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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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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연극인의 초상 2000
― 2003년 하반기 공연을 중심으로 ―
김남석
(문학평론가)
1. 연극적 위기와 젊은 연극인
만나는 연극인들마다 ‘연극의 위기’를 거론하는 시절이다. 오태석이나 이윤택처럼 각광받는 연출가도 예외가 아니며, 철옹성으로 불리던 ‘국립극장’도 위기의식을 감지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임하고 있다. 외국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유럽과 일본에서 전해지는 소극장 연극의 몰락 사례를 들어가며 갈수록 좁아지는 연극의 입지를 역설하고 있다. 객석에 앉아 보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확실해진다. 분명 관객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전과는 다르다. 누가 보아도 지금의 한국 연극은 위기이다. 이웃 장르인 한국 영화가 득세하면서, 연극의 위기감 내지는 상대적 박탈감 또한 증폭되고 있다. 서구 대형 뮤지컬의 득세로 이러한 추세는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연극이 항상 위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좋겠지만, 근본적으로 수공업품인 연극이 대량 생산과 속도에서 다른 현대적 장르(심지어는 뮤지컬까지도)들을 앞지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연극은 그 속성상 ‘아날로그’적이다. ‘디지털’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 입지가 협소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그래서 연극이 필요한 이유가 발굴될 수도 있다. 가열찬 속도와 대량 생산과 디지털의 세상에서, 연극이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며 ‘작고 낮고 느린 것’들의 소중함을 알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연극인들이 말하는 ‘연극의 위기’에 어느 정도 찬동한다. 비록 그들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현재 한국 연극이 위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젊은 연극인의 부재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앞으로 10년, 20년 후를 짊어질 든든한 재목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연극의 위기가 작가나 연출가의 위기를 불러왔을 터이나, 나에게는 연극 전체의 위기를 토로하는 목소리보다 주목할 수 있는 젊은 연극인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큰 위기감을 느낀다.
솔직히 2000년대를 짊어질 세대의 작품 중에서 삶과 문화에 대한 신뢰할만한 견해나 감각을 갖춘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아직, 그들에게는 가벼운 웃음과 관념적 설계 그리고 연극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우세하다. 이러한 생각은 속단일 수 있다. 설령 속단이 아니라 해도 편견으로 작용해서 젊은 연극인들의 작품(희곡과 공연)을 등한시 여기게 만들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생각을 냉정하게 재점검하고, 객관적으로 젊은 연극인의 작품(극작과 연출)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 내적 대화의 자리이다. 그러나 이 대화는 대단히 요령부득(?)이어서 차라리 전장(戰場)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한국 연극에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었지만, 최근 가중되는 30․40대 연출가․극작가의 부재는 종래에는 심각한 위기를 부를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래서 연극계 주변을 둘러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고심하고자 이 글을 구상했다. 이것은 동시에, 변화하는 2000년대 연극계의 소중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될 것이며, 그 밑그림을 따라 그려질 다음 세대의 중요 작품의 초상을 먼저 도안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2003년 하반기 공연 중에, 젊은 연극인이 주축이 된 작품을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만화의 문법 : 박쥐가 되고자 한 사나이
이상의 「날개」는 난해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라는 넋두리로 시작해서 ‘은화처럼 맑은 정신’을 가졌다고 우기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 사내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현실에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한다. 그 남자가 박제된 천재인지, 정말 은화처럼 맑은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그 남자가 어떤 여자(부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도 아닌)에 종속된 삶을 살다가 차츰 벗어나고 있으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박제된 천재’와 ‘은화의 정신’을 떠올리게 될 뿐이다.
마지막도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녀가 자신을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 남자는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고 돈의 가치를 체험하면서 집이 아닌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어렴풋한 직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세상으로의 외출은 쉽지 않다. 세상은 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며, 그녀가 없는 세상은 그에게 두려움 투성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 외출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빌딩 옥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힘으로 비상을 꿈꾸게 된 것이다.
그 비상이 심적인 비상, 그러니까 갇힌 세상에서 열린 세계로의 정신적 탈출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진짜 정신이상 징후를 드러내면서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날개」는 모호하게 사내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자살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말 그대로 비상일 수도 있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끝나고 있다. 경계 위에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일탈과 모험을 꿈꾸게 했는가?
그 대답은 그의 갇힌 집, 그를 가둔 아내, 그리고 그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를 하나의 주체로 생각하면, 그는 ‘진정한 그’가 아닌 외적인 세계로부터(설령 그 안에는 표피적인 그도 포함될 수 있다) 억압받고 소외된 가련한 존재이다. 그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 식민지 현실의 나약한 지식인상을 대입할 수도 있고, 아내보다 힘이 없는 가장을 생각할 수도 있고, 룸펜이나 문학인처럼 현실적으로 권위를 갖지 못하는 특수한 직업인을 생각할 수도 있다. 병자나 범죄자처럼 숨어살아야 하는 특수한 처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아니면 사회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특수한 측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해석이든 상관없다. 「날개」는 지금도 읽히고 있으며, 이후 산출되는 ‘폐칩된 자아’를 그린 소설의 전범이나 원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날개」의 2000년대 버전은 어떤 것일까. 나는 「날개」의 2000년대 버전을 고선웅의 희곡 「성인용 황금박쥐」(2003년 10월 3일부터 연우소극장에서 공연)에서 발견했다. 이 작품만이 「날개」의 탁월함이나 독창성을 이어받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날개」의 전통을 이으려는 소설이나 「날개」의 문화적 맥락에 닿으려는 시도는 최근 부쩍 증가하고 있으며 각 시기마다 어느 정도 발견되고 있다). 나는 「성인용 황금박쥐」가 그 범주 속에 들어가는, 괜찮으면서 창의적인 작품이라고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지하철 운전기사이다. 그는 매일 시꺼먼 굴속을 운행한다. 그러다가 어떤 구간에서 박쥐를 발견했다고 믿게 되고, 한밤중에 다시 그 곳으로 찾아 든다. 그 곳에서 특이한 소리를 듣고 그는 박쥐의 소리라고 믿게 된다. 그 다음부터 자신이 박쥐가 될 수 있다고, 아니 되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는 현실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이다. 성적 능력도 뛰어나지 못해 아내와의 잠자리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직장에서도 그는 ‘찬밥’이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윗사람과 사귀지도 못하고, 다들 ‘피는 바람’조차 피지 못한다. 남들이 잘 모를 소리를 하고, 사람들 주변을 맴돌기만 하며, 항상 심각한 표정으로 제대로 웃지도 못한다. 가끔 하는 일이라고는 술집에 가서 술 몇 잔을 먹고 주사를 부리는 말썽 정도인데, 그나마 ‘모자란 사람’ 취급받고 쫓겨나기 일쑤이다. 그때마다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며 ‘왕따’도 아니라고 강변함으로써, 오히려 남들에게 약점을 광고하고 마는 순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꿈은 있다. 그는 성적으로, 업무 능력으로, 사교 실력으로 소외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장애물을 피해내는 박쥐에 대한 남모를 동경이 있다. 박쥐는 초음파를 발생시켜 앞에 놓인 장애물을 피하는 영물이다. 어두워지면 공중을 비상하고 낮에는 동굴에서 동면하듯 움츠린다. 이러한 기질은 남자의 어떤 점을 시사한다. 남자는 낮에는 직장에서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밤에는 기운차게 세상을 기웃거린다. 아직 날지는 못하지만 소심함을 버리고 마음의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잘난 체하는 사람을 이죽거려 주고, 힘센 자들에게도 용기 있게 대든다. 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소외되고 불쌍한 이들이 일어설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위안은 된다. 낮에는 움츠렸던 박쥐일지언정, 밤에는 어떤 새들보다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남자의 이러한 성격은 어떤 면에서는 현대인들의 본연적 기질을 시사한다. 현대인들은 세상에 널린 덫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밤과 낮의 논리에 이율배반적으로 적응해야 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정신분열증적 증세를 나타내 보이며 유연한 현실 적응을 꿈꾸며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서 비상의 꿈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마음 깊이 간직하게 된다.
남자는 현대인의 마음 깊이 간직된 어린이의 꿈을 옮겨온 인물이다. 그의 꿈은 황금박쥐 옷을 사고 비상을 주제로 한 무용 공연에 뛰어들어 날개를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비약하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다가 황금박쥐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며 마치 마음속의 열망이 실현된 것처럼 흥분하는 모습, 또 13층 바의 창문을 열고 비행을 보여주겠다며 뛰어내리는 모습, 그런데 실제로 추락해야 할 그가 하늘을 날아 세상의 덫을 피해 가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상식으로 말하면 지하철 운전기사는 경성역에서 하늘을 향해 뛰어내렸고 그의 겨드랑이에는 인공의 날개가 달려 그를 세상의 장애물로부터 떼어놓은 셈이다.
이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고선웅이 가용한 상상력(과 그 원류) 때문이다. 이상은 경성역과 몸을 파는 아내와 1930년대의 서울로 탈출해야 하는 세상을 이야기했다. 고선웅은 암담한 지하굴과 섹스에 굶주린 남녀들과 네온사인과 술로 범벅이 된 어두운 하늘로, 탈출해야 하는 그 무엇, 우리를 억누르는 답답함과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만화적 상상력(그것이 어릴 적 본 만화영화 「황금박쥐」이든 할리우드 영화 「배트맨」이든)으로, 의미심장하지만 경쾌하게 상징적이지만 현실 감각과 유리되지 않게 그리고 특이하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이지 않게 그려내려 한다.
황금박쥐는 만화에서 잉태된 물상이고 황당한 공상이지만, 그 가치는 세상의 은유가 되고 질책이 되면서 달라진다. 만화가 아닌 우리 삶의 절실한 측면을 드러내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 비록 이 작품의 전언이 「날개」의 전언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다른 상징으로, 다른 상상력으로 그리고 차별된 무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달라진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를 되새기게 한다.
나는 최근 한국 문학계에서 만화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도용하고 있는 이가 백민석이라고 생각하는데, 고선웅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백민석이 어렵게 만화를 이끌고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만화의 중의성을 말하려고 하는데 비해, 고선웅은 쉽고 명쾌하게 그리고 만화가 지닌 유쾌함과 유치함까지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만화의 정수에 한발 더 깊게 다가간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문학에 만화가 그 자리를 잡을 수 있고, 만화적 상상력이 침투해 문학의 영토와 그 이웃 영역을 개간할 수 있다면 이것은 예의 주시해야 할 문화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3. 시트콤의 조합 : 하룻밤의 해프닝을 위하여
장진은 기대를 모으는 연극인이다. 그의 재기 발랄함은 70년대 이후 출생 관객들에게 특히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텔레비전과 영화계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평가는 젊은 감각과 다재다능함에 기인할 뿐, 작품이나 연출 사례에서 엿보이는 역량이나 깊이에 근거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의 극작술을 보면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기 어려우며,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 역시 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런 선입견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툰 사람들」의 공연에서 재확인했다.
우리극연구소는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6편의 연극을 순차적으로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름도 ‘6탄 게릴라전 <연극은 연극이다>’로 짓고, 의욕적으로 6편의 작품을 준비하며 한편으로는 공연했다. 그 중 두 번째 작품이 장진 작, 이윤주 연출의 「서툰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공연을 2003년 10월 25일(4시 30분 공연) 동숭동 <아트홀 스타시티>에서 관람했다. 의욕적인 기획과 참신한 도전 정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의 원작과 공연을 공히 지지할 수 없었다.
먼저 이 공연은 ‘연희단거리패’의 이름을 걸고 무대화되었지만, 실제 배역은 대부분 학생 연기자들이 맡았다. 그들은 발음과 움직임, 특히 성격 분석과 장면 창조에서 심각한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학생이고 전문적인 배우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서 이 점은 더 이상 문제삼지 말도록 하자. 다만 앞으로의 공연에서 보다 튼실한 기본기가 필요하다는 말만 남기도록 하자. 기본기의 부재는 배우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연출력의 미비함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좁은 공간에서 숨 막히게 진행되는 상황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간결하지만 더욱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이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서툰 도둑이 물을 찾기 위해서 냉장고를 들락거리는 장면에서, 도둑은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닐 동선을 찾고 있었다. 좁은 공간과 급박한 상황에서 움직일 때 나타나는 ‘허둥지둥’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서툰 연기자의 여유 없는 발걸음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연출자는 이러한 점을 충분히 바로 잡았어야 한다.
유화이(김지현 분)의 실감나지 않는 연기도 연기자 이전에 연출자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서툰 도둑과의 티격태격하는 말싸움에서 감칠맛 나는 템포가 중요한데, 주어진 대사를 뱉어내기에 급급해서 젊은이들의 사랑싸움이라는 느낌이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유화이가 덕배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적 변화 역시 급작스럽게 처리되지 않을 수 없다. 또 배우는 쉰 목소리를 사용해도 발성이 되어야 한다. 그 점 역시 미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둑이 집에 들어올 때 보여야 할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고, 아무리 희극이라고 해도 억지스러운 설정을 과장되게 그려낸 점도 불만이 아닐 수 없다. 유화이의 집은 아파트이고 아파트라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할 공간적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연출 작업에서 무시된 것 같다. 그러한 배경 설정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밑의 층에서 벌어지는 자살 소동 역시 급작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엄격히 말하면, 극작가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서툰 사람들」은 공간과 인물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결여된 작품이다. 초보 도둑이 침입하는 상황부터 리얼리티를 느끼게 힘들 정도로 엉성하다. 초보 도둑이 넘어온 곳이 베란다라는 점을 상기하면, 도대체 밑의 층에서 자살 소동이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을 복잡하게 발전시키고 퇴로를 막기 위한 편의적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까.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좀처럼 벌어지기 힘든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 대한 납득할 만한(신빙성 있는) 장치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설정이나 장면은 많다. 도둑이 들었는데도 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도 그렇고, 도둑을 떠나보내고 신고를 하지 않는 상황도 그렇다. 여선생은 일종의 독신주의자로 타인의 접근을 기피했는데 갑자기 덕배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덕배 역시 초보 도둑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다른 집을 턴 경험이 지나치게 많다. 그의 술회 속에서 남의 집을 털기 위해서 침입했다가, 부부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아무래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싶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가면 이 작품에서 제대로 납득되는 대목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신빙성(authenticity, 문예 미학적으로 개연성)은 최근 들어 무시되고 있는 미학적 자질이다. 웃기고 즐거우면 그만이지, ‘복잡한 그럴듯함’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젊은 관객의 반응이다. 그러나 신빙성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보고(듣고) 있는 이야기를 끝까지 보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뢰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삶의 관찰에 어둡거나 이야기 구조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나면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될 수도 있었지 않나?
그럴듯함, 즉 이야기를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힘은 작품이 제시하는 세상이 현실의 세상과 닮아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코뿔소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작품 속에서 코뿔소가 그냥 나타나서는 안 된다. 코뿔소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시하던가, 코뿔소가 나타남으로써 성취하게 되는 현실 묘사의 의의가 인식되어야 한다. 장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선생과 도둑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서로의 마음을 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작정 두 사람의 만남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진에게 아쉬운 점이 그것이다. 책상에서 한 공상을 무작정 옮겨놓은 것이 희곡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선웅과 비교를 해보자. 고선웅도 황당한 이야기를 구사하고 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어느 날 황금박쥐가 되어 서울 하늘을 날아간다는 설정은, 사실 여선생과 도둑의 사귐보다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작품 내부에서는 그렇지 않다. 황금박쥐는 지하철 운전사의 처지와 좌절과 욕망과 희망을 유연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설정을 통해 황금박쥐로 변신하는 것의 당위성이 넓게 포진되고 있다. 마지막까지 착각과 기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함부로 단정짓기도 부정하기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반면 장진은 고선웅보다는 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했으면서도 더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왜 여선생이 도둑에게 공포보다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는지, 왜 덕배는 도둑이 되었고 그럼에도 도둑이 아닌 품성을 지니고 있는지, 왜 도둑이 나가는 길이 막히고 아래층 남자가 자살 소동을 벌이는지, 왜 그 각종 해프닝을 관객들이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여선생과 덕배의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만일, 하룻밤의 해프닝을 목격하기 위해서, 그 의외성에 손뼉 치며 좋아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작품을 보아야 한다면 꼭 연극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장진의 작품에서 실감을 느낄 수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웃는 웃음에 동감할 수 없었다. 웃음은 과장과 억지의 산물이 아니다. 웃음은 인생을 대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씁쓸하게, 혹은 억눌린 세상에 대한 복수하며 통쾌하게, 아니면 이야기에서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며 허탈하게 뱉어지는 것이다. 웃음은 세상을 절절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의 독백 같은 것이다. 우연과 해프닝에 의존하는 웃음은 일회용이며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억지웃음 앞에 즐거워하는 관객들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젊은 작가들이 어떤 점을 고쳐야 하고 어떤 작품을 쓰지 말아야 하는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연극은 ‘시트콤’과는 달라야 한다.
4. 소설의 속편 : 완결된 이야기에 대한 궁금함
어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완결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영화 「매트릭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영화이다. 속편의 유무에 관계없이, 인간의 세계 인식 방식을 바꾸는 놀라운 발상 전환을 보여준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속편을 만들면서 그러한 의미는 조금씩 달라지고 어떤 면에서는 무색해졌다. 이것은 뒷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부른 결과이다.
「삼국지」를 예로 들 수도 있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더 이상 읽기 싫어지는 대목이 있다. 첫째 대목이 관우가 죽는 장면이다. 그 다음 대목이 유비와 장비가 죽는 장면이고 마지막 대목이 제갈량이 죽는 장면이다. 세 의형제가 죽었음에도 「삼국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제갈량 때문인데, 그 마저 오장원에서 죽으면 이 책을 읽을 더 이상의 흥미를 잃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삼국지」를 다시 쓰는 사람이 있고, 그 중에서는 서서가 조조에게 떠나는 장면부터 윤색하기 시작해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꿈꾸던 결과(재사와 명장이 살아 지탱한 촉이 삼국을 통일하는 것)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 책은 기존의 서술 방식에 대한 불만을 새로운 창작으로 대체한 경우이다.
그런가 하면 셰익스피어 연극은 세계 각 나라에서 그 나라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어 연극으로 영화로 텔레비전 드라마나 만화로 제작되고 있다. 하나의 원전이 완결되어 있어 손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에 도전장을 던진 경우이다. 이러한 사례를 들어 생각하면 이야기의 변형과 속편의 등장은 필연적인 인간의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연극계에도 이러한 ‘속편의 상상력’과 관련된 흥미 있는 작품이 등장했다. 어릴 적 소설로 읽거나 텔레비전 만화로 보았던 소설 「작은아씨들」을 연극으로 각색한 경우(박보애 작, 박주영 연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설 각색과는 달리, 원작의 10년 후 이야기를 가정하고 그 설정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이것은 네 자매와 ‘마치 가문’이라는 원작의 분위기와 기본 설정을 이용하되, 소설 이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작은 끊어진 필름처럼 군데군데만 남아 있었다. 연극을 보면서 끊어진 필름을 서로 잇고 변화된 마치 가문의 상황과 비교하는 것은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넓은 이해심을 갖추었던 메그는 어릴 적 맏언니의 모습답게 한 집안을 이끄는 안주인이 되어 있었다. 활달하고 거침없는 조는 여전히 말괄량이 기질을 드러내면서 운명을 향해 첨벙첨벙 뛰어가고 있었고, 새침데기 에이미는 어느새 숙녀 티를 내는 처녀가 되었지만 새침한 기질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베스, 그녀 역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세 자매의 화해와 가정의 평온을 기원하고 있었다.
네 여자의 캐릭터는 원작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소설의 이야기를 기억만 해내면 문제없이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 집사 격 하녀 해너와, 이웃집 소년 로리, 그 로리의 가정 교사였다가 메그와 결혼한 부르크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보다 넓어지는 형국이다. 넓어진 이야기 속에서 네 자매와 외부 사람들의 새로운 자리 찾기가 이어진다.
모든 이야기는 갈등이 있어야 하고, 그 갈등이 첨예하면서도 보편타당하게 전개될 때 매력이 샘솟을 수 있다. 각색된 「작은아씨들」의 주요 갈등은 조와 에이미 사이에서 일어난다. 갈등의 첫 번째 요인은 남자이다. 로리를 친구로만 생각했던 조가 남자친구 프레드릭과 불화를 겪으면서 로리를 미래의 남편감으로 여기게 되자, 로리와 사귀던 에이미는 이에 충격을 받는다. 자매 사이에 삼각관계가 일어난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돈과 관련된다. 에이미는 그림 전시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치 가문의 집문서를 훔치려 하고, 조는 이를 발견하고 에이미와 크게 다툰다. 둘의 다툼은 과거와 숨겨진 이야기를 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에이미는 고모의 후원으로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전시회를 열 돈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고모의 후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마치 가문과 인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한 에이미는 집을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요량이었지만, 그마저 불가능해진다.
숨은 갈등도 있다. 그것은 죽은 베스이다. 이 연극은 조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연극적 장면으로 보여주는 듯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조는 무대의 모퉁이에서 소설을 쓰듯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베스는 조의 옆에 있기 때문에 베스가 죽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에이미에게 쏟아지는 폭언 속에서, 베스가 이미 죽었고 장례식에 에이미가 오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극 무대는 술렁인다. 서사의 기법으로 설명하면 반전인 셈이다.
베스의 죽음은 이 가족이 겪었을 상실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두 가지 표면적인 갈등과 숨겨진 갈등은 이 작품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그것이 소설이든 연극이든)를 읽거나 보거나 감상하거나 기억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작은아씨들」에도 그 이유가 있다면 위의 세 가지 갈등과 연관되어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 가지 갈등은 필요하지도 않고 유효적절하지도 않다. 원작은 여성의 성장기를 보여주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그 또래의 독자들에게 유효한 전언을 주고 있다. 설령 그 또래의 독자들이 아니라고 해도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 점에서 가족 내의 갈등(특히 조와 에이미의 대립)은 필요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세상의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는 시점에서도 올바른 것과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연극으로 변환된 「작은아씨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만 그럴 듯하지 그 의미의 깊이와 파장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와 연출가가 이구동성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주장하지만,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자매의 대결이나 곤란한 처지에 빠진 동생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은 지나치게 상투적인 설정이다. 이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어울릴 만한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베스의 죽음으로 던져진 침묵과 그 아픔을 무대 위에 실연시킨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뻔한 노출이 아니라 생생한 반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을 재구성한 박보애는 여러 가지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장면을 처리하는 솜씨나, 장면과 장면을 매듭짓는 아이디어, 그리고 대사에서 나타나는 깔끔함은 장래성을 밝게 한다. 인물의 성격을 개성적으로 부각시킨 점도 칭찬 받을 만하다. 이러한 기본기는 극작가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기본기가 극작술의 본질로부터 오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의 솜씨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시트콤의 편리한 속성에서 온 듯한 혐의가 짙다. 세련된 방식으로 장면을 처리하지만, 장면을 일관하는 관통선은 부재하는 편이며 연극적 비전도 함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연극 「작은아씨들」은 세상이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바가 매우 적다. 세련되고 깔끔한 장면 배열은, 볼 때는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극장 문을 나서면 곧 한 장의 스틸사진 이상으로 남기 힘들 것이다.
속편은 쓸 가치와 쓸 이유가 분명할 때 쓰여지고 만들어져야 한다. 흥행이나 단순한 재미 혹은 유년의 집착 같은 이유로 인해 만들어지고 쓰여진다면 흥미를 끌 수는 있을지언정, 연극과 소설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서사가 담지해야 할 몫은 그 후에 창작될 다른 작품에서나 기대해야 할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세련된 솜씨를 보이지만 취약한 점이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재미 못지않게 의미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속편도 완결된 작품으로 인정될 듯하다.
5. 고전의 부활 : 움트는 전통 연희의 싹
김태웅의 「이(爾)」는 많은 장점을 가진 희곡이다(이 작품은 2000년에 초연되었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재의 특이성이 돋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대를 다루면서 역사 서적에 기록된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쉽게 쓰여진 작품이 아니다. 역사극이라고 해서 쉽게 쓰여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미 잘 알려진 사료들을 조합해서 기존의 작품과 비슷하게 쓰여진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김태웅은 조선시대 연희의 한 양상인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탐구하고, 공길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역사적 배경을 첨가하여, 극적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그가 작품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자료와 조사는 전경욱과 사진실 같은 학자들이 연구해서 밝혀놓은 논문 위에서 가능했다. 이것은 일상적 상상력과 신변잡기적 소재를 벗어나 작가의 고심이 배어 있는 대목이다. 젊은 작가들이 쉽게 희곡을 쓰지 않고 연구와 조사를 통해 발로 쓰는 희곡을 선보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둘째, 작품 어디를 보아도 간결한 대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희곡을 말로 쓰려고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 갔다. 희곡은 설명하기(telling)의 측면에서 본 연극의 대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설명하기는 많은 보여주기(showing)를 전제한 것이어야 한다. 15개의 장 어디를 펴보아도, 등장인물들은 장황한 대사를 늘어놓지 않으며 두 인물 사이의 대화 또한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진행되고 있다. 또 15개에 이르는 장면에 대한 설명(지문) 역시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작가는 말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말의 간극을 대단히 넓히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젊은 나이에는 쉽지 않은 극작술이다.
셋째, 15개의 장면이 간략하게 만들어졌으며 극의 초점을 정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연산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장르에서 다루어진 바 있다. 박종화는 ꡔ금삼의 피ꡕ를 썼고, 이를 바탕으로 신상옥 감독은 두 편의 영화 「연산군(장한사모편)」(1961)과 후편 「폭군연산(복수, 쾌거편)」(1962)을 만들었다. 이윤택은 「문제적 인간 연산」을 1995년과 2003년에 공연한 바 있다. 이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를 선택했으면서도, 기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넷째, 전통 연희의 삽입과 발굴에 신경을 쓴 점이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허규, 오태석, 이윤택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오태석과 이윤택은 서구적 극작술이나 연출 메소드에서 벗어나는 연극을 선보이고 있고, 그 연극은 현 시점에서 한국 연극의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장일홍을 거쳐 김태웅에게 이르는 계보는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니지만, 이 작품의 의도만을 놓고 본다면 어느 정도 연속선을 상정할 수는 있다.
다섯째, 드라마 속의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공부했다는 점이다. 녹수의 계략에 빠진 공길을 장생이 구원하는 대목은 이 작품의 구조에서 가장 혼란스러울 수 있는 대목이다. 녹수가 어찌하여 공길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가, 공길은 과연 그 누명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빠져나온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공길을 구원한 장생의 행위에 극적 개연성과 상황의 근거가 충분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이 작품은 충분히 대답하고 있다. 즉 드라마적 공감을 얻는데 무리가 없으며, 그로 인해 장생, 공길, 연산의 인물 형상화는 입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틀림없이 장점이며, 김태웅의 미래를 밝게 점치게 하는 잠재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爾)」는 이러한 좋은 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이유는 역사적 판단의 단순성과 전통 연희적 소재의 난립에 있다. 경중우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격동의 시대를 사는 인물들답게 등장인물의 운세는 선악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녹수와 홍내관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시대의 악인으로 그려진 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우인들을 위기에 몰아놓는다(물론 녹수의 비리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경고되기는 하지만). 장생도 우인치고는 지나치게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다음은 전통 연희의 난립이다. 어느 새 우리 연극계에는 전통연희적 요소를 연극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굿과 무가는 예사로 등장하고,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의 한 가락, 민요, 시조창, 풍물, 탈춤의 한 자락이나 그 구조, 그리고 전통 악기의 연주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적인 것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케 하는 증거이기에, 한편으로는 흐뭇하다. 그러나 내실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는 요긴하지 않은 부분에도 전통연희를 삽입시키느라고 극의 템포를 저해하고 극적 흥미도 상당히 반감시켰다. 또한 작품의 중간중간에 전통연희적 요소가 틈입하며 볼거리 위주의 공연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극의 플롯이 스펙터클(장관)적 자질에 희생당하는 폐해를 초래했다. 이것은 이 작품이 가진 문제이다. 아무리 희한하고 흥미롭고 전통적 소재를 활용한 작품일지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연희적 요소는 정리되어야 하며 사건 진행상 필요한 요소를 매끄럽게 다듬는 극작술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6. 추리의 구조 : 보이지 않는 칼과 죽음에 대한 질문
추리 소설 혹은 탐정 소설의 기본 요체는 범인 찾기이다. 범인을 찾는다는 것은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물건을 훔치는 경위와 원인을 추리를 통해 밝혀내는 것이다. 만일 그 추리가 연극 구조 내에서 통용된다면, 그 사건은 하나의 문제적 장면으로 형상화될 수 있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작가는 문제적 장면을 구조 속에 숨기고, 그 장면과 관련된 다른 장면들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숨겨진 장면을 예측하도록 종용해야 한다.
고연옥의 「웃어라 무덤아」(2003년 11월 14일~30일, 문예진흥원예술극장 소극장, 김광보 연출)는 이러한 추리 소설의 구조를 응용한 작품이다. 옥자 할머니 살인 사건의 전후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사건 현장은 뒤늦게 보여주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극의 흥미와 의미를 증대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은 “옥자 할머니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 그리고 왜 죽였는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세 지붕 한 가족’처럼 살고 있는 옥자 할머니의 딸과 아들 그리고 동창을 제시한다. 그들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옥자 할머니의 가까운 이웃이자 가족으로 살아왔다. 매사에 의욕이 없지만 옥자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택시 운전사(아들), 옥자 할머니의 밑 집에 살면서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오뎅장사(딸)’, 여인숙을 하면서 여자를 상습적으로 희롱하는 노인(친구), 이 셋은 옥자 할머니가 빙판 길에 넘어져 폐렴으로 고생할 때 병원으로 데리고 가 살려낸 다정한 이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이웃들은 옥자 할머니가 죽은 뒤에 장례비용으로 써달라며 허리에 차고 있던 백만 원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그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다가 옥자 할머니를 궁지로 몰아넣을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고무친으로 살아왔을 것 같던 옥자 할머니가, 실은 두 번 결혼한 전력이 있고 그것도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지면서 친정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사경을 헤매는 두 번째 남편을 버렸으며 심지어는 자기 몸으로 낳은 세 자식마저 버렸다는 사연이다. 이들은 옥자 할머니가 괴로워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전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괴로워하다가 생을 달리한다. 그들에게 처음부터 살해 의지가 있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들은 할머니의 과거를 알게 된 것에 신기해하며 나름대로 관심을 표시한 것인지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들은 할머니의 유언(백만 원으로 장례를 지내달라는)을 멋대로 해석하고 백만 원을 갈취하고자 한다. 세 명의 친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카라며 할머니를 찾아온 친척 여자와 위층에 사는 가출 소녀들까지 암묵적으로 돈의 갈취와 분배에 개입한다. 그들은 죽은 할머니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읽어 가면, 우리는 이 작품의 주제를 ‘인심을 잃은 세상의 각박함’ 내지는 ‘돈과 위선으로 점철된 세상의 타락’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타락해 가는 인간과 세태를 깔끔하게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은 우스꽝스러운 이웃들의 행동에 폭소를 터트리면서도, 나중에는 할머니의 처지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웃음과 한숨 사이에서 이 작품은 세상을 비웃고 한편으로 비판한다.
세상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간직하되, 지루하지 않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이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도용하여 결정적인 장면을 뒤로 배치하고 그 배치를 통해 흥미와 의미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숨겨졌던 장면이 노출되는 대목에서 주제적, 형식적 쾌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미덕과 미적 쾌감만으로도 이 작품은 높은 수준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숨겨진 또 하나의 의도가 있다. 그 의도는 철학적인 명제와 관련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작품을 아이러니컬하게도 출산 직후에 썼다고 한다. 출산 직후에, ‘생명’이 아닌 ‘죽음’에 대한 글을 쓰다니, 어찌 보면 의외일 수 있다. 작품의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면, 경찰서 장면에서 순경이 형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은 이야기를 전화 통화를 통해 옮겨오고 있다. 사실 이 삽화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어낼 경우, 불필요한 삽화가 아닐 수 없다. 또 죽은 나무에 물을 주어 살려내고 꽃을 피우게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틈입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표면적으로 불필요한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작가가 근본적으로 천착하고 있는 것이 “죽음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죽는다’는 것의 의미와 상태를 경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또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차이를 가져오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희곡의 언어로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혹은 상호 관계에 대한 삽화들과 대사들로 무수히 채워진다. 할머니가 꾼 죽음에 대한 꿈과, 죽은 이후의 행적도 환상 장면으로 설정되어 있다.
옥자 할머니는 죽은 이후에 긴 잠을 잔다. 영원히 깨지 않을 잠이다. 그 잠에서 옥자 할머니는 어떤 낯선 공간에 놓여지게 되고, 그 공간은 ‘밤에만 보이는 길’로 판명된다. 그 길을 지나며 죽은 이를 위해 탑을 쌓는 아이에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죽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자문하는 살아있는 사람의 의문을 닮아 있다.
아이는 모른다고 한다. 우리 역시 모른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이든 밤에만 보이는 길에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길에는 꽃이 있고 풀이 있고 물고기가 있다.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길이다. 그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이 죽음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의미심장한 비유로 형상화된 장면이다.
파트마 삼바바 같은 사람의 이해를 빌리면, 죽음 이후의 세상은 관념의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가상 공간이다. 생각하는 것이 존재를 증명하고 생각하는 대로 구현되는 세계라고나 할까.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조작해서 꽃이 되는 하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연옥의 생각이기도 하다. 작가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고요할 수 있음을 연극으로 타진하고 있는 것 같다. 상식적인 것 이상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작가가 꿈꾸는 하나의 아름다운 관념 세계가 그려질 수 있고 죽음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이 희곡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젊은 작가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주목된다.
하지만 그 주목은 그 자체로 완결 무구한 것은 아니다. 일단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구현된 대답에는 큰 차이가 있다. 화제가 죽음이다 보니, 그 격차를 줄이는 작업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며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고연옥이 그 길을 집요하게 걸어, 나름대로 확장된 견해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또 두 개의 주제, 즉 ‘세상과 인심에 대한 비판’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 사이의 겹침(연결)이 보다 공고해지기를 바란다. 지금의 구조로는 동전의 앞뒤 같은 면밀한 유기성을 상상하기 힘들다. 마치 두 개의 초점이 있는 타원처럼 작품은 두루뭉술하게 찌그러진 느낌이다. 두 개의 주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포괄하면서 감싸고도는 구조로 밀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질문을 펴기보다는 숙고하며 하나하나 해답을 구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고연옥이 힘들지만, 그 길을 갈 수 있었으면 한다. 고연옥이 그 길을 갈 수 있다면 한국 연극은 의미 있는 작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초연한 김광보의 연출 능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김광보는 고연옥의 작품을 정적인 연출법으로 접근해 갔다. 그는 무대를 구획해서 부분 조명으로 그 할당된 일부분만을 쓰는 방식을 고집했다. 할머니의 방, 오뎅가게, 경찰서, 유치장 등은 무대의 1/4을 차지하는 작은 공간일 뿐이다. 그 안에 갇힌 배우들은 활달하고 큰 동선을 따르기 힘들다.
대신 김광보는 아기자기한 마임과 움직임을 통해 그 작은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다. 유치장에서의 발장난, 할머니의 작은 손동작, 간결하지만 힘 있는 동선들, 무대를 옹송그리며 걷고 정해진 길로 들어오는 등 퇴장 방식은 연출가의 세심한 주문을 확인시킨다. 간단한 설정으로 작은 공간을 살려내는 솜씨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김광보의 연출 수법은 기억할 만하다.
대사에 대한 생각도 남다르다. 그는 형사가 아이를 낳았다는 정보를 순경으로 하여금 빠른 속도와 기계적인 음성으로 내뱉게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필요한 대사를 현명하게 처리한다. 사실 이 대사는 고연옥이 생각하는 죽음과 삶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김광보는 이 점을 간과했거나 일부로 비중을 낮추려고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철학적 화두는 이 작품에서 완결된 형태로 대답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사를 자르지 않고 빠르게 처리한 것은 이러한 연출자의 소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출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도 적지는 않다. 대사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여인숙을 경영하는 친구의 대사 처리법은 잘못되어 있다. 지나치게 빨리 내뱉는 대사로 인해 그 갈피(대사와 대사 사이의 휴지)에 깃들여야 할 비판적 사고와 명상의 어조가 훼손되었다. 옥자 할머니의 서투른 사투리도 문제삼을 수 있다. 또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무거운 대사들을 지나치게 가벼운 연기로 처리한 점도 역시 불만 사항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연출 스타일(연기 메소드)은 새롭다. 단조로운 듯하지만 세부적이고, 우화적인 것 같지만 의외로 리얼리티로 충만해 있다. 이러한 이중성과 복합성은 작품의 숨결이 뛰어나고 주제 의식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작품의 의미와 흥미는 가중될 수 있었다. 40대 연출가의 발굴과 젊은 작가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기억될 만한 작품이자 공연이었다.
7. 리얼리즘 위의 장난을 기대하며
무리한 마무리는 짓지 않겠다. 근사한 논리와 근엄한 어조로 부진의 시대를 질책하고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겠다. 대신 조용하게 명상하겠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40대 연출가와 작가의 부재를 넘어, 2000년대 새로운 연극의 미약한 가능성을 뒤져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젊은 연극인들은 역사적 사고나 현실적 시각을 종래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종래의 방법이란, 흔히 리얼리즘적 전통으로 알고 있는 우리 연극의 정형적 틀이다. 현실의 단면을 옮겨오고, 일상의 관점에서 설명 가능한 설정을 배치하고, 그 안에서 평범한 인간들이 벌이는 어찌 보면 작품 바깥의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연극 속 세상 말이다.
그러나 젊은 작가들은 만화적 캐릭터를 고르고, 어릴 적에 읽은 이국의 이야기의 뒤편을 궁금해 하고, 추리소설의 구조를 이용하여 관객의 흥미를 끌기도 하고, 만화적 움직임을 배우들에게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70년대부터 활발하게 추구되던 전통연희적 요소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기도 하고, 한국 문학의 고전에 해당하는 작품을 교묘하게 패러디하기도 하며,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희곡의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보면, 어릴 적 본 만화, 헐리우드 영화, 텔레비전 시트콤, 외국 소설, 추리 소설 등 대중적 감각과 형식에서 연극적 소재와 형식을 끌어오는 경향이 우세하다. 가벼운 형식과 대중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대신 그 안에 담기는 주제는, 형식이나 감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편이다(특히 김태웅과 고연옥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로 인해 작품의 무게가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우는 것을 막고 있다(평형 상태마저 갖추지 못한 경우가, 박보애나 장진의 사례이다).
형식적 측면을 보면, 과거에 비해 대단히 유희적이다. 예를 들면, 60․70년대 한국의 리얼리즘 전통을 이어온 「산불」․「만선」․「달집」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이들의 주제 의식은 대체로 상투적이고 깊이에서 부족하다. 물론 형식도 가볍고 불안정하다. 대신, 종래의 리얼리즘이 따르지 못하는 문화적 세련미와 대중적 감각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보다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과연 이러한 유행적 추세를 이해하고 용인해야 할 사항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할 사항인지. 그것은 시간을 좀더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사항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늘 점검해야 한다. 그들의 작품이 현재 어떤 상태에 와 있는지.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의 세계를 그려가고 있으며, 연출가들은 젊은 상상력으로 그 위에 새로운 덧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이야기의 국경도 정해진 방식도 지켜야 할 관습도 없다. 그 만큼 그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새로움이라는 무기로, 명맥이라는 과거의 것을 버리지 않을지. 그리고 그들의 새로움이 관념적으로 설계되고 유희적으로 꾸며진 것이 되지나 않을지.
그래서 그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그들의 연극에서는, 그들이 그렸던 관념과 유희의 설계도를, 그리고 마음껏 고른 자유와 파격의 형식을, 현실과 역사과 구체적 체험 위에 안치시켜야 한다고. 연극은 삶의 반영이고 인간의 진실을 그리는 작업이기에, 고민 없이 특이함과 상상력과 가볍고 유쾌함만을 찾거나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형식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한 내용이기보다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 형식이 절실하다고.
사실 이러한 질책 앞에, 위의 다섯 작품은 그다지 당당하지 못하다. 리얼리즘이 지나간 시대의 고루한 화두가 아님은, 연극의 해석과 표현이 현실과 인간과 사회의 이해 위에 축조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에서도 재확인된다. 젊은 작가들의 장난과 모험과 관념적 유희 밑에, 삶에 대한 절실한 감각과 세계에 대한 참고할 만한 이해가 초석으로 놓이기를 기대해 본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ꡔ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ꡕ
․현재 고려대, 한경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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