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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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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증에 걸린 한국영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강성률
(영화평론가)
1. 한국영화의 황금기?
지금의 한국영화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황금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1960년대 한국영화를 흔히 전성기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시대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 상황이 1960년대 상황보다 낫다는 것은 몇 가지만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다. 1960년대는 아직 TV가 등장하기 전이었고, 비디오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오락인 인터넷, 게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유희라면 극장의 영화가 전부인 때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어서 주말이면 시외로 나가는 레저문화도 없었고, 또 경제개발도 미진해서 지금처럼 유흥문화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영화를 봐야 했던 이유는 당시에는 외국영화쿼터제가 있었다. 즉 외화는 1년에 30여 편 정도로 수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국영화는 만드는 족족 흥행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이유로만 따지자면 지금 한국영화는 정말로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작편수, 한국영화점유율, 관객증가율 등 거의 대부분의 통계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먼저 제작편수를 보면 1999년 42편이던 것이 2000년 58편, 2001년 52편, 2002년 77편으로 증가했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2003년의 제작편수 역시 2002년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50편 내외이던 제작편수가 확실히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영화 점유율을 보면 그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1999년 35.8%이던 점유율이 2000년에는 32%로 안정세를 이루다가 2001년이 되면 46.1%로 껑충 뛰었고, 이어 2002년에는 45.2%로 안정세를 구축했다.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2003년은 가장 높은 수치가 나올 것 같다. 2003년 1월에서 10월까지의 점유율이 49.7%로서 미국영화의 42.54%를 눌렀다. 특히 2003년 10월의 점유율 70. 2%로서 그저 놀랍다는 말 외에는 달리 형언할 표현을 찾지 못할 지경이다. 전 세계에서 자국영화가 미국영화보다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단 한 나라, 한국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적인 통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시장의 전체적인 파이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 증거로 영화 관객 수가 가파르게 증가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999년 2408만 명이던 총 관객이 2000년에는 2746만으로 늘어났으며, 2001년이 되면 드디어 3000만 명을 넘어 3498만 명이 되었고, 2002년에는 ‘마의 벽’이라고 느꼈던 4000만의 벽을 넘어 4040만 명으로 증가했다. 역시 정확한 통계가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2003년은 2002년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서는 극장의 증가는 영화관객의 증가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멀티플렉스의 증가는 극장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편수, 영화관객, 영화점유율, 극장 수 등의 증가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던 수출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2003년 상반기 동안 잠정 집계된 수출액은 15,000,000달러로(시네마서비스 제외) 지난 해(2002년-필자 주) 같은 기간의 10,457,000달러에 비해 최소한 43% 증가했다. 확인되지 않거나 협상 중인 영화까지 감안하면 실제 수출액은 이보다 클 것으로 예상되며, 2002년 총 수출액 14,952,089달러를 이미 초과하고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수치를 보면 바야흐로 한국영화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셈이다. 홍콩의 중국반환으로 공백이 되어버린 동아시아 맹주 자리를 한국이 확실하게 차지했다. 한국의 관객도 이제는 한국영화를 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영화를 보는 외국의 시선도 매우 고무적이고, 한국의 이런 상황을 연구하려는 외국인들의 관심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제가 한국영화의 선전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2. 커진 덩치, 초라한 실속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통계를 보면서 즐거운 비명이라도 목놓아 외쳐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 먼저 한국영화가 이렇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원인을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한국영화는 이런 단시간 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일까?
대부분의 평자들은 이런 원인을 뛰어난 인재의 충무로 대거 유입, 배급구조의 개선, 관객들의 인식 변화, 자본의 과감한 투자 등을 꼽는다. 크게 틀리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더 들어갈 것이 있으면 바로 스크린쿼터제도의 유지를 들 수 있다. 대부분 맞는 것이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다시 논해야 할 것은 스크린쿼터제도이다. 점유율이 50%를 넘어선다고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대한민국 영화자본으로는 도저히 할리우드의 자본력을 이길 수 없다. 장담컨대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는 순간 한국영화 점유율은 10%대로 떨어지고 말 것이며, 그것을 계기로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미국 문화가 직수입되면서 한국의 영상문화는 그야말로 초토화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잠시 유보상태이긴 하지만 스크린쿼터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왜 지금 들뜬 기분을 젖혀두고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영화가 발전을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1993년 한국영화점유율은 15.9%로 고사 직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7년 25.5%를 넘어서면서 꾸준히 증가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IMF 체제의 시작과 영화 발전이 그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 IMF 체제가 문제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 원리를 철저하게 내세운 신자유주의에 의해 문화마저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나라 경제가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금 모으기를 하면서까지 이를 물고 생활비를 줄여나갔다. 그때 가장 먼저 줄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밥을 굶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여가생활’인 문화지출비였다. 이렇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문화가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겪게 되었다. 살기 힘든 시대에 사람들이 택한 것은, 당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멜로드라마를 위시한 한국영화였고, 지출을 줄여버린 영화 이외의 다른 분야들, 특히 출판, 연극, 미술 시장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영화의 성장은 다른 분야의 죽음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몇 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당시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서 키웠던 벤처기업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이 보던 투자의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간명하다. 누가 출연하느냐가 먼저이고, 다음은 어떤 장르인가, 그리고 어떤 감독이 연출하는가였다. 이제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스타가 나오고 스타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만 돈이 몰리면서 영화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스타가 나오지 않은 영화, 주류의 장르 흐름과 다른 영화는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라도 제작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논하기로 해보자. 한국영화의 최고 흥행작들은 어떤 영화가 차지했을까?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역대 순위
제 목
동원관객수
제작년도
1
<친구>
2,579,950 명
2001
2
<공동경비구역 JSA>
2,501,533 명
2000
3
<쉬리>
2,448,399 명
1999
4
<살인의 추억>
1,912,725 명
2003
5
<엽기적인 그녀>
1,765,100 명
2001
6
<동갑내기 과외하기>
1,630,937 명
2003
7
<신라의 달밤>
1,605,200 명
2001
8
<가문의 영광>
1,604,219 명
2002
9
<집으로……>
1,596,521 명
2002
10
<조폭 마누라>
1,466,400 명
2001
11
<달마야 놀자>
1,306,400 명
2001
12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1,216,907 명
2003
13
<두사부일체>
1,215,900 명
2001
노파심에 말하자면, 위의 순위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전산망이 구축되어있지 않은 현재 정확한 관객 수를 알기는 불가능하고, 그나마 그 수를 잘 알 수 없는 지방의 관객보다는 대략적인 관객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서울의 관객만을 다룬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막 전국 600만 명을 돌파한 <실미도>는 제외했다.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자, 위의 표를 보고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역대 흥행 랭킹이 모두 200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제작년도를 자세히 보면 2000년 이전의 작품은 <쉬리> 단 한 편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쉬리>도 1999년에 제작된 영화이므로 사실상 흥행순위 랭킹 10안에 있는 모든 영화가 2000년대 영화라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수치로 보여주었으니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가지는 말해야 한다. 어떻게 ‘갑자기’ 엄청난 흥행을 몰고 온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한국영화사 80년에서 불과 최근 4년을 제외한 그 이전의 시기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아니, 그 이전 시기와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일까?
가장 먼저 논해야 할 것은 배급 구조의 개선이다. 위에서 나는 한국영화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로 배급 구조의 개선을 든 적이 있다. 독자들은 그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란다. 예전 같으면 한 영화를 한 개봉관에서 개봉하던 것을 이제는 전국 동시상영의 와이드 릴리스(wide release)를 통해 단시일에 많은 관객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수법은 1998년 정도부터 국내에 사용하던 방법으로, 주로 직배 영화가 자주 쓰던 것인데,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라는 토종 배급사 역시 같은 수법을 배운 것이다. 토종 배급사가 자리를 굳히면서 한국영화 배급도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배급사가 ‘미는’ 영화만 배급을 받을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는 영화는 어떤 영화들일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스타가 나오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가 우선이다. 다른 말로 하면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 우선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제작비 30억의 영화는 투자자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제작비 10억의 영화 투자자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크게 놓고 크게 먹으려는 판이 형성되면서 점점 영화의 제작비는 증가하게 되었고, 2003년의 평균 제작비는 마침내 30억 원을 돌파하게 되었다. 제작비의 가파른 증가는 결국 영화계의 총체적 적자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배급구조의 개선이 오히려 문제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평균 제작비가 30억 원이라는 것은 한국시장에서는 많은 문제를 지니게 된다. 제작비가 30억 원이라는 것은 전국적으로 100만 명의 관객이 들어야 겨우 본전을 건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한국영화 가운데 전국 관객 100만 명을 동원하는 영화가 얼마쯤 될까? 냉정하게 말하자. 많이 보더라도 전체 개봉영화의 1/3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다보니 다시 두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영화산업 전체가 흑자게임이 아니라 적자게임이라는 것이다. 10편 가운데 잘해야 3편이 본전이라도 건질 수 있고(즉 ‘똔똔’이 되고), 단 1편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다면 누가 투자를 하려고 하겠는가. 그렇게 위험률이 높은 사업에 투자할 사업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제 투자자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는 다시 위축되기 시작했다. 2002년의 통계로는 성공인데, 전반적인 수지는 엄청난 적자였다. 당연히 제작비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많은 영화의 기획이 무너졌다. 이런 상황은 다시 스타 중심의 영화만 제작되는 악순환을 몰고 왔다. 한국영화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과감한 투자 역시 이제는 문제가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다음 문제는 저예산영화를 제작하려고도 않고 배급하려고도 않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배급사들은 스타가 나오는 고예산영화는 배급하려고 하지만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저예산영화나 예술영화는 배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서 겨우 극장에 걸려고 하지만 홍보비가 없는 영화도 극장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서 영화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제는 웬만큼 들었다 하면 기본이 100만 명이고 들지 않으면 아예 전국 5만 명이 되지 않는 극단적 빈익빈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개봉하는 주말에 그것을 결정해서 밀거나 간판을 떼어버리니 50만 명 내외의 튼실한 중간층 영화가 설 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면서 관객은 영화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좁아졌다. 20개관의 멀티플렉스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서너 편의 영화가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풍요로운 멀티플렉스 시대에 개봉을 하지 못하거나 단관 개봉하는 영화들의 운명이라니!
제작년도 문제 외에 위의 도표를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화 장르를 잘 봐 달라는 것이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원하건 원치 않았건 간에) 조폭 코미디의 원조가 된 <친구>를 비롯해서 <신라의 달밤>, <가문의 영광>,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등 일련의 영화가 조폭 코미디라는 점이다. 무려 절반이 이런 경향의 영화이다. 범위를 약간 넓히면 슬랩스틱 코미디인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역시 서브 장르(sub genre)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코미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코미디적 요소로 승부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 같은 미스터리(스릴러) 기법을 사용했지만, 영화의 승부수는 코미디였다. 코미디로 분단의 긴장감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자, 이렇게 되면 흥행영화의 2/3가 코미디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한국영화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멜로드라마이다. 액션과 멜로를 혼합(hybrid)한 <쉬리>, 퓨전 사극 멜로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그리고 단순한 드라마이지만 멜로적 코드를 차용한 <집으로……>
가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대개가 흥행하기 쉬운 장르 영화라는 점이다. 사실 <집으로……>를 예외로 한다면, 나머지 영화들은 지나치게 장르 영화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이 말을 다르게 하자면, 지나치게 흥행 영화만 만들면서 흥행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만 제작해서 영화의 다양성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주춤해졌지만 조폭 코미디의 행진은 조폭 코미디가 아닌 영화는 아예 충무로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충무로에 떠도는 시나리오의 대부분은 코미디거나 멜로드라마이다. 물론 괜찮은 조폭 코미디도 있지만,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아류작들이 줄을 이어 쏟아졌다. 조폭 코미디가 끝을 보이자 이어 <몽정기>류의 섹스 코미디가 그 뒤를 이었고 다음에는 <선생 김봉두>류의 가족 코미디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코미디의 생명은 이토록 질겨서 끝없는 변용을 낳으면서 이어졌고, 그 가운데 몇 편은 확실한 성공을 하면서 아류를 양산하게 되었다. 멜로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이다. 순수 멜로드라마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퓨전 멜로드라마가 들어섰다. 액션, 사극, 순수 드라마와 결합한 멜로드라마는 그 질긴 생명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한국영화를 먹여 살린 코미디와 멜로를 왜 나는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영화가 흥행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영화의 제작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비슷비슷한 이야기, 비슷비슷한 스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양산되면서 다른 장르 영화가 제작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악전고투(惡戰苦鬪)끝에 제작되더라도 배급에서 소외되면서 관객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흔히 말하듯, 기획영화가 난무하면서 작가영화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기획영화가 영화의 다양성을 막았다는 게 아니라, 패기 있고 능력 있는 신인 감독들을 기획영화의 틀로 옭매면서 영화적 상상력을 제한해 버렸다는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한국영화의 폭넓은 상상력을 소멸시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의 미래를 미리 재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코미디나 멜로드라마가 아니면 ‘입봉’을 할 수 없는 신인 감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기획사에서 내민 아이디어로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하다가 혹 실패하면 데뷔작이 은퇴작이 되는 길을 걷고, 혹 운이 좋아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스타와 제작사만 부각될 뿐 감독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도표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짚어봐야 할 것은 말 많고 탈 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이다. 한국영화 시장을 키운 일등공신을 들라면 단연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영화의 두 배가 넘는 제작비, 스타의 등장, 화려한 스펙터클, 엄청난 홍보 등을 수반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2000년대 초반 흥행을 주도했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 나온 숱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다. 70억 원 이상을 쏟아 부은 영화들이 연이어 무너지는 동안 30억 원 내외의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했다. 흥행 순위에서 보는 것처럼, 블록버스터는 단 두 편뿐이다. 관객의 파이가 커졌다고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모조리 무너진 것이다. 한국영화의 황금기가 오히려 위기가 된 것을 블록버스터가 집약해 준다. 다양한 영화를 만들지 않고, 더군다나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오로지 크기로 승부하려는 전략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몰고 오는지 비싼 수업료를 내고 우리는 배운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반드시 불행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이 추세라면 흥행신기록을 경신할 것이 분명한 <실미도>, <실미도>의 기록을 다시 갈아 치울 가능성이 높은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국 관객 1000만 명 시대에 도전하고 있다. 완성도와 대중적 코드를 겸비하지 않은 블록버스터는 위험하지만, 완성도와 대중적 코드를 겸비한 블록버스터는 오히려 엄청난 성공을 불러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할 수 있을지 좀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3. 현실을 냉철하게 보자
2003년 한국영화는 위기 속에서 살았다. 50%에 육박하는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적자를 기록한 2002년의 성적은 2003년의 상황을 옥죄어왔다. 투자는 되지 않고 많은 영화들이 기획단계에서 ‘엎어졌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인 30억 원 내외의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고, 다행히 2003년은 전반적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흑자를 기록한 것에 만족하며 웃어야 하는가?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감독들은 오히려 적자를 기록했던 2000년 초가 영화 만들기가 더 좋았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2003년의 영화들은 대부분 제작사의 기획영화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작품성을 우선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은 제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역시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악전고투 끝에 만든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가 투자를 받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에 한국영화계가 처한 것이다. 그만큼 지금 한국영화계는 어려운 위기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위험부담이 있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자를 구하지 못한 <바람난 가족>은 명필름에서 영진위 담보로 자체 제작했었다. 적어도 2000년, 20001년의 상황은 이토록 살벌하지는 않았다(그렇다고 내가 그 시절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관객의 코드도 그런 경향에 치우친다는 것이다. 다양한 영화 보기를 포기한 관객들은 적당한 대중성을 겸비하지 않은 영화를 더 이상 보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대중성을 잘못 파악한 많은 신인 감독들은 자신의 코드와 맞지 않는 영화를 들고 나와서 처절하게 깨져나갔다.
단연코 지금 한국영화는 황금기가 아니다. 돈에만 눈이 멀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벌려는 영화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산업이기 때문에 차기작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은 필수적으로 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로지 돈의 잣대로만 판단하려 한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 문화가 정착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지금의 배급 구조를 개선해야 하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예산영화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를 관객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홍기선 감독이 11년 만에 내놓은 <선택>은 전국관객 1만 명도 모으지 못했다. 그나마 이는 행복한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임순례 감독이 프로듀싱하고 추상미가 주연한 박경희 감독의 <미소>,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김응수가 연출하고 영화의 명가 명필름이 제작한 <욕망>은 아예 개봉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 독립 다큐멘터리를 언급해서 무엇 하겠는가. 정말로 영화문화를 살리는 것은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가 모든 것을 덮어주지는 못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요즘 관객들의 선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지금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능력 있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면 마땅히 그런 감독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정향, 허진호, 임순례, 이창동, 봉준호, 류승완, 장진, 김지운, 이재용,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곽경택 등 젊고 패기 있는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영화는 소재도 다양하고 또한 각기 독특한 스타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사람만이 희망이다.
글을 마치려고 하니 주로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논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든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산업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이후 들어선 시장(만능)중심주의는 영화 역시 획일화하면서 대중성이 떨어지는 영화의 제작을 어렵게 했고, 반대로 한번 대박을 터뜨린 장르는 아류를 양산하게 만들었다. 결국 영화의 성격이 산업적 성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어쩌면 너무 비관적으로 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영화는 분명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다가 정말 한국영화는 고사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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