무상함을
상을 지어 소리쳐야 했던 것은

세월의 풍상이란 건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허물고
허망을 허망으로 허물고 나서

긴 세월
돌탑 하나 남긴 뜻은

허망에 머물지 말라고
마음 한 그루 남겼는가
―「마음 한 그루」 전문

「마음 한 그루」는 혼란과 갈등을 지나, 회의를 지나 스스로를 버리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폐허 속에 오직 돌탑 하나만이 서 있다. 삶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무상함을 알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허문다는 것은 “허망을 허망으로” 허문다는 것이고, 그 위에 솟아난 것이 ‘돌탑’ 하나이다. 이 ‘탑’은 폐허 속에 우뚝 솟아남으로써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망으로 허망을 허물고 마음 한 그루 남긴 의미는 그 허망에 머물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시인에게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분노가 있다. 「비에 젖은 바다」에서 “다시 살아나는 걸 나는 어쩌지 못합니다/분노 같은 파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합니다/비 내리는 바닷가에 올 때마다”에서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저항’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아이 집」에서는 판자 담장이 헐리고, 안방 아궁이가 큰길에 나앉고, 군용차들이 일으키는 먼지에 언제나 뽀얗던 그 집에 사는 아이가 현실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비가 내려 흙범벅이 된 붉은 장미 꽃잎을 “바가지 물 떠다 씻는” 것을 통해 ‘저항’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짓밟히고 내동댕이쳐진 곳”에서 “더 온전하게 더 푸르게 피어오르는” 그 아이는 “넉넉한 저항”인 것이다.
3.
백무산이 “넉넉한 저항”에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환멸의 대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희망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멸 속에 희망은 존재했던 것이다. 「섣달 그믐」에서는 해가 가기 전에 묵은 때를 씻으려 목욕탕에 간 아비와 아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시인은 환멸을 목격한다. “핏기 없는 버섯”처럼 마른 아비는 “희멀거니 피둥피둥 살이 찐” 아들에게 각별하다. “도련님 모셔온 몸종”처럼 아비는 연신 아들의 시중만을 들고 있지만 아들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느라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시인이 알지 못한 희망이 있다.

밤은 어두워졌다 눈이 온다고 하더니 비가 내리고 바람이 좀 불 거라더니 태풍인 듯 세다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새천년이 온다고 등 뒤에서 그 피둥피둥한 놈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바를 벗어 아비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다정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거리에는 늦도록 불이 밝다 해가 또 가는데 나는 역사를 얼마나 믿고 있는 것일까 나의 이 낡은 믿음을 지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섣달 그믐」 부분

거리에는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환멸의 대상이었던 아비와 아들에게서 희망을 엿보게 되는 것은 이 순간이다. 잠바를 벗어 아비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다정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순간 역사에 대한 낡은 믿음을 떠올리는 것이다. 희망이 있으므로 시인은 이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백무산은 ꡔ인간의 시간ꡕ과 ꡔ길은 광야의 것이다ꡕ에서 이어지는 경계인으로서의 혼란과 갈등을 ꡔ초심ꡕ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ꡔ초심ꡕ에서는 혼란과 갈등, 그리고 저항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탑’의 이미지를 통해 혼란과 갈등을 벗어나 “넉넉한 저항”으로 향하고 있다. 그에게 ‘저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억압과 폭력의 현실에 대한 응전으로 시작된 그의 시세계에서 ‘저항’은 처음의 마음인 것이다. “첫 번째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창의였다”로 시작하는 「첫째」(ꡔ인간의 시간ꡕ)에서 “첫 번째 마음이 사라지고 창의성이 문 닫히는 순간/위기는 시작되었다”는 初心의 순수성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ꡔ초심ꡕ은 백무산이 사회에 대해, 시에 대해 고민했던 처음의 마음, 初心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것은 내 사춘기 적 꿈을 찾는 방식이었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일은 이제 거의 없지만, 아직도 그 버릇이 남아 내 그리움의 다이얼을 돌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채널이나 혹은 주파수의 어떤 층위들이 수없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자꾸 마음속 어떤 주파수를 찾아갑니다. 그대 아름다운 목소리를 찾아서.
―「라디오」 부분

그것은 순수했던 사춘기 적 꿈을 찾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채널이나 혹은 주파수의 어떤 층위들이 수없이 있다는 믿음은 그로 하여금 주파수를 찾게 하고 있다. 황폐한 현실에서 꿈을 찾기 위한 그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다.


권경아
․2002년 ≪시와 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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